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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창간 45주년 특집_남한땅 7정맥 ①호남정맥 | 명봉들과 문화·역사·지리] 조선 건국의 꿈이 피어난 호남의 산줄기

문성식 2015. 5. 28. 16:31
[山창간 45주년 특집_남한땅 7정맥 ①호남정맥 | 명봉들과 문화·역사·지리] 조선 건국의 꿈이 피어난 호남의 산줄기
우리나라 판소리, 민요의 진원지…자연생태계의 보고 ‘광주의 산’ 무등산,
조선 건국한 이성계가 기도한 마이산 등 호남의 명산 즐비

	호수와 어우러진 마이산 풍경. 두 개의 봉우리가 꼭 말의 귀를 닮았다.
▲ 호수와 어우러진 마이산 풍경. 두 개의 봉우리가 꼭 말의 귀를 닮았다.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온 호남정맥은 호남지역의 16개 시군을 지나면서 문화와 풍습을 달리 만들었다. 호남정맥을 기준으로 서쪽의 만경강, 동진강, 영산강, 탐진강 유역 등은 평야지대의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으며, 동쪽의 섬진강 유역은 판소리와 농악 등이 발달해 현격히 다른 생활 문화권을 형성하게 되었다.


호남정맥은 비옥한 평야지대와 자원이 풍부한 강을 끼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민간예술이 발달했다. 판소리와 판조가 발생한 곳도 호남정맥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다. 전라도 특유의 사투리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투박하고 거친 발성이 그대로 배어나오며, 저음을 굵게 하면서 고음을 강하게 꺾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이 지역의 판소리를 ‘서편제’와 ‘동편제’라 불렀으며, 민요는 ‘육자배기 토리(남도민요)’, 풍물은 ‘호남 우도농악’이라 해 그 독특함을 구분했다.


호남정맥의 종산 장안산


호남정맥과 섬진강을 기준으로 서쪽과 동쪽으로 구분되는 판소리의 유형인 서편제와 동편제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광주, 나주, 담양, 화순, 보성 등지의 판소리인 서편제가 계면조(슬픈 가락)에 기교가 많은 소리라면 남원, 순창, 곡성, 구례 등지의 판소리인 동편제는 씩씩하고 감정을 절제하며 기교를 부리지 않는다. 물론 교통이 발달한 요즘엔 동편제와 서편제의 구분이 지형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호남정맥 서쪽에서는 영산강과 동진강을 가르는 영산기맥을 기준으로 문화와 언어가 달라진다. 영산기맥 북쪽의 만경강과 동진강 유역은 충청도와 비슷한 말씨와 문화가 나타나는 반면, 영산기맥 남쪽의 영산강 부근에서는 전라도 특유의 억센 말투(발음)가 나타난다. 영산기맥 북쪽의 부안, 정읍, 고창 등에서는 삭힌 홍어를 먹지 않지만 영산강 부근의 광주, 나주, 목포 등에서는 즐겨 먹는 것도 영산기맥을 기준으로 나뉜 문화와 관련된다. 


장흥 사자산에서 광양 망덕산에 이르기까지 동서로 뻗은 호남정맥 구간은 지리산~김해 낙동강 하구(봉화산)까지 동서로 이어진 낙남정맥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남도문화권을 형성하는 데 일조했다.


호남정맥(금남호남정맥 포함)을 형성하는 주요 산을 찾아보면 장안산, 마이산, 만덕산, 경각산, 오봉산, 내장산, 백암산, 추월산, 무등산, 천운산, 제암산, 일림산, 방장산, 조계산, 희아산, 백운산 등 호남의 쟁쟁한 산들이 있다. 월출산과 두륜산을 제외하고 호남지방의 명산들은 거의 호남정맥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장안산(長安山·1,236.9m)은 영취산으로부터 백두대간의 정기를 이어 받아 금남호남정맥을 통해 충남과 전라도 방면으로 광활하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산이다. 장안산 북쪽에서 발원하는 계류는 대지를 따라 흘러 금강 상류가 된다. 또한 남쪽에서 흐르는 물은 백운천을 이룬 다음 섬진강 상류가 된다.


전형적인 육산(肉山)인 장안산은 백두대간 산줄기에서 뻗어 내린 남한의 8대 종산(宗山) 중 제일 광활한 면적을 점유하고 있다. 또한 육당 최남선 선생이 산의 명승과 종산 개념 등 여러 요인을 고려해 선정한 12명산에 호남의 대표 산으로 뽑은 장안산은 1986년 군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장안산이 위치한 장수에서는 ‘2덕(德), 3절(節), 5의(義)’라 하여 '장수를 빛낸 인물’ 10인을 꼽는다. 먼저 2덕은 ‘황희 정승’으로 알려진 고려시대의 명신 방촌 황희(1363~1452)와 고려 후기의 충신 정신재 백장(1342~1418) 선생을 일컫는다.


3절은 의암 논개와 충복 정경손, 순의리 백씨를 일컫는다. 우리가 잘 아는 논개는 임진왜란 당시 왜적장의 허리를 안고 진주 남강에 빠져 순절했다. 정경손은 왜적으로부터 장수의 향교를 지켜냈다. 백씨는 현감을 모시고 민정을 시찰하다가 꿩이 갑작스레 날아가는 소리에 놀라 현감이 깊은 소에 빠져 죽자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을 자책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밖에 5의는 백용성 조사, 정인승 박사, 전해산 장군, 박춘실 장군, 문태서 장군을 일컫는다. 모두 장안산 자락에서 나고 자라거나 인연을 맺었으니 호남의 종산으로서 그 기운이 범상치 않음을 증명하는 듯하다.


장수 사람들은 장안산의 상봉을 ‘쇠봉(金峯)’이라 부르는데, 예부터 이 산에 묘를 쓰면 가뭄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으면 주민들은 누가 이 산에 묘를 쓴 것이 아닌가를 조사했다고 한다. 또한 나라에 역병이 돌거나 흉년이 드는 등 큰 흉사가 있을 때면 산이 운다고 믿었다.


장안산은 남서쪽의 덕산계곡, 남동쪽의 지지계곡 등 길고 깊은 골짜기를 품고 있어 여름철 피서지로 이름이 놓다. 또한 봄에는 5부 능선 위로 철쭉 군락이, 가을철엔 무령고개 근처에 억새밭이 펼쳐져 항상 등산객이 북적인다.


조선 건국의 꿈을 꾼 마이산



	마이산 이산묘 옆의 ‘주필대’와 ‘마이동천’ 암각.
▲ 마이산 이산묘 옆의 ‘주필대’와 ‘마이동천’ 암각. 주필대는 이성계가 남원 운봉 황산에서 왜적을 물리친 후 꿈속에서 하늘로부터 금척을 받아 머문 장소라 전하는 곳이다.

	말의 귀를 닮은 마이산의 명물인 탑사와 돌탑들.
▲ 말의 귀를 닮은 마이산의 명물인 탑사와 돌탑들. 돌탑은 이갑용 처사가 30여 년에 걸쳐 쌓았다고 전해진다.

말의 귀를 닮아 ‘마이산(馬耳山·685m)’으로 불리는 이 산은 금남호남정맥 상에 위치하며 백두대간과 호남정맥을 단단히 이어 준다. 또한 금강과 섬진강의 분수령을 이루는 물줄기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수마이산(678m)과 암마이산(685m)으로 불리는 두 봉우리가 특징이다. 이러한 기이한 모습 때문에 시대별로 이름이 다르고 전설도 많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신라 때는 서다산(西多山), 고려 때는 용출산(湧出山), 조선 초기에는 속금산(束金山)로 불렸다고 나와 있다. 그러던 것이 조선 태종 때 이르러 진안 성묘산에서 제사를 지내다 바라다보니 말의 귀와 비슷하게 생겼다 해서 마이산으로 불렀다고 전해진다.


계절에 따라 이름을 달리 부르기도 한다. 봄에는 안개 속에 솟은 두 봉우리가 쌍돛배 같다 하여 돛대봉, 여름에는 신록 사이로 드러난 봉우리가 용의 뿔처럼 보인다 하여 용각봉, 가을에는 단풍 든 모습이 말 귀처럼 보인다 해서 마이봉, 겨울에는 눈이 쌓이지 않아 먹물을 찍은 붓끝처럼 보인다 해서 문필봉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마이산은 산 전체가 지방기념물 제66호로 지정되었고, 1979년 10월에는 도립공원으로 지정됐다.


1억 년 전 마이산 일원은 거대한 호수였다. 그 바닥이 지층의 충돌에 의해 솟아올라 지금의 ‘말 귀’ 모양이 되었다. 풍수지리에서는 두 지층이 충돌했던 마이산을 물과 산이 휘돌아나가는 ‘산태극물태극’ 형세라고 풀이한다. 그래서 예로부터 국가적인 제향을 드리던 장소이기도 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선덕왕이 서다산(마이산의 옛 이름)에서 소사(小祀)를 지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마이산은 이성계의 조선 건국과도 연관이 깊다. 이성계(1335?)는 1380년 전라도 남원 운봉에 출몰한 아지발도(阿只拔都)가 이끄는 왜구를 물리치고 개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산신께 제를 드리러 마이산을 들렀다.


기도를 마친 이성계는 잠을 자다 꿈에서 산신(山神)으로부터 “네가 잴 수 있을 만큼 재어 네 땅으로 하라”는 계시와 함께 금척(金尺 : 황금으로 만든 자)을 받게 된다. 조선 왕조 500년의 역사가 처음 태동한 셈이다.


이후 이성계는 혼란에 빠진 고려의 역사를 청산하고 조선을 건국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마이산에서 산신에게 금척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조선 건국의 당위성을 입증하는 ‘몽금척(夢金尺)’ 신화로 전해졌다. 마이산에는 지금도 이성계가 주둔했던 주필대(駐필臺)와 100일 기도를 올린 장소의 흔적이 남아 있다.


탑사를 지나 조금 더 산을 오르면 두 마이봉 사이에 이성계와 얽힌 또 다른 일화를 간직한 은수사(銀水寺)라는 작은 절이 있다. 이곳에는 이성계가 꾼 꿈을 상상해 그린 ‘몽금척 상상도’와 금척 모형이 모셔져 있는 태극전이 있다. 이렇듯 조선 건국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는 마이산을 기리기 위해 진안군은 매년 10월 11일이 되면 은수사에서 마이산제를 거행하고 있다.


한편 마이산의 명물인 돌탑은 1885년경부터 이갑용(李甲龍·1860?) 처사가 30여 년에 걸쳐 쌓은 것이라 전해지는데, 풍수지리적으로 기운이 허한 곳을 보완하기 위해 쌓았다고 한다. 원래는 120여 개가 있었지만 지금은 80여 개만 남았다.


마이산 일대는 국가문화재(명승 제12호)다. 세계 최고 권위의 여행안내서 프랑스 미슐랭그린가이드에서 만점인 별 3개를 받았다. 특히 갑오년 청말띠의 해인 올해 관광객이 부쩍 늘었다. 마침 오는 10월엔 자연휴식년제로 10년 동안 입산 금지됐던 암마이봉 등산로가 열릴 예정이라 마이산을 찾는 사람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조선왕조실록을 지켜낸 내장산



	단풍으로 물든 내장산과 케이블카.
▲ 단풍으로 물든 내장산과 케이블카.

‘호남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내장산(內藏山·763m)은 1971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동국여지승람>에 남원 지리산, 영암 월출산, 장흥, 천관산, 부안 변산과 함께 내장산을 ‘호남 5대 명산’이라 기록되어 있다.


내장산은 원래 영은사의 이름을 따서 영은산이라고 불렸다. 하지만 깊은 계곡이 많아 인파가 몰려와도 계곡 속에 들어가면 어디에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아 ‘마치 양의 내장 속에 숨어 들어간 것 같다’ 하여 내장산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이곳 지명도 내장동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내장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가을 단풍이다. 내장산 단풍은 그 빛깔이 특히 곱고 붉어 가을철 단풍놀이객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공원 진입로부터 백양사까지(1.8km), 백양사에서 약사암까지(1km), 매표소에서 내장사까지(3km), 원적암과 벽련암을 지나는 3.8km 산책로 구간 등이 가장 대표적인 단풍놀이 코스다. 전망대까지 케이블카를 타고 가면서 봄, 여름에는 신록을, 가을에는 단풍을 즐길 수 있는 것도 내장산의 매력이다.


내장산은 우리나라의 역사를 지킨 곳으로도 유명하다. 백제 무왕 때에 영은조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 천년사찰 내장사를 비롯해 벽련암, 원적암, 부도전 등 많은 불교 유적이 남아 있다. 특히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왕조의 정신적 상징인 <태조어진>을 보관해 지켜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조선왕조실록>은 전주의 경기전(慶基殿)을 비롯해 서울 춘추관, 충주, 성주 총 3곳의 사고에 보관되어 있었다. 왜군은 경기전을 약탈하기 위해 애를 썼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역대 임금들의 어진(御眞·초상화)를 약탈하기 위함이었다. 특히 조선왕조실록은 다른 사고의 것들이 모두 약탈되고 경기전의 것만 남은 상태였다. 서울의 춘추관을 비롯해서 충주·성주의 사고에 있던 것이 모두 왜적의 침입으로 사라졌다. 이때 실록을 숨겨 보관한 이들이 경기전 참봉 오희길과 정읍의 유생 손홍록, 안의 등과 희묵대사를 위시한 내장사의 스님들이었다.


이들은 내장산 깊은 곳에 자리한 ‘용굴(龍窟)’이라는 곳에 실록과 어진을 옮겨 약 2년간 보관하면서 전쟁 속에서 실록을 지켜냈다. 이후 이 <조선왕조실록>은 오대산 사고로 옮겨졌고, 이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며 오늘에 전하고 있다.


내장산에는 금선폭포, 도덕폭포와 금선계곡, 원적계곡 등을 비롯해 신선봉(763m)을 주봉으로 서래봉, 연지봉, 연자봉, 장군봉 등이 내장사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산수화 같은 풍경을 자랑한다. 또한 굴거리나무, 비자나무 등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희귀식물이 서식하고 있어 생태적인 가치도 뛰어나다.


	호남정맥의 군사 요충지였던 산성산 금성산성.
▲ 호남정맥의 군사 요충지였던 산성산 금성산성. 이 산성은 호남의 3대 산성 중 하나로 꼽히며 역사 속 분쟁의 무대가 되었다.

호남정맥의 군사 요충지 산성산


볼거리, 먹을거리 많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여행지인 담양에서 산성산(山城山·603m)은 비교적 덜 알려진 숨은 명소다. 산성산은 그 이름처럼 옛 성곽의 흔적이 7.3km에 걸쳐 곳곳에 남아 있다. 이 산성 이름이 ‘금성산성’이어서 외지 사람들은 ‘금성산’으로 흔히 부르곤 한다.


사적 제353호로 지정된 금성산성은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고려 우왕 6년(1380) 왜구 침입에 대비해 개축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금성산성은 장성의 입암산성, 무주의 적상산성과 더불어 ‘호남 3대 산성’으로 꼽힐 만큼 역사 깊은 곳이다.


산성산에 금성산성이 들어선 이유는 외적의 침입을 막기 좋은 입지조건 덕분이다. 산성산에는 깊은 계곡이 있어 물이 흔하다. 또한 산성 안쪽의 지형은 평탄하고 유순한 데 반해 산성 바깥쪽은 높은 봉우리와 절벽이 많아 외적이 침입하기 어렵다.


외세의 침입을 막는 산성이 들어선 만큼 산성산은 호남지역의 군사 요충지로 자리 잡으며 역사 속에서 여러 분쟁의 무대가 되었다. 조선 중기에는 성내에 130여 가구가 살았으며 담양·순창 등지에서 거둬들인 군량미가 2만여  석에 달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정유재란(1597~1598) 때는 왜군과의 전쟁으로 ‘이천골(二千骨)’이란 계곡에 2,000여 구의 시체가 쌓였다고 한다. 그래서 특이하게도 이 계곡의 이름에는 골 곡(谷)자 대신 뼈 골(骨)자를 쓴다.


1894년에는 갑오농민전쟁이 발발했고, 당시 동학군이 산성산을 점령한 때도 있었다. 녹두장군 전봉준(1855~1895)은 이곳에서 전투를 지휘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때는 빨치산의 은거지로 이용되기도 했다.


역사의 풍파를 몸으로 받아들였던 산성산은 이제 주말에 가벼운 등산을 즐길 수 있는 산책코스로 사랑받고 있다. 산성산에 오르면 담양평야가 한눈에 들어오고 지리산과 무등산도 아련하게 보인다. 산성산을 지나는 동쪽 물줄기는 강천제를 거쳐 섬진강으로 흘러들고, 남쪽 물줄기는 담양호를 지나 영산강과 합쳐진다.


호남정맥의 제1명산 무등산


‘호남의 제1명산’ 무등산(無等山·1,187m)은 호남정맥에서 백운산(1,228m) 다음 가는 높이의 산이지만 상징성이나 유명세를 놓고 본다면 단연 호남정맥의 ‘간판스타’다. 1972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이후 2012년 12월 27일 41년 만에 우리나라에서 21번째 국립공원으로 승격되었다.



	‘광주의 진산’ 무등산. 호남정맥을 대표하는 명산이기도 하다.
▲ ‘광주의 진산’ 무등산. 호남정맥을 대표하는 명산이기도 하다.

	무등산 최정상 천왕봉(1,187m) 부근에 등산객이 모여 있다.
▲ 무등산 최정상 천왕봉(1,187m) 부근에 등산객이 모여 있다. 무등산 정상은 출입제한 구역이지만 매년 한두 차례 시민에게 개방하고 있다.

‘무등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빼어난 자연경관이고, 그 중심엔 입석대와 서석대를 위시한 여러 주상절리가 있다. 무등산 정상에는 주상절리의 돌기둥 무더기로 천황봉, 지황봉, 인왕봉, 서석대와 입석대 등이 있다.


무등산은 우리나라 생태계의 보고이기도 하다. 무등산국립공원에는 총 2,296종의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되어 있으며, 특히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Ⅰ급 수달(천연기념물 제330호)을 비롯한 Ⅱ급 삵, 담비, 하늘다람쥐(천연기념물 제328호) 총 4종의 멸종위기 포유류가 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무등산은 누정(樓亭)문학의 산실이기도 하다. 무등산의 누정은 광주와 담양, 화순에 걸쳐 자리하는데, 광주의 환벽당(環碧堂), 풍암정(楓巖亭), 취가정(醉歌亭), 담양의 독수정(獨守亭), 소쇄원(瀟灑園), 면앙정(仰亭), 식영정(息影亭), 송강정(松江亭), 명옥헌(鳴玉軒), 화순의 물염정(勿染亭) 등이 가장 대표적인 누정들이다.


수많은 누정들이 무등산을 중심으로 존재하면서 무등산권은 16세기 호남 지역 누정문학 활동의 중심무대가 되었다. 박상을 비롯해 송순, 임억령, 양산보, 김인후, 박순, 김성원, 기대승, 고경명, 정철, 백광훈, 최경창, 임제 등이 이곳을 무대로 활동했던 대표적 문인들이다.


‘광주를 말하면서 무등산을 빼놓고 말할 수 없고, 무등산을 빼놓고 광주 사람을 말할 수 없다’는 말이 있듯 무등산은 늘 어머니처럼 인자한 미소를 짓고 시민들을 품는다. 무등산은 광주 시민들의 터전이자 광장이었다. 우리 조상들은 매년 삼월삼짇날(양력 3월 27일)이면 예부터 산과 들 도처에 피는 진달래 꽃잎을 따서 전을 부쳐 먹으며 춤추고 노는 화전(花煎)놀이를 즐겼다. 광주에서는 ‘사직서당(社稷書堂) 화전놀이’와 ‘무등산 화전놀이’가 대표적인 것이었다.


광주시민들이 화전놀이를 즐겼던 대표적인 장소가 바로 무등산에 있던 지산동 딸기밭과 증심사 계곡이다.


뽕 따러 가세 뽕 따러 가세 / 뽕도 따고 임도 보고 겸사겸사 뽕 따러 가세/ 무덤산(무등산)에 곤달잎은 우리 님 밥상으로 다 올라가네 / 중략 / 시집살이가 강해서 나는 못 살겠네                                                           -광주지방 민요 ‘밭노래’ 中


광주의 아낙들은 진달래 피고 복숭아꽃 피면 산에 올라 정성껏 음식을 마련하고 북과 장구에 맞춰 ‘밭노래’를 부르며 시집살이의 고단함을 풀곤 했다.


관헌들도 마찬가지였다. 지난해 철거된 옛 무등극장 자리에는 광주 동헌 목사가 있었다. 이곳의 관헌들 또한 봄철에 날을 받아 무등산으로 화전놀이를 갔다고 한다. 그들은 놀이를 즐기고 돌아올 때 청사초롱에 불을 밝혔는데 그 모습이 장관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광주사람들의 소풍이나 모임의 장소로 자주 이용되었던 무등산인지라, ‘해 뜨면 무등산, 해 지면 무등산’이란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광주 사람들에게 무등산은 예나 지금이나 하루의 대부분을 함께하는 친숙한 존재다.


호남정맥의 종착지 백운산



	길게 뻗어온 호남정맥을 갈무리하는 백운산 정상.
▲ 길게 뻗어온 호남정맥을 갈무리하는 백운산 정상. 호남 땅을 두루 거친 호남정맥이 그 기운을 바다로 보낼 준비를 한 곳이다.

전주 부근에서부터 숨 가쁘게 달려온 호남정맥은 광양 만덕산에 이르러 그 기운을 남해바다로 흘려보낸다. 백운산(白雲山·1,228m)은 호남정맥의 남쪽 끄트머리에서 호남정맥의 기운을 갈무리하면서 550리를 흘러온 섬진강 물길을 바다로 흘려보낸다.


백운산은 우리나라에서 한라산 다음으로 자연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4개의 큰 능선이 남쪽과 동쪽으로 흘러내리면서 성불, 동곡, 어치, 금천 총 4개의 깊은 계곡을 만들었다. 또한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북쪽에 선 지리산은 북쪽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막아 주고 광양만에서는 따뜻한 바닷바람이 분다.


덕분에 백암산에는 온대식물부터 한대식물에 이르기까지 1,080여 종이 넘는 식물이 분포하고 있으며, 백운란, 백운쇠물푸레, 백운기름나무, 나도승마, 털노박덩굴 등 백운산에서만 자생하는 희귀식물도 여러 종이다. 이에 정부는 1993년 백운산을 자연생태계보호구역으로 지정했다.


백운산에는 고로쇠나무가 많아 봄철이면 그 수액을 뽑아 마시는데, 이 백운산 고로쇠나무에 얽힌 전설이 재밌다. 풍수지리의 대가 도선국사는 백운산에서 35년간 수도생활을 했다. 그가 마침내 도를 깨닫고 일어나려 했으나 너무 오랫동안 앉아 있던 나머지 일어날 수 없었다. 이에 도선국사는 옆에 있던 나뭇가지를 잡고 일어서려 했으나 나뭇가지가 부러져버렸다. 그런데 그 부러진 나무에서 수액이 흘러내리기에 그것을 받아 마셨더니 거짓말처럼 무릎이 펴졌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 덕분에 백운산 고로쇠 수액은 지금도 전국적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또한 백운산은 구한말엔 호남 의병의 활동무대였으며, 광복 후에는 빨치산이 전남도당본부를 세웠다.


백운산은 낮은 산이 주를 이루는 남도에서 드물게 장엄한 산세를 뽐낸다. 서쪽으로는 따리봉, 도솔봉, 형제봉, 동쪽으로는 매봉, 남쪽으로는 억불봉이 자리한다. 정상인 상봉에서는 한려수도와 광양만의 빼어난 절경을 바라볼 수 있다. 백운산은 억불봉(1,000m) 부근으로 능선을 따라 억새 군락이 밀집해 있어 가을철 억새산행지로 인기가 좋다.


이외에도 호남정맥에는 오봉산, 묵방산, 백암산, 추월산, 광덕산, 사자산, 억불봉 등 수많은 봉우리와 기암이 절경을 이루고 빼어난 수려함을 뽐내면서 호남인의 생활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호남평야의 비옥함과 빼어난 경치의 산과 계곡은 누정문학과 민간예술을 빚어냈고, 험한 산세는 전쟁의 역사를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호남정맥의 역사와 문화는 다시 백두대간으로 거슬러 올라가 한반도 곳곳에 전파되었다. 호남정맥은 호남사람들의 희로애락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혼과 애환이 깃들고 전파된 역사의 산줄기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