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정스님 어록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말라

문성식 2015. 5. 27. 13:36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말라 
    장마가 오기 전에 이 일 저 일 하느라고 바빴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일인데도 새 일처럼 머리 무겁다. 
    혼자 살아도 혼자 차지하고 있는 만큼 일도 또한 그렇다. 
    요즘 내 아침 일과 중 한 가지는 
    인동덩굴이 밤새 자라 오른 것을 보는 일이다. 
    한 해 겨울을 지낸 바 있는 동해안의 바닷가 그 집에서 
    울타리에 무성하게 뻗어 오른 인동 덩굴을 
    얼마 전에 몇 줄기 떼어다 심었다. 
    오두막 한쪽에 버팀대를 세워 타고 올라가도록 해 놓았는데 
    자고 일어나면 새 줄기가 뻗어 있어 
    그 왕성한 생명력에 감탄한다. 
    내가 하는 일은 
    한데 얽히지 않고 각각 자기 길을 가도록 
    유도하는 보살핌이다. 
    식물도 눈과 귀가 있는지 
    두런두런 일러주는 내 말을 알아듣고 
    제 갈 길을 열심히 가고 있다. 
    추녀 밑이라 이따금 물을 주고 분무기로 잎에 물을 뿜어준다. 
    이런 일을 하면서 식물과 동물의 상관관계를 생각한다. 
    식물과 동물이 서로 주고받으면서 함께 살아갈 때 
    이 지구의 생태계는 건강하다. 
    그러나 공생의 균형이 깨지면 생태계는 병든다. 
    오늘날 지구의 생태계가 위기에 직면한 것도 
    동물인 사람이 식물을 무자비하게 남벌하고 학대한 때문이다. 
    이 지구의 주인을 사람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온갖 동물과 식물이 함께 살아간다. 
    한 순간도 없어서는 안 될 산소는 누가 만들어 주는가. 
    그 무게와 차지한 면적으로 따지면 
    지구상에서 식물이 가장 막강한 존재이고 
    숫자로 따지면 지구상에서 사람보다 곤충이 훨씬 많다. 
    이들 식물과 곤충들이 자연계에서 번성한 이유는 
    서로 주고받으면서 함께 살아왔기 때문이다. 
    식물과 곤충의 세계에서는 
    ‘일류가 아니면 살아남지 못 한다’는 그런 비정한 논리는 
    통용되지도, 용납되지도 않는다. 
    사람인 우리는 이와 같은 생명의 질서를 따라야 한다. 
    남보다 늦게 출가한 한 스님이 안거 중에 편지를 보내왔는데 
    그 내용은 대강 이렇다. 
    ‘저는 요즘 가도하며 정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진이 잘 안 됩니다. 
    어떻게 해야 되는지요? 
    선정에 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즘 앉아서 잠을 자고 있으나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것인지요?’
    이 삼복더위에 뚱딴지같은 물음이라 
    이 자리를 빌어 대답하기로 한다. 
    잘 들으라. 
    삶에 어떤 공식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저마다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에 따라 
    그 자신의 삶이 있을 뿐이다. 
    정진이 잘 안 된다고 했는데, 
    정진이란 무엇이며, 왜 정진을 하는지 
    그 일부터 밝혀져야 할 것이다. 
    물론 정진은 한결같이 꾸준히 나아감을 뜻한 말이다. 
    날씨처럼 갠 날도 있고 흐린 날도 있듯이 
    정진도 또한 그럴 것이다. 
    잘 안 되면 안 되는대로 잘 되면 잘 되는대로 
    중단하지 않고 꾸준히 지속한다면 
    마음에 분별이 사라질 때가 올 것이다. 
    인욕과 정진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참는 것이 곧 정진이다. 
    인욕으로 정진을 삼으라는 말이다. 
    우리가 정진을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서다. 
    흔히 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 무엇에 집착하면 그것은 정진이 아니다. 
    명심하라. 
    우리가 정진을 하는 것은 
    무엇이가를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그 무엇인가를 드러내기 위해서다. 
    그 무엇인가와 
    그 무엇을 위해 정진하는 사람이 
    하나가 되도록 하라. 
    이와 같이 한다면 
    그대의 삶 자체가 선정삼매가 될 것이다. 
    뭐, 앉아서 잠을 잔다고? 
    웃기지 말게. 
    잘 바에야 누워서 편히 잘 것이지 
    앉아서 비몽사몽 꿈속을 헤맬게 뭔가. 
    옛 수행자들은 너무나 절실한 문제 앞에 
    마음 놓고 잘 수 없어 
    자지 않고 앉아서 정진한 사례가 드물지 않다. 
    내게도 한때는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대에게도 편히 잠들 수 없을 만큼 절실한 과제가 있는가? 
    수행자는 무엇보다도 정직해야 한다. 
    곧은 마음이 곧 도량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앉아서 잔다고 득 될 게 없다. 
    졸리면 두 다리 뻗고 편히 자거라. 
    잘 때는 그대 전체가 잠이 되고 
    깨어 있을 때는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온몸으로 깨어 있으라. 
    투철한 자기 결단도 없이 
    남의 흉내나 내는 원숭이 짓 하지 말라. 
    그대 자신의 길을 그대답게 갈 것이지 
    그 누구의 복제품이 되려고 하는가. 
    명심하라.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말라. 
    ‘나는 지금 이렇게 살고 있다’고 순간순간 자각하라. 
    한 눈 팔지 말고, 
    딴 생각하지 말고, 
    남의 말에 속지 말고, 
    스스로 살피라. 
    이와 같이 하는 내 말에도 
    얽매이지 말고 그대의 길을 가라. 
    이 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이런 순간들이 쌓여 한 생애를 이룬다. 
    끝으로 덧붙인다. 
    너무 긴장하지 말아라. 
    너무 긴장하면 탄력을 잃게 되고 
    한결같이 꾸준히 나아가기도 어렵다. 
    사는 일이 즐거워야 한다. 
    수행의 길도 예외는 아니다. 
    자고 나면 새로운 덩굴로 위를 향해 뻗어가는 인동처럼 
    수행자의 삶도 그래야 한다. 
    수행에는 시작은 있어도 그 끝은 없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라. 
    묵은 수렁에서 거듭거듭 털고 일어서라. 
    -법정 스님의 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