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국보

국보 제1호 서울 숭례문(서울 崇禮門)

문성식 2013. 12. 30. 23:44

 

 

 

 

 

 

 

 

 

 

내부 천장 모습

 

 

숭례문 화재 직후의 모습

 

종 목

 

국보  제1호

명 칭 서울 숭례문(서울 崇禮門)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시설
수량/면적 1동
지정(등록)일 1962.12.20
소 재 지 서울 중구  남대문로4가 29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국유
관리자(관리단체) 중구

 

조선시대 서울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원래 이름은 숭례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이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수리 때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앞면 5칸·옆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붕을 우진각지붕이라 한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그 형태가 곡이 심하지 않고 짜임도 건실해 조선 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봉유설』의 기록에는 ‘숭례문’이라고 쓴 현판을 양녕대군이 썼다고 한다. 지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서울 성곽 중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ㅇ 숭례문 방화 화재(2008.2.10)
- 2008년 숭례문 방화 사건(崇禮門放火事件)은 2008년 2월 10일 ~ 2월 11일 숭례문 건물이 방화로 타 무너진 사건이다. 화재는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 전후에 발생하여 다음날인 2008년 2월 11일 오전 0시 40분경 숭례문의 누각 2층 지붕이 붕괴하였고 이어 1층에도 불이 붙어 화재 5시간 만인 오전 1시 55분쯤 석축을 제외한 건물이 붕괴됨. 현재 복구공사로 2012년 12월 공사완료 예정임.

 

1398년 (조선 태조 7년) - 숭례문 준공 태종의 맏아들이던 양녕대군이 숭례문 현액을 씀. 세종 30년(1448년)에 개축했으며,

성종 10년 (1479년)에 중수.

1907년 - 일본 황태자가 방한하자 일제는 "대일본의 황태자가 머리를 숙이고 문루 밑을 지날 수 없다"면서 숭례문과 연결된 서울 성곽을 헐어버렸다. 성곽을 헌 자리에 도로와 전차길을 내고, 숭례문 둘레에 화강암으로 일본식 석축을 쌓았고, 문앞에는 파출소와 가로등을 설치했다. 또한 이 때부터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이 사건으로 현 모양이 확립되었다.

1916년 - 고적급유물보존규칙 공표. 조선총독부에 고적조사위원회 설치.

1924년 - 조선총독부가 고적급유물등록대장초록을 간행. 1호 원각사지십층석탑 등 193점의 유물을 등록함.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없었다. 1933년 8월 9일 - 제령 제6호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 공포

1934년 -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보물 1호로 숭례문을, 보물 2호로 흥인지문을, 보물 3호에 원각사지십층석탑을, 보물 4호로 보신각종을 지정하였다.

1961년 - 한국전쟁 때의 파손을 복구하기 위해 전면 해체 중수작업에 착수.

1962년 - 한국 정부는 조선총독부의 문화재 지정을 참고해서 남대문을 국보 1호, 원각사지십층석탑을 국보 2호, 동대문을 보물 1호, 보신각종을 보물 2호로 각각 지정.

1963년 - 해체 중수공사 완료.

1994년 11월 - 미술전문지 「가나아트」 40호가 미술인 70명에게 여론조사한 결과 서울의 랜드마크로 국보 1호 남대문이 33표로 1위로 선정되었다.

2002년 2월 - 문화재위원회는 서울시의 숭례문 근접 관광 계획을 불허했다. 불허 이유는 차량으로 인해 관람객이 위험에 처할 수 있고 복잡한 도로사정으로 숭례문을 차분하게 감상할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2003년 - 일제가 1907년에 헐어버린 서울 성곽을 숭례문 좌우로 10m씩 복원했다.

2003년 9월 - 일제는 돈의문 등 조선의 왕성인 궁궐과 성곽을 항일의 상징으로 보고 철저히 파괴했으나,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숭례문을 지나갔으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흥인지문을 지나갔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가 있다며 보존했다고,

2002년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오타 히데하루(太田秀春) 일본 도호쿠대 특별연구원이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기관지인 ‘한국사론’ 49집에 발표한 논문에서 밝혔다.

2005년 5월 27일 - 1907년 일제에 의해 도로 속에 고립되었던 숭례문 주변에 광장을 조성·단장함. 2006년 3월 3일 - 중앙통로를 시민들에게 개방, 일반인 출입이 가능하게 되었다.

2008년 2월 10일 - 숭례문에 방화로 인한 화재 발생. 2008년 2월 11일 - 석축과 1층 일부만을 남겨놓고 2층 문루의 90%와 1층 문루의 10%가 타 버림 2010년 2월 10일 - 숭례문 복구공사 착공

▣ 특징 숭례문은 중앙에 홍예문이 있는 기반 위에 지어진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건물이다. 홍예문에는 철이 덧씌워진 큰 문이 양쪽으로 달려 있다. 기단 위로는 얕은 담을 두르고, 좌우 양쪽에는 작은 문과 계단이 있어 드나들 수 있게 하였다. 전형적인 다포형식의 건물로 평가된다.

 

● 숭례문 현판

숭례문의 현판을 누가 썼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과 《신증동국여지승람》,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양녕은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뛰어났으나 글을 알지 못하는 척했다. 스스로 미친척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지만 아무도 양녕의 진심을 아는 이가 없었다."라고 전하듯이 양녕대군이 썼다고 되어 있으나 여러 이설이 존재한다.

추사 김정희의 《완당 전집》에는 조선 초기의 문신인 신장의 글씨라고 적혀 있으며,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숭례문이라는 이름은 삼봉 정도전이 지은 것이요, 그 액자는 세상에서 전하기를 양녕대군의 글씨라 한다”면서도 “숭례문의 편액은 정난종이 쓴 것”이라고 썼다.

일제 강점기 때 잡지인 《별건곤》 1929년 9월호에는 “안평대군의 글씨는 오해요, 중종시대 명필 유진동의 글씨”라고 남겨져 있다. 서울 성곽의 다른 문과 일반적인 문들의 현판들은 대부분 가로로 달려 있지만, 숭례문의 현판은 특이하게 세로로 만들어져 있다.

이는 관악산의 화기에 대응하기 위하여 세로로 달았다고 전해진다.

2008년 2월 10일 숭례문 화재로 인해 편액의 손실을 우려해 숭례문으로부터 분리하는 과정에서 현판이 추락하여 그 충격으로 일부 목재편이 탈락, 결실 및 부분 균열되었다. 또한 현판의 테두리목도 여러 조각으로 파손되고 일부 결실된 상태이다.

그러나 해당 결실편을 현장에서 95%정도 확보함에 따라 원형 보존처리에는 이상이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분리한 편액은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이송되어 보존처리되었다.

이송 후 관련 문헌과 자료를 검토함과 동시에, 그간 국립고궁박물관의 사전응급조사 및 자문결과를 기초로 과학적 상태조사(X선, 적외선 촬영 등)를 거쳐 손상부분의 접착복원 등 숭례문 현판의 정밀보존처리를 진행할 예정이며 처리기간은 6개월 이상 소요예정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현재 알려진 바에 따르면 숭례문 현판은 총 38조각이 났으며 2009년 5월 말에 복원완료 예정으로 진행되었다. 이어 2009년 7월 3일에는 현판이 완전히 복원되었다. 기존의 ‘숭’(崇)자 부분에 갈라진 부분도 메웠으며 고증을 통해 정확하다고 밝혀진 지덕사 소장 탁본을 토대로 기존의 변형된 글씨(‘崇’자와 ‘禮’자의 일부 등)를 보다 원형에 가깝게 살려냈다.

테두리목은 연결부위가 심하게 파손된 관계로 다시 걸었을 때의 위험에 대비하여 완전히 교체 했으며, 최고라 일컬어지는 중요무형문화재 각자장(刻字匠)인 오옥진과 단청장(丹靑匠)인 홍창원이 참여 했고 원래 부재를 최대한 활용[18][19]하여 복원의 의미를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