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글,시,모음

시인 조지훈 시 모음

문성식 2014. 1. 22. 14:03

 

사  모                                                     

 

사랑을 다해 사랑하였노라고

정작 할 말이 남아 있었음을 알았을 때

당신은 이미 남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불러야할 뜨거운 노래를 가슴으로 죽이고

당신은 멀리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마 곱스런 눈웃음이 사라지기 전

두고두고 아름다움으로 잊어 달라지만

남자에게서 여자란 기쁨 아니면 슬픔

다섯 손가락 끝을 잘라 핏물 오선을 그려

혼자라도 외롭지 않을 밤에 울어 보리라.

울어서 멍든 눈물김으로

미워서 미워지도록 사랑하리라.

한 잔은 떠나버린 너를 위하여

한 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를 위하여

또 한 잔은 너와의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그리고 마지막 한 잔은

미리 알고 정하신 하느님을 위하여...

 

 

 

 

민들레꽃                                               
 

까닭 없이 외로울 때는

노오란 민들레꽃 한 송이도

애처롭게 그리워지는데


아, 얼마나 한 위로이랴

소리쳐 부를 수도 없는 이 아득한 거리에

그대 조용히 나를 찾아 오느니


사랑한다는 말 이 한마디는

내 이 세상 온전히 떠난 뒤에 남을 것


잊어 버린다. 못 잊어 차라리 병이 되어도

아 얼마나 한 위로이랴

그대 맑은 눈을 들어 나를 보느니.

 

 

 

병(病)에게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어두운 음계(音階)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생(生)의 외경(畏敬)을 가르치네.

그러나 자네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은 마냥 허무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네의

그 나직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없이 흐뭇하네.


내 뜨거운 이마를 짚어 주는 자네의 손은 내 손보다 뜨겁네.

자네 여윈 이마의 주름살은 내 이마보다도 눈물겨웁네.

나는 자네에게서 젊은 날의 초췌한 내 모습을 보고

좀더 성실하게, 성실하게 하던

그 날의 메아리를 듣는 것일세.


생에의 집착과 미련은 없어도 이 생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지옥의 형벌이야 있다손 치더라도

죽는 것 그다지 두렵지 않노라면

자네는 몹시 화를 내었지.


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

자네는 무슨 일을 해도 나는 노하지 않네.

그렇지만 자네는 좀 이상한 성밀세.

언짢은 표정이나 서운한 말, 뜻이 서로 맞지 않을 때는

자네는 몇 날 몇 달을 쉬지 않고 나를 설복(說服)하려 들다가도

내가 가슴을 헤치고 자네에게 경도(傾倒)하면

그때사 자네는 나를 뿌리치고 떠나가네.


잘 가게 이 친구

생각 내키거든 언제든지 찾아 주게나.

차를 끓여 마시며 우린 다시 인생을 얘기해 보세그려.


 

 

풀잎단장                                         


무너진 성터 아래 오랜 세월을 풍설에 깎여 온 바위가 있다.

아득히 손짓하며 구름이 떠가는 언덕에 말없이 올라서서

한 줄기 바람에 조찰히 씻기우는 풀잎을 바라보며

나의 몸가짐도 또한 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노라.

아, 우리들 태초의 생명의 아름다운 분신으로 여기 태어나

고달픈 얼굴을 마주 대고 나직이 웃으며 얘기하노니

때의 흐름이 조용히 물결치는 곳에 그윽히 피어 오르는 한 떨기 영혼이여.

 

 

석문(石門)                                              
 

 당신의 손끝만 스쳐도 소리 없이 열릴 돌문이 있습니다. 뭇사람이 조바심

치나 굳이 닫힌 이 돌문 안에는, 석벽 난간(石壁欄干) 열두 층계 위에 이제

검푸른 이끼가 앉았습니다.


 당신이 오시는 날까지는, 길이 꺼지지 않을 촛불 한 자루도 간직하였습니

다. 이는 당신의 그리운 얼굴이 이 희미한 불 앞에 어리울 때까지는, 천 년

(千年)이 지나도 눈 감지 않을 저희 슬픈 영혼의 모습입니다.


 길숨한 속눈썹에 항시 어리운 이 두어 방울 이슬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남
긴 푸른 도포 자락으로 이 눈썹을 씻으랍니까? 두 볼은 옛날 그대로 복사꽃

빛이지만, 한숨에 절로 입술이 푸르러 감을 어찌합니까?


 몇 만리 굽이치는 강물을 건너와 당신의 따슨 손길이 저의 목덜미를 어루

만질 때, 그때야 저는 자취도 없이 한 줌 티끌로 사라지겠습니다. 어두운 밤

하늘 허공 중천(虛空中天)에 바람처럼 사라지는 저의 옷자락은, 눈물 어린

눈이 아니고는 보이지 못하오리다.


 여기 돌문이 있습니다. 원한도 사무칠 양이면 지극한 정성에 열리지 않는
돌문이 있습니다. 당신이 오셔서 다시 천 년(千年)토록 앉아 기다리라고, 슬

픈 비바람에 낡아 가는 돌문이 있습니다.

 

 

 

승무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낙화(落花)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노니


꽃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기다림                                                  

 

고운 임 먼 곳에 계시기

내 마음 애련하오나


먼 곳에나마 그리운 이 있어

내 마음 밝아라.


설은 세상에 눈물 많음을

어일 자랑삼으리.


먼 훗날 그때까지 임 오실 때까지

말없이 웃으며 사오리다.


부질없는 목숨 진흙에 던져

임 오시는 길녘에 피고져라.


높거신 임의 모습 뵈올 양이면

이내 시든다 설을리야......


어두운 밤하늘에

고운 별아.

 

 

 

女人                                                       


그대의 함함이 빗은 머릿결에는

새빨간 동백이 핀다.


그대의 파르란 옷자락에는

상깃한 풀내음새가 난다.


바람이 부는 것은 그대의 머리칼과

옷고름을 가벼이 날리기 위함이라


그대가 고요히 걸어가는 곳엔

바람도 아리따웁다.


 

 

완화삼                                                    

 

차운산 바위 우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움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 리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 마을에 저녁 노을이여

이밤 자면 저 마을의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양하여

달빛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빛을 찾아가는 길                                    


사슴이랑 이리 함께 산길을 가며

바위 틈에 어리우는 물을 마시면


살아있는 즐거움의 저 언덕에서

아련히 풀피리도 들려오누나.


해바라기 닮아 가는 내 눈동자는

자운 피어나는 청동의 향로


동해 동녘 바다에 해 떠 오는 아침에

북받치는 설움을 하소하리라.


돌뿌리 가시밭에 다친 발길이

아물어 꽃잎에 스치는 날은


푸나무에 열리는 과일을 따며

춤과 노래도 가꾸어 보자.


빛을 찾아가는 길의 나의 노래는

슬픈 구름 걷어 가는 바람이 되라.
 
 
  

고  사                                                   
 

목어를 두드리다 졸음에 겨워

고오운 상좌아이도 잠이 들었다


부처님은 말이 없이 웃으시는데


서역만리길


눈부신 하늘아래

노을이 진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

나는 아직도 작은 짐승이로다.


人生은 항시 멀리

구름 뒤로 숨고


꿈결에도 아련한

피와 고기 때문에


나는 아직도

괴로운 짐승이로다.


모래밭에 누워서

햇살 쪼이는 꽃조개같이


어두운 무덤을 헤매는 亡靈인 듯

가련한 거이와 같이


언제가 한번은

손들고  몰려오는 물결에 휩싸일


나는 눈물을 배우는 짐승이로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

 

 

꿈 이야기                                              

 

문(門)을 열고

들어가서 보면

그것은 문이 아니었다.

 

마을이 온통

해바라기 꽃밭이었다.

그 훤출한 줄기마다

맷방석만한 꽃숭어리가 돌고

 

해바라기 숲 속에선 갑자기

수천 마리의 낮닭이

깃을 치며 울었다.

 

파아란 바다가 보이는

산 모롱잇길로

꽃 상여가 하나

조용히 흔들리며 가고 있었다.

 

바다 위엔 작은 배가 한 척 떠 있었다.

오색(五色) 비단으로 돛폭을 달고

뱃머리에는 큰 북이 달려 있었다.

 

수염 흰 노인이 한 분

그 뱃전에 기대어

피리를 불었다.

 
꽃상여는 작은 배에 실렸다.

그 배가 떠나자

바다 위에는 갑자기 어둠이 오고

별빛만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문을 닫고 나와서 보면

그것은 문이 아니었다.


 

고풍 의상(古風衣裳)                            
 

하늘로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附椽) 끝 풍경(風磬)이 운다.

처마 끝 곱게 늘이운 주렴(珠簾)에 반월(半月)이 숨어

아른아른 봄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 가는 밤,

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파르란 구슬빛 바탕에

자주빛 호장을 받친 호장저고리

호장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

살살이 퍼져 내린 곧은 선이

스스로 돌아 곡선(曲線)을 이루는 곳

열두 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치마 끝에 곱게 감춘 운혜(雲鞋) 당혜(唐鞋)

발자취 소리도 없이 대청을 건너 살며시 문을 열고,

그대는 어느 나라의 고전(古典)을 말하는 한 마리 호접(胡蝶)

호접인 양 사푸시 춤을 추라, 아미(蛾眉)를 숙이고…….

나는 이 밤에 옛날에 살아

눈 감고 거문고 줄 골라 보리니

가는 버들인 양 가락에 맞추어

흰 손을 흔들어지이다.

 

 
봉황수(鳳凰愁)                                 

 

 벌레 먹은 두리 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風磬) 소리 날러간 추녀 끝

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

(玉座) 위엔 여의주(如意珠) 희롱하는 쌍룡(雙龍) 대신에 두 마리 봉황새를

틀어 올렸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푸르른 하늘 밑 추석을 밟고 가

는 나의 그림자. 패옥(佩玉) 소리도 없었다. 품석(品石) 옆에서 정일품(正一

品), 종구품(從九品) 어느 줄에도 나의 몸 둘 곳은 바이 없었다. 눈물이 속된

줄을 모를 양이면 봉황새야 구천(九天)에 호곡(呼哭)하리라.

 

 

조지훈 趙芝薰 (1920. 12. 3 - 1968. 5. 17) 본명 조동탁                                 

 

경상북도 영양(英陽) 출생.
엄격한 가풍 속에서 한학을 배우고 독학으로 혜화전문(惠化專門)을 졸업하였다. 1939년 《고풍의상(古風衣裳)》 《승무(僧舞)》, 1940년 《봉황수(鳳凰愁)》로 《문장(文章)》지의 추천을 받아 시단에 데뷔했다. 고전적 풍물을 소재로 하여 우아하고 섬세하게 민족정서를 노래한 시풍으로 기대를 모았고, 박두진(朴斗鎭) ·박목월(朴木月)과 함께 1946년 시집 《청록집(靑鹿集)》을 간행하여 ‘청록파’라 불리게 되었다.

 

1952년에 시집 《풀잎 단장(斷章)》, 1956년 《조지훈시선(趙芝薰詩選)》을 간행했으나 자유당 정권 말기에는 현실에 관심을 갖게 되어 민권수호국민총연맹, 공명선거추진위원회 등에 적극 참여했다. 시집 《역사(歷史) 앞에서》와 유명한 《지조론(志操論)》은 이 무렵에 쓰인 것들이다. 1962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소장에 취임하여 《한국문화사대계(韓國文化史大系)》를 기획, 《한국문화사서설(韓國文化史序說)》 《신라가요연구논고(新羅歌謠硏究論考)》 《한국민족운동사(韓國民族運動史)》 등의 논저를 남겼으나 그 방대한 기획을 완성하지 못한 채 사망했다. 서울 남산에 조지훈 시비(詩碑)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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