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정스님 어록

나에게 주어진 맑은 복(福), 살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줄 알아야 /법정 스님

문성식 2011. 5. 24. 18:54

      나에게 주어진 맑은 복(福), 살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줄 알아야 ㆍ‘맑고 향기롭게’ 법정스님 가을 정기법회 ㆍ일시: 2008년 10월 19일(일) ㆍ장소: 길상사 극락전 (청법가 후 대중들 합장 반배) 그동안 잘 계셨습니까? 요즘처럼 청명한 날에는 사는 일이 고맙고 복됨을 느낍니다. 산중에서는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비바람이 불면 짜증나고, 화창한 날에는 기분 좋아지는데 가을 날씨 덕에 요즘에는 흥겹게 지냅니다. 빨래 널면서 서정주 시인의 「푸르른 날」을 외우기도 합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 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 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송창식씨가 이 시를 노래로도 불렀다지요. 시를 읽으면 마음이 흐뭇해집니다. 언어의 결정체인 시에는 우리 말의 넋이 깃들어 있습니다.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시를 일상생활에서 읽어보세요.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시를 읽다가 나이를 먹으면 망각하고 맙니다. 시를 읽으면 피가 맑아지고 무디어진 감성의 녹이 벗겨집니다. 왕유(王維)와 백낙천(白樂天)의 시를 읽으면 사는 일이 고마워집니다. 요즘 세상을 보면 지겹고 짜증나는 뉴스가 많이 들립니다. 미국발 금융가소식, 주가폭락, 쌀직불금 부정수령 등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경제와 돈타령입니다. 경제 살리겠다고 하시는 분들이 잘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가진 것 만큼 행복한가? 갖지 못하면 불행한가? 외부적인 요건만으로 행ㆍ불행을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많이 가졌어도 불행할 수 있고, 적게 가졌어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외부적 요건보다는 내부적인 요건에 달려있습니다. 받아들이는 삶의 자세에 달려있습니다. 요즘 뉴스를 보면 자신이 왜소해지고 무기력해집니다. 사는 일이 지겹고 힘들어집니다. 그러나 다시 눈을 돌리면 향기로운 부분도 많습니다. 그런 외압에 짓눌리지 말아야 합니다. 옛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장혼(張混)은 「평생의 소망」이라는 글에서 ‘맑은 복’ 여덟가지를 말했습니다. 그는 인왕산 아래에 집을 짓고 나무, 꽃, 채소를 가꾸고 살았는데, 예전 집을 500냥에 내놓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장혼의 맑은 복 여덟가지는 ‘첫째, 태평시대에 태어나는 것, 둘째, 서울에 사는 것, 셋째, 선비축에 끼는 것, 넷째, 문자를 대충 이해하는 것, 다섯째, 산수의 아름다운 곳을 차지하는 것, 여섯째, 꽃과 나무를 심는 것, 일곱째, 마음에 맞는 벗이 있는 것, 여덟째, 좋은 책을 소장하는 것’ 입니다. 우리는 나에게 주어진 맑은 복을 어떻게 받아쓰고 있는가? 나는 이 글을 읽고 나 자신을 비추어보았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받쳐주고 있어 나날이 새로워지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에게는 맑은 복 네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책이 있습니다. 마음의 양식이 나를 받쳐주고 있습니다. 둘째, 차(茶)가 있습니다. 출출할 때 마시는 차는 제 삶의 맑은 여백입니다. 셋째, 음악이 있습니다.
      제가 사는 곳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건전지로 듣습니다만 음악이 삶에 탄력을 주고 있습니다. 넷째, 채소밭이 있습니다. 채소밭은 제 일손을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내 삶을 녹슬지 않게 늘 받쳐주고 있습니다. 누구나 한적한 삶을 누리고픈 꿈이 있습니다. 밭을 일구면서 살고자 하는 꿈, 이러한 꿈은 우리의 본능입니다. 언제 현실적으로 이어질지 모르지만 일상에 찌들지 않는 꿈을 가집시다. 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赤壁賦)」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저 강물의 맑은 바람과 산중의 밝은 달이여 귀로 들으니 소리가 되고, 눈으로 보니 빛이 되는구나 가지고자 해도 말리는 사람 없고, 쓰고자 해도 다함이 없네 이것은 천지자연의 무진장이구나” 맑은 바람, 밝은 달을 즐기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남은 생(生)에 평생 둥근 달을 몇 번이나 볼 수 있을 것인가? 비오면 못볼 수도 있으니 다음 달도 기약할 수 없습니다. 강과 산은 본래 주인이 따로 없습니다. 보고 즐길 수 있는 사람이 강산의 주인입니다. 내면을 돌아보면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무수히 많습니다. 외부로 돌리니 발견 못할 뿐입니다. 우리나라는 하루 30명, 일년에 1만2천명이 자살한다고 합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내 세계최고 자살률입니다. 목숨처럼 귀하고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목숨을 내팽개치고 있습니다. 이 순간에도 시한부 인생을 살며 산소호흡기로 연명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존엄한 목숨을 내팽개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자기 혼자만을 위하는 일입니다. 사람은 혼자만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이 떠나있더라도 많은 사람들과 삶의 흐름을 이루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탈하는 것은 명예롭지 못합니다. 결코 고통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고, 또 다른 삶의 시작입니다. 이것은 많은 선각자들이 느낀 부분입니다. 자살은 스스로를 해치는 자해행위로 업(業)이 되며, 이 업은 나중에 윤회의 사슬이 되고 고통으로 이어집니다. 결국 자살은 자해(自害)의 업만 추가될 뿐입니다. 보고 듣고 말하는 것이 업입니다. 말이 씨가 된다고 “죽고 싶다, 죽고 싶다” 하면 결국 죽게 됩니다. 그리고 업의 파장이 됩니다. 업은 파장에 따라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관성(慣性)의 법칙’에 따라 습관이 되고, 나중에는 업력(業力), 업장(業障)으로 이어집니다. 자해행위도 자꾸 하다보면 습관이 됩니다. 누구나 한번 쯤은 자살의 충동을 느끼지만, 막막한 고통이 늘 지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흐린 날이 있으면 맑은 날이 있습니다. 외부적 여건 뿐만 아니라 생각도 변합니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절망감도 한 때입니다. 맑은 정신으로 인간세를 널리 살폈더라면 좋았을 것을... 괴로울 때 혼자 있으면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궂은 일, 좋은 일도 다 한 때입니다. 모든 것은 고정되지 않고 늘 변합니다. 어려운 일 닥쳤을 때 혼자서 해결하려 하지 마세요. 절이나 교회를 찾아 짐을 부려놓으세요. 절이나 교회는 항상 문이 열려있습니다. 자살 전에 좋은 스승이 있으면 쉽게 자살하지 못합니다. 누구든지 제 명(命)이 있습니다. 몸 바꾸는 것은 자연스런 생명의 현상으로 헌차에서 새차로 바꾸는 것과 같습니다. 자살하면 그 새차는 헌차만 못합니다. 왜냐하면 업의 파장 때문입니다. 그 업의 찌꺼기가 다음 생에까지 따라옵니다. 어렸을 때의 소질이나 개인차는 다 전생의 업력입니다. 우리는 살아있다는 사실에 늘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나누기 위해 이렇게 존재합니다. 이만 마치겠습니다. ㅡ법정 스님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