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법화경 / 독경 성수스님

문성식 2011. 3. 11. 09:04

『법화경』의   원제목은
『삿다르마 푼다리카 수트라(Saddharma pundarika sutra)』이다.
「삿다르마」는 「바른 법(正法, 진리)」,
「푼다리카」는 「백련꽃」,
「수트라」는 「경」이라는 의미이며
전체로서는 '백련꽃과 같이 올바른 가르침' 이라는 의미가 된다.

19세기의 전반에 이르러 『법화경』의 원전이 네팔에서 발견된 이래
중앙아시아와 카시밀에서도 몇몇의 원전 사본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20세기로 들어와서는 원전의 교정본도 두세 가지 출판되었다.
극히 최근까지도 여러 계통의 사본 출판이 이어져
법화경의 원전 연구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중국어 역으로서는 『정법화경』(286년, 竺法護 역), 『묘법연화경』(406년, 구마라습 역),
『첨품묘법연화경(添品妙法蓮華經)』(601년, 團那幄多와 達摩宮多 역)이 현존하는데
이 가운데에서도 구마라습 역인 『묘법연화경』은 명역이란 평을 받아 왔으며
후세의 법화사상의 전개는 전적으로 이 번역에서 힘입었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동북아를 중심으로 한 대승불교권에서는 『법화경』이라고 하면
대체로 이 『묘법연화경』을 가리킨다.
또 중국어 역 외에 티베트어 역도 있다.
『법화경』의 원전과 역서에 관한 상세한 사항은
관본행남. 암본유(岩本裕) 역주 『법화경』 상(岩波文庫)을 참고하면 된다.

다른 대승경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법화경』의 성립연대도 확실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기원 전후에 성립되었다고 하는 설이 일반적이며
그리고 그 성립시기를 3기로 나누어서 제1기는 기원후 50년경,
재2기는 100년경, 제 3기는 150년경으로 추정한다(田村觸,『법화경』 中公新書).

『법화경』도 산문과 시구로서 구성돼 있는데
대부분 산문과 시구의 내용이 흡사하다.
즉 시구는 산문 내용의 반복이 많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법화경』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커다란 두 개의 장이 있는데
하나는 제2장 방편품, 다른 하나는 제16장 여래수량품이다.

전편을 통해 『법화경』은 보살, 비구, 비구니, 사람들에게 성불을 예언하고
그러기 위해 일불승을 삼승으로 나누어 설한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성불수기를 주는 부처님은 구원실성의 본불임을 천명하는 동시에
『법화경』의 독송과 수지(受持), 해설과 서사(書寫)를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이 같은 『법화경』의 신앙은 중국에서 천태학(天台學)으로 발전해
중국불교의 중요한 기능이 되었다.
천태대사 지의(智 ;538∼597)에 의해 확립된 천태학은
한국, 일본에도 큰 영향력을 미쳤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시대 의천(義天 : 1055∼1101)에 의해 천태종이 개창 되었다.
일본에서는 최징(最澄 : 762∼822)이 히예산에서 천태교학을 크게 선양했으며
일연(日蓮)등은 『법화경』에 귀의하는 하나의 강력한 종파를 형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미륵보살의 일을 말한 6부의 경전으로,
구마라집 역『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 『미륵내시경』(彌勒來時經) 『미륵하생성불경』과
의정이 번역한 『미륵대성불경』(彌勒大成佛經) 『미륵상생경』(彌勒上生經)
『미륵하생성불경』(彌勒下生成佛經)을 말한다.
미륵은 Maitreya로 대승보살 또는 매달려야(梅麗耶), 매달례야(梅耶),로 음역하며
성(姓)은 자씨(慈氏) 이름은 아일다(阿逸多), 무승(無勝), 막승(莫勝)이라 번역한다.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집안에서 태어나 석존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가 도솔천주가 되어
지금 그 하늘에서 천인(天人)들을 교화하고 계시며,
석존 입멸 후 56억 7천만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시어
화림원(華林園)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서 성도하여
3회의 설법(첫번째 법회에서 96억인을, 두번째 법회에서 94억인을,
세번째 법회에서 92억인을)으로서 석존의 교화에서 빠진 모든 중생들을 제도한다고 한다.

또한 그때는 인간의 수명이 8만 4천에 이르고 5백살이 되면 결혼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사람들의 마음도 다 어질고 복스러워 모두가 화합하게 되니,
마치 하늘나라에서 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 인간세계가 욕심, 성냄 어리석음 등의 모든 번뇌가 사라지고
질병도 없어지는 그야말로 지상낙원의 시대가 되고
그때 미륵보살께서 수범마와 범마월을 각각 부모로 하여 이 세상에 오신다고 설하고 있다.

석존의 업적을 돕는다는 뜻으로 보처(補處)의 미륵이라 하며,
부처님 말씀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생기어 없어지는 동안을 현겁(賢劫)이라 하고
이 현겁에 부처님 천분이 나오신다고 하셨는데,
그 첫 번째 분이 구류손불(拘留孫佛)이요,
두 번째로 구나함모니불, 세 번째로 가섭불, 네 번째로 오신 부처님이 석가모니불이며
다음 다섯 번째로 이 세상에 오실 부처님이 미륵불이다.



--법화경은 쉽지만 그 뜻은 깊다--

1. 서론
부처님께서는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셨다.
   이를 "교(敎)라 하는데, 그것이 중국을 통해 전해져 "경(經)" 이라는 이름으로 전래되어 오늘날 해인사에 목판으로 각인된 것이 팔만대장경이다.
   팔만대장경은 "경(經)"과 경의 해설서인 "논(論)" 또, 수행하는 이들이 지켜야 할 계(戒)와 율(律)을 모아놓은 "율장"과 조사(祖師)들의 행적과 법문등을 추려놓은"고승전"등이 포함되어 실은 그 판각의 장수는  "팔만사천"이 넘고 경(經)수로는 "천오백십사"경에 달한다.
   그 중에는 채 몇 줄도 않되는 경에서부터 "대반야경" 이나 그 주석서인 "대지도론", "화엄경"등과 같이 내용의 이해는 고사하고 그 엄청난 분량에 한번 읽어볼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경"과 "논"등이 총망라되어있다.
   그래서 혹 신심을 내어  얼마 전 완역된 318권에 달하는 우리말 대장경을 전부 한번만이라도 소설 읽듯이 일주일에 한권씩 읽어도 7~8년은 족히 걸린다는 계산이 나오는데 소승의 경험으로는 오직 독경에만 매달려 보아도 아함경과 같이 쉬운 경도 한달에 세권을 마치기에도 벅차다.
그러하니 범인(凡人)은 평생에 팔만대장경 모두를 읽어 본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분명히 간경(看經)은 참선, 염불과 함께 불교의 3대 수행법 중의 하나이다.
   곧 경을 읽는 것도 엄연히 참선과 같은 수행의 훌륭한 방법이고 당연히 그 결과는
해오라 이름하는 깨달음의 증득(證得)에 있다.
   그렇다면 평생을 매달려도 한번 읽기에만도 시간이 부족한데 어찌 깨달음의 경지인"해오"까지 기대할 수 있다는 말인가.
   부처님의 말씀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 "경(經)"이고, 그 "경(經)"을 다시 유사한 내용과 사상으로 묶어서 "부(部)" 라 부른다.
   그 경이나 부를 설하신 시기나 내용별로 구별하는 것을 "교판(敎判)"이라 하는데 구별의 방법에 따라 몇가지의 전형적인 분류방식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하지만 소승은 "해오(解悟)"에 이를 수 있는 나름대로의 차제(次第)를 터득하였다.
   이 말은 소승이 "해오" 했다는 것이 아니라 팔만대장경을 다 보지 않고도 부처님의 의도 하신 바를 이해할 수 있는 지름길을 알 수 있는 지견(知見)이 생겼다는 뜻이다.
   물론 소승의 지견이 무조건 옳다는 말이 아니라 혹 다른 공부하는 이들에게 공감을 얻고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소박한 견해일 뿐이다.
   그 지견(知見)이란 몇몇경을 통해 부처님께서 의도하신 근본사상을 꿰뚫어 버리는 방법인데, 소승은 그 순서를 "반야경" , "법화경" , "화엄경"의 순이라 이해하고 있다.
   먼저 반야부(般若部)의 경은 팔만대장경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실제로 부처님께서도 일생의 거의 3분의1을 반야부의 경들에서 그토록 지루하고 어렵게 설명하고 있는 "공(空)의 이해"를 위해 할애 하셨다.
   소승의 생각에 공(空)이 즉 깨달음은 아닌데-실제로 깨달음의 당체(當體)를 있는 그대로 설하신 화엄경에서는 공(空)이라는 단어를 찾기 힘들다-그토록 많은 시간을 중생들에게 단지 "공"을 이해시키기 위해 할해하신 이유가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더욱 이해되지 않은 것은 법화경의 경우로, 비유품의 '화택(火宅)의 비유'나 그 유명한 '장자 궁자의 비유'가 있는 신해품, 또 다시 '화성유품의 비유'등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들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이이솝 우화 같은 비유나 아니면 '약왕보살본사품', '관세음보살보문품'등 중생들을 "달래는" 내용들이 대부분인데 어떻게 거기에서 "천태사상"같은 심오한 진리들이 정립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었다.
   하지만 화엄경을 독경하고 나니 그 모든 의문들이 한 순간에 해결되었다.
   그 결과는 앞서 거론했던 경(經)을 통한 해오(解悟)에 이를 수 있다는 나름대로의 "지견(知見)"이 확실해 졌고, 그 지견이 솔직히 우습게 보았던 법화경이 얼마나 중요하고 심오한 가르침을 담은, 마치 한편의 명화(名畵)를 본 후의 평생 잊혀지지 않는 감동과 여운을 간직하도록 만드는 듯한 멋들어진 경(經)인가를 깨닫게 된 것이다.
 


2. 본론
   이제 소승의 견해를 정리를 해보면 부처님은 중생들이
명색(名色)에 대해 집착함이 가장 큰 병(病)임을 아시고 그 병을 고치지 않고는 "진정한 깨달음"에 도달할 수 없음을 분명히 아시고 우선 준비단계로 깨달음의 길에 동행하기 전에 병부터 고쳐놓으시려 하셨고 중생들의 병이 워낙 깊어 그토록 많은 시간이 필요하셨던 것이다.
   다음에는 병을 고친 중생들은
누구나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격려하시며 길을 재촉하시는데, 중생들이 지루해 하고 믿으려 하지 않으니 방편(方便)으로 깨달음의 "법락(法樂)"을 조금 맛보게 해주셔서 "확신"과"용기"를 확인시키시고, 불퇴전의 신심(信心)으로 화엄의 바다를 건너 열반의 언덕에 안착시켜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것이 부처님의 의도라는 것이 소승의 결론이다.
   워낙 중요한 문제라 이번에는 공부하는 이의 입장에서 다시 밝혀 보기로 한다.
   우선 반야부의 경들에서 설명하는 공(空)에 대한 이해를 완전히 한 후- 과거나 현재의 많은 이들이 여기에서 얻어진 것이 마치 "한소식" 인 양 착각하는 듯하다. 소승은 공은 절대적 사고와 모든 선입과 본능적이고 무의식적인 집착에서 벗어난 상태라 생각한다. 공(空)의 체득이 곧 깨달음이라면 해공제일(解空第一)
수보리(須普提)가 대승경전인 "유마경"에서 유마거사에게 혼이나며 "법화경"이나 "화엄경"등에는 공(空)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음을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백지 상태가 된 다음에 법화경을 통해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여실히 파악하고, 마지막으로 화엄경으로 말도 붙일 수 없는 우주적 실상(實相)이 서로 다름이 없고 곧 자아(自我)이기도 하다는 것을 단계적으로 증득(證得)하여 완성해 나아가는 것이 곧 부처님의 의도하신바 라는 것이 소승 나름대로의 결론이다.
   지금까지 밝힌 제경전(諸經典)에서의 법화경의 지위 부여는 통상의 "교판(敎判)"을 염두에 두지않고 오로지 소승의 "경험적 논리"에 의한 것이므로 "
일련정종(日蓮正宗)"은 제외하고라도 "천태지자(天台智者)"의 눈으로 법화경을 보는 이들에게는 불만일수도 있을 것이다.
   어찌 되었건 그렇다고 법화경의 가치가 과소평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시대에 오히려 법화경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특히 "방편"의 중요함을 일깨워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앞에 "깨달음"이란 말이 언급되어 버렸으니 내친김에 불교계와 세간(世間)의 일부에서 수행과 그 방법에 대한 이해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한 소승 나름대로의 논리로 그 의미를 재조명해 보는 모험을 해야 할 것 같다.
   첫째는 수행과 그 결과에 대한 왜곡인데 "깨달음"은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에 모두 자재(自在)하며 자취도 없고 있음과 없음도 없고 또한 파격(破格)과 역행(逆行), 이해(利害)도 없고 얻음과 잃음도 없고 두루 거슬림이 없어 깨달음의 경계(境界)에 찰라만 접한 이라도 인간은 물론 마구니의 시비에 말려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조사들의 무애행(無碍行)은 어찌보면 일상사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한번의 "장난" 쯤이거나 아니면
목련존자가 대중들 앞에서 공중에 앉아 있는 "묘기"를 자랑하다 부처님께 혼쭐났듯이 오히려 수행의 미완성에서 오는 "아만(我漫)"일 수 있다는 것이라 감히 주장한다.
   부처님의 일생은 정신적 세계의 깊이를 떠나서라도 가장 모범적이고 지극히 평범한 언행으로 일관하신 "한 인간"이셨는데-"금강경"의 시작을 보면 다른 경과 달리 유별나게 일상적인 부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곧 소승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경전상의 증거가 아닐까?-그 "한 완성된 인간"이 되겠다는 이들이 스승인 부처님도 당황해 할 언행들을 즐기며 "무애(無碍)"니 "자재(自在)"니 하는 표현을 쓸 수 있겠는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해 나간다고 자청하는 승속(僧俗) 모두는 우선 불법(佛法)과 수행을 빙자한 위선에서 벗어나 "가장 상식적이지만 수승한 인간", "누구나 이해하고 어떤 대화라도 가능한 인간"으로서의 탈바꿈이 수행의 시작이요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두번째는 "공(空)"과 "무소유(無所有)"에 관한 왜곡으로 "
진공묘유(眞空妙有)"란 말에 현혹되어 "묘유(妙有)"를 구하면 "공(空)"을 증득(證得)한 것으로 이해하는 이들이 있는데, 소승의 견해는 "묘유(妙有)"란 "공(空)"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空) 자체를 아예 인식하지 않는 "탈공(脫空)"에 있다는 것이다.
   또한 "탈공(脫空)"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 경계(境界)가 즉 "깨달음"은 아니라는 것이 소승의 신념인데, 이는
근기(根器)에 맞는 수행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원각경"이나 수행의 단계별로 오는 마장(魔障)은 물론 그 마장에서 벗어나는 방법까지 조목조목 밝혀놓은 "능엄경", 깨달음 그 자체와 수행의 과정과 그 지위(地位)를 너무나도 명확하고 세세히 설명하고 있는 "화엄경"등을 보면, 이미 공(空)을 여윈 수행자라 전제하고 갖가지 "삼매(三昧)"를 재차 삼차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탈공(脫空)"에서 오는 "한 소식"은 "삼매(三昧)"에 들기 위한, 다시 말해 진정한 깨달음을 향한 수행의 준비가 "온존히" 되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이 소승의 견해이다. 
   "무소유(無所有)" 역시 최소한의 소유가 수행의 미덕이라는 양(量)의 단정적 의미가 아니라, 질(質)적인 마음의 "
반연(攀緣)"에서 그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장 예를 들어 지금 소승이 고군분투하고 있는 "경전 전산화불사"의 경우 내 방과
요사채는 10년 이상을 비가 새지 않게 방수비닐로 덮어 누더기 같은 형편이지만, 컴퓨터와 관련기기, 소프트웨어 등은 수시로 업그레이드하여 일반인들이 부러워할 수준의 시스템을 유지하지 않으면 작업자체의 능률이 오르질 않는다. 
   나의 "불사(佛事)"는 "소유"가 없으면 불가능하고, 소승의 경제적 "무소유"가 오히려 가장 큰 장애가 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 아닌가.
   두 가지 문제만을 제기 했지만 다른 많은 "용어"에 대한 그릇된 유사한 관행적 논리들이 불법(佛法)에 대한 깊이를 제한 시킬 수 있는 심각한 사안이 될 수도 있다는게 소승의 기우이다. 
   몇 가지의 경우가 더 있긴 하지만 다시 가던 길로 돌아와 이제부터는 법화경에서 강조된 "방편(方便)"의 문제에 대한 소승의 견해를 피력하고자 한다. 
   첫째, 경전과 불법에 대한 이해에 관한 것과 "설법"과 "포교"의 근본적인 문제이다.
   경전에 수없이 등장하는 <부처님의 한마디 말씀에 곧 '어떠한'과를 증득하였다.>라는 귀절들은 부처님의 탁월한 "
대기설법(對機說法)"의 능력을 강조한 것이지 그 시대 중생들의 지금보다 수승한 근기(根器)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만약 지금 부처님이 우리에게 법(法)을 설하신다고 가정할 때 과연 경전에 나온데로 "거문고의 비유"나 "뗏목의 비유"정도의 수준이셨을까? 아니면 조금 높여 법화경 수준의 비유로 법(法)을 이해시키시려 하셨을까?
   소승의 생각에는 아마 "스트레스", "신세대", "치매"같은 일상화된 언어에서부터 "DNA", "e-메일", "빅뱅"등의 전문적인 언어는 물론 검증되고 체계화된 각 분야의 모든 이론과 단어들을 사용한 "대기설법"을 하셨을 것이 당연하다.
   예를 들어 '자기가 지은 업(業)이 후세에 까지 미친다'는 업(業)의 과보(果報)와 연속성을 설명하신다고 가정할 때, 육체적인 면으로는 부모의 유전자가 결합하여 자식에게 그대로 전달되니 현세에 건전한 생활을 하여 육신을 잘 다스리라 하시고, 정신적인 면으로는 태교의 중요함을 말씀하시어 부부간의 화목과 산모의 정신적 안정을 강조하셨을 것이다.
   위의 예는 지극히 단순하고 간단한 경우이고 "자재무애(自在無碍)"나 "이(理)와 사(事)", 혹은 "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 같은 마음과 물질의 지극히 형이상학적인 난해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현대물리학과 천문학, 심리학 등의 검증된 전문적 이론을 들어 우리를 이해 시키려 하셨을 것이다. 
   사실 이런 가정은 형식적 요소, 즉 "언어의 사용과 범위"에 관한 현재의 문제점을 제기한 것 일뿐 정작 심각한 문제는 천편일률적이고 정형화되어 버린 그 내용에 있다.
   대표적인 경우로, 마음과 물질을 설명할 때 가장 흔한 예로 한 선사의, "바람이 부는 것이냐,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냐, 아니다 네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라는 천수백년전 어느 시점, 특정스승이 특정제자를 위한 문답이 오늘날에도 모법답안으로 신봉되고, 벗어나려고 하면 감히 어느 선사(禪師)의 경계(境界)인데 의문을 갖느냐며 공부할 마음의 기본 자세가 되어있지 않다고 되레 호된 질책만 듣게 되어 있다.
   소승이 이 "깃발의 예"가 의도하는 문제제시와 그 가치를 무조건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직설적인 표현을 하자면 이는 '한수행인이 한제자를 가르치기 위한 한가지 대기설법의 경우'일뿐 이라는 것이다. 
   깃발을 만들어 선풍기로 실험을 해 보니 운운하면 '너는 공부는 커녕 지옥고나 면해라' 할 것이니, 법화경을 들먹여 반박의 논리를 들이대보면 "실상(實相)"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 수행의 과제임이 분명할 진데, 그렇다면 바람이 불어 역학적인 힘에 의해 깃발이 나부끼는 것이 오히려 여법(如法)하게 보는 경계이고, 이러한 논리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말이 의도하는 바와 같지 않은가?
  더욱 그 선사(禪師)의 '일회성 가르침'을 순전히 "선(禪)의 논리"로만 비판을 해도 본래 성품(性品)이 "무자성(無自性)"이요, "무아(無我)"라고 그렇게 강조하면서 도대체 "움직이는 마음"이 설 자리가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이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고 "
간화선(看話禪)"과도 연관된 워낙 미묘한 과제라 앞으로 소승의 전산화 불사 계획 중 "선(禪)의 총론"에서 다시 심도있게 다루기로 하겠다.
   두번째는 "방편(方便)"이란 이름으로 아무 생각없이(실은 신도를 절에 한번이라도 더 오게 하기 위해서지만) 현재 벌어지고 있는 절의 행사와 법회의 성격에 대한 문제인데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실은 바로잡지 않으면 불교의 비불교화와 그 질적저하에 결정적인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는, 당연시 되어가고 있는 왜곡들이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우란분절" 즉 "백중"은 "우란분경"에서 밝히듯이 효심 깊은 목련존자가
아귀도(餓鬼道)에서 고통받는 어머니를 구제하기 위해 하안거를 마친 수행자에게 음식과 의복 등을 "대중공양(大衆供養)" 올리고 그 공덕으로 악도(惡道)에서 벗어나게 해주셨다는 부처님이 친히 내려 주신 "방편"을 행하는 날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우란분절에 대중공양은 고사하고 "재"가 중심이 되어 천도재를 지내는 날로 변질된지 오래이다. 
   근래에는 한술 더떠 누가 죽기라도 했는지 7,7재를 붙여 백중날 49재식 회향을 하는 절들이 경쟁하듯 늘어 나니-그것도
"할"과 "봉"을 일삼는 큰스님들께서 주석하신다는 절에서 마저도- 그렇지 않은 절들은 오히려 천도기도를 소홀히 하는 소승의 절과 같은 뭘 모르는 중이 괜한 고집을 부려 신도만 섭섭케 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 정도는 그래도 "파불(破佛)"의 단계까지는 아닌데, 표현하기도 유치하지만 입춘날 "삼재풀이"라는 명목으로 '속옷'을 "수행도량"에서 태우는 데까지 이르러서는 더 할 말조차 찾을 수 없을 지경이다.
   이런 "비불(非佛)"을 넘어 "파불(破佛)"적 요소는 너무나도 많아 열거하기도 번거로운 형편이니 그만두기로 하고, 마치 세속의 장사하는 이들이나 써먹을 법한 수준의 '신도를 모이게 하는 방법'을 "방편"이란 이름으로 묵인하고 조장하는 현실이 계속된다면 , 소승의 결론은 승가(僧伽)와 재가(在家) 모두를 위해 차라리 "무방편(無方便)"이 "상방편(上方便)"이라는 것이다.



3. 결론
   사설이 길어 이제 마무리를 하고자 한다.
   이 시대에 불교가 안고 있는 수많은 문제를 이제는 법화경의 정신을 통해 상당부분 해결할 수 있는 실행 가능한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 대안이란 "과학불교"와 "전문불교"를 지향하자는 것인데 구체적인 방법은 현재 난립되어 있는 승가와 재가의 교육기관을 세분화, 전문화 하자는 것이다.
   지금처럼 어느 절의 어느 법회나 어느 불교대학에서 공부를 해봐도, 강의하는 이나 공부하는 이들이 결국은 그 내용을 그 수준으로 이 절, 저 대학에서 서로 반복하게 하지 말고 최소한 서울과 부산 등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추고 있는 절도 충분하고, 인구도 밀집된 큰 도시부터라도 한 사찰, 한 불교대학 단위로 한가지 경전이나 교리, 불교사상 등을 초급 중급 상급으로 반을 나누어 1년 내내 반복강의 연구토록 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공부하는 이는 언제라도 기초교리는 어느 절, 금강경은 어느 절, 법화경은 어느 절, 화엄경은 어느 불교대학으로 가서 다시 자기의 수준에 맞게 초급이나 상급반을 선택하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이 자리를 잡으면 승가(僧伽)와 재가(在家) 모두 소승이 "화엄경 총론"머리말에서 이미 강조한 바 있는 경전의 본래 정신에 충실해져 비불교적 요소들이 사라짐은 물론 "불교의 상향 평준화"가 이루어질 수 있고, 우리나라 불교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정말 중요한 과제인 경(經)과 론(論)등의 활발한 연구를 할 수 있는 <전문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솔직히 소승은 학자들이 인도에서 불교 쇄퇴의 가장 큰 이유로 들고, 大乘(대승)이라 자처하며 小乘(소승)인 부파불교시대의 승가중심의 현학적 논쟁을 폄하하는 오늘의 代僧(대승)들을 보면, 所乘(소승)인 그들의 수백년에 걸친 소모적 논쟁에 오히려 경외심을 느낀다.
   현재의 한국불교가 진정 "부처님의 말씀"인가, 아니면 "조사(祖師)의 가르침"인가, 아니면 "불교를 대신한 절이나 학자"들의 불교인가, 그도 아니면 "보험설계사"가 되어버린 "새불교"의 "새승가"의 말씀인가? 또 나는 언제 보험설계사에서 벗어날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기라도 한 것일까? 
   이것이 소승의 마지막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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