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울물에 벼루를 씻다
비가 내리다가 맑게 갠 날,
개울가에 앉아 흐르는 물에 벼루를 씻었다.
잔잔히 흐르는 개울물 소리를 들으면서 벼루를 씻고 있으니
마음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문득 내 안에서 은은한 묵향이 배어 나오는 것 같았다.
이렇듯 말게 흐르는 개울물도
사나운 폭풍우를 만나면
흙탕물로 온통 폭포를 이루어,
골짜기가 떠나갈 듯이 소란스럽다.
이런 날은 자연의 일부분인 내 마음도 스산해져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밤에는 넘치는 물소리 때문에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한다.
같은 산중에 사는 나무와 짐승과 새들도 그런 내 기분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한 생명의 뿌리에서 나누어진 가지들이기 때문이다.
인적이 끊긴 깊은 산중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나그네가
그 산중에 은거하고 있는 한 노승을 만나 마을로 내려가는 길을 물었다.
노승은 단 한 마디로 '흐름을 따라가게隨流去'라고 일러 주었다.
산중의 개울물은 이 골짝 저 골짝을 거쳐
마침내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촌락으로 지나가게 마련이다.
흐름을 따라가라는 이런 가르침은 인생의 길목에도 적용될 것이다.
세상을 살다가 갈 길이 막히면 절망을 한다.
이런 때는 뛰어넘을 수 없는 벽 앞에서 절망할 게 아니라 '흐름'을 찾아야 한다.
그 흐름은 마음이 열려야 만날 수 있다.
지금까지 쌓아온 벽을 미련없이 허물고 다리를 놓아야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것은 벽이고,
이어주는 것은 다리다.
벽은 탐욕과 미움과 시새움과 어리석음으로 인해 두터워 가고
다리는 신의와 인정 그리고 도리로 인해 놓여진다.
다리는 활짝 열린 마음끼리 만나는 길목이다.
좋은 세상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믿음과 사랑의 다리가 놓여진 세상이다.
- 범정 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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