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정스님 어록

산 너머 사는 노승 / 법정 스님

문성식 2011. 2. 12. 00:24

    

 

 

 

산 너머 사는 노승
                                                    / 법정 스님

가을 바람  불어오니 일손이 바빠진다.
우선 이 구석 저 구석에 놓인여름의 부스러기들을 치워야 한다.
드리웠던 발을 걷고 투명한 가을 햇살에 새로 창문을 바른다.
서리가 내리기 전에 고추밭에 남은 끝물 고추도 마저 딴다.
호박도 거두어들인다.  그리고 이제는 날마다 군불을
지펴야 하므로  나뭇간에 장작과 땔감을 마련해 두어야 한다.

뜰가에 있는 몇  그루 소나무와 단풍나무의 가지치기도 한다.
그  동안 왕성하게 자라 한데 얽힌 가지들을 따내어 수형을 잡아 준다.
폭우로 밀려 나간 개울가 디딤돌을 물 속에 들어가 끌어올려 제자리에 놓는다.
아무리 오두막일지라도 집을 한 채 지니고 살려면 이런 일은 감수해야 한다.
이것이 또한 사람 사는 일 아니겠는가.

태풍이 지나간 후 한 노스님이 사는 산 너머 일이 궁금해서 며칠 전 찾아 나섰다.
영동 산간지방은 눈과 비는 많이 내려도 바람 피해는 별로 없다고 한다.
높은 산으로 첩첩이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제아무리 거친 바람도 기를 펴지 못한다.

"스님.  계세요?"
서너 번 인기척을 냈지만 아무 대꾸도  없었다.
밖에 나가고 안 계신가 싶어 뒤꼍으로 돌아서니 저 언덕 위 소나무 아래 정좌하고 계셨다.
한 손에 단주短珠를 들고  앉아 있는 그 모습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나는 숨을 줄이고 바라보았다.
소나무 아래 반석에 방석을 깔고 선정禪定에 든 모습이 내눈에는 거룩함보다 아름다움으로  비쳤다.
수행자가 아무 잡념없이 무심히 홀로 앉아 있는 모습은 참으로 천연스럽고 아름답다.
선원에서 여럿이 한 방에서 참선하는 모습도 보기 좋지만 거기에는 긴장감이 서려 아름다움은 덜하다.
여럿과 홀로의 그 분위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따금 서울 광화문 거리에 있는 교보빌딩에 올라가 치료를 받는 단골  치과가 있다.
지정석은 아니지만 맨 안쪽에 있는 방이 내게는 익숙하다.
창으로는 왼쪽으로 이순신 동상이 발 아래로 내려다보이고  멀리 인왕산이 들어온다.
의자에 앉으면 정면에 뭉크가 그린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걸려 있다.
파리의 로댕 미술관에서  생각하는 사람의 실물을 보기도 했지만
뭉크가 그린 이 생각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나는 우리 '미륵반가사유상'이 겹쳐서 떠오르곤 한다.

똑같이 생각하는 사유상을 다루고 있는데 동서양의모습은 전혀 다르다.
로댕의 것은 생각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괴뇌하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 만큼 그 모습이 어둡고 무겁다.
한참 바라보고 있으면 그의 고뇌가 어둡고 무겁게 내게 묻어오는 것 같아
내 기분 또한 가볍지 않다.   내 편견일까.
그러나미륵반가사유상을 마주하고 있으면 마음이 편하고
불상이 머금은 잔잔한 그 미소가 내게 옮아오는 것 같아 마음이 가볍고 그윽해진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과는 전혀 다른 명상하는 모습이다.
똑같은 사유를 주제로 다루고  있으면서도 동양과 서양은 그 표현 방식이 이와 같이  다르다.
문화의 차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뭉크의 그림이 걸린 그 방에서 치료를 마치고 원장인 윤박사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그도  "참 그렇군요"라며 공감했다.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일본 교토에 와서
고류지에 모셔진 미륵반가사유상을 보고 크게 감탄한 바가 있다.
일본에서 국보 제1호인 이 미륵반가사유상은
백제 사람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한다.

야스퍼스는 이렇게 술회한다.
'나는 지금까지 철학자로서  인간 존재의 최고로 완성된 모습으로  여러 가지 모델을 접했봤다.
옛 그리스 신들의 조각도 보고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수많은 뛰어난 조각의 상도 보아왔다.
그러나 그것들은 완전히 초월하지 못한 지상적이고 인간적인 체취가 남아 있다.

그 어떤 것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지상적인 감정의 자취를 남긴 세속적인
표현이지 진정한 인간  실존의 저 깊숙한 바닥에 까지  도달한 자의 모습은 아니다.
그러나 이 미륵반가사유상에는 완성된 인간 실존의 최고이념이 남김없이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지상의 시간적인 온갖속박에서 벗어나 도달한 가장 청정하고  원만한,
그리고 보다 영원한 모습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오늘에 이르도록 수십 년 철학자의 생애를 살아오면서 이처럼 인간 실존의
참으로 평화스러운 모습을 표현한 예술품을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이 불상은 우리 인간이  지닌 마음의 영원한 평화를 남김없이 최고도로 표현하고 있다.'
아스퍼스가 이와 같이 감탄해 마지않은 사유상은 다름 아닌 신라나 백제 때  우리 선인들의 모습이다.
그 후손인 현재의 우리들 모습은 어떤지 한 번 돌이켜 볼 일이다.
오늘 우리들의  얼굴  모습을 보고 옛 사람들은 뭐라고 말할 것인가.

현대 정신의학에서는 '영상 치료'라는 것이 있다.
자비스럽고 온화한 모습을 항상 가까이 대함으로써 거칠어진 정신과
불안정한 정서를 치유하는 새로운 의술이다.
그러나 뜻이 있는 사람은 어떤 대상을 보고 치유할 게 아니라 스스로 자비와 온화를 만들어내야 한다.

나무 아래 홀로 앉아 무심히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이와 같은 일상적인 집중과
정진이 아름다움을 만들고  자비스럽고 온화한 모습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것은 앞서 간 이들의 발자취가 아니라 그분들이 찾고자 했던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외부에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이미 존재해온 우리 자신이다.

                          
                            


              《홀로사는 즐거움 中》
       


           一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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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일촌 불 원문보기   글쓴이 : 목우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