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토릭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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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식 2020. 8. 24.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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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략설명 읍성 곳곳에 순교의 피가 흐른 충청도의 첫 순교터
지번주소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 110-6 
도로주소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아문길 37-1
전화번호 (041)633-2402
팩스번호 (041)634-3217
홈페이지 http://www.hongjushrine.com/
문화정보 사적 제231호(홍성 홍주읍성)

 

홍성천과 월계천이 만나는 합수머리 부근 생매장터에 홍주 순교성지비가 세워졌다.

충청남도 서북부의 중심지에 위치해 내포 지역 정치, 행정, 문화, 교통, 체신의 중추이자 군사적으로도 서해안 방위의 핵심 역할을 담당해 온 홍주성은 그 관할 범위가 넓었던 만큼 순교자들도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홍주는 결성과 합해 홍성이 되어 행정구역상 홍주라는 지명은 없다.

 

조선 시대에 홍주부를 두어 관찰사가 주재했던 홍성은 관할 구역만 해도 북으로는 평택 이남, 동으로는 경부선 서부 지역, 남으로는 금강 이북의 22개 군에 이르렀다. 홍성읍의 한 복판에 있는 홍주성은 전체가 순교 현장이다.

 

읍성 안 관아시설은 특히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형벌이 집행되었던 곳으로 구체적인 순교터로는 목사가 머물던 동헌, 홍주옥, 진영장이 머물던 조양문 앞, 옛 저잣거리, 북문교 건너 월계천변 참수터, 생매장터로 사용되었을 곳으로 추정되는 홍성천과 월계천이 만나는 합수머리 부근이 있다. 이렇듯 구석구석이 처형지로 사용됐던 홍주성은 아직도 무심하게 남아 있는 고목들과 함께 당시 교우들이 받았던 엄청난 핍박을 그대로 전해 준다.

 

홍주읍성 남문 홍화문과 성곽 모습.

홍성은 예로부터 최영 장군, 만해 한용운 선사, 백야 김좌진 장군, 사육신의 하나인 성삼문 등을 배출했을 뿐만 아니라 1905년 을사늑약에 의분을 참지 못한 의병들이 순국한 충절의 고장이기도 하다. 홍성의 역사를 찾는 순례자들은 죽음을 무릅쓴 신앙 선조들의 굳건한 신앙과 함께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몸 바친 우국 열사들의 향기를 함께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여행길이나 마찬가지이겠지만 홍성을 찾는 순례객들은 미리 지역에 대한 사전 지식을 갖추고 떠나는 것이 유익하다. 특히 단순한 경치 구경을 넘어서 선조들의 향기를 맡으려는 여행자는 목적지의 역사와 유래 등을 진지하게 살펴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홍성에 도착해서 홍주성 내 군청에 들러 간단한 여행안내 책자를 받으면 개략적으로나마 지역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이다. 홍성은 서울에서 출발할 경우 2시간이 조금 넘게 소요된다. 홍성역에서 순교 현장인 홍주성까지는 걸어서 20분 남짓이면 갈 수 있어 열차 순례도 가능하다.

 

홍주목 관아의 정문인 홍주아문. 현재 관아 자리에는 홍주 군청이 들어와 있다.

홍주성은 홍성읍 한복판, 남산 공원에 쌓은 최장 1772미터에 달하는 성곽이 있었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810미터 규모로 최초의 축성 연도에 대한 명확한 자료는 없으나 고려 시대로 추정된다. 그 후 여러 차례의 보수와 확장 공사를 거쳤다. 성내 35개 동에 이르렀던 관아 건물 중에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조양문(朝陽門)과 22칸의 목조 기와집으로 건축된 홍주목 관아의 동헌인 안회당(安懷堂), 홍주아문(洪州衙門), 여하정(余何亭)뿐이다. 1870년 흥선대원군이 조양문과 홍주아문, 안회당 등의 현판을 사액하였다. 홍주성 유적지는 1972년 사적 제231호로 지정되었다.

 

홍성읍 시가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조양문인데 홍주성을 드나들던 동서남북 4개 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동문이 바로 조양문이다. 당시 홍주군이 관할하던 넓은 지역에서 붙잡혀 온 교우들은 이 문을 통해 홍주성 안으로 들어갔고, 멀쩡하게 걸어 들어갔던 그들은 시체가 되어 성벽 밖으로 던져졌다. 조양문의 왼편으로 골목을 조금 돌아가면 군청이 나오는데 그 입구에 서 있는 것이 홍주아문이다.

 

홍주 목사가 머물던 동헌 안회당. 이곳에서 잡혀온 신자들은 고문과 배교를 강요당했다.

홍주 아문을 돌아 청사 안으로 들어서면 그 안이 바로 순교의 생생한 숨결이 배어 있는 동헌 안회당이 복원되어 있다. 청사 안뜰에 무심하게 서 있는 고목들은 당시 순교자들이 처분만을 기다리며 오랏줄로 꽁꽁 묶여 있던 기둥들이었고 바닥에 깔린 흙 위에는 선조들의 피와 고통이 서려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 지역에서 모진 고통을 당하고 숨을 거둔 선조들이 누구누구이며 얼마나 많은지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관할 지역의 규모와 지리적 위치로 볼 때 많은 순교자가 배출됐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홍성군 내의 문서에는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부분들이 거의 나타나 있지 않아 이에 대한 조사와 정리가 시급하다.

 

교회 순교록에 따르면 홍성의 초기 박해(1791-1801년) 순교자는 8명으로 이 중 원 시장 베드로, 방 프란치스코, 박취 득 라우렌시오, 황일광 시몬 등 4명의 시복시성이 추진되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중기 박해(1812-1839년) 때는 이 여삼 바오로 등 4명이 순교했으며, 이후 1866년부터 1870년대 초까지 계속된 병인박해 때 가장 많은 200명이 순교해 교회 순교 록과 관변 기록 등 기록상 확인된 홍성 순교자는 모두 212명에 달한다. 그러나 순교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무명 순교자들까지 고려하면 실제 순교자는 1000여 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홍주읍성 내에 복원된 감옥. 복자 원시장 베드로는 이곳에서 우물물로 얼려 죽이는 형벌을 받았다.

순교록에 의하면 홍성 순교자는 참수형보다는 교수형이 많았고 생매장된 순교자도 있었다. 많은 순교자가 성 안에서 처형된 후 그 시체는 성 밖으로 내던져졌다. 군청을 나와 왼편으로 약간의 언덕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리 높지 않은 성벽이 나온다. 바로 이 성벽 위에서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오직 천주를 배반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차디찬 시체가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천주교인들에 대한 혹독한 탄압을 일삼았던 흥선 대원군이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에서 승리하고 그해 서울 종로와 전국 각지에 세운 척화비(斥和碑)는 홍성에서도 발견된다. 척화비는 홍성읍에서 차를 타고 서산 방면으로 15분가량 달리면 구항 면사무소 건너편 산자락에 철책이 둘러쳐진 채로 서 있다. 산허리를 돌아 나오는 세찬 세월의 바람에 척화비의 글자들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지만, 당시의 서슬 퍼런 박해의 기억과 굳은 신앙을 아직도 우리에게 되새기게 해 준다.

 

2004년 홍성 본당과 홍성군에 의해 지역 천주교 순교사가 공론화되고 순교성지 발굴이 본격화된 지 4년 만인 2008년 3월, 홍성 본당은 홍성군과 함께 홍주의사총 옆 홍주 순교성지 공원 터에 순교비를 세우고 성역화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홍주읍성의 동문인 조양문.

순교비가 세워진 곳은 홍주읍성 북문 밖을 흐르는 월계천과 조양문 밖을 흐르는 홍성천이 만나는 합수머리 지점으로 1868년 생매장으로 순교한 최법상 베드로, 김조이 루치아, 김조이 마리아, 원 아나타시아 등을 비롯해 박해시대 홍주읍성 안에서 옥사나 교수형으로 순교한 순교자들의 시신이 매장된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이다.

 

순교비 앞면에는 ‘천주교 홍주순교성지’, 뒷면에는 ‘이곳 홍주골은 믿음을 지킨 성지로 충청 최초 순교자가 승천한 곳 이 숭고한 넋은 평화의 빛이 되리라’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아울러 순교비 옆 표지석에는 ‘이곳은 순교의 정신으로 내 나라 내 고장 홍주의 얼을 견고히 하는 거멀못이 될 것임에 삼가 순교자를 현양 하는 마음으로 이 비를 세운다’라고 적혀있다.

 

홍성 본당은 순교비 제막과 하천부지 임대에 관심을 두고 지원을 아끼지 않은 홍성군과 협력해 순교비가 세워진 하천부지 일대를 홍주 순교성지 공원으로 조성하고, 공원에는 십자가의 길을 비롯해 순례객들이 언제든 찾아와 순교자의 삶을 묵상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할 계획을 세웠다. 또한 2011년 6월 18일 40년 넘게 사용한 옛 성당을 헐고 그 자리에 새 성당을 지어 봉헌하며, 새 성당을 원 시장 베드로와 박취득 라우렌시오 등 순교자 212위와 무명 순교자까지 1000여 명이 넘게 순교한 홍주(홍성의 옛 지명)의 교회사적 의미를 살려 홍주 순교자기념성당으로 명명했다.

 

생매장터인 홍성천변으로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다..

홍성군은 장기적인 홍주성 복원사업을 진행하면서 대표적인 순교터였던 홍주 감옥을 2012년 복원했다. 홍주 감옥은 기록으로 확인된 홍주의 순교자 212명 중 가장 많은 113명이 순교한 곳이다. 이곳에서 주로 교수형이 시행됐고, 굶주림과 목마름, 심한 매질로 인한 장독과 전염병, 포졸들의 괴롭힘으로 비참한 옥중생활을 하다가 옥사한 이들도 많았다. 이곳에서 순교한 충청도 최초의 순교자인 복자 원시장 베드로는 3개월에 걸친 매질에도 죽지 않자 우물물을 이용해 얼려 죽이는 형벌을 받았다. 이 우물 또한 복원되었다. 이곳은 또한 프랑스의 첫 번째 선교사였던 성 모방 신부와 두 번째 선교사였던 성 샤스탕 신부가 1839년 기해박해 때 홍주 관아에 자수하여 머물던 곳이고, 성 다블뤼 주교와 그 일행인 성 위앵 신부, 성 오메트르 신부, 성 황석두 루카까지 모두 6명의 성인이 머물렀던 역사적 장소이다.

 

대전교구는 2014년 1월 15일 자로 홍주 순교성지를 전담할 신부를 발령했다. 홍주 순교성지는 우선 감옥 앞의 상가 건물을 일부 임대해 아담한 성당과 사무실을 마련해 매일 11시에 미사를 봉헌하고, 성지 신부와 함께 읍내 전역에 흩어져 있는 6곳의 순교터와 증거터를 순례하고 있다. 2016년 10월 22일에는 홍주 성지의 순교터 중 한 곳인 생매장터에 십자가의 길 14처를 설치하고 축복식을 거행했다. 십자가의 길은 조각가 고영환 토마스 형제가 3년에 걸쳐 순교자의 손을 소재로 제작한 작품이다. 현재 홍주 순교성지는 20평 남짓한 임대 성당이 들어선 건물마저 철거를 앞두고 있어 순례자를 위한 성당 건립이 시급해 관심과 후원을 호소하고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 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 수정 2018년 6월 30일)]

 

생매장터에는 홍주 순교성지비와 야외제대, 십자가의 길 등이 마련되어 있다.홍화문에서 바라본 홍주읍성 모습. 왼쪽에 홍주목 관아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홍주아문이, 오른쪽에 복원된 감옥이 보인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모바일용 요약 설명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내포 지역의 중심이자 군사적 요충지였던 홍성읍 한복판에 자리한 홍주성은 그 전체가 순교의 현장입니다. 구체적 순교터로는 목사가 머물던 동헌, 홍주옥, 진영장이 머물던 조양문 앞, 옛 저잣거리, 월계 천변 참수터, 생매장 터로 사용되었을 곳으로 추정되는 홍성천과 월계천이 만나는 합수머리 부근이 있습니다. 홍성읍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곳이 조양문인데, 홍주성을 드나들던 동서남북 4개 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동문으로 박해 당시 붙잡혀 온 교우들이 이 문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갔다가 시체가 되어 성벽 밖으로 던져졌습니다. 현재 홍주성의 옛 모습 중에서 성벽과 일부 건물이 복원되었고, 원형 복원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순교 록과 관변 기록 등을 통해 확인된 홍성 순교자는 모두 212명에 달합니다. 그러나 무명 순교자를 감안하면 실제 순교자는 1000여 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순교 록에 의하면 홍성 순교자는 참수형보다는 교수형이 많았고 생매장된 순교자도 있었습니다. 2004년 순교성지 발굴이 본격화된 후 2008년 3월 홍성 본당은 홍성군과 함께 순교비를 세웠습니다. 순교비가 세워진 곳은 홍주읍성 북문 밖을 흐르는 월계천과 조양문 밖을 흐르는 홍성천이 만나는 합수머리 지점으로 1868년 생매장으로 순교한 이들을 비롯해 박해시대 홍주읍성 안에서 옥사나 교수형으로 순교한 이들의 시신이 매장된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입니다. 홍성 본당은 홍성군과 협력해 앞으로 순교비가 세워진 하천부지 일대를 홍주 순교성지 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을 세우고, 2011년 6월 새 성당을 지어 봉헌하며 홍주 순교자 기념성당으로 명명했습니다.

대전교구는 2014년 1월 홍주 순교성지를 전담할 신부를 발령했습니다. 홍주 순교성지는 우선 감옥 앞의 상가 건물을 일부 임대해 아담한 성당과 사무실을 마련해 매일 11시에 미사를 봉헌하고, 성지 신부와 함께 읍내 전역에 흩어져 있는 6곳의 순교터와 증거터를 순례하고 있습니다. 2016년 10월 생매장터에 십자가의 길 14처를 설치하고 축복식을 거행했습니다. 현재 홍주 순교성지는 20평 남짓한 임대 성당이 들어선 건물마저 철거를 앞두고 있어 순례자를 위한 성당 건립이 시급해 관심과 후원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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