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토릭 성지

대전교구 > 황무실 성지

문성식 2020. 8. 24. 06:55

대전교구 > 황무실 성지

 
간략설명 박해 중에도 신앙을 꽃피운 내포교회의 중심지
지번주소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 석우리 1013 
전화번호 (041)362-5947 , (041)363-5947
홈페이지 http://cafe.daum.net/3625945
전자메일 shd5947@hanmail.net
관련기관 신합덕 성당    
관련주소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 굴미2길 40

 

순교자현양비.

황무실은 당진시와 예산군의 경계에 위치한 얕은 구릉 지대에 있는 유서 깊은 교우촌으로, 1791년 윤지충 바오로(1759-1791년)의 진산사건으로 촉발된 신해박해 이전부터 1868년 5월 오페르트(E. Oppert)의 남연군묘(南延君墓) 굴총사건으로 촉발되어 내포에서 2천 명에 가까운 신자가 해미 등지에서 순교한 무진박해까지 신앙공동체를 이루었던 곳이다. 또한 신리 교우촌과 더불어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거주하며 사목활동을 한 내포교회의 중심지로 고증되었다.

 

대전교구 초기 공동체 중 하나인 황무실 인근에서 살다 1793년 1월 28일 홍주 옥에서 동사형(凍死刑)으로 순교한 원시장 베드로(1732-1793년), 1799년에 홍주 형장에서 참수 순교한 방 프란치스코(?-1799년)와 박취득 라우렌시오(1769?-1799년) 등은 장렬한 순교를 통해 대전교구 초기 공동체에 영적 영감과 감화를 주었다. 그 후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병인박해(1866년), 무진박해(1868년) 등 내포 전역을 휩쓴 무서운 박해 중에도 황무실 신앙 공동체는 계속 보존되었다.

 

1852년 조선에 잠입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스승인 메스트르(Maistre, 1808-1857년) 신부는 1853년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 페레올(Ferreol) 주교가 선종하고 1856년 새 교구장으로 성 베르뇌(Berneux, 張敬一, 1814-1866) 주교가 입국하기까지 조선교구의 장상직을 맡으며 고아 사업과 배론 신학교를 설립 운영하였다. 조선교구 제4대 교구장 베르뇌 주교의 지시로 충청도 내포 황무실을 중심으로 교우촌을 맡아 사목하던 메스트르 신부는 1857년 12월 20일 과로로 쓰러져 덕산 황무실에 묻혔다. 그의 장례식에는 박해 시대인데도 300명이 넘는 신자들이 모였다고 전해진다.

 

성 베르뇌 주교는 조선 교회를 8개 지역으로 구분하고 그 중 충청도 홍주 지방을 ‘성모 성탄’ 공동체로 지명하여 1857년에 조선교구 부주교로 성성된 성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 주교에게 맡겼다. 당시 홍주(洪州) 지역 교회 공동체의 중심지는 황무실이었다.

 

현재 성지에는 순교자현양비 외에 특별한 시설은 없다.

1861년 조선 입국에 성공한 랑드르(Landre, 洪, 1828-1863년) 신부는 베르뇌 주교로부터 충청도 내포 지방으로 파견되어 한수 이남을 관할하던 다블뤼 주교의 명령에 따라 황무실에 근거지를 두고 전교 활동을 하던 중 1863년 봄 중병을 얻어 9월 16일 35세의 젊은 나이로 황무실에서 선종하여 그곳에 묻혔다.

 

프랑스 랑그르 교구 출신의 성 위앵(Huin, 閔, 1836-1866년) 신부는 1865년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로 백, 김, 서 신부와 함께 조선에 파견되었다. 충청도 내포에 머물며 다블뤼 주교에게 한국말을 배운 뒤 황무실에 부임하여 전교하였다. 1866년 3월 11일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자 자수하여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Aumaitre, 吳, 1837-1866년)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고, 갖은 고문을 겪은 뒤 3월 30일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음으로써 30세의 나이로 이 땅에 신앙의 씨앗을 뿌리고 주님의 품에 안겼다.

 

위앵 신부는 1865년 6월 18일 성체 성혈 대축일까지 신리 성지의 다블뤼 주교와 함께 있었다. 그런 다음 주교가 계신 곳에서 십 리 떨어진 황무실 교우촌으로 갔다. 위앵 신부는 그때의 감동을 이렇게 적었다. “이것이 제 성체거동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유럽에서 당신들의 그 화려한 예절에 참석한 것보다도 더 기뻤습니다.”

 

순교자현양비 뒤에는 신합덕 성당 교우들이 순교자들을 기리고자 이 비를 봉헌했음이 새겨져 있다.

신리 성지는 삽교천과 무한천이 아산만으로 흘러 들어가는 수로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며, 내포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의 생가가 있는 여사울 및 덕산 황무실, 솔뫼 등 초기에 천주교가 전파되었던 곳과 연계하여 위치하고 있다. 충청도 서부 지방의 천주교 신앙 공동체는 수로를 통해 이어졌고, 신리를 중심으로 교세가 확장되어 갔다.

 

1890년 8월 조선교구장 직무대행인 코스트(Coste, 高宜善, 1842-1896년) 신부는 황무실 공동체에서 뻗어 나간 양촌(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 본당을 설립하여 퀴를리에(Curlier, 南一良, 1863-1935년) 신부에게 맡겨 충청도 남쪽과 동쪽을 관할하게 하고, 예산군 간양리에 본당을 설립하여 파스키에(Pasquier, 朱若瑟) 신부에게 맡겨 충청도 북쪽과 서쪽을 관할하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1868년 해미에서 수많은 순교자를 낸 무진박해 이래 22년 만에 2개의 본당을 충청도에 설립하였다.

 

‘황무실’은 달레 교회사나 관변문서에서 소위 ‘덕산’ 또는 ‘홍주’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박해시대에 황무실은 홍주목 덕산현 관할지로 면천군과 범천면(솔뫼)과 인접해 있었다. 사리 때 바닷물이 만수가 되어 삽교천 구만포까지 배가 올라올 수 있을 때는 홍주나 덕산 사람들이 배로 아산만과 서해를 거쳐 한강을 따라 서울 서강까지 왕래했다. 하지만 조금 때 바닷물이 삽교천에 적게 들어오면 홍주나 덕산 사람들이 황무실을 거쳐 현재 삽교천 방조제에 인접한 남원포까지 걸어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서울을 오갔다. 그래서 황무실은 한양 교우들의 소식을 전해 듣기 쉬운 길목이었다.

 

황무실 교우촌은 병인박해로 철저히 파괴되고, 이웃한 면천 출신과 합쳐 70여 명에 이르는 순교자가 탄생했지만, 서서히 역사 속에 묻혔다. 그러다가 신합덕 성당 신자들이 메스트르 신부와 랑드르 신부의 묘소를 찾았고, 1970년 이전까지 합덕 교우들은 솔뫼 성지처럼 황무실을 신앙 선조들의 고향으로 생각해 자주 순례하며 선교사제와 교우들의 묘지를 보살폈다. 1970년 4월 30일 메스트르 신부와 랑드르 신부의 묘를 합덕 성당으로 이장하면서 황무실은 교우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돌보지 않는 순교사적지가 되었다. 지금은 성물(십자고상, 묵주)을 간직한 무명 순교자 또는 신자들의 묘지가 사적지를 지키고 있다. 황무실은 외교인의 가족묘역으로 변해 비신자의 소유지가 되었다. 합덕 성당으로 모셨던 두 선교사제의 묘는 2003년 4월 11일 대전가톨릭대학교 내의 성직자 묘지로 다시 이장되었다.

 

성지 전경.

 

황무실 순교사적지는 2008년 8월 15일 대전교구 청소년대회를 시작하며 실시한 도보 성지순례 출발지 중 하나로 선정되고, 2014년 8월 16일 이곳 출신 이보현 프란치스코(1773-1800년) 순교자의 시복을 계기로 성지로 조성되기 시작했다. 신합덕 본당은 해미에서 순교한 이보현 프란치스코가 살았던 옛 황무실 교우촌 부지를 매입해 4m 높이의 자연석으로 순교자 현양비를 세우고 성지 개발을 본격화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29일 충남 당진 합덕읍 석우리 1013 현지에서 교구장 유흥식 주교 주례로 황무실 성지 및 순교자 현양비 축복 미사를 봉헌했다. [대전교구 홈페이지의 소개글과 관련 신문 기사를 중심으로 편집(최종수정 2018년 7월 10일)]

 

성지 전경.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모바일용 요약 설명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황무실은 당진시와 예산군의 경계에 위치한 얕은 구릉 지대에 있는 유서 깊은 교우촌으로, 1791년 신해박해 이전부터 1868년 무진박해까지 신앙공동체가 존속했던 곳입니다. 또한 신리 교우촌과 더불어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거주하며 사목활동을 한 내포교회의 중심지입니다. 그러나 병인박해로 철저히 교우촌이 파괴되고, 이웃한 면천 출신과 합쳐 70여 명에 이르는 순교자가 탄생했지만, 서서히 역사 속에 묻혔습니다.

그러던 중 신합덕 성당 신자들이 황무실에서 사목하다 선종한 메스트르 신부와 랑드르 신부의 묘소를 찾아 솔뫼 성지처럼 황무실을 선조들의 고향으로 생각해 자주 순례하며 선교사제와 교우들의 묘지를 보살폈습니다. 1970년 4월 30일 메스트르 신부와 랑드르 신부의 묘를 합덕 성당으로 이장하면서 황무실은 교우들의 관심에서 다시 멀어지고 돌보지 않는 순교사적지가 되었습니다.

황무실은 2014년 8월 16일 이곳 출신 이보현 프란치스코 순교자의 시복을 계기로 성지로 조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신합덕 본당은 해미에서 순교한 이보현 프란치스코가 살았던 옛 황무실 교우촌 부지를 매입해 순교자 현양비를 세우고 성지 개발을 본격화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교구장 유흥식 주교 주례로 황무실 성지 및 순교자 현양비 축복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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