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화,산수화

시산 유운홍(詩山 劉運弘)의 작품세계

문성식 2015. 9. 8. 19:39

시산 유운홍(詩山 劉運弘)의 작품세계

 

 

 

시산 유운홍(詩山 劉運弘,1797(정조21)~1859철종10)]

1819년(순조 19) 이수민(李壽民)·이의양(李義養) 등 여러 화원들과 함께  문조신정후(文祖神貞后) 가례반차도(嘉禮班次圖) 제작에 참여하였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산수인물도이지만, 그밖에 화조와 풍속을 다룬 그림도 남기고 있다. 이들 그림에는 대체로 김홍도(金弘道)의 영향이 가장 두드러져 보이고 있다.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홍(致弘), 호는 시산(詩山). 도화서 화원으로 첨추(僉樞)를 지냈다.
1819년(순조 19)이수민(李壽民)·이의양(李義養) 등 여러 화원들과 함께 문조신정후(文祖神貞后) 가례반차도(嘉禮班次圖) 제작에 참여하였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산수인물도이지만, 그밖에 화조와 풍속을 다룬 그림도 남기고 있다.
이들 그림에는 대체로 김홍도(金弘道)의 영향이 가장 두드러져 보이고 있으나, 기녀들의 일상생활의 한 장면을 그린 「기녀도」(서울 개인 소장)에는 신윤복(申潤福)의 화풍도 엿보인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 전반적으로 나타나 있는 변화없는 필선이라든가 무감각한 담채, 단조로운 표정의 인물 등은 19세기 이후 형식화의 길을 걷던 화원화풍의 경향과 상통된다.
유작으로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청산고주도(靑山孤舟圖)」·「월야소선도(月夜小仙圖)」,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부신독서도(負薪讀書圖)」, 개인 소장의 「등고망원도(登高望遠圖)」, 홍익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화조도(花鳥圖)」 등이 있다.

 

 

청산고주도(靑山孤舟), 지본 담채, 24.5 cm X 2.6 cm, 고려대학교 박물관

 

오른쪽 앞쪽에 작은 언덕이 있고 그 위에 몇 그루의 나무가 서있다. 그리고 그 옆으로 넓은 수면이 펼쳐져 있으며 뒤로는 산봉우리들이 이어져 있다. 그림 속에는 돛을 내린 작은 배 한척이 우두커니 앉은 사공 한 사람을 태우고 물가에 매여있는 듯이 보인다.
이 그림처럼 물가를 배경으로 한쪽에 나무가 서 있는 낮은 언덕이 있고 그 뒤로 산이 이어지는 그림 스타일은 예황식(倪黃式) 또는 예황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 타입의 산수화는 19세기 들어 많이 유행했다.
예황식에서 예황이란 예찬과 황공망을 가리키며 즉 이 두 사람의 기법을 합쳐 그렸다는 말이다. 구체적으로는 구도는 예찬 그리고 필법은 황공망을 따랐다는 것이다.
 
원나라 말기의 문인화가였던 예찬(倪瓚, 1301-1371)은 산수화를 그릴 때 앞쪽의 얕은 언덕에 나무 몇 그루를 배치하고 그리고 중간에 넓은 수면을 놓아둔 뒤 다시 그 뒤쪽으로 먼 산을 배치하는 구도법을 주로 썼다. 이런 구도는 좁고 긴 화면에서도 깊이를 느끼게 해주는 구도로 이후 많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황공망(黃公望, 1269-1354)은 예찬보다 조금 앞섰지만 역시 원나라 말기의 문인화가이다. 황공망의 필법이란 그가 주로 구사한 피마준법을 가리킨다. 피마준에 대해서는 앞서 설명한 바가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예황법이 19세기에 널리 유행한 데에는 중국에서 수입된 남종화의 확산과도 관련이 깊다. 즉 18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전래된 남종화는 19세기가 되면 상하를 가리지 않고 유행했다.
 
이 무렵에는 문인 사대부, 즉 양반들도 그림을 그리고 감상할 줄 아는 것이 중요한 교양의 하나로 손꼽혔다. 따라서 그리기 쉬운 피마준법이나 비교적 간단한 구도의 이 예찬식 구도법이 애용된 것이다.
어쨌든 유운홍은 당시 유행하던 예황식 스타일의 산수 한 폭을 그리고 그 위쪽에 ‘청산만리일고주(靑山萬里一孤舟)’라고 적었다. 뜻은 ‘만리나 멀리 보이는 산은 푸르른데 물가에는 외로운 배 한 척이 매여 있다’는 정도일 것이다.
실제 그림 속에는 시산(詩山)이란 호 아래쪽에 먼 곳의 산이 희미하게 그려져 있다. 그림만 봐서는 조선시대 문인산수화에 흔히 나오는 쓸쓸한 풍경 또는 산 좋고 물 좋은 곳을 찾아가 은거하려는 심정을 대변하는 그림이라고 해석하기 십상이다.
그런데 그림에 적혀 있는 시구의 원시(原詩)를 읽게 되면 그림에 담긴 뜻이 전혀 달라진다. 이 시는 당나라 때의 시인 유장경이 지은 유명한 칠언절구인 「중송배랑중폄길주(重送裵郞中貶吉州)」의 마지막 행(結句)을 적은 것이다.
 
‘중송배랑중폄길주’는 ‘배랑중이 길주로 유배 가는 것을 다시 전송하며’이다. ‘중송(重送)’이란 앞서 이미 송별연을 열어 이별의 정을 나누었는데 어찌된 연유인지 재차 다시 송별연에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시는 그렇게 두 번째로 가진 송별의 자리에서 지은 시라는 것이다.
시를 한번 보면 칠언절구의 명수답게 몇 자 되지 않는 글자 속에 당시에서 요구하는 정경(情景)의 융합이 근사하게 녹아있다. 정경이란 감정과 경치를 말하며 정경융합은 주체적인 감정와 객관적인 외부의 형상이 시 속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며 하나로 녹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의 내용은 이렇다.

猿啼客散暮江頭 원제객산모강두
人自傷心水自流 인자상심수자류
同作逐臣君更遠 동작축신군경원
靑山萬里一孤舟 청산만리일고주

원숭이 울음소리 들리는 저녁 강둑 사람들 사라지니
사람을 사람대로 가슴 아프고 물은 저절로 흘러가네
같은 귀양신세지만 그대는 더욱 먼 곳이니
청산 만리를 이 외로운 배로 어찌할꺼나

시인 유장경은 성격이 강직해 아무리 권세가라도 직언을 서슴치 않았던 것으로 유명했다. 그런 만큼 관직에 있으면서 두 번이나 유배를 경험했다고 한다. 낭중(郎中)은 중앙부처의 과장급 정도인데 낭중이었던 배모는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이 시를 지을 때 유장경과 배모는 나란히 ‘쫓겨난 신하(逐臣)’의 처지였던 것 같다.
당나라는 강력한 황제권력 아래 신하들의 권력 부침이 매우 심했다. 툭하면 유배를 당했다. 그러나 이때의 유배는 조선시대의 유배처럼 그로써 정치 생명이 완전히 끝장날 정도로 가혹한 것은 아니었다. 유배를 간다고 해서 중앙 정계에서 완전히 잊혀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면 대개 주변의 도움을 통해 다시 중앙 관직에 컴백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당시(唐詩)에 유배 관련된 시가 많은 것도 이런 이유이며 이런 유배시에서 절박 위급함보다 어느 면에서 약간의 낭만적인 뉘앙스마저 느껴지는 까닭은 이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 시는 나란히 유배를 가게 된 유장경이 자신보다 처지가 더 나쁜 배낭중을 걱정하면서 지은 시이다. 앞부분은 객관적인 경치를 묘사한 것이다. 당시가 회화적이라는 것은 대개 시속에 이렇게 경(景)이 묘사돼 있기 때문이다.
 
강둑에 원숭이 울음소리가 들릴 정도면 수도에서 한참 떨어진 한적한 곳까지 이미 와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마저 흩어져 버렸다니 얼마나 적적한 장면인가. 그리고 이어지는 마지막 두 행은 바로 주관적인 감정을 노래한 것이다. ‘그대는 나보다 더욱 먼 곳으로 가야 하는데 저 작은 배로 그 먼 곳까지 어떻게 가시려 하오.’
이 그림을 보면서 만일 시의 이런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면 해석은 아마도 상당히 다른 곳으로 흘렀을 가능성이 다분히 있다. 조선후기 문인들에게는 특별한 취향이 있었다. 즉 쓸쓸하고 적막한 분위기에 스스로 매몰돼 즐기는 경향이다. 이 그림은 첫인상에 그와 같은 즐길만한 쓸쓸한 정경을 그린 그림이 아닌가 하고 여길 만한 여지가 충분한 그림이다.
그렇지만 유장경 시 전체의 내용을 알고 보면 먼 산을 배경으로 그려진 작은 배는 더 불행한 처지에 대한 연민, 동정은 물론 자신을 포함한 유배 길에 대한 막연한 불안, 걱정 등이 뒤엉킨 복잡한 심정을 대변하는 그것이 된다.

시가 있는 그림, 즉 시의도를 감상하는 데에는 이처럼 감상자에게도 어느 정도의 교양을 요구했다. 따라서 조선시대 후기에 유행한 시의도는 당시 교양인들 사이에 지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실험장이자 아울러 고도의 교양 있는 유희물이었던 것이다


  

등고망원도(登高望遠圖)

 

 

 

 


 

베짜기(길쌈),국립중앙박물관

 

 

 

 

 

 

 

 

유운홍(劉運弘), <부신독서도(負薪讀書圖)>, 견본담채, 22 Cm X 16.2 cm,  서울대박물관 소장

 

 


 

부신독서(負薪讀書), 견본담채, 16.1 cm X 22.1 cm,서울대학교 박물관

 

 

등에 짐을 지고 걸어가면서 책을 읽는 한 남자가 있다. 나무를 해서 산길을 내려가는 중인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중국 전한시대 무제 때 인물인 주매신(?-B.C. 109)이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아버지에게 책을 많이 읽어야 뛰어난 인물이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컸다고 하는데, 크게 뛰어난 머리는 아니지만 정말 열심히 책을 읽었나보다.


나무를 해서 팔아 생계를 유지해야만 하니 먹고 살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는 나무를 하면서도 책을 걸어놓고 읽고, 집에 돌아올 때도 등짐을 진 채로 걸으면서 책을 읽었다고 한다.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하고, 늦게 들어오기도 하고... 열심히 나무를 해와도 시원찮을 판에 아내의 입장에서는 책만 읽는 남편이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결국 마누라가 집을 나가고 혼자가 되었다. 이것이 결말이라면 그림에 등장할 만큼 칭송받는 입장은 되지 못했다. 그는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책을 읽어 뛰어난 학식을 갖게 되고 어찌어찌해서 한 무제에게 등용, 출세의 꿈을 이루게 된다.  몇 년 후 고향 태수로 금의환향하고는 옛 부인과 그녀의 새남편을 불러 대접하니 그 부인이 옛날 자신의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낀 나머지 자살을 했다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결말이다.

 

반딧불에도 책을 읽고 눈에 비친 달빛에도 책을 읽지만, 어쩔 수 없이 나뭇짐을 해야 하는 고달픈 삶 중에서도 열심히 책을 읽는 것이 동양의 미덕이었나 본다.  책을 열심히 읽으라는 교훈 외에, 사람마다 다른 교훈을 얻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남들이 뭐라 해도 한 가지를 무식할 정도로 꾸준히 파라는? (남자를 볼 때는 특히)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미래를 내다봐야 한다는?

 

주매신은 그 이후 중앙정부로 돌아가 어떤 이의 죄상을 자세히 파헤쳐 자살하게 하였는데, 이로 인해 오히려 한무제의 분노를 사 죽임을 당하였다. 융통성 없는 성격 때문이었을까.. 그의 인생은 다소 불행하게 막을 내렸지만, 뭔가를 이루려면 이 정도의 몰입은 필요한 것 같다.

  

* 이 주매신의 고사를 그림으로 옮긴 화가는 조선 후기에 활동한 도화서 화원인 유운홍(劉運弘1797-1859?)입니다. 1819년(순조 19) 다른 여러 화원들과 함께 문조신정후(文祖神貞后) 가례반차도(嘉禮班次圖) 제작에 참여한 바 있다.  <부신독서도>외에 남아 있는 그의 작품으로는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청산고주도 靑山孤舟圖〉·〈월야소선도 月夜小仙圖〉등이 있는데, 전반적으로 19세기 이후 형식화된 화원화풍의 단조로운 경향에다가 김홍도(金弘道)의 영향이 살짝 보인다고 할 수 있겠다.

 

유제조어도(柳題釣魚圖), 지본담채, 22.5 cm X 35.8 cm, 선문대학교 박물관

 

 

우리나라의 낚시가 나오는 그림은 대체로 산수화 중 한 구색으로 등장하고 있어 정적이며, 옛그림의 낚시꾼은 대부분 한 사람이다. 고화 속 낚시꾼은 고사, 은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기 쉽지만, 이 그림에 묘사된 낚시꾼은 두사람의 소년이다. 그리고 산 소년은 막 큼직한 물고기를 거어 올려 손에 잡으려 한다.

산수화이 한 구석이 아니라, 낚시 장면을 묘사한 동적이며 생기와 확기가 있는 드문 옛 그림이다. 한 소년은 고기르를  올리며 즐거워하는 표정이자만, 같이 낚시하는 소년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내겐 입질이 왜 안오지? 약간의질투심에 약이 오르고 속이 탄 것일까? 소년이지만 낚시꾼답다. 그림에등장하느 소년은 분명 우리 바지저고리르 입었다 관념적인 낚시 그림 중에 나오는 중국풍 옷을 입은 낚시꾼과는다른 모습이다  


 

고깃배

 


 

화조도도

 

 


 

 

 

 

기방(妓房), 기녀도, 화첩, 종이에 채색, 23.9 cm X 36.2 cm, 개인소장 

 

 

 

 

유운홍은 화원으로 첨사를 지냈으나, 지금가지 공개된 작품이 별로 없어 크게 주목받지 못한 인물이었다. 그의 자는 치홍(致弘)이고 호는 시산(詩山)이다. 산수, 인물, 화조에 능한 것으로 젼해져 오나 대표작으로 내세울 만한  이렇다 학 그림이 없었는데< 한국미술 5천년전>의 미국 전시를 통해 기녀 한폭이 공개되면서 풍속화로 그의 면모룰 다소 부각 시키게 되었으며 알려진 그림 중에선 그의 대표작으로 다루어지게되엇다.

 

몇점 안되는 그의 그림들은 소폭들로 이를 통해 볼 때 기량이나, 용필, 용묵에 있어 김홍도의 여맥(餘脈)이 보이나, 두드로진 면을 찾기 힘든 화가임을 부인키 힘들다. 기녀는 조선  후기에 크게 유행한 속화(俗畵)에 있어서 신운복이 영향이 간취된다.

 

화면을 꽉 메운 공간 구상으로 , 화면 중앙에 아이를 업고 있는 여인과 긴 담뱃대를 문 여인, 거울 앞에서 탐스로운 긴 머리를 손질하는 여인등 ,  각 여인이 자태가 잘 나타나 있다. 가늘고 고른 필선은 거듭 신윤복의 영향을 느끼게 하며, 세 인물의 자연스러운 자태는 묘사력을 알려준다. 배경이 되는 문짝과 툇마루의 평행을 이룬 선들은 기하학적 문양으로 등장 인물의 무대 구실을 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