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정스님 어록

옛 절터에서

문성식 2015. 7. 19. 12:24

 
      옛 절터에서 산에만 묻혀서 사노라면 별로 꿈이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생활 자체가 단순하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내 침상머리에는 이따금 꾸어지는 꿈이 있다. 꿈이란 따지고 보면 다 허무맹랑한 것이지만, 맑은 꿈을 꾸고 나면 생각도 맑아지고, 언짢은 꿈에는 어두운 그림자 같은 것이 드리워지게 마련이다. 잣나무와 전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숲길을 휘적휘적 걸어가고 있었다. 맑은 시냇물이 바위에 부딪치며 줄기차게 흘러내기는 골짜기를 따라 한참을 올라가니, 저만치 벼랑 위에서 폭포가 시원스럽게 쏟아져 내린다. 가까이 다가서기도 전에 휘날리는 물보라로 얼굴이 차갑게 느껴졌다. 요란한 폭포소리를 뒤에 두고 모퉁이를 돌아섰을 때 훤히 트이는 시야. 푸르고 상서로운 기운이 뻗쳐오르는 덤불 속을 헤치자 바위틈에서 맑은 샘물이 콸콸 솟아오른다. 둘레를 살펴보았다. 풀더미 속에 여기저기 주춧돌이 박혀 있다. 퍼렇게 이끼가 낀 축대가 반쯤 허물어진 채 쌓여있다. 아하. 옛 절터로구나. 갑자기 배 떠난 뒤의 나루처럼 허전한 생각이 스며들었다. 지붕에 잡초를 잔뜩 이고 있는, 곧 허물어질 것 같은 전각이 한 채 눈에 띈다. 비바람에 삭았는지 문종이가 너덜너덜하다.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아당긴다. 곰팡이 냄새가 가득 담긴 법당 안은 단청 빛이 바랠 대로 바래 희미하다. 언뜻 보니 맞은쪽 탖자 위에 오래된 불상인 듯 얼마쯤 금박이 벗겨져 나간 좌불이 한 분 계신다. 불상을 대하자 그 자리레 엎드려 예배를 드렸다. 향과 꽃을 올리는 발길들이 끊어진 빈 절에 부처님만 홀로 계시는구나 싶으니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무수히 예배를 드리면서 ' 고사무거승古寺無居僧'을 되뇌었다. 그러자 홍안에 기골이 는름한 노장님 한 분이 나타나 종을 쳤다. 그 소리에 눈을 떴다. 아랫절에서 울려오는 새벽 종소리였다. 이것이 지난밤에 내가 꾼 꿈이였다. 꿈치고는너무나 사실적이라 깨고 나서도 꿈인지 생시인지 어리벙벙했다. 나는 이와 비슷한 꿈을 몇 차례인가 꾼 적이 있다. 그때마다 문득문득 옛 절터를 찾아가고 싶은 충동으로 들뜨곤 했다. 지난해 가을. 보조암普照庵터를 찾아갔을 때 축대와 돌층계만 남은 자취를 보고 세월의 덧없음에 감회가 무량했었다. 고려 중엽 최씨 일파의 무단독제가 살기 등등하게 설치던 시절, 보조 국사 지눌은 남으로 내려와 이 암자를 짓고 머물렀다. 그 암자가 이제는 풀더미 속에 빈터만 남은 것이다. 그날 눈이 시리도록 푸르른 하늘 아래 주렁주렁 빨갛게 매달려 있던 고목가지 끝의 감들이 내 기억의 바다에서는 아직도 떨어지지 않고 있다. 지금은 그 이름조차 잊어버리고 말았지만, 어느 해 여름 지리산 자락에서 맑게 고인 셈과 돌담만 남아 있던 옛 암자터를 보았을 때의 적막감과 허무감. 그것은 마치 전쟁이 지나간 뒤 서둘러 찾아간 정든 모교가 잿더미로 화해 버린 것을 보았을 때의 그런 허무감이었다. 그때 그 암자터에 쓸쓸히 피어 있던 달맞이꽃이 이 여름에도 내 기억의 터전에서 피고 있다. 여름이 가면, 나는 오늘 새벽 꿈에 본 절터를 찾아 나설 것이다. 거기 고인 샘물로 오늘의 이 갈증을 달래리라. ㅡ 법정 스님글 중에서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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