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란 무엇인가
불교를 일컬어 자비의 종교, 깨달음의 종교, 성불의 종교 등 각자 개인이 이해하고 있는 지식 안에서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칭은 불교의 어느 한 단면만을 놓고 말한 것에 지나지 않고 부처님의 교설은 매우 광대무변하여 불교에 대해 바로 이것이라고 말하기는 무리이다.
범어로 불교는 붓다 다르마(Buddha - dharam)라고 하는데 이 범어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즉 붓다(Buddha)는 불타(佛陀)를 음역(音譯)하여 줄여서 불(佛)이라 하고, 다르마(dharma)는 의역(意譯)을 하여 법(法)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붓다 다르마를 번역하면 불법(佛法)이 되는 것이다.
이렇듯 불교의 단어는 범어가 음역과 의역으로 번역이 되었기에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처음 전해졌을 때 중국에서는 불교를 가리켜 서역불법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또한 파알리어에서는 불교를 붓다사나(Buddhasana)라고 하고 있는데 이것을 번역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뜻이고 불법은 부처님께서 가르쳐 보인 법이라는 뜻으로 풀이하고 이해하면 무난할 것이다.
즉 불교 또는 불법은 부처님께서 이 세상의 인류를 교화하고 구원하시고자 설하신 법과 교의(敎義)를 통틀어 말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1. 부처님이란?
불교 또는 불법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한다면 그럼 부처님은 무엇을 뜻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부처님은 각자(覺者), 즉 깨친 사람 또는 깨달은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단순하게 깨달은 분이 아니시다.
부처님은 무량한 공덕을 성취하신 분으로 온갖 복덕과 지혜를 다 갖추신 분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부처님을 부를 때 여래 십호(여래, 응공, 정변지,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불, 세존으로 실제는 열한 가지이나 세간해와 무상사 또는 불과 세존을 하나로 보아서 십호라고 통칭한다)라고 하여 열 가지 이름으로 부르는데 이 명호(名號)들을 풀이해보면 부처님이 얼마나 무량한 공덕과 복덕과 지혜를 성취하셨는지 잘 알 수 있다.
여기서 부처님이 깨달으신(成道) 것은 보편타당한 진리를 올바르고 정확하게 보고, 그 보편타당한 진리를 참되고 진실되게 이해하여, 그 보편타당한 진리를 실천적 체험을 통해 자기화 함으로써 자주적이고 자율적인 인격을 완성하신 것이다.
이런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우리는 바로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불교는 깨달은 사람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불교는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들을 이미 깨달은 사람들이 깨닫도록 가르쳐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바른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여 올바르고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하는 종교라는 것을 알았다.
2. 깨달음의 내용은 무엇인가
불교는 깨달은 사람의 가르침이니 그 깨달음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흔히 깨달음을 진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깨달음의 내용은 그렇게 단순하게 몇 마디의 말이나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근본 진리를 깨닫고 또 현상계의 모든 이치를 다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그 깨달음의 내용은 스스로 실천적으로 체험해보지 않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깨달음의 내용에 관한 말로서 아누타라(Anuttara) 삼먁(Samyak) 삼보디(Sambodhi) 라는 말이 있다.
이것을 그대로 번역하면 가장 높다는 뜻을 지닌 무상(無上), 가장 두루하다는 뜻을 지닌 정변(正偏), 가장 바른 깨달음이란 뜻을 지닌 정각(正覺)을 말하고 있는바 그래서 깨달음의 내용은 바로 최정각(最正覺)이라 하기도 하고 일체지(一切智)라고도 하는 것이다.
한편 아함경 등의 경전에서는 “연기를 보는 자는 나를 볼 것이요, 나를 보는 자는 연기를 볼 것이다” “모든 법은 인연을 쫓아서 생하고, 모든 법은 인연을 쫓아서 멸한다”고 하여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법이 연기법이라고 하고 있다.
연기법이라는 것은 이 세상의 일체만류는 모든 것이 인연에 의하여 생성되어진다는 절대적인 진리를 말한다.
연기라는 것은 연하여(Pratitya) 결합해서(Sam) 일어난다(Utpada)는 뜻을 지니고 있는 말로서 이 연기에서는 주체적인 인간과 객체적인 어떤 대상의 사이에 반드시 인과의 법칙이 존재하고, 사물이 생겨나고 없어지는 것은 인연화합(因緣和合)의 법칙이 존재하며, 또 모든 존재와 존재 사이에는 상의상관 법칙이 존재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또한 아함경에 “세상에는 세 가지의 가르침이 있으니 사람이 하는 바는 일체가 다 숙명으로 인하여 지어졌다고 하거나, 일체가 다 신의 지음에 원인한다고 하거나, 모든 것이 인(因)도 없고 연(緣)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법이 바로 연기법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3. 불교는 인연을 소중히 하는 종교
이제 불교에서 인연을 얼마나 소중히 하는가를 알았다 그렇기에 연기(緣起)에 대해서는 좀 더 상세히 알고 있을 필요가 있다.
불교에 있어 부처님의 가르침 중 가장 중요한 핵심은 우리 모두는 누구나 혼자서 살아갈 수 없고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수많은 인연을 맺으며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나라는 자신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많은 인연이 필요한 것이다.
나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부모님이 계셔야 하고 또 그 부모님을 계시게 해준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셔야 한다.
이렇게 거슬러 올라가 보면 나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 있기까지에는 수도 없이 많은 인연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또 나라는 존재가 생명을 유지하며 이 세상에 살아가기 위해서는 물과 공기 등 자연적인 것은 물론 거기서 얻은 곡식과 과일 등과 그 외의 수많은 사람들의 생산 활동에 의해 생산된 제품 등이 필요한 것이다.
이렇듯 다른 존재들과의 인연이 없어서는 나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이 존재의 관계성이 연기인 것인데 이런 연기의 법칙을 화엄경에서는 “인드라 망”으로 비유하고 있다.
“인드라 망”이란 저 하늘 세계에 있는 인드라 신의 그물이 온 우주를 감싸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온 우주를 감싸고 있는 인드라의 그물에는 각각의 그물코마다에 아름다운 구슬이 달려 있는데 그 하나의 구슬에도 다른 모든 구슬의 모습이 비춰지고 있으며 또 하나의 그물코만을 잡아 당겨도 온 우주를 감싸고 있는 그물 전체가 함께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라는 존재 하나에도 우주의 협력과 조화가 집약되어 있다는 것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았다는 진리도 이런 연기에 관한 철저하고 확고한
깨달음이었던 것이다.
경전에서는 이런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을 “이것이 있음으로 해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김으로 해서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음으로 해서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함으로 해서 저것이 멸한다”고 하고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남이 없어도 나가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아니 남을 쓰러뜨리고 꺾어야만 나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나가 쓰러뜨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남은 경쟁 상대가 아니라 남과 조화하고 협력을 하면 더 성숙한 우리로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 나라는 존재는 어떠한가.
수많은 인연을 맺고 있는 나 역시 고정 불변의 실체가 없다.
이것을 무아(無我)라고 한다.
이것은 나는 부모의 입장에는 자식이고, 배우자의 입장에서는 역시 배우자이고, 자녀들의 입장에서는 부모이다.
또한 동물들의 입장에서는 사람이고, 식물들의 입장에서는 동물이다.
이처럼 나는 처한 상황에 따라 수시로 다른 모습으로 비춰질 뿐 어떤 하나의 모습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숱한 관계와 상황과 무관하게 변하지 않는 나가 있다고 여기고 나를 영원히 변하지 않는 나로서 유지하려고 한다.
이것은 나의 참모습을 모르는 무명(無明) 때문에 생겨나는 나에 대한 집착인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했다.
즉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홀로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나에 대한 집착을 끊고 수많은 인연들과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최고의 평안인 열반적정(涅槃賊情)인 것이다.
우리는 태어나 살아가면서 숱한 괴로움에 시달리는데 그것은 바로 나에 대해 끊임없이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집착을 끊을 수 있다면 우리는 행복할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런 집착을 없애는 구체적인 방법을 확실하게 제시하고 있는데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동(正業), 바른 생활(正命),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생각(正念), 바른 수행(正定)의 팔정도(八正道)가 그것이다.
4. 불교는 인간을 중심으로 한 종교
불교를 어려운 종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것은 타종교는 단순한 신앙체계를 갖고 있는데 반해서 불교는 매우 다양한 신앙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동양에서는 불교를 종교로 보고 있지만 서양에서는 불교를 종교의 개념으로 보고 있지 않고 철학으로 여기고 있다.
이에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서양의 종교가 신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이기 때문이다.
서양에서 말하는 종교라는 단어인 Reiigion는 “신적인 것과의 교류” “신과의 결합” “신에의 예속” 등의 뜻을 지닌 라틴어인 Relegere나 Religare에서 온 단어이다.
이 단어가 지닌 뜻만으로도 우리는 서양에서의 종교의 개념은 신을 알아 신을 쫓고 신에게 예속되는 완전히 신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체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서양의 종교는 인간이외의 절대자인 유일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신봉하여 선택받아 구원을 얻으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창조신이나 주재신을 부정하며 인간이외의 절대자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 않다.
그 대신 불교에서는 인간 내면에 내재되어 있는 위대한 존재인 불성을 발견하고 번뇌를 정화하여 자유와 해탈을 얻어 인간이 성불하는 종교이다.
불교는 이렇기에 유일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서양에서는 불교를 종교로 보지 않고 철학으로 보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 일단 인간에 의해 인식이 되지 않는 것은 그 존재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그리고 불교의 원시 교리에서 불교의 세계관은 오온설과 12처설인데 여기서 그 주체가 되는 6개의 감관인 육근(六根)은 인간 존재를 나타내고 인식을 나타내는 6개의 대상인 육경(六境)은 자연환경에 해당된다.
여기서 주체인 인간이 지니고 있는 특질은 자유와 능동적인 힘이 있는 의지(Manas)를 말하고 객체의 대상이 지니고 있는 특질은 어떤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있다는 필연적인 속성인 법(Dharma)를 말한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이런 인간의 의지적인 작용을 업(Karma)이라고 하며 이에 대한 대상의 필연적인 반응을 보(Vipaka)라고 한다.
이렇듯 불교에서는 인간의 의지적인 작용인 공업들에 의해 모든 것이 생성되고 파괴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유일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종교에서는 이 세계를 인간이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절대의 신이 생성시키고 유지하고 파괴한다고 한다.
이와 같이 타종교는 모든 것을 유일신에게 의지하고 있지만 불교는 그와는 달리 모든 것을 인간에게 그 중심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점들이 바로 불교가 그 만큼 인간 중심의 종교임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5. 불교는 깨달음을 구하고 자비를 실천하는 종교
불교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자신이 온갖 괴로움을 극복하고 성불(成佛)을 하는 것이다.
서구의 종교나 신앙은 절대자를 믿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불교에서도 믿음을 강조하고 있지만 맹목적인 믿음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또 믿음은 있되 그 믿음에 대한 확실한 이해와 실천이 없으면 소용이 없는데 불교에서는 믿음에 대한 확실한 이해와 실천은 물론 수행하여 증득하는 길을 자세히 제시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4과(四科)라고 하는데 4과는 경전 속에 들어 있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치신 말씀인 교(敎),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 담겨 있는 진리인 리(理),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진리를 실천하는 행(行),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진리를 실천하여 얻은 결과인 과(果)를 말한다.
불교에서도 믿음이 있어야 불법의 세계로 들어 갈 수 있다.
그러나 그저 단순히 믿는 것만으로는 성불에 이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믿더라도 바르게 믿고 바르게 실천하여야만 한다.
바르게 믿고 바르게 실천하기 위해서는 믿음에 대한 확실한 이해가 있어야만 한다.
믿음의 대상이 하늘의 계시라든가 성인의 말이라고 하여 그것이 모두 바른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믿음의 대상이 생겨나면 그 다음에 반드시 그 믿음을 이해하여야 하며 그 다음에는 실천, 즉 수행을 하여야만 한다.
그래야만 맹신적인 믿음이나 미신이 아닌 바른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타종교와 불교의 차이점이다.
즉 타종교나 신앙은 절대자의 선택이나 기도 등에 의해 구원받지만 불교는 믿고 그 믿음을 이해하고 실천하여 깨달음을 성취하는 종교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한편 불교에서의 진리는 신적인 초월성을 의미하거나 형이상학적인 실재로서의 의미를 두지 않고 바른 삶의 길(正道), 크나 큰 진리의 수레(大乘), 또는 해탈의 언덕에 건네주는 행(波羅蜜行)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므로 진리를 깨달았다 하더라도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는 본능이나 혹은 후천적으로 생겨 난 감정이나 번뇌에 쉽사리 없어지지 않고 끊임없이 수행 정진하면 믿는 바의 진리와 같이 인격화가 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성불(成佛) 혹은 성도(成道)나 증도(證道)라고 하는 것이니 이것 역시 불교가 타종교나 신앙과 같이 맹목적인 믿음을 가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체계적인 수행에 의해서 깨달음에 이르는 종교라는 불교가 지닌 또 하나의 특징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앞에서 언급했지만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성불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무작정 성불이라고 하면 이해하기가 힘들 것이다.
여기서 성불이 의미하는 것은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이다.
즉 위로는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보리(菩提)를 구한다, 즉 깨달음을 구한다는 것은 세속적인 번뇌를 끊고 내면적인 인격의 완성을 말하는 것으로 이 깨달음이 있으므로 해서 올바른 신앙행위가 이루어지는 것이며, 끊임없는 수행 정진을 통해 이루어지는 이 깨달음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성취하신 그 깨달음으로서 우리 불자들이 이루어야 할 깨달음인 것이다.
그럼 그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불교에서의 깨달음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여실하게 보는 힘을 말한다.
우리 인간들은 수많은 세속적인 번뇌로 인하여 사물을 바르게 보지 못하여 온갖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세상을 올바르게 보고 올바르게 사는 것이나 중생을 올바르게 인도하는 것도 바로 이 깨달음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니 이 깨달음이 바로 인류를 구원하고 평화와 번영으로 이끄는 것이다.
따라서 이 깨달음은 어떤 학문탐구에 의해 얻게 되는 단순한 지식이나 차별화 된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비추어 보는 참다운 무분별의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며 불교는 이런 깨달음을 성취하는데 그 목표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깨달았다 하더라도 자비가 없는 깨달음은 아무 소용이 없다.
불교에서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은 중생을 위한 것인데 중생을 외면한다면 그것이 아무리 뛰어난 깨달음이라고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즉 깨달음을 바탕으로 하여 중생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것인데 이 자비의 실천이 바로 하화중생인 것이다.
자비(慈悲)의 자(慈)는 그 어원이 우인(友人)에서 발로된 것으로 진실한 우정이나 순수한 친애의 관념을 의미하는 것으로 한마디로 말해 상대에게 어떤 조건이나 보상을 바라지 않고 즐거움을 주는 것을 말한다.
또 자비(慈悲)의 비(悲)는 애련이나 동정의 뜻이 담겨져 있어 다른 사람의 괴로움을 같이 함으로서 괴로움을 소멸시켜주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자비는 어떤 조건을 달거나 보상을 바라지 않고 남에게 이익과 안락을 주고
괴로움을 덜어주는 순수한 인간애를 말하기에 진정한 동체자비(同體慈悲)가 아니고서는 참다운 자비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불교에 있어서 이 깨달음의 완성과 동체자비의 실천은 각기 따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는 성질의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깨달음을 완성하고 그 후에 자비를 실천하면 되는 줄 알고 있지만 이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즉 깨달음의 완성과 자비의 실천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달음의 완성과 자비의 실천을 위해 끊임없이 수행 정진하고 조건도 없고 보상도 바라지 않는 자비를 실천하여야 할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런 깨달음과 자비의 실천은 누구나 할 수 있고 그런 경지에 이르면 부처님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우리는 모두 부처님이 될 수 있는 소질과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것을 불성(佛性)이라고 한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이 불성을 계발하여 부처님이 될 수 있을까.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가장 쉬운 길은 부처님이 되는 길을 직접 보여주신 석가모니 부처님의 삶을 본받는 것이다.
생각과 말과 행동을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한다면 우리도 언젠가는 성불하여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 성제 송명 스님의 불교기초교리서 "아까 묻꼬 또 묻고"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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