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목 중요무형문화재 53호
명 칭 채상장 (彩箱匠)
분 류 공예기술
지정일 1975.01.29
소재지 전남전역
※ 본문설명
채상장(彩箱匠)은 얇게 저민 대나무 껍질을 색색으로 물을 들여 다채로운 기하학적 무늬로 고리 등을 엮는 기능 또는 기능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언제부터 채상장이 있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채상은 고대 이래로 궁중과 귀족계층의 여성가구로서 애용되었고, 귀하게 여겨졌던 고급공예품의 하나였다. 조선 후기에는 양반사대부 뿐만 아니라 서민층에서도 혼수품으로 유행하였으며, 주로 옷·장신구·침선구·귀중품을 담는 용기로 사용되었다.
채상의 제작기술은 대나무 껍질을 균등하게 떠내는 데에서 시작된다. 대나무껍질을 입으로 물어 얇게 떠낸 다음, 떠낸 대나무 껍질을 물에 불린 후 그것을 무릎에 대고 일일이 다듬어 정리한다. 염색을 하고 나서 1∼5가닥씩 엇갈려 가며 엮는다. 모서리와 테두리에 남색이나 검정색 등 바탕무늬와 어울리는 비단으로 감싸면 완성된다. 채상의 무늬는 완자·수복강녕·십자·번개·줄무늬 등 주로 길복(吉福)을 추구하는 길상적인 무늬이다.
채상장은 근대 이후 플라스틱 제품이 범람하면서 단절 위기에 직면하였으나 전통 민속공예로서 그 가치가 높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하게 되었다. 기능보유자로 서한규씨가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 보충설명
죽세품(竹細品)을 짜서 만들 수 있는 기술을 채상장이라 한다.
채상(彩箱)의 역사가 오래이나 어느 때부터 사용되어왔던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서유구(徐有구)의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나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 담양지방의 채상(彩箱) 또는 채상(綵箱)이 국내에 이름 있다고 하여 주목하고 있으므로 죽(竹)의 주생산지인 영호 양남에서 전승되어왔던 죽세공(竹細工) 가운데서도 비단결같이 곱고 보기에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쓰임새가 긴한 죽세공의 한 부문으로 생각된다.
채상은 죽(竹)을 종이처럼 얇고 가늘게 다스려서 거기에 청(靑), 홍(紅) 등 각색 물감으로 염색하여 무늬를 넣어 겉을 짜거나 아니면 겉대와 속대의 색상이 다름을 이용하여 염색을 하지 않고 그대로 짜서 무늬가 은은히 비치게 하는 두 가지 기법이 있다. 이렇듯 정교 미려한 것을 겉으로 하고 속에는 역시 겉보다 굵은 대로 엮은 것을 받쳐서 겉과 속을 부합한 구연부(口緣部)에 넓은 대쪽으로 대테를 두르고 겉테와 안테를 칡이나 소나무뿌리로 잡아매기 위하여 매끼질을 하고 헝겊이나 가죽으로 테를 입혀 이를 동이라 한다. 상자의 모서리인 귀에 종이나 가죽으로 귀를 바르고 나면 완성된다.
채상은 크기를 달리하여 작은 것은 목고(木枯) 칫수로부터 크게는 농(籠)의 구실을 할 만한 것이 있는데 그것을 포개어 세 개일 때는 삼합(三合)이라 부르고 다섯 겹이면 오합(五合)이라고 한다. 오합의 경우 가장 큰 것을 대자라 부르고 차례로 거스름, 보통되자, 해웅이라 일컫는다. 또 겉짝은 속짝보다 커서 겉짝이 속짝 바닥까지 덮이도록 마련하여 작게는 실에서부터 크게는 천이나 옷을 담는 데 쓰이고 값이 고리와 달리 비쌌으므로 부유층에서 많이 쓰였다.
도구로는 등이 두껍고 날이 일직선인 뜨는칼과 날이 곧은 훑는칼 및 두 개의 칼날을 좁게 맞대어 나무토막에 꽂아 놓은 조름칼과 조름 썰 때 대올을 누르는 누짐대가 갖추어져야 한다. 이밖에 대를 훑을 때 무릎에 대는 쇠가죽인 물갓이 있고 그것을 올려놓는 헝겊 방석과 대테를 맬 때 쓰일 송곳, 물대칼, 더벅이 있다.
공정은 통대를 1∼2m 길이로 잘라 3mm 정도의 너비로 쪼개어 표피와 내피를 가르는 겉목뜨기를 하고 물을 들이고 상자를 절고 꾸미는 순으로 이루어진다. 죽을 종이처럼 엷게 가다듬는 일과 그것을 비단결처럼 저며 줄무늬를 비롯하여 네모방울무늬, 방울십자무늬, 완자난간무늬, 완자발무늬, 도트마리무늬, 수복강녕 등의 여러 기본무늬에 그 변형까지를 곁들인 수십 종의 무늬를 적절히 포치하는 데는 오랜 숙련을 필요로 한다. 채상은 본래 대올뜨기와 절기를 각기 맡아서 하는 분업으로 이루어졌다.
1930. 7. 28. ~ | 보유자 인정: 1987년 1월 5일
이 병신아 이 병신아 / 뭣 하고 살았노
- ‘죽세공(竹細工) 노래’, 박재삼 시인
내 눈에 금(金)빛 열매 열리는 / 매미 운다.
햇빛과 바람을 친하였던 / 천 갈래 만 갈래의
댓살을 다스리어 / 먼 강물은 들판을 도는가
청춘은 다 가고 빈 바구니를
내 천치나 네 천치나 / 별 수 없는 캄캄한 숲을 헤쳐
매미가 손 끝에 와선 / 내 울음을 운다.
한국 전통 죽세공품의 정수, 채상
대를 이용하여 만든 제품은 매우 다양하다. 통대를 그대로 사용하기도 하고 쪼갠 대를 이용하기도 하며, 죽순껍질이나 뿌리로 만들기도 하고, 대오리를 만들어 짜기도 한다. 그 중에서도 채상, 삿갓, 반짇고리, 바디, 세렴(細簾) 등과 같이 대를 재료로 하여 정교하게 가공한 제품을 죽세공예품이라고 한다.죽세공예품 중에서 가장 정교한 세공을 요하는 것이 채상이다. 채상은 대를 가늘게 오린 대오리에 색색의 물을 들여 세올뜨기로 여러 가지 무늬를 수놓 듯 만든 고리의 일종으로 우리나라 죽세공예품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채상장(彩箱匠)은 얇게 저민 대나무 껍질을 색색으로 물들여 기하학적 무늬로 고리 등을 엮는 기능을 가진 장인을 말한다. 언제부터 채상장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채상은 고대 이래로 궁중과 귀족계층의 여성이 즐겨 사용하던 공예품의 하나였다. 조선 후기에는 양반사대부뿐만 아니라 서민층에서도 혼수품의 하나로 유행하였으며 주로 옷, 장신구, 침선구를 담아두는 용기로 사용되었다. 채상에 관련된 최초의 문헌기록은 빙허각 이씨가 지은 [규합총서]에서 볼 수 있다. 순조 9년(1809)에 저술된 이 책에는 팔도의 명품을 적고 있는데 담양의 소산(所産)으로 죽순 및 세대삿갓과 함께 채죽상자(彩竹箱子)가 유명하다고 적고 있다. 이외에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서도 발견된다. 임금님이 승하했을 때 봉물(封物)을 담아 보내는 데에 채상을 사용하였고, 좋은 채상을 진상한 대가로 나라에서 참봉, 봉사 등의 벼슬까지 내렸다는 이야기는 채상의 고급스러운 가치를 말해준다. 통풍이 잘되고 습기나 곰팡이가 생기지 않아 오래 담아 두어도 냄새가 배이지 않는 특성으로 인해 민간에서도 대개 폐백이나 혼수 등 귀한 물건을 담는 용도로 사용해 왔다.
채상은 1970년대 중반부터 플라스틱 제품이 범람하면서 다른 죽제품과 더불어 수요가 줄어들었다. 1930년대 10여호가 채상일에 종사하였는데 1975년 이후로는 단 1호만이 작업을 계승하고 있었다. 이러한 기술이 단절될 위기에 처하자 정부에서는 채상장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김동련 선생을 초대 기능보유자로 인정하게 되었다. 뒤를 이어 1987년 서한규 선생이 그 맥을 이어 중요무형문화재로 인정받게 되었다. 채상은 죽세공예의 정수로 고도의 숙련된 기술과 예술적 감각이 결합된 제품이다. 그래서 죽세공에 정통하고 많은 경험이 축적된 후에야 제작이 가능하다. 대나무에 염색을 하여 상자를 짜는 채상은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공예기술이기에 경쟁력을 가진 공예품이라고 할 수 있다.
채상의 의미와 분류
채상은 [규합총서]에 나타나 있는 단어 ‘채죽상자(彩竹箱子)’의 준말이다. 채상은 대나무를 종잇장처럼 얇고 가늘게 쪼개서 꽃자주, 노랑, 녹색 등으로 염색을 하여 무늬를 놓아가며 짠 고리의 일종이다. 또 다른 이름으로 채협(彩篋)이라고 표현되기도 하는데 옷고리나 반짇고리처럼 기물을 담는 상자라는 뜻이며, 토합[套盒:투합]이라고 표현되는 것은 3개 또는 5개로 한 벌을 갖추어왔음에 기인한다. 채상은 상자이지만 염색을 한 대오리로 짠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상자를 짤 때는 대나무의 피죽이 이용되는데, 이 피죽에 염색을 하면 색깔이 있는 채죽(彩竹)이 된다. 여러 색깔로 물들인 채죽으로 문양을 놓아가며 상자를 짠 것이 채상이다. 채죽으로는 상자만 짠 것은 아니고 반짇고리, 베개, 부채 등도 만들었다.
· 소상과 채상: 소상이란 흔히 ‘피죽상자(皮竹箱子)라 불리는 것으로 채상과 짜는 기법은 똑같지만 단지 염색을 하지 않는 대오리로 짠 상자를 말한다. 채상은 소상에 아름다운 옷을 입힌 것으로 표현할 수 있다. 즉 소상은 채상의 모체인 셈이다.
· 합(合)상자: 채상은 간혹 상자 한 개로 마감하는 제품을 만들기도 하지만 대체로 3·5·7개가 한 벌로 만들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이처럼 크기가 조금씩 다른 몇 개의 상자가 일습을 이루며, 그것을 세는 단위가 합(合)이다. 채상으로 가장 많이 짜여지고 보급되었던 것이 삼합이기에 채상이란 이름 대신 ‘삼합’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채상의 형태와 부분 명칭
채상은 겉상자와 속상자의 2중 구조로 되어 있다. 얇고 가는 대오리로 짠 겉상자는 매우 여리고 부드러워서 상하기 쉽기 때문에 튼튼한 속상자를 덧대어 탄력과 강도를 유지해 준다. 그러므로 채상은 장식성을 나타내는 겉상자와 실용성을 확보해 주는 속상자를 따로따로 짜 서로 이어서 만든 형태로 2개의 상자가 포개어져 하나의 제품이 완성된다.
채상을 이루는 구조는 일곱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1) 겉상자: 채상의 겉에 보이는 상자로 염색된 대오리로 여러 가지 문양을 넣어 짠다.
2) 속상자: 채상 안쪽에 받쳐대는 상자로 염색을 하지 않은 굵직한 대오리로 짠다.
3) 테: 겉상자와 속상사즐 결합하는 구연부에 대는 넓은 대쪽이다.
4) 매끼: 겉테와 안테를 잡아맨 끈이다.
5) 동: 테대를 감싸바르는 헝겊이나 가죽이다.
6) 귀: 겉상자의 바닥선과 모서리가 만나는 지점에 감싸 바른 헝겊이다.
7) 청지: 속상자 내면을 바른 종이로 예전에는 청색 한지를 바르다가 옥색 물을 들인 창호지를 발랐으나 지금은 한지를 바른다.
<채상 부분명칭>
비단 꽃 상자에 세월을 담아내는 이 시대 유일한 채상장 기능보유자 서한규 선생
전라남도 담양은 예로부터 좋은 대나무 밭이 형성되었고, 이를 이용해 훌륭한 죽제품을 생산하였던 곳이다. 죽제품 생산지이자 집산지인 담양에서 자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죽세공품 제작기술을 익혔듯이 서한규 선생 또한 그렇게 죽세공품 제작기술을 익히게 되었고, 그 기술을 바탕으로 죽세공품의 최고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채상을 제작, 전승하고 있다. 일죽(一竹) 서한규(徐漢圭) 선생은 1930년 7월 28일 전남 담양읍 만성리에서 아버지 서원경 선생과 어머니 박판례 여사 사이에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졸업 후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집안 일을 돕기 시작하였는데 선생이 살던 마을은 100여 가구 중 70여 가구가 농사를 지으면서 죽물을 만들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죽세공을 배울 수 있었다.서한규 선생의 부친도 합죽선을 제작하였으나, 장남인 형님을 가르치기 위해 대전으로 떠나 목물장사를 하였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죽세공 제작기술을 배운 것은 아니었다. 시골 농가의 차남으로 태어나 교육의 기회가 장남에게 주어지고, 차남이었던 선생이 자연스럽게 고향에 남아 집안을 돌보게 된 것이다.
해방 직후 16세부터 생계를 위해 본격적으로 죽제품을 만드는 일을 시작하였는데 이때 주로 제작한 것은 죽석(竹席), 삿갓, 부채였다. 그러나 곧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군에 입대하였고 전쟁 중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1952년에 의병제대 후 고향에 돌아왔으나, 그나마 있던 농토도 형님 학비로 팔아 더 이상 생활 기반이 없어 다시 대나무를 잡아야 했다고 한다. 1956년 어머니께서도 돌아가시고 다음해 선생은 한 마을에 사는 이의 소개로 결혼을 하여 딸만 일곱을 낳았는데, 그 중 둘째 딸인 서신정 선생이 현재 선생의 뒤를 이어 채상 제작기술을 전수받아 전수교육조교로 활동하고 있다. 생활고로 한때 대나무를 손에서 놓으려고 마음먹고 담양을 뜰 결심을 하였으나 1963년 담양에 죽세공품을 주문 제작하여 해외로 수출하는 유창공예사가 설립되었는데 제작기술이 뛰어난 기술자가 필요하였고 적임자로 서한규 선생이 지목되었다. 이로 인해 다시 담양에 남아 죽세공품을 만들게 되었다.
1978년 제품에 문제가 생겨 공장이 폐쇄되고 이후 선생은 다시 집에서 죽제품을 만드는 작업을 이어 갔다. 이때 집안에 전해 내려오던 외할머니의 채상을 보고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채상은 외할머니가 17살에 시집 올 때 가져온 것으로, 약 100여년이 넘은 것이었다. 외할머니의 채상을 보고 제대로 만들기까지 여러 번의 실험을 거쳤다. 담양에서 대 다루는 솜씨로 꼽히는 선생도 똑같이 만들기까지는 여러 번의 시도와 실패과정을 거듭하였다고 한다. 다수의 공모전 수상으로 선생의 대나무 다루는 기술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결국 198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3호 채상장 기능보유자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선생은 채상장으로 지정되기 이전부터 이미 대나무를 다루는 뛰어난 기술로 1986년 미국 워싱턴 링컨 기념관 초청 시연에 참가하였고, 채상장으로 지정된 이후는 1988년 일본 오사카에 초청시연을 비롯하여 국립민속박물관 시연 등을 통해 국내외에 한국 죽제품 공예 기술을 알리는 데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대나무의 강직함을 이겨온 선생의 손에는 60여년간 단단하게 굳어진 공이가 여럿 박혀 있다. 선생은 아직도 채상은 죽물로서 가장 섬세하고 최고라 자부하기에 죽전(竹田)에서 대를 구입하지 않고, 직접 황토밭에서 자란 좋은 대나무를 골라서 재료를 구한다. 또한 딸인 서신정 선생은 채상의 고증에도 힘쓸 뿐 아니라 현대생활에 맞는 작품도 시도하는 한편, 배우고자 하는 이들에게 전수활동을 통하여 채상의 현대화와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주요작품
삼합소죽상자소36×20×14, 중36×20×14, 대48×30×18cm
채상은 대, 버드나무, 갈대, 왕골 등을 염색하여 만든 상자로 채협(彩篋)아라고도 한다. 대올이나 버드나무 등을 엮어 만든 생활용품 중 가장 고급품이다. 대나무 올을 염색하지 않고 제작한 것을 소죽상자라고 하는데 이 작품은 안쪽에 한지를 붙이지 않고 겉과 안 모두 대올로 제작하여 통풍이 잘되게끔 하였다.
죽침37×9cm
채상기법으로 만든 베개이다.
제작도구
제작도구들
대톱: 대밭에서 대나무를 자르는 톱
대낫: 자른 대의 가지를 후리는 낫으로 등이 두껍고 무겁다.
대오리자: 시누대에 눈금을 표시하여 제작할 상자에 따른 대오리의길이를 재는 자.
수조: 마른 대를 담가 불리는데 사용한다.
대 자르는 톱: 만들고자 하는 상자의 크기에 맞게 대를 자르는데 사용한다.
대 쪼개는 칼: 마디의 볼록한 부분을 깎아 내거나, 대를 적당한 너비로 쪼개는데 사용한다.
조름판: 조름틀이라고도 하며, 댓가지를 똑같은 너비로 빼내는 기구이다.
누름대: 조름을 뺄 때 댓가지가 상하좌우로 움직이는 것을 막기 위해 누르는 대로 시누대를 잘라 만든다.
골무: 조름을 뺄 때나 훑을 때 손가락을 보호하기 위해 끼우는 골무
이외에도 대오리 뜨기와 대오리 훑기, 염색, 채상짜기 등에 다양한 도구가 사용된다.
제작과정
좋은 채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질 좋은 왕대가 필요하다. 그래야 겉대와 속대를 모두 쓸 수 있다. 서한규 선생은 담양에서 나는 3~4년생 겨울 대나무를 고집한다. 그 시기에 나는 대나무는 수분이 적어 병균이 없고 단단하다. 여름에는 대나무가 무르고 곰팡이가 피기 쉬워 사용하지 않는다. 채취한 대나무는 물에 불려 부드럽게 만든 후 서너 조각으로 쪼갠다. 쪼갠 대는 다시 겉대와 속대로 분리한 다음 0.5cm정도로 쪼갠다. 쪼갠 대는 일일이 손으로 잡아 조름판에 통과시켜 조름 썰기를 한다. 저민 대오리는 입으로 물고 겉껍질과 속껍질을 갈라낸다. 폭이 고른 대오리는 천연염료를 사용해 염색한다. 물을 들이는 방법은 솥에 물과 쳔연염료를 섞어 끓인 다음 대오리를 다발로 묶어 담갔다 뺀다. 채상 짜기에 사용되는 문양은 태극문양, 만자(卍字)문, 격자(格子)문 등 기하학적인 모양과 수(壽), 복(福) 등이 있다. 속대로 정성스럽게 겉 상자를 만들고 나면 그 안에 겉대로 엮은 속 상자를 넣고, 테를 둘러 고정시킨다. 속 상자 안은 깨끗하게 종이를 바른다. 또 겉 상자의 귀모퉁이가 바스러지지 않게 귀에는 비단을 두른다. 채상 제작은 시간과 공이 많이 들기 때문에 두 명이 협동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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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오리제작_대통 끝 자르기 2 조름빼기 3 대오리 뜨기 4 염색하기 5 겉상자 짜기_바닥짜기 6 테대선에 맞추어 접기 |
-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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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 출생
- 1977년 제2회 인간문화재 공예전 특별상, 장려상
- 1979년 제7회 인간문화재 공예전 장려상
- 1979년 전남 관광민예품경진대회 우수상
- 1981년 담양군민의 날 죽공예전 금상
- 1982년 제7회 전승공예대전 대통령상
- 1985년 미국 워싱턴 링컨 기념관 초청 시연
- 198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3호 채상장 기능보유자 인정
- 1988년 한일 친선 대한민국통합전시회 후쿠오카 초청 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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