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시절

그 옛날 정겨운 농촌 풍경과 생활

문성식 2011. 8. 4. 09:34

 

◐ 옛날 생각이 나시지요. ◑


 

예전엔 집에서 탈곡을 하였기 때문에 집주위가 엉망이죠~

어릴적 탈곡한 집단을 날랐었죠~소먹이(여물)로사용 하였답니다.

 

 


보리타작 콩타작은 도리깨로 하였지요.
 

콩타작을 하나 봅니다. 잔일들이 많았죠~

바람을 일으키는 풍로가 있었는데 안보이는 것 보면 60년대 이전인가 봅니다.



 

 

 

전형적인 초가마을

마을 주변에 버드나무들이 많았어요~



 

여유있는 가족들의 모습..(사립문 밖에서)


손으로 하루종일 모내기 하고나면 눈이 퉁퉁 붓지요.

경상도말로 논도가리가 크네요~ 모내기하는 사람이 많아서 다행입니다.


예전에는 천수답이 많았죠~

이맘때면 초벌 논매기 하였죠~ 손톱이 없으면 힘이들죠..



동네 아이들의 모습..

여름이면 매미잡고 구슬치기하고 놀았는데..


먼~ 시장길(신작로) 산중시골이라 오리나 십리길을 가야 한답니다.

 

당시 까만 비누도 많았는데..


 

풀베기 운동(퇴비용)ㅡ4H 구락부기도 보이네요 

 

 

 

새마을 모자를 보니 생각이 나네요~

예전에 성남에 새마을 연수원 교육도 받았는데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어요~

 

남녀노소 불문하고 산과 들에서 풀을 베어 지게에 지고 새마을기를 든

마을 이장이나 작업 반장의 뒤를 따라 긴 행렬을 이루며

집합장소로 이동하던 그때...높은 분들이 지나가면

잘 보이도록 도로 옆 가장자리에 산더미처럼 최대한 높게 쌓아

실적에 따라 마을별로 시상도 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초가집 이을때 이엉과 용마루를 엮고 있네요~

초가지붕 이을때면 굼벵이들이 정말 많았죠~

그땐 징그러워 먹지도 못햇는데..요즘에는 고단백으로 당뇨에 좋다죠..

 

 

내년에 심을 씨앗들 처마에 매달아 보관하였죠~

 

도리깨로 콩타작 하는 모습

 

 

 

당시 농촌에는 잔일들이 항시 많았지요.

 

 

노오란 옥수수가 먹음직 스럽네요~

 

 

감나무 사이로 벼 탈곡하는 모습..

 

 

등목이라하여 예전에 많이들 하였죠~

</ㅁ>

 

 

집집마다 장독대가 있었죠~

 

 

예전의 부엌모습(경상도에서는 정지라 하였죠)

 

 

부지간 맷돌에 메밀을 갈고 다정하게 보입니다.

 

 

짚신을 만들어 장날에 나가 팔기도 하고.

 

 

소는 재산목록 1호에 소가 없으면 농사를 못지었지요~

쟁기질 보기보담 어렵죠~

 

 


 

 


가을걷이에 새참을 나르고 있나봅니다.(막걸리에 국수..)

배가 고프면 허리가 더 아팠어요~ 어찌나 기둘렸는지..

  

 

 

   옛날의 시골 풍경

 

직접 맛을 봤다 그냥 말을 듣고 알 수 없는 일

그래서 그자리에서 맛을 봤다

 

 

 

 

장터 

 

옹기전, 어물전, 우시장, 철물전, 장에서 장으로 이장

저장 떠도는 온갖 장돌뱅이에 뜨거운 국물 국밥집,
갓 눈뜬 강아지도 팔러 나왔다.

 

사고 파는 이가 따로 정해진 것도 없었고
아마추어와 프로의 구별도 없었다.

 

은행나무 향기

 

사방의 장사꾼이 모인 장터엔 세상의 모든 것이 모여   하나의 축제가 됐다. 

모두가 주인공이고 각 부문의 감독이었다.

 

한 명의 관객도 없는 역동하는 완벽한 축제의 한마당 그 자체였다.

  

 

맨바닥 장터는 원시적 거래장소다. 

땅 바닥에 물건을 놓고 엉덩이를 붙이면 그만이었다. 

그런 노점이 장터가 되고 장날이 생겼다  

장터 국밥집에서는 주인과 손님, 초면과 구면을 불문하고 

거래와 별개로 자리를 털고 일어설 때까지
이런 저런 대화가 이어졌다.

 

 

 

거래

거래 처음에는 물러설 줄 모르는 듯, 아슬아슬 하지

짐짓한발씩 뒤로 물러서는 듯 거래가 됐다.

"이러면 밑져요." "
그 무슨, 허허허." 그러다가
 
그다지 상관도 없는 사람이 

끼어들면 거래는 또 늦어졌다.

 

 

 

지게꾼

  

입성이 제법 괜찮아 보이는 사람은 중절모를 쓰고 곰방대를 

물고 있지만 남루한 옷차림의 남자는 이것도 저것도 없다. 

 

가난에도 차이가 있었던 것일까?

 

지게꾼은 시장이나 기차역 등에서 손님의 짐을 

  날라주고 품삯을 받았다.

긴 기다림에 비해 얼마 되지 않는 돈이 그의 손에 쥐어졌다.

 

 

 

았다

흰 수건 곱게 쓰고 고추를 다듬는 아낙의 얼굴은 

색 좋은 고추처럼 발그레하다.

   

 

 

 

 

물레방아

 

옛 시골의 물레방아간은 만남의 장소로 제격이었다. 

하교길 아들을 마중 나온 엄마는 물레방아간에서 

 얼굴이 붉어졌다.  

처녀 시절 추억이 한 순간 떠오른다.

 

 

 

그만 가시죠

일년 농사를 장에 팔러 가는 날 
주인 아저씨는 더 실 

것 없냐고 고함을 친다

 

짐이 점점 높아갈수록 소는 불만이 많다 

"아저씨, 그만 출발 하시죠"

 

 

 

사람들은 쌀 미(米)자를 농부의 손이 팔십팔(八八)번

거쳐야 먹을 수 있다고 풀이했다.  

그들에게 농사는 지고지순한 그 무엇이었다. 

 

그 천직에 온 정성을  기울이고 쌀 한 톨도 

 함부로 하는 법이 없었다.

 

 

 

지게가 들려주는 이야기

 

옛날에 너무도 가난해 먹고살기에 급급한 사람이
늙으신 아버지를
산에 버리려고 지게에 태우고는

어린 자식과 함께 산으로 갔다

 

 

아버지를 버린 아들이 돌아서서 집으로 오려는데 

어린 자식이 그 지게를 다시 집으로 갖고 오려고 했다.

 

놀란 아들은 그것을 무엇에 쓰려고 하느냐 묻자 

"나중에 아버지가 늙으면 이 지게로 짊어지고 와야지요"

 

 크게 뉘우친 아들은  

아버지를 다시 집으로 모시고 왔다고 한다.

 

 

 

 

머리 스타일

어른들도 머리 스타일에 꽤 멋을 부렸다. 

상투 틀고 망건 매고 탕건 쓰고 조선시대 벼슬아치가 망건의

덮개로 갓 아래에 받쳐 관, 모양은 앞쪽이 낮고  

뒤쪽은 높아 턱이 졌다. 재료로 말총을 사용했다.

 

 

맞담배질

 

17세기초 조선에 들어온 담배는 임진왜란이 끝난 뒤 급속도로 퍼진다. 

피폐한 삶에 대한 스트레스를 해소할 방법이 없던

백성들은 너도나도 담배를 피웠다.
특히 여성흡연자가 남성흡연자 보다 
더 많았고 궁궐의

상궁들까지 담배를 피웠다.

 

아이·어른 할 것 없이 맞담배를 피우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신하들의 담배 피우는 모습을 광해군이 심하게 꾸짖자

그 이후부터 몰래 피우는 습관이 생겨 흡연 예절이 만들어졌다. 

젊은이는 어른 앞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 

'그때 그시절'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0) 2011.08.07
1965년도 광고자료   (0) 2011.08.07
100 년전 제주의 모습  (0) 2011.08.04
조선왕실과 삶의 모습들  (0) 2011.07.13
우리에겐 이런 시절도 있었습니다  (0) 2011.0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