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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이상하지요? 어느 날 한 친구가 이름을 바꿉니다. 그러자 이제까지 보던 똑같은 얼굴인데도 바뀐 이름 속 그의 얼굴까지 달라 보이는 경험을 아주 이따금 하게 됩니다. 학교를 다니던 교실에서도 경험하고, 아주 가깝게는 인터넷상의 닉네임 변경에서도 그것을 경험합니다.
때로 지명도 그렇게 바뀌기도 하지요. 저는 그 경험을 아주 오래 전에 직접 한 적이 있습니다. 산꾼들은 강원도의 은비령을 잘 아실 겁니다. 백두대간의 한 구간과 연결되어 있는 곳인데, 한계령 꼭대기에서 동쪽으로 500m쯤 내려가다가 오른편으로 다시 필례약수가 있는 인제군 귀둔리로 넘어가는 고갯길 이름이자 그 아래 필례약수가 있는 마을 이름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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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봄의 ‘산 우에 바닷길 ’에서 만난 새순.
- 그 동네가 처음부터 은비령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원래 이름은 필례령인데, 15년 전쯤 제가 그 동네를 무대로 ‘은비령’이라는 소설을 쓴 다음 이제는 아주 지명이 은비령으로 굳어져버렸습니다. 작가인 저로서는 참으로 명예롭고 영광스러운 일이기도 한데, 소설 한 편이 길 이름을 바꾸고 마을 이름을 바꾼 아주 희귀한 예를 저는 그곳에서 일찍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야기하는 바우길 제8구간 ‘산 우에 바닷길’ 역시 그러합니다. 강릉에서 남쪽으로 8km쯤 아래 안인이라는 마을이 있고, 이곳에서부터 정동진역까지 산길을 따라가는 가벼운 등산로이자 트레킹 코스가 바로 ‘산 우에 바닷길’입니다. 애초에 불리기는, 그리고 지금도 많은 등산지도에 ‘안보체험등산로’라고 적혀 있습니다.
1996년 어느 여름밤 이곳 안인바닷가에 북한의 잠수정 한 척이 침투해 들어오다가 암초에 좌초되었습니다. 북한 무장군인은 잠수정을 버리고 도주하기 시작했고, 이들을 추격해 생포하거나 사살하는 군작전이 늦가을 서리가 내리고 큰산에 첫눈이 내릴 때까지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해가 지난 다음 강릉시청 산악회에서 안인진과 정동진지역 관광과 연계해 이때 북한 무장군인들이 도주한 길을 따라 등산로를 만들고 ‘안보체험등산로’라고 이름을 붙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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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왼)파도소리가 바닷가보다 더 크게 들리는 ‘산 우에 바닷길’. / (오른쪽)괘방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
- 멀어지며 올라갈수록 더 크게 들리는 파도소리
1970년대나 1980년대 같으면 제가 감히 이 등산로에 ‘산 우에 바닷길’이라는 다른 이름을 붙이지 못했을 겁니다. 아마 그 시절 그랬다가는 그곳이 어딘지도 모를 곳에 끌려가 곤욕을 치르며 사상검증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어쨌거나 저는 이태 전 이기호 국장과 함께 바우길 탐사작업에 나서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이 ‘안보체험등산로’를 걸어본 적이 없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은사님께서 정동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부임해 계실 동안 초등학교 동창들이 선생님과 함께 저녁시간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다시 선생님을 모시고 이 등산로를 걸을 때에도 혼자 뒤로 빠져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등산로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러니 그 길을 걷는 것도 왠지 심드렁했던 것입니다.
그러다 바우길을 탐사할 때 안인바닷가에서 정동진으로 나가는 숲길은 오직 이 한 길뿐이라는 얘기를 듣고 함께 이 길에 올랐습니다. 불과 100m쯤 올랐을까, 정말 깜짝 놀랄 만한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파도소리였습니다. 바다 가까이 붙어 있는 안인삼거리 등산로 입구에서는 철썩철썩 바위에 부딪쳐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와 흰 포말은 마치 그것이 옷에 튈 듯 가까이 보이는데, 파도소리는 그다지 크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길을 100m쯤 오르자 뒤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이름을 부르고 귀를 잡아당기듯 파도소리가 바다 옆보다 더 가까이, 그것도 마치 대자연의 오케스트라처럼 너무도 웅장하게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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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봄의 ‘산 우에 바닷길 ’에서 만난 새순.
- 이 뜻밖의 경험은 이 길을 끝까지 걷는 내내 이어졌습니다. 산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바다가 더 가까이 느껴지고, 파도소리가 더 웅장하게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눈 아래로 보이는 바다가 마치 우리가 걷는 산 위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바다의 위치는 눈 아래 있는데 또 그것은 우리가 걸어야 할 산 위에 하늘과 함께 걸터앉아 있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아마 그때가 모든 활엽수들의 잎이 떨어진 깊은 가을이어서 더욱 그랬을 겁니다. 산 위에서 숨박꼭질하듯 바다를 보며 걷는 길, 길이 너무도 아름다워 처음 그곳을 걷는 내게 ‘안보체험’이라는 말은 도무지 들어올 틈이 없었습니다. 산 아래로 그때 북한 무장군인들이 타고 온 잠수정과 또 그 옆에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퇴역한 군함이 내려다보이는데도, 또 그것들을 배경으로 안보공원과 안보체험시설들이 한눈에 들어오는데도 그것까지도 산 위에서 바라보는 바다의 풍광이 모두 감싸 안아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얼마간은 조금 오르막길이라 숨이 턱밑으로 차오르는데도 눈은 자꾸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고 왼편 바다로만 향하는 것입니다. 이제 더 높이, 또 멀리 올라와 파도소리가 안 들리는 곳쯤 오게 되자 이번엔 바다의 전경 전체가 우리의 두 눈을 압도해 들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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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왼쪽)잎이 무성해지면 바다가 잘 보이지 않으므로 산 우에 바닷길은 늦가을부터 봄까지가 제격이다. / (오른쪽) 산 우에 바닷길의 종착점은 그 유명한 정동진이다.
- 파도에 이랑이 있다는 것은 모두 잘 아실 겁니다. 한 번의 파도가 오면 곧이어 그 다음 파도가 오고, 또 오고 하는데 그게 산 위에서 바다 전경 전체로 바라보면 마치 바람에 물결치는 푸른 보리밭의 이랑처럼 보입니다. 뭍으로 한없이 밀려오는 파도의 너울들이 푸른 밭고랑같이 보이는 것이죠. 그것은 그냥 높은 곳에 오른다고 다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파도의 이랑을, 푸른 보리밭의 밭고랑을 옆으로 바라볼 때, 또 그것이 바람에 물결칠 때 너울처럼 푸른 이랑이 보이는데, 이곳 ‘산 우에 바닷길’ 곳곳에서 우리는 그런 바다의 이랑을 봅니다.
곳곳에서 바다의 수많은 이랑 보이는 길
걷다보면 ‘활공장’이라는, 바다가 가장 잘 보이면서 확 트인 넓은 전망대가 나옵니다. 행글라이더가 바다를 향해 공중에서 붕 뜰 수 있게 저만치에서 온힘을 다해 뛰어와 ‘활공’하는 장소입니다. 운 좋으면 행글라이더 활동팀을 만나기도 하지만, 아니어도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바다는 또다른 인상을 당신에게 남길 것입니다.
이 길에서는 이렇게 가십시오, 저렇게 가십시오, 말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입구에 들어서면 끝나는 지점까지 거의 외길입니다. 중간중간 탈출로가 있는데, 그 쓰임새가 이 길을 걷다가 힘들어 탈출할 때 쓰이는 길이라기보다 저 아래 안보공원이나 약수 맑기로 소문난 등명락가사에 놀러왔다가 ‘산 우에 바닷길’과 합류할 때 쓰이는 샛길들입니다.
등명은 안인과 정동진 딱 중간쯤에 위치한 바닷가 마을인데, 정동진이 서울 경복궁에서 볼 때 가장 바른 동쪽에 있는 바다이고, 그중에서도 등명이 정동진 지역에서도 가장 먼저 하루의 빛을 받는 곳입니다. 매일 아침 동해바다에서 떠오르는 해의 빛이 가장 먼저 닿는 자리에 바로 등명락가사의 부처님이 모셔져 있습니다.
- 길은 당집 사거리에서 정동진으로 가는 길과 피래산으로 가는 길로 갈라지는데, 산우에 바닷길은 정동진을 향해서 가고, 3박4일 동안 산 위에서 먹고자고 걷는 ‘울트라 바우길’은 그때의 북한 무장군인들의 도주로를 따라 더 높고 깊은 피래산 쪽으로 향해 갑니다. 걷다보면 정동진이 가까워질수록 발밑의 흙이 검은 곳들이 종종 나옵니다. 그것은 정동진 지역의 산들이 탄전지대라는 뜻입니다. 안인에 화력발전소가 있는 것도 이 지역의 중질탄을 사용하기 위해 세워진 것입니다. 사람들은 정동진을 ‘해뜨는 바닷가’로만 알고 있는데, 사실 이곳은 아주 오래된 탄전지대이고, 바닷가 마을보다는 바다가 가까운 탄광마을로 더 잘 알려진 곳입니다.
다른 바우길이 모두 그렇듯 이 길에도 소나무들이 아주 빽빽합니다. 그런데 다른 지역의 소나무들과 다른 건 양지 쪽 돌산에서 자라 소나무들이 키가 크지 않고, 또 심하게 몸이 뒤틀려 있습니다. 같은 종류의 소나무라도 대관령 깊은 산 쪽으로 들어가면 궁궐의 기둥감이 되고, 이렇게 바닷가 돌산 쪽으로 오게 되면 또다른 모습으로 그곳의 풍광에 맞게 온몸을 뒤틀며 바닷바람을 이겨내며 자라는 것입니다.
전체 길이가 9.3km면 사실 바우길 다른 코스의 절반 거리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점심시간을 포함해 다섯 시간쯤 걸리는 것은 길이 험해서가 아니라, 산 위에 바다와 어우러진 이 길 곳곳의 풍경이 자꾸 발길을 잡기 때문입니다.
이태 전 이기호 국장을 따라 처음 이 길을 걷고 난 다음 저는 이 길을 바우길의 한 구간으로 바로 포함시키며 제일 먼저 한 것이 이 길의 이름을 바꾸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산 위에 바다가 있는 길, 그러니까 강원도 사투리로 ‘산 우에 바닷길’, 왠지 이 길은 그런 이름으로 불러야 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안보체험 등산로’보다는 바우길의 인기에 힘입어 ‘산 우에 바닷길’로 더 많이 불리고 있습니다. 풍광이 이름을 바꾸고, 이름이 길의 느낌을 바꾸어 가는 것이죠.
활엽수의 잎이 무성해지면 산 위에서 바라보는 바다의 풍경이 많이 가려집니다. 그래서 이 길은 늦가을부터 봄 사이에 걷는 게 더욱 제맛입니다. 다 걷고 난 다음 정동진 해변 한번 꼭 밟고 떠나십시오. 틀림없이 다시 오고 싶어질 것입니다.
■ 8구간 정보 산 우에 바닷길 (9.3km 소요시간 약 5시간)
●출발지 안인삼거리(안보등산로 입구)
안인삼거리 - 전망대~삼우봉~활공장 전망대~괘방산 방송탑군~당집~183고지~정동마을~정동진역
교통
■ 자가용·전세버스
●서울 방향 영동 고속도로~동해 고속도로~남강릉 IC~톨게이트에서 약 4.5km 직진 교차로에서 7번국도로 우회전~직진~강동면 사무소에서 좌회전~바우 우회전~안인삼거리 (7번 국도는 구 동해고속도로로서 강동면 사무소 앞에서 좌회전 놓치기 쉬움) 따라서 남강릉 톨게이트~약 4.5km 직진~7번국도 밑으로 통과~농산물 도매시장 지나서 우회전 - 강동면 사무소~안인 삼거리 가 안전함.
●삼척 방향 ① 동해고속도로~남강릉 IC~이하 서울 방향과 동일
② 동해고속도로~옥계 IC~해안도로로 금진~정동~안인삼거리.(해안 경치 드라이브 길)
글 이순원 바우길 탐사단장 | 사진 이기호 바우길 사무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