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흐르고 꽃이 피더라
몇 아름 되는 큰 소나무 가지 위에서
새처럼 보금자리를 마련하여 살던 스님이 있었다.
세상에서는 그를 조과선사(鳥菓禪師)라 불렀다.
그때 까치가 같은 나무의 곁가지에 둥지를 틀고 살았다.
사람과 새가 길이 들어 사이 좋은 친구처럼 지냈던 모양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스님을 작소화상(鵲巢和尙)이라고도 불렀다.
선승(禪僧)들은 될 수 있으면 가진 것 없이
거리낌없이 천진(天眞) 그대로 살고자 하기 때문에,
인간의 도시보다는 자연과 더불어 살기를 좋아한다.
기후가 온화한 지방에서는 바위굴 속에서 지내기도 하고
반석 위에서 살기도 했었다.
석두(石頭)며 암두(岩頭) 같은 선승들의 이름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깊은 산중이라 할지라도 일단 주거(住居)를 시설하여
살림을 차리게 되면 거기 붙잡혀 얽매이기 마련이다.
집착함이 없으면 망상도 일지 않는다.
온갖 고통은 결국 집착에서 오는 것이니까.
또한 선승들이 자연과 더불어 살고자 하는 것은
인공적인 건축물 안에서는
인간의 사유가 위선적이거나 관념적으로 되기 쉬운 반면,
나무나 바위 혹은 물가와 같은 자연 속에서는
사유의 길도 훤출히 트여 우주의 실상(實相) 앞에 마주서게 된다.
인류 사상 위대한 종교의 탄생이
벽돌과 유리로 들러싸인 교실 안에서가 아니라
만물이 공존하고 있는 숲속에서
그 움이 트였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인간의 생활이 갈수록 도시화되고 산업화 되어감에 따라
종교의 기능도 새롭게 요구되고 있는 오늘,
그러나 거기 아랑곳 없이 걸망 하나만을 메고
철 따라 이 산중 저 산중으로 마치 철새들처럼 떠돌아다니며
정진하는 선승들이 아직도 건재하고 있다.
이런 처지에서 보면 선(禪)불교는
다분히 구도(求道)의 종교이지 포교의 종교는 아니다.
사심(邪心)이 없는 무심한 마음은 그러한 마음끼리 서로 통한다.
한 나무에서 새와 사람이 서로 믿고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것도
그 마음에 때가 끼여 있지 않아서이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에게
새들이 날아와 어깨와 팔에 내려 앉는가 하면
서로 말을 주고받을 수 있었던 것도
생명이 지니고 있는 가장 내밀한 면목이 그대로 드러난 소식이다.
사람을 믿고 따르는 선량한 개를 때려잡는 백정이나
그 고기를 즐겨먹는 사람을 보고
동내 개들이 일제히 짖어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쩌면 '우리 개만도 못한 인간들아!' 하고 항변하는지도 모른다.
개는 인간에게 '개대접'을 받고는 있을 망정
자기 종족을 대량으로 학살하거나 잡아먹는 일은 절대로 없다.
까치와 함께 소나무 위에서 살아가던 스님 앞에
어느 날 그 고을을 다스리던 지방장관이 찾아온다.
문헌에는 그 이름을 백거이(白居易)로 기록하고 있다.
당대의 대표적인 시인이기도 한 백낙천.
나무 위에서 내려온 선사를 보고 그가 묻는다.
"불교의 근본 뜻은 무엇인가요?"
"나쁜 짓 하지 말고 착한 일을 행하시오."
고승이라는 소문을 듣고 일부러 멀리서 찾아와 묻는
그에게 이 대답은 너무도 뜻밖이었다.
기대에 어긋났다.
이런 대답이라면 선사의 입을 빌 것도 없이
누구나 알고 있는 평범한 상식에 속한다.
그가 기대했던 것은 보다 심오한 불교의 근본정신이었던 것이다.
그는 내뱉듯이 말한다.
"그런 건 세 살 난 어린애도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때 선사가 엄숙히 대답한다.
"그렇소, 세 살 먹은 어린애도 다 알고는 있지만,
팔십 노인일지라도 행하기는 어렵지요."
이 말에 그는 크게 회심, 정중히 절을 하고 물러갔다고 한다.
알고 있다는 것과 행동 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머리로는 알았을 지라도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공허한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사물의 이치는 일시에 이해할 수 있지만
행동은 반복된 훈련을 통해서 몸에 밸 수 있다.
불타 석가모니의 가르침에는 8만도 넘는 많은 교설이 있는데,
시민을 어질게 다스려야 할 그 지방장관에게는 부정한 짓으로
시민을 괴롭히지 말고 선정(善政)을 행하라는
이 말이야말로 가장 절실한 과제였을 것이다.
걸핏하면 무슨 운동이다.
무슨 개혁이다. 하여 소란을 떨면서
막상 그 자신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운동도 개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세상을 속이는 거나 마찬가지다.
나아가 정직한 정부를 표방하는 눈부신 깃발을
아무도 쳐다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무슨 바람이든지 건전한 것은
조용히 그리고 서서히 자발적으로 불어야 뜻한 바 열매를 거둘 수 있다.
너무 조급하게 요란하게 몰아치면
그야말로 용의 머리에 뱀의 꼬리가 되고 만다는 사실을
우리는 짧은 생애를 통해서나마 생생히 겪어왔다.
종교의 본질만이 아니라
온갖 사회현상의 핵심은 말보다도 살아있는 행동에 있다.
지혜와 사랑과 덕의 실천행.
특히 선불교의 경우 절대적인 진리를 체험했다면
보편적인 현실 세계에까지 그 진리가 확산되어야 한다.
그래야 그게 살아있는 법이요. 진리이지,
일상에 구현되지 않고 혀끝에서만 맴돌고 있다면
그것은 선(禪)도 종교도 될 수가 없다.
선이 단순히 깨달음의 지혜에만 머문다면
그것은 한낱 철학의 영역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에 대비심(大悲心)이 있기 때문에 선은 진짜 종교가 될 수 있다.
출가자나 재가신자를 가릴 것 없이
한국 불교계 여기저기에 자칭 견성했다는 사람들은 많아도
그 영향이 산문(山門) 안이나 자기집 담장 속에서만
통용되고 있다면 그건 대개가 사이비다.
뭘 알았다고 큰소리치는 사람치고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온전한 사람은 없다.
보라. 지금 당장 보라!
우리는 그 사람의 말에 팔릴 게 아니라
행동을 보고 가치판단을 해야 한다.
행동은 더 말할 것도 없이 몸으로 움직임이다.
진짜 선은 혀끝의 놀이가 아니라 신체의 작용이다.
순간순간 천진면목(天眞面目)을
행동으로 발산하면서 마음껏 사는 일이다.
지금 이곳에서 이렇게 살아감이다.
오늘 이 자리의 일에는 관심이 없이 추상적인 관념유희에 도취되어
나팔 부는 종교는 그 어떤 종파를 가릴 것 없이 모두 가짜다.
나쁜 짓 하지 않고 착한 일 행하기가 말은 쉬워도 얼마나 어려운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고마운 다리도 놓여 있지만 또한 어두운 함정도 파져 있다.
제정신 바짝 차리지 않고는,
즉 내 마음을 몸소 다스리지 않고는 어떤 함정에 빠질는지 알 수 없다.
저마다 서 있는 자리를 똑똑히 살펴볼 일이다.
사람이 없는 텅 빈 산에 물이 흐르고 꽃이 피더라.
(空山無人 水流花開).
ㅡ 법정 스님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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