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기원과 본질적 특성
3. 죄의 전이와 결과
3.1. 죄의 전이
벌코프는 원죄(original sin)라고 명명하게 된 이유에 관해 다음 세 가지를 들었다. 원죄는 인류의 원초적인 뿌리로부터 파생된다. 원죄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인간의 생명 안에 현존하는 것으로, 인간이 모방한 결과가 아니다. 원죄는 인간의 삶을 오염시키는 모든 실제적인 죄들의 내적 뿌리가 된다.7) 원죄를 아담이 범한 첫 번째 죄로 오해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원죄’ 대신 ‘유전된 죄’라고 하자는 주장도 있다.8) 원죄가 아담에게서 그 후손에게로 파생되어 나가는 과정은 유전적인 특성을 지닌다. 죄는 영과 함께 유전되므로 본질적으로 죄는 영적이다(롬 7:11). 이를 죄의 전이(轉移)라고 한다.
죄의 유전은 영의 유전과 맥락이 닿아 있다. 죄는 유전한다고 하고 영에 대해서는 창조설이나 선재설을 주장하면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진다. 요한 웨슬리(John Wesley)도 아담이 범죄한 이후 그 영향이 온 인류에게 미쳤다고 말하고, 칼빈(John Calvin)도 원죄를 영혼의 모든 부분에 퍼져 있는 인간 본성의 유전적 부패와 타락이라고 정의했다.9) 그러면서도 칼빈은 부모로부터 육체는 이어져도 영혼은 별도로 창조한다는 견해에 동조한다. 원죄를 생물학적인 유전적 견해로 이해하긴 어렵다는 말이다. 창조설은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무죄를 입증하기에 편하다는 이점이 있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처녀의 몸에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된 신령한 사실을 애써 부인하는 결과가 되어 성령이 하신 일을 인간적 사유(思惟)의 과정으로써 억지로 과학적 증명을 하려 한다는 흔적을 지울 수 없다.
인간의 영혼은 몸과 함께 혈통을 통해 전이된다는 것이 유전설이다. 온 인류를 한 혈통으로 지어 그 영을 유전함으로써 인류의 영이 아담 하나라고 하는 이 유전설은 터툴리안(Tertullianus)에 의해 제시되었다. 실제로 하나님은 오직 한 번 인간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셨고, 그 이후의 종(種)의 전파는 인간에게 일임되었다. 하와의 영혼은 아담의 영혼 안에 포함되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뒤에 창조사역을 중단하셨다는 사실, 아브라함의 후손들도 그 허리에서 났다고 말하고 있는 사실(히 7:5) 등으로 이 학설은 지지를 받는다. 또 무엇보다도 영적 부패와 타락을 초래한 죄의 문제를 설명할 최적의 기초가 된다.10) 결국 유전설로서만 하나님이 인간의 영을 아담이라는 오직 하나의 영만 지으셨다는 말씀(말 2:15)과,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전이되었다)는 말씀(롬 5:12)을 설명할 수 있다.
3.2. 사망과 부패
마귀의 유혹을 받아 먹지 말라 한 계명을 범했기 때문에 ‘네가 정녕 죽으리라’ 하신 경고대로 아담은 하나님과 단절되고 말았다. 이를 성경은 인간이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말한다(엡 2:1). 곧,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으로 살아야 할 존재가 스스로 살 수 있다는 마귀의 유혹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을 떠나 사망 권세자 마귀의 종노릇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불순종하여 하나님과의 사귐이 단절됨으로써 불순종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의무가 발생했다. 이를 벌코프는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 또는 스스로 결단하여 율법을 범한 데 대한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켜야 할 의무’인 원초적 죄책이라고 말한다. 이런 죄책은 개인적이든 대리적이든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키면 그 죄책이 제거된다. 생득적으로는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 하지만 칭의에 의해 죄책이 제거됨으로써 실제로는 처벌을 받지 않아도 된다.11) 인류 계약의 머리로서 아담이 범한 죄에 대한 죄책은 그의 모든 후손에게 전가된다. 이는 죄에 대한 형벌인 죽음이 아담으로부터 그의 모든 후손에게로 전이된다는 사실에서 분명해진다(롬 5:12-19, 엡 2:3, 고전 15:22).
아담은 죽었을 뿐 아니라 죄책도 지니고 있으면서 동시에 아담이라는 영은 전적으로 부패하고 전적으로 무능력하게 되었다. 인간은 아담으로부터 생득적으로 부패를 물려받으며, 이 부패는 인간 성품의 모든 부분 곧 영혼과 육체의 모든 기능과 능력에까지 확대되었다. 아담 안에는 영적으로 선한 것이 더 이상 없고 다만 부패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어떤 영적인 선도 행할 수 없고 근본적으로 죄와 자아를 선호하는 태도를 바꿀 수도 없으며, 거듭나지 않는 한 아무리 작은 행위일지라도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요구에 반응하는 행위를 할 수 없다.
이처럼 부패한 인간 성품에는 죄를 지으려는 본성이 있고, 이를 본죄라 한다. 본죄는 외부로 표출되지는 않으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죄를 지으려는 악한 본성과 죄를 짓고자 하는 소원’을 말한다.12) 또한 그런 본성이 실제 행동으로 드러난 행위를 자범죄라 한다.13) 죄인이기에 죄를 짓고자 하고 마침내 죄를 짓는 것이다.14) 가인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다가 자기 제물이 열납되지 않자 분으로 안색이 변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하셨다(창 4:7). 죄의 소원, 죄에 대한 소욕은 정욕이다. 김기동은 정욕을 음욕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으로 보았다. ‘육체에 속한 정과 욕심’의 바탕은 생육(개체성장)하고 번성(종족확산)하려는 육체의 본능이며, 이는 모든 생명체에게 명하신 하나님의 창조계명에 해당하므로 그 자체는 자연스럽다. 아담의 영이 죽음에 처한 이후 육체의 속성인 정욕만 남게 된 것이다. 정욕은 누구에게나 있고 그것은 정상적이다.15)
하와는 유혹하는 자에 의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욕망을 품었다. 하와에게 들어온 사단적인 생각은 결국 선악과를 먹게 했고, 하와의 죄는 자범죄에 해당한다. 자범죄는 품행으로 저지른 품행죄로, 본죄에서 출발한다. 자범죄는 정욕을 이기지 못한 결과다. 미움이 진하면 살인하게 되고, 음욕이 강해지면 간음하게 된다. 또 욕심이 많아지면 도둑질하게 된다. 어린아이 때는 품행죄가 거의 없으나 나이가 들면서 품행죄를 짓게 된다. 율법은 품행으로 드러난 죄만을 정죄하지만, 예수께서는 마음에 품었던 생각 즉 본죄까지도 죄로 여기심으로 품행만큼은 스스로 정결한 체했던 수많은 사람의 손에서 돌을 내려놓게 하셨다(요 8:1-11).
행동으로 나타난 죄인 자범죄는 정욕이라는 생각과 마음에서 나오고, 이는 봄이 되면 새 잎이 나듯이 누구도 피할 수 없다. 혹 품행으로 죄를 범하지 않았다 해도 육신의 정욕은 육신이 생존하는 한 떨칠 수 없는 본능이므로 벗어나지 못한다. 만에 하나 육신의 정욕마저 강력한 억제력으로 발아하지 못하게 했다 해도 그 영이 하나님과 단절되었으면 영원한 죄인이다.
인간은 모든 부패와 퇴폐의 심연이다. 인간은 인간 자신의 본성을 스스로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키기에는 전적으로 무력하다. 죄의 삯은 사망, 그래서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말하고(롬 3:23), 히브리서 기자도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지만,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못 박고 있다(히 9:27). 이는 심각한 정도를 넘어 절망적 상태다.
3.3. 저주와 질병, 고통과 죽음
죄는 불순종으로 시작하였으나, 지금은 불신앙이 죄다. 아담의 불순종이나 예수 그리스도 이후의 불신앙은 하나님께로부터 단절을 지속하게 만든다. 하나님과의 단절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지 못하는 것이며,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이를 ‘소외’라고 하였다.16) 죄를 범하여 소외된 인간에게는 심판과 형벌을 면할 길이 없으므로 두려움과 불안이 들어오게 된다.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는 죄를 근원적 불안으로 보았다.17) 존 칼빈은 죄가 사람을 전적으로 부패하게 하고 그 부패는 인간의 육체적 부분에도 확대되었다고 말한다.18)
죄가 육체에 어떻게 확대되었는가에 대해 김기동의 분석은 매우 명확하다. 그는 불신앙과 저주를 동격으로 간주하며 불신앙이 영에 대한 문제이듯이 육체에는 저주가 왔다고 말한다. 윤리적으로 반듯하게 살아도 불신자는 불신앙으로 인해 이미 그 육체에 저주가 와 있다는 것이다.19) 그는 영을 가진 사람이 이 음부 안에 불신앙으로 거할 때에 육은 이미 저주를 받았고, 불신앙으로 저주를 받은 사람은 그에게 영이 있기 때문에 영원한 저주가 임한 것이라고 간파했다. 그는 영에는 불신앙의 죄가, 육체에는 그 영향으로 저주가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어떤 불신자의 육체에 나타난 소경이라는 저주는 그 영이 불신앙으로 인해 사망 당한 사실의 표시라는 말이다. 이 저주는 영혼이 가지고 있는 죄로부터 온 것이라 그가 육신이 죽어도 소경된 저주를 갖고 다른 산 사람의 육체에 들어갈 수 있는데, 그 때는 역시 소경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그 사람 역시 불신자로서 저주를 받아 벙어리였다면, 그의 육체에 나타나는 저주의 현상 중 벙어리는 자기 영의 불신앙으로 인한 병이고, 소경은 들어온 다른 저주받은 영적 존재(귀신)의 것이 된다. 김기동은 육체는 영혼이 거하는 장막인데, 불신자의 영혼인 귀신은 이 장막을 떠나는 것을 괴로워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자기 영혼에 있는 저주를 갖고 다른 사람의 육체에 기어코 들어가려 하고, 그 때 살아 있는 불신자의 육체에 복합적인 저주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불신자의 육체에 나타난 저주는 죄로 인한 형벌의 개념으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다. 아담의 불순종 이후 모든 사람이 사망 권세자 마귀에게 복종하면서 영원한 저주를 받게 되었지만, 욥의 경우처럼 마귀는 하나님에 의해 제한을 받는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치 않는 자에게는 저주를 그대로 두지만 청종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임하지 않도록 오히려 축복하시는 분이다.20) 이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실현되었다. 죄와 저주가 동격이듯이 구원과 치료는 같은 뜻이다.21)
죄의 저주가 육체의 질병으로 나타나는 이면에 생각과 정신의 영역에도 불안과 좌절, 고통과 슬픔이 들어차게 된다. 이는 삶의 기쁨을 잃고 정신적인 균형을 빼앗겨 참된 삶의 조화가 파괴되고 저주스런 분열된 삶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인간은 ‘해체의 상태’에 들어가며 독초와도 같은 고통이 뒤따른다. 허무한 것과 부패의 굴레에 굴복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몸과 영혼이 분리된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육체의 죽음을 죄의 결과로 보지 않으려는 움직임도 존재한다. 펠라기우스주의와 소지니주의자 및 합리주의자는 죄와 죽음의 연관성을 부인했다.22) 지금도 자연 과학의 지지를 받아 죽음을 유기체로서의 인간 몸에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아주 늙어서 기력이 완전히 쇠잔해져서 죽는 사람은 비교적 소수에 불과하며 사실상 훨씬 많은 사람이 질병과 사고 때문에 죽는다. 이에 따라 사고와 재해와 질병에 의한 죽음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