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불화,탱화

화엄사

문성식 2019. 3. 19. 17:05


화엄사



2014년9월13일 찾은 전남 구례의 화엄사 풍경입니다.

백제시대 연기조사님에 의해 창건된 천년고찰 대화엄성지 화엄사 각황전의 거대한 목조 건축물의 웅장함에 감탄을 하게 하고

국보4점과 보물8점을 보유하고 있는 문화재가 많은 사찰로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는 대 가람입니다.

우리의 목조 건축물의 아름다움과 효대로 유명한 사사자석탑과 두개의 아름다운 5층석탑.석등등 아름다운 석조물의 미에 매료되게 하는

화엄사입니다.

자연과 조화롭게 위치한 화엄사의 풍경 보면 볼수록 그 아름다움과 조화로움에 매료되어 감탄할 따름입니다.



각황전

 

정면 7칸, 측면 5칸의 다포계(多包系) 중층팔작지붕건물. 국보 제67호. 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생각되는 대석조기단 위에 선 웅장한 건물로 기둥머리에 창방(昌枋)을 끼고 그 위에 평방(平枋)을 돌리고 있다.

평방 위에는 기둥 위와 주간(柱間)에 공포를 올렸으며, 공포는 상하층이 모두 내외2출목(內外二出目)으로 되었다. 내부는 통층(通層)으로 되었고 초층은 짧은 툇보로 고주(高柱)와 변주(邊柱)가 연결되었다.

천장은 고주를 끼워 井자천장이 가설되었으나 그 주변이 굽어 경사지게 된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그 예가 적은 수법이다. 공포양식(栱包樣式)은 외부첨차의 곡이 매우 심한 쇠서[牛舌]로 시대가 떨어짐을 나타내며, 전체적인 느낌은 복잡한 공포가 처마 밑에 꽉 차 있어 매우 화려한 느낌을 준다.

현재 건물 중앙에 길게 설치된 불단(佛壇) 밑에는 석각(石刻) 화엄석경(華嚴石經)이 수장되어 있으며 각황전은 그 거대함과 아울러 이것으로도 이름이 높다.









화엄사 대웅전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건물. 보물 제299호. 화엄사 경내에서 각황전(覺皇殿) 다음가는 큰 건물이며 그 전면에는 신라시대의 것으로 생각되는 대석단(大石壇)과 대석계(大石階)가 있는데, 이 대웅전은 이 대석단 위에 남향으로 서 있다.

기둥 사이의 간격은 모두 동일하게 하고 높은 기둥을 사용하여 주열(柱列)이 매우 정연한 느낌을 준다. 전면 주간(柱間)에는 각각 세짝식으로 된 문짝을 달았고, 그 위에는 교창(交窓 : 창문 위에 다는 작은 창)을 만들었다.

공포(栱包)는 내외3출목(內外三出目)의 갖은포작으로 외부에서는 쇠서[牛舌]를 윗부분에 조각한 장식적인 요소가 증가되고, 내부에서는 대들보를 받친 공포의 살미첨차[山彌檐遮]가 한몸으로 합쳐져서 장식판처럼 변형되어 시대적인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지붕의 가구(架構)를 위하여 건물 내부에는 불단(佛壇) 후면 좌우에 2개의 고주(高柱)를 배치하여 대들보를 받쳤다. 천장은 우물천장인데 주위의 외둘레간(間)을 중앙부분보다 한층 낮게 만들었다.

불단 위에는 각각 J자형의 처마를 이룬 정교한 닫집을 3개 달았는데 전체가 매우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사적기(寺蹟記)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36년(인조 14)에 각성(覺性)이 재건하였다고 한다.

이 건물은 규모뿐만 아니라 외관도 훌륭하여 조선 중기 이후의 건축으로서는 가장 우수한 대표적인 건물로 손꼽을 수 있다.



 각황전 중건 설화

***-벽암 스님의 제자였던 계파스님은 스승의 위촉을 받아 장륙전 중창 불사를 시작했으나 어디서 어떻게 지원을 받아야 할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래서 밤새 대웅전의 부처님께 기도를 드리는데 비몽사몽간에 한 노인이 나타나 말했다.
 "그대는 걱정 말고 내일 아침 길을 떠나라. 그리고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권하라."하고는 사라졌다. 이에 용기를 얻은 계파스님은 다음날 아무도 몰래 절을 나섰다.
 한참 길을 가다보니 간혹 절에 와서 일을 돕고 밥을 얻어먹곤 하던 노파가 걸어오는 것이었다. 스님은 난감하기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간밤에 받은 계시를 지워버릴 수 없어 그 노파에게 장륙전 건립의 시주를 청했다.
 어이가 없기는 노파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런저런 사정을 얘기하면서 하루종일 간청하는 스님에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며 큰 발원을 하였다. "이 몸이 죽어 왕궁에 태어나서 큰 불사를 하리니, 부디 문수대성은 큰 가피를 내리소서."라는 말을 마친 노파는 길 옆 늪에 몸을 던졌다. 스님은 너무도 갑작스러운 사태에 놀라 멀리 도망쳤다.
 몇 년 뒤 걸식을 하면 돌아다니다가 서울에 나타난 계파스님은 궁궐 밖에서 유모와 함께 나들이하던 어린 공주를 만났다. 공주는 스님을 보자마자 반가워하며 매달렸다. 공주는 태어날 때부터 한쪽 손을 꼭 쥔 채 펴지 않았는데, 대사가 안고서 쥔 손을 만지니 신기하게도 손이 쫙 펴졌다. 그리고 그 안에 장륙전이라는 세 글자가 씌어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숙종은 계파스님을 불러 자초지종을 듣고 감격하여 장륙전을 지을 수 있도록 시주하였다. 전각이 완성되자 '각황전(覺皇殿)'이라 이름했는데, 이는 왕이 깨달아 건립했다는 뜻이다.






화엄사동오층석탑

높이 6.4m. 보물 제132호. 남향한 대웅전과 동향한 각황전의 높은 석단 아래 서탑과 대립하여 건립되었다. 서탑은 각 면에 조각상의 장엄이 가득한 데 비하여 이 탑은 아무런 장식이 없다. 또, 서탑이 2층기단임에 비하여 이 탑은 단층기단이다.

여러 장의 석재로 지대석을 짜고 그 위에 4매의 하대석과 함께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와 탱주(撑柱 : 받침기둥)가 모각(模刻)된 여러 장의 판석을 세워 중석을 구성하였다.

갑석은 4매석으로 덮었고, 밑에는 부연(副椽 : 탑 기단의 갑석 하부에 두른 쇠시리)이 있으며 상면에는 완만한 경사와 함께 중앙에는 1단의 각형 굄으로 탑신을 받고 있다.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가 각각 1석이며, 옥신에는 매층 우주를 모각하였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옥개석은 편평하여 낙수면(落水面)의 경사는 극히 완만하며 전각에도 반전이 매우 약하다. 추녀 밑은 수평이며 층급받침은 각 층 4단이다. 2층 이상의 옥개석은 옥신을 따라 체감률이 많은 편이다.

상륜부(相輪部)는 상부에 2단의 갑석형 층단이 있는 노반(露盤 : 탑의 최상부 옥개석 위에 놓아 복발·앙화·상륜 등을 받치는 장식)과 반구형의 복발(覆鉢), 그리고 보주형의 석재가 높은 간주(竿柱) 위에 있어 주목된다. 5층의 고준한 석탑이면서 단층기단을 형성하였으며 세부수법에도 간략화된 양식이 보여 이 탑의 조성연대는 서탑에 준하는 9세기경으로 추정된다.



화엄사서오층석탑

높이 6.4m. 보물 제133호. 동탑은 아무런 조각이 없으나 이 탑은 기단과 탑신부에 장식이 가득하다. 탑의 구조는 2층기단 위에 5층의 방형 탑신을 건립하였다.

기단은 수매로 구성된 지대석 위에 하대석과 중석을 같은 돌로 붙여서 만들고, 각 면에는 안상(眼象) 속에 십이지신상을 배치하였다. 십이지상은 각 면 3구씩 북쪽의 중앙에 자상(子像)을 배치하여 각기 방위에 따라 순서대로 놓았다.

하층기단의 갑석은 4매 판석이고 상면에는 호형(弧形)과 각형의 굄이 있어 상층기단을 받게 하였다. 상층기단 중석은 4매로 짜였고 각 면은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와 함께 탱주(撑柱 : 받침기둥)로 구분한 다음 각 면 2구씩 팔부신중(八部神衆) 입상을 조각하였다.

갑석은 2매석으로 덮였고 밑에는 부연(副椽 : 탑 기단의 갑석 하부에 두른 쇠시리)을 나타냈으며 상면 중앙에는 2단의 굄이 있다.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가 각각 1석으로, 옥신에는 층마다 우주를 모각하였으며, 초층옥신 4면에는 사천왕 입상을 배치하였다.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각 층 모두 5단이며 추녀 밑은 수평이다. 옥개의 경사도 적당할 뿐 아니라 전각(轉角)의 반전 역시 경쾌하다. 상륜부(相輪部)는 상부에 갑석형의 2층단이 있는 노반(露盤 : 탑의 최상부 옥개석 위에 놓아 복발·앙화·상륜 등을 받치는 장식)과 함께 그 위에 보주(寶珠)가 있다.

석탑의 형태는 고준하면서도 상하의 체감비율이라든지 옥개의 경쾌한 수법 등이 잘 조화되어 우아한 기품을 지니고 있다. 하층기단의 십이지상 조각은 흔하지 않은 예의 하나이다.

상하기단과 초층 옥신 세 곳에 나타난 조각상은 그 배치에 보다 신중을 기하였고 특히 십이지·팔부중·사천왕 모두 불교의 외호적 기능을 지닌 조형물이라는 점에서 탑파의 사리 외호적 성격을 강조하는 석탑이다. 방위수(方位獸)로서의 십이지와 함께 팔부중·사천왕의 방위에 대해서도 고찰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여러 상의 조각수법은 다소 경직성을 면하지 못하나, 석탑의 비례에 따르는 경쾌한 기품에 잘 조화되고 있다. 석탑의 조성연대는 조각상이 가미된 점, 또는 옥개의 조형이 보다 유연한 느낌을 주는 점 등으로 보아 신라 하대인 9세기경으로 짐작된다. 석탑 남면에는 측면에 안상, 그리고 상면에는 연화가 조각된 배례석이 있다.



화엄사보제루

정면 7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건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9호. 본래 법요식(法要式) 때 승려나 신도들의 집회를 목적으로 지어진 건물로서 대웅전 앞 한 단 낮은 터에 위치하고 있다.

대웅전 쪽은 지면 위에 막돌초석을 놓아 바로 기둥을 세웠으나, 반대쪽에서는 한 단 낮은 터에 막돌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워 누정(樓亭) 모양으로 꾸몄다. 기둥은 민흘림이며 바닥은 모두 우물마루를 깔았다.

대웅전 쪽 창문은 7칸 모두 큰 두쪽의 빗살문을 달고 반대쪽 5칸은 판문으로 대치하였으며 좌우 양칸은 문을 생략하였다. 공포(栱包)의 양식은 초익공(初翼工) 양식이다. 이 건물의 건립시기는 1800년 이후라 생각된다.




































각황전앞 석등

높이 6.36m. 국보 제12호. 현존하는 석등 중 가장 큰 이 석등은 신라석등의 기본형인 8각을 따르고 있으나 간석(竿石)을 고동형(鼓胴形)으로 만들어 전라도지방 석등간석의 특색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 석등의 간석은 그 중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다.

8각 하대석 각 면에는 예리한 안상(眼象)이 조각되었고 그 위에 귀꽃이 있는 복련8엽(覆蓮八葉)이 크게 조각되었으며 상면의 얕은 굄 위에 운문(雲文)이 조각된 하단과 8각 소로형[小累形]인 상단에 2단의 높직한 간석 굄이 마련되었다.

간석은 얕고 배가 불러서 일견 장구를 연상하게 하며 중앙에 2조 횡대(橫帶)가 있고, 8각의 면마다 화형(花形)이 횡대 위에 장식되었다. 이 중간부 상하는 일단 가늘어졌다가 다시 넓어지면서도 8각의 기본형을 지키고 있다.

상대석은 평박한데 밑에는 거의 수평에 가깝게 복련8엽이 조각되고 위에는 소로형의 8각 화사석(火舍石 : 석등의 점등하는 부분) 굄이 있다. 화사석은 8각 1석인데 화창(火窓)을 네 곳에 내었을 뿐 우주(隅柱)의 표현이나 화창 주위의 구멍이 없다.

옥개석은 얇은 편이고 처마 밑은 수평이며 추녀 위에는 귀꽃이 크게 표현되었다. 상륜부(相輪部)는 사다리꼴의 노반과 8각 앙화(仰花)를 얹고 그 위에 보륜(寶輪)을 사이에 두고 귀꽃이 달린 보개(寶蓋)를 얹었으며, 정상에는 연화가 장식된 보주(寶珠)를 얹어 완형을 이루었다. 간주(竿柱) 이하가 상층부에 비하여 빈약한 감을 주나 당당한 위풍을 보이며 뒤의 각황전의 위용과 좋은 대조를 보인다.












 

화엄사 원통전 앞 사자탑 보물 제300호

이중 기단에 무문의 중석과 부연을 갖춘 갑석을 구비한 사자탑이다. 상층의 기단 네 귀에 4구의 사자를 배치하였고, 각 사자상 밑에는 복련석을 두어 받치게 하였다. 사자상의 두부에는 앙련석을 썼고 그 위로 1매의 판석을 얹었는데, 연화로 둘러 싸였다. 방주형으로 된 탑신은 높으며 탑신 각 면에는 방광을 돌렸으며 그 속에 다시 신장상 1구씩을 배치 조각하였다. 그리고 탑신 위에도 1매의 판석이 있는데 이 판석 밑에는 앙련이 새겨져 있고 판석 위에는 반구형의 돌기가 있다. 이와 같은 탑형을 일명 노주라고도 부른다. 그 조형이 특례의 이형일 뿐만 아니라 사사자를 이용한 조각 수법은 그렇게 흔한 것이 아니다. 또한 양식과 조각 수법이 섬약해 보이는 탑형으로 9세기경의 작품으로 본다.









화엄사사사자 삼층석탑

높이 5.5m. 국보 제35호. 전체 부재를 화강암으로 조성한 이 사자탑은 경주의 불국사다보탑(佛國寺多寶塔, 국보 제20호)과 더불어 우수한 걸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현재 화엄사 가람 중심에서 서북방의 ‘효대(孝臺)’라고 불리는 높은 대지에 건립되어 있는데 이 탑의 바로 앞에는 석등 1기가 배치되어 있어서 본래부터 이 장소가 석탑을 세우기 위하여 마련된 곳임을 알 수 있다.

기본조형은 2층기단 위에 3층탑신을 얹고 그 정상에 상륜부(相輪部)를 놓은 신라석탑의 전형적인 기본형을 따르고 있으나 상층기단에서 특이한 의장을 보이고 있다. 기단부는 지대석 위에 각형과 원호와 또 하나의 각형 굄 순서로 높직한 3단의 굄대를 마련하여 하층기단을 받고 있다.

하층기단 면석 각 면에는 양쪽 우주가 각출되었을 뿐 중간에는 탱주가 없다. 그러나 각 면에는 고식(古式)의 큼직한 안상(眼象)을 3구씩 오목새김하고 그 안에 천인상(天人像)을 1좌씩 12구를 돋을새김하였다. 보관과 영락(瓔珞)으로 동체(胴體 : 몸체)를 장식하고 천의(天衣)를 공중에 휘날리며 앉은 자세는 모두 같으나, 연화대 위에 앉은 법석과 지물(持物)은 각기 다르다.

어떤 좌상은 악기를 들어 연주하고 있고 혹은 팔을 벌려 춤을 추고 있으며 어떤 천인은 꽃을 바쳐 공양하고 있어 이 여러 천인상들이 모두 불천(佛天 : 부처의 존칭)을 찬미하고 있는 자세로 보인다.

상층기단은 우주를 대신하여 연화대 위에 무릎을 꿇고 앉은 암수 두 쌍의 사자를 한마리씩 지주(支柱) 삼아 네 귀에 배치하고 정상에도 하대와 대칭되게 연화대를 얹어 널찍한 갑석을 받고 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또한 찰주(擦柱 : 탑의 중심기둥) 대신 연화대 위에 합장한 대덕(大德)의 입상을 안치하고 갑석의 하면 중앙에도 연화문을 장식하여 천개(天蓋)를 삼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네 귀에 앉은 석사자상과 중앙에 서 있는 대덕의 모습인데, 네 마리의 석사자는 상하 앙복련화대(仰覆蓮花臺) 위에 앞발을 뻗고 뒷발을 구부려 앉아서 정면을 바라보며 입을 벌려 날카로운 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 곧 불국사다보탑의 석사자상을 연상하게 하고 있다.

그리고 원각한 대덕의 입상은 얼굴의 인상이나 몸에 걸친 가사의 문양과 균형 잡힌 체구 등이 당시의 불상과도 같은 조성수법을 보이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게 한다. 대덕은 사자상과는 달리 머리가 갑석에 붙지 않고 있으므로 갑석은 4구의 사자만에 의하여 지탱되고 있다.

그러므로 네 마리의 사자를 일반형 석탑의 상층기단 부재에 비한다면 곧 각 면의 양쪽 우주로 볼 수 있고 혹은 불국사다보탑 기단부의 방형4주(方形四柱)와도 비유할 수 있는 구실을 하고 있다. 상층기단 갑석은 1매석으로 만들어지고 그 상면에는 2단의 굄을 각출하여 탑신부를 받고 있는데, 이러한 수법은 곧 신라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석이 각기 1석씩으로서 일반형 석탑의 탑신부와 같으나 초층옥신석 4면에 각기 문비형(門扉形)을 새기고, 그 좌우로 여러 가지 존상(尊像)을 조각하였다. 즉 정면에는 인왕상, 양측면에는 사천왕상, 그리고 뒷면에는 보살상을 돋을새김하여 장엄하였다.

이 위의 2·3층 옥신석은 초층과는 전혀 달리 양쪽 우주가 정연하게 각출되었을 뿐 아무런 장식조각이 없다. 옥개석은 초층부터 3층이 모두 같은 형식으로서 처마의 받침이 5단씩이고 상면 중앙에는 2단의 각형 굄을 각출하여 그 위에 부재를 받게 되어 있다.

낙수면이 평박하고 네 귀 전각의 반전이 예리하여 경쾌한 느낌을 주고 있음은 신라 성대(盛代)의 석탑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며, 상륜부는 노반석 위에 복발만이 원형대로 남아 있을 뿐이다. 이 석탑의 건립연대는 각 부의 조각수법이나 건조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성대인 8세기 중엽으로 추정되며 신라시대의 사자석탑으로는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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