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세기를 맞이하는 한국 교회의 선교적 비전과 과제
(한국 기독교 신풍 운동 주제 강연)
선교는 인류의 내적 변혁이 목적 이 제목은 개신교 선교 100주년, 천주교 전래 200주년을 맞이하면서 앞으로 맞을 세기에 우리는 이 땅에서 무엇을 어떻게 선교할 것인가라는 문제 제기입니다. 저는 사실 이 제목으로 이야기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망설이기도 하고 조금은 당황했습니다. 아직도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신학자도 아니고 또한 선교에 대한 남다른 식견을 가진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여러분은 일선에서 선교를 직접하고 계시는 분들이고 선교에 관한 한 저보다도 경험도 많고 무엇이 문제인지도 잘 아시는 분들에게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다음 세기를 위해서든 어떤 세기를 위해서든 선교의 새로운 비전이 따로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기회가 좋든지 좋지 않든지 선교를 해야 하는 것이고 비록 미래가 어둡게 내다보인다 해도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희망이 없는 곳에서도 희망을 지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선교에 있어서도 어떤 처지에 부딪칠지라도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 우리의 비전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니 참으로 무엇을 제가 여러분에게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저는 혹시 선교 내용, 곧 복음에 있어서 다음 세기를 위해 새로운 측면이 있을 수 있을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중에 어떤 분은 혹시 복음 선교를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고 신자를 만드는 데 있는 것으로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물론 틀린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선교를 좁게 해석한 것뿐이지요. 여러분 중에는 아무도 선교를 이렇게만 생각하시는 분은 없으리라 믿습니다. 누구나 다 인정하고 있듯이 복음 선교는 이 세상 모든 이에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세우는 데 있습니다. 즉 복음의 기쁜 소식을 사회 모든 계층과 전 인류에게 전해 주어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 21, 5; 2고린 5, 17)라고 한 것과 같이 복음의 힘으로 사회 전체와 인류 전체를 내부로부터 변혁시켜 가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교회가 선포하는 메시지는 그 신적 능력, 즉 성령의 힘으로 누룩과 같이 모든 개인과 집단의 양심, 그들의 생활과 활동, 그들의 삶 자체, 그들의 구체적 사회 환경을 변화시켜 갑니다. 교회의 선교는 이래야 하고 또 이럴 때 우리는 참으로 복음 선교를 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하여 스스로 최초의, 또한 최대의 복음 선교자였고 바로 그 자신이 복음의 내용이기도 한 예수와 같이 우리도 성령에 힘입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묶인 이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며, 눈먼 사람을 보게 하며,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줌으로써"(루가 4, 18)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자유를 누리고 그리스도 안에 서로 형제 되어 서로 사랑하고 하나 되어 나누는 공동체가 이 땅에 이룩되고 이것이 점차 세계적으로 확장되어 간다면 우리의 복음 선교는 참된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 중에서 이것을 모르실 분도 없고 이렇게 선교를 안하실 분도 없다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오늘 이 시간, 정녕 무엇을 말씀드려야 할지 사실 모르겠습니다. 단지 있다면 "오늘날 한국 교회는 과연 전체적으로 보아서 이 같은 복음 선교를 하고 있는가? 우리는 과연 예수와 같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예수와 같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 예수와 같이 눈먼 이들에게 시력을 주고 묶인 이들, 억압된 이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고 있는가? 우리들 곧 우리가 형성하고 있는 교회는, 이 땅에서 그런 의미로 빛과 소금의 구실을 하며, 인간과 사회를 내적으로 변혁시키는 누룩의 구실을 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져 보고 반성해 보는 것이 저에게 주어진 문제의 다른 측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 많은 이들이 교회로 몰리는가? 오늘날 한국 교회는 신구교 모두가 적어도 수적으로는 굉장한 발전을 하고 있습니다. 전도열, 구도자들의 열기는 획기적이고 신자 수 증가는 괄목할 현상입니다. 그리하여 총신자 수는 거의 1,000만에 육박하고 있는 줄 압니다. 도처에 교회당과 십자가가 보입니다. 마치 아니 계신 데 없이 곳곳에 다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여실히 증명하는 듯도 합니다. 한국의 이 같은 선교의 성과와 교회 발전은 아프리카를 제외하고는 참으로 세계에서 유일한 현상입니다. 우리 교회의 어떤 신부님은 너무나 많이 몰려드는 예비 신자들을 보고 겁이 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개신교도 같은 현상일 것입니다. 오히려 더할 것입니다. 저는 가끔 하느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또 "근년에 들어서면서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찾고 있는가? 그 원인은 무엇인가?" 정치, 경제, 사회 불안이 그 원인이 될 수 있고 남북 분단이 지닌 지속적 불안이 직접, 간접적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물질주의에 사로잡힌 나머지 정신적, 영적 갈증을 더 느끼게 되었다는 것도 이유가 되겠지요. 어떤 분은 한국인의 기복적(祈福的) 종교심이 그 원인이라고 보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신자들을 보면 물론 기복 심리가 없는 바 아닙니다. 그렇다고 믿음을 지니고 살면 부귀 영화를 누린다는 바람에서 교회에 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때 병고나 불행과 고통 때문에 여기서 해방되고 싶어서 교회를 찾는 이들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는 충분히 이해될 뿐 아니라 인지상정이라고 봅니다. 의지할 곳이 없어서 하느님께 의지하고 싶은 것, 얼마나 좋습니까? 그리고 이런 사람들을 치유해 준다고 기도하고 돈을 뜯어내는 사이비 교역자도 없지 않겠지만 그 수는 적다고 봅니다. 아무튼 지금 한국은 선교의 황금 어장입니다. 마치 점포를 차리기만 하면 장사가 잘되듯이, 교회를 세웠다 하면 꽉꽉 차는 것이 오늘의 현상입니다. 이런 추세라면 10년 안에 한국 인구의 반 이상이 기독교인이 될 것으로 내다보입니다.
날로 부요해지는 교회 그렇다면 그만큼 우리 사회도 기독화, 더 깊게는 복음화되어 가고 있다고 보아야 이치상 옳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의 결실, 곧 성령의 열매인 "사랑 기쁨 평화…"(갈라 5, 22)가 미구에 이 사회 구석구석에 넘쳐흐르리라고 내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니, 지금 이미 인구의 4분의 1이 기독교인일진대는 이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결실이 현저히 나타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실상은 어떻습니까? 교회당 수도 신자 수도 많고 하늘로 향해 솟은 십자가를 보면 온통 기독교국처럼 보이건만 그런 결실이 현저히 나타나 있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교회마다 자선 사업 불우 이웃 돕기도 나름대로 하고 있고 대체로 우리 신자들은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데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각 교회는 교육, 의료, 사회, 문화, 자선 사업 등을 통하여 사회 발전에도 많이 기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여전히 같은 세상입니다. 이 말은 기독교적인 가치관, 윤리관이 이 사회를 내부로부터 근원적으로 변혁시켜 가고 있는지 대단히 의심스럽다는 것입니다. 세속의 힘, 악의 힘이 너무 커서입니까? 또한 우리는 이 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의 구실을 한다고 자부할 수가 있는지도 의문입니다. 우리 자신은 그렇게 자부할지 모르나 사회는 우리를 그렇게 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기자분들도 초대되어 있는 것 같은데 이분들이 우리 교회를 또 우리 교역자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어쩌면 이분들은 `사랑, 기쁨, 평화'의 증거보다는 오히려 `시기, 분노, 이기심, 분열, 당파심'(갈라 5, 20), 즉 성령의 열매와는 반대되는 육의 열매를 우리 속에 더 많이 보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사회에 비추어진 교회는 우선 결코 사랑으로 하나된 교회는 아닙니다. 크게는 이른바 신구교로 갈라져 있는 것이 그렇고, 다시 개신교 안에서는 통합과 합동 또 그 밖에 많은 교파의 분열상이 가장 부정적인 인상을 주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교회 일치는 절실한 과제라고 보면서도 일치에로의 길은 사실상 요원합니다. 더 많은 교파로 분열될 가능성이 현재는 더 크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거기다가 세속의 물질주의 풍조가 교회까지도 지배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만큼 큰 교회일수록 기업화되어 가고 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작은 교회들은 이것을 선망의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교역자들의 생활 양식도 예수와 같이 가난한 봉사자의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는 아주 보기 힘듭니다. 예수는 본시 부요하신 분이셨지만 우리를 위해 가난한 자, 낮은 자가 되셨는데 우리는 반대로 날로 부요한 자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들은 오늘날 예수께서 광야에서 당하셨던 사탄의 유혹(부, 허세, 권세)을 물리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유혹에 날로 깊이 빠져 들어가고 있지 않나 하는 염려가 큽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는 무엇이며 선교는 무엇인가?"라고 참으로 깊이 자문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신자 수 증가와 함께 분열도 늘어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WCC는 교회의 본질을 말하면서, 교회는 1) Koinonia 친교의 공동체 2) Diakonia 봉사의 공동체 3) Martyria 복음 증거의 공동체 라고 천명했습니다. 이는 가톨릭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하여 밝힌 교회관과 근본적으로 일치합니다. 이런 표현은 근래의 것이겠지만 교회관 자체로서는 초대 교회의 그것입니다(사도 2, 44-47; 4, 32-35). 뿐만 아니라 우리는 사도 신경에서 이미 이런 교회관을 믿음으로써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이요 거룩하고 공번된 교회, 사도로부터 내려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교회, 믿는 이들 사이에 친교를 나누는 교회, 우리는 모두 이 교회를 믿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한국 안에서만도 교파 수가 100이 넘도록 분열되어 있습니까. 선교의 결과로 신자 수도 늘었지만 교회의 분열도 더 많게 된다면 선교 자체에 확실히 문제점이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파 수가 더 많으면 어떠냐? 믿는 이들의 수가 늘고 그로써 많은 이가 구원을 얻으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만일 교파간에 서로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서로 돕고 참으로 친교의 유대 속에 나눈다면 이 말도 성립이 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서로 배타적이요 다투고 분열한다면 그것은 결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라고 말하기는 힘듭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같이 성령에 의하여 생겨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육화, incarnation의 연장이 교회입니다. 그 때문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 교회는 아직 참된 의미의 교회는 아닙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모습은 형제적 사랑으로써만 드러낼 수 있습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우리는 지금까지 선교를 통하여 많은 신자를 양산해 냈고 또 내고 있지만 참으로 형제적 사랑에 사는 신자, 그만큼 마음이 열린 신자를 얼마나 만들어 내었는지는 의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점이 앞으로의 선교의 문제의 핵심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얼마 전에 제가 교회 평신도들의 모임에서 아래와 같은 문제를 이야기한 일이 있습니다. 문제는 "누가 신자인가?"입니다. 개신교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에서는 대체로 아래와 같은 사람들을 신자로 봅니다. 1) 세례를 받은 사람 2) 성당에 잘 다니는 사람(특히 주일 미사 참례를 잘하는 사람) 3) 아침, 저녁 기도를 잘 드리는 사람 4) 교무금과 연보를 잘 내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신자요 어쩌면 훌륭한 신자일 것입니다. 여기다 더 욕심을 낸다면, 5) 신자 재교육 운동이나 피정에 자주 참여하고 이런 일에 적극적인 사람 6) 자기 소속 본당에서 사목 위원, 반장으로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사람 그 위에 교리도 잘 알고 성경도 잘 알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신자라고 간주할 것입니다.
용어 표현은 좀 다르겠지만 개신교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나 여겨집니다. 1) 세례받고 성경을 잘 알며 2) 주일 예배(수요 예배)에 잘 나가고 3) 집에서도 기도 잘 드리고 4) 십일조 헌금을 비롯하여 각종 헌금을 잘 내는 사람 5) 권사, 집사, 장로로서 헌신적으로 전도와 교회 운영에 봉사하는 사람 6) 술 담배를 하지 않는 사람 대충 이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 역시 이런 분들이 신자이고 또한 훌륭한 신자라는 데 동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이와 같이 통념적으로 세례받고 교회에 잘 나가고 주일을 잘 지키고 교회의 규율을 잘 지키고 성경 교리를 잘 알고 헌금을 잘 내고 등등을 좋은 신자 규범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모르는 사이에 예수 시대의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과 같은 개념으로 누가 신자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고 있지 않나 하는 염려가 있습니다. 그 때는 할례를 받은 자, 안식일을 비롯한 율법을 잘 알고 지키는 자, 회당에 성금을 잘하는 자 등이 훌륭한 신자였습니다. 이들은 바로 이렇게 스스로 훌륭하다고 자부하였기에 선민 의식에 젖어 있었고 또 하느님 나라의 시민 자격을 지녔다고 자신했습니다. 아마도 우리의 좋은 신자, 열심한 신자들도 같은 선민 의식과 자신감을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교역자들인 우리 자신이 이같이 자부하고 또한 자신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실천 없이는 구원될 수 없어 그런데 이 같은 관념에 대해서 예수는 어떤 태도를 취하였습니까? 그 어떤 사람이 하늘 나라를 차지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까? 산상 수훈은 이에 대해서 명백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는 1) 마음이 가난한 사람 2) 슬퍼하는 사람 3) 온유한 사람 4)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5) 자비를 베푸는 사람 6) 마음이 깨끗한 사람 7)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 8)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 이런 사람이 바로 하늘 나라의 시민이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이런 사람은 바로 예수 자신을 닮은 사람입니다. 예수와 같이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요 그중에서도 가난한 이, 죄인, 창녀, 간음한 여인 등 보잘것없고 버림받고 억눌린 이들을 사랑할 줄 알 뿐 아니라, 그들과 자신을 일체화시키는 사람입니다. 더 나아가 원수까지도 용서해 줄 줄 알고, 드디어는 예수와 같이 진리를 위해 몸 바치고 이웃을 위해, 모든 이를 위해 자기 목숨까지도 바칠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예수처럼 참된 형제애에 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을 빌리면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간직하고"(필립 2, 5) 사는 사람, 이런 사람이 참으로 예수의 사람, 곧 참된 의미의 그리스도교 신자입니다. 그리스도 신자와 비신자의 근본 분류는 아마도 세례로써 정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례를 너무 형식화시키지 않았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세례 자체가 결코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세례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세례는 결코 개인적 구원의 의미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례를 통하여 구원되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와 그의 몸의 다른 지체들과 믿음과 사랑으로 일치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몸인 다른 지체들과 사랑으로 일치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미워하고 다툴 때에도 세례를 받았다는 그 이유만으로 구원될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이 없으면 우리는 세례만으로 구원되지 않습니다. 아마 그 때문에 사도 바오로는 고린토 전서 13장에서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이 소용없다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훌륭한 설교도 기적도 선교도 헌신적 활동 등, 그 모든 것이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사랑이 없으면 산을 옮길 만한 믿음도 모든 재산을 남에게 주는 `자선'까지도 소용이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저는 이 때문에 예수께서 루가 복음 10장 25절에서 37절에 말씀하신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오늘날 우리에게 누가 신자인지를 밝히는 좋은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우리가 지닌 좋은 신자 개념에는 `사랑'이라는 본질이 빠져 있습니다. 그 때문에 여기서는 `공동체'가 형성될 수 없습니다. 또한 세상을 향하여 열린 교회가 형성될 수 없습니다. 결국 우리가 사랑을 살 때에 참으로 신자입니다. 그리고 형제적 사랑이 있는 곳에 교회가 있습니다. 성령의 일하심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의 유일한 증거는, 예수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할 줄 알고 그 사랑으로 모든 이를 특히 가난하고 버림받고 억눌린 이들을 우리가 가슴에 품을 줄 알 때입니다. 그들과 고통을 나눌 줄 알 때입니다. 그들에게 관심을 두고 그들의 전인적 해방을 위해서 헌신할 때입니다.
최종 목표는 `모두가 하나' 되기 저는 다음 세기를 맞이하는 한국 교회의 선교의 비전을 이 점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궁극적으로 우리가 선포해야 할 복음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선교의 본질적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이십니다. 특히 하느님께서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보내 주신 그 외아들(요한 3, 16),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그 사랑,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전하는 것이 선교의 본질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리하여 그 사랑으로 성령에 힘입어 다시 태어나서 그리스도를 닮은 새 인간, 하느님의 자녀 되고 그리스도의 형제 되며 하느님의 백성 되어, 드디어는 삼위 일체이신 하느님의 그 생명과 사랑의 일치 속에 우리 모두가 민족, 국가, 인종, 성별, 일체의 차별을 초월하여 `하나' 된다는 것, 이것이 복음 선포의 내용이요 최종의 목표입니다. 결국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이 당신의 사랑으로 온 세상을 구원하신다."는 이것이 복음 선포의 내용의 핵입니다. 이 하느님을 전하는 것이 선교입니다. 이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것이 믿음이요 이 사랑에 사는 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그렇다면 이 같은 선교를 달성하기 위해서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대단히 큽니다. 왜냐하면 참된 사랑은 자신을 열고 비우고 또한 목숨까지 바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의 관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재검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자신과 교회 전반을, 제도, 조직, 권위까지 검토하고 또한 깊이 반성하고 새로 나다시피 쇄신되어야 할 것입니다. 결국 필립비서 2장 6절에서 8절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비우심(keno- sis)을 오늘의 교회는 철두철미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참된 회개(metanoia), 복음 증거의 공동체(martyria)를 만들어야 합니다. 저는 여기서 교회 일치 문제를 직접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위에서 드린 말씀에서 교회 일치의 문제가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부터 풀려야 하는지 간접적으로나마 지적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게 된다면, 살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확실히 서로를 형제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교회 일치의 문제의 근원도 교리적 차이에서보다도 마음과 마음의 거리에 더 있다고 봅니다. "저는 모든 이로 하여금 하나 되게 하소서."라고 수난 전날 저녁에 간절히 기도하신 주 예수의 그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고 그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되는 날, 여러 교회는 제도의 차이 또는 어떤 교리의 해석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랑 안에 하나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1982. 3. 크리스찬 아카데미 하우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