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와 성직자(평신도 전국 회의 강론)
평신도와 성직자의 일치 공의회 교회 헌장 제4장은 `세계 안에서'의 평신도 사도직에 대하여 말하면서 "특별히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자신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현세의 사물들(정치, 경제, 문화, 발전 등에 관한 모든 일)을 비추어 주고 관리함으로써 모든 것이 언제나 그리스도의 뜻대로 이루어지고 자라서 창조주와 구세주에게 찬미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31항)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헌장은 교회 내에서의 평신도의 권리와 의무 및 이에 따르는 사도직도 말하고 있으나 그러나 평신도가 사도직을 수행하는 원래의 곳은 `세계 안에서'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직에 관한한 여타의 서술은 이차적인 것이라 해도 좋습니다. 그래서 "세속적 성격은 평신도의 고유의 특징이다."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이 점은 평신도들에게 새로운 시야를 전개시켜 준 것이며 동시에 평신도나 성직자가 다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할 점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은 교회의 일치, 모든 믿는 자들의 일치에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일치요 그리스도 안에서의 일치입니다. 그것은 바로 성삼위 일체의 일치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이 일치 안에 구원이 있고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 통합되어 하느님의 왕국의 완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치는 획일적인 것이 아니라 다양성 안의 일치입니다. 이 점이야말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특성입니다. 그래서 공의회는 무엇보다도 교회 자체가 이같이 다양성 안의 일치임을 명백히 했습니다. 한몸에 여러 지체가 있듯이 교회도,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참된 유기체와 생명체로서 여러 지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몸에 여러 지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다양성) 그리고 동시에 이 여러 지체가 서로서로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인식하고 결합되어 한몸(일치)을 이룬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똑같이 중요합니다. 평신도와 성직자, 이것은 결코 차별적인 또는 대립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몸의 지체를 손발 혹은 이목구비라 하듯이 교회의 지체의 구분을 지적하면서도 상호 유대와 조화 및 일치를 뜻하는 것이며 또 그래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 모두 평신도나 성직자가 함께 생각해야 할 것은 `현대 세계에 있어서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이라는 그 제목 자체가 이미 지적하는 바와 같이 교회의 활동의 곳, 봉사의 곳은 세계라는 것입니다. 또 세계는 교회의 존재 이유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결코 교회 자체를 위해서 세워진 것이 아니고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 세워졌다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의 강생도 구속도 다 이 세계를 위해서였고 또 그 때문에 그리스도는 사도들을 부르시고 그들 위에 교회를 세우셨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이렇게 교회는 세계를 위해서 있습니다. "세속적 성격은 평신도의 고유한 특징이다."라는 말은-너무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는지 몰라도-교회에 대해서는 보다 깊은 의미로 해야 할 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떤 이들(신학자들 중에, 특히 프로테스탄트의 하비 콕스)은 교회가 참으로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세속화'돼야 한다고까지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결코 이른바 `세속주의'에 빠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 속에 육화(Incarnatio)돼야 한다는 뜻입니다. 공의회가 말한 교회 쇄신(관습, 제도 등을 포함)은 교회의 이 같은 일치성의 개념을 깊이 깨달음으로써 가능합니다. 교회는 성령의 감도 아래 그리스도의 신비체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참다운 생명체와 유기체로서 교회는 한몸에 여러 지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은 같은 하느님의 백성 가운데서 목자들, 즉 성직자들을 뽑으시고 이들로 하여금 이 교회를 가르치고 다스리고 거룩하게 합니다. 때문에 평신도와 성직자의 구별은 신법(神法)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느님 백성 전체가 성령의 감도 아래 하나로 움직이며, 하느님의 창조와 구속 사업을 계속 추진하고 변천하는 세대에 적합한 길을 찾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복음의 누룩을 세상의 밀가루 반죽 속에 섞습니다. 이 길을 찾고 이 사명을 다하는 것은 결코 목자들, 즉 성직자들만의 일이 아닙니다. 평신자를 포함한 하느님 백성 전체의 책임입니다. 교회는 스스로를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그만두고 교회의 존재 이유가 되고 또 활동의 본질적 대상인 세계를 더 생각하고 세계에 대해서 더 관심을 갖고 더 말해야 할 만큼 이 세계를 사랑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계를 사랑하는 그만큼 세계 속에-그리스도의 강생의 연장으로-강생해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교회는 비로소 세계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시고 사시고 죽으신 세상 만일 교회가 이것을 잊어버리고 과거처럼 혹은 아직도 의식, 무의식중에 되풀이하고 있듯이 세계를 천시하고 적시(敵視)하고 교회를 위해 위험한 것으로만 보고 죄악으로만 보며 이것을 떠나는 것을 강조한 나머지, 세계를 도피하면 그리고 자신 속으로 달팽이처럼 움츠리면 세계를 향해 담을 쌓아 올리기만 하면 이것은 전혀 자신의 존재 목적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사랑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에서 세상 속에 성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성부께 "아버지께서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저들을 이 세상에 보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시고 사시고 죽으신 곳은 세상 안에서입니다. 만일 교회가 세상을 도피하면 그것은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세상, 그리스도께서 나시고 사시고 사랑하시고 죽으신 세상을 등지고 도피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뚜렷이 교회로서 우리 자신의 존재 목적을 이해한다면 그리고 교회가 이 방향으로 진지하게 머리를 돌린다면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에 있을 수 있는 많은 문제가 해결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에 어떤 긴장이 있다면 그것은 주로 `세계 안에서' 일어나지 않고 `교회 안에서' 일어나며, 또 문제성도 세계를 위하고 여기에 어떻게 더 잘 봉사하느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 내의 문제, 그것도 참으로 2차, 3차적인 문제로서 교회의 재정, 운영, 관리 등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마치 교회가 하나의 이권 단체같이 보이는지). 그래서 교회 헌장 4장(평신도)은 서두에서 "사목자들은 평신도들이 얼마나 교회 전체의 선익에 이바지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사목자들은 세계 구원을 위한 교회의 사명을 독점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로부터 선정된 것이 아니고 오직 모든 신도들로 하여금 공동 사업에 일치 협력하도록 그들을 사목하고 그들의 봉사와 은사(Charisma)를 인정하는 것이 자신들의 빛나는 임무임을 알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공의회의 이 말은 깊은 통찰에서 우러난 것입니다. 그리고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선교 사명, 세계 구원 사명과 이에 따르는 책임은 평신도와 성직자라는 직위 또는 직책의 구별에도 불구하고 성직자와 평신도의 `공동 사업'이기 때문입니다. 복음화는 본질상 주교와 사제들만의 일도 아니요 신자들만의 일도 아닙니다. 그것은 평신도, 성직자 또는 수도자라는 지체들로 한몸을 이루고 있는 크리스찬 공동체의 일입니다. 과연 교회는 공동체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실로 한가족이요 한집안입니다. 이 집안에 속하는 사람들의 직책은 서로 다릅니다. 한집 식구가 다 아버지 될 수도 다 어머니 될 수도 없듯이 교회의 직책도 서로 다르나 한집 식구들의 신분과 품위는 같듯이 이 교회에 속하는 사람들의 신분과 품위도 같습니다. `평신도와 성직자'의 상호 관계를 말하는 교회 헌장 32항은 이런 뜻에서 서술된 것입니다. 그것은 먼저 다양성 안의 일치를 말하면서 그 일치의 요체가 되는 `하나'를 성서 신학적으로 뜻 깊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간택된 하느님의 백성은 하나뿐이다. `주님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뿐이다'(에페 4, 5). 그리스도 안에서 재생(再生)한 지체들의 품위도 같고 자녀 되는 은총도 같고 완덕에로의 성소도 같으며 구원도 하나요 희망도 하나요 사랑도 갈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교회 안에는 민족의 차별도 국가의 차별도 남녀의 차별도 있을 수 없다"(32항).
신앙 교육과 신학 교육의 필요성 이같이 교회의 모든 지체의 품위는 같습니다. 모든 지체가 한몸이기 때문입니다. (완덕에의 성소: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외에 완덕에의 길은 없다. 평신도도 이 부르심을 받고 있다.) 평신도와 성직자는 한몸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한몸입니다. 중추신경과 같은 한 성령에 의해서 함께 인도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평신도와 성직자의 관계가 얼마나 밀접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 원리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성령과 사랑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자신과 같이 한집안 식구같이 형제같이 사랑하는 데에 평신도와 성직자의 가장 깊은 관계가 있고 또 그래야만 평신도와 성직자의 관계는 올바릅니다. 만일 서로가 기능의 차별 때문에 직책의 차별 때문에 다툰다면 그것은 교회를 하나의 인간적 이해 관계 단체와 같이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원리 원칙이요 이상이지 현실은 다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직자나 평신도나 우리는 다 인간이요 불완전하며, 그 취약성을 지니고 있고 또 죄 없다고는 아무도 말할 수 없을 만큼 다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지금까지의 교회관이나 그 체제가 성직자 위주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공의회에서 제시한 교회로 쇄신되기 위해서는 성직자이거나 평신도이거나 상당한 반성과 쇄신의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럼 우리는 무엇부터 해야 할 것인가? 제 생각으로는 먼저 교육이 필요합니다. 평신도도 성직자도 기도하면서 복음 성경과 공의회 문헌 연구를 좀더 진지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의식 구조가 변화될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쇄신을 위해서 절대로 필요합니다. 평신도들에게 요청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신들도 성세와 견진, 즉 성령의 도유로 축성된 존재, 하느님 백성의 정식 구성원(full member)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전에는 성직자는 축성된 사람이고 평신도는 그렇지 않은 양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엄격한 의미로 축성은 성세와 견진만으로써 됩니다. 전에 주교품을 받을 때 이것을 축성(Consecratio)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것을 신품으로서, 서품(Ordinatio)이라고 말합니다. 이유는 신품을 받는 것은 새로운 축성이 아니고 이미 축성된 신자들 중에 간선된 사람에게 사제직에 서품하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목자라는 직책을 주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도 위에서 말한 대로 결코 인위적인 것은 아니요 하느님 백성을 가르치고 다스리고 성화시키는 일꾼을 뽑는 성령의 일하심입니다. 신적 제정(神的制定)입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평신도는(성직자도) 교회에 있어 가장 고귀한 품위는 교황이 되는 것도 주교가 되는 것도 신부가 되는 것도 아니요 신자가 되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크리스찬이라는 것이 가장 근본적이요 또 최상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주교학자 아우구스티노는 "여러분을 위해서 내가 있다는 사실은 나에게 공포를 일으켜 주지만 여러분과 함께 있다는 사실은 나를 위로해 줍니다. 나는 여러분을 위해서 주교이지만 여러분과 함께 크리스찬입니다. 전자는 직명(職名)이요 후자는 은총의 이름이며, 전자는 위험한 이름이지만 후자는 구원받을 이름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32항 끝 참조). 교육에 있어 다음으로 지적해야 할 것은 평신도도 교회의 정식 일원이고 따라서 여기에 따르는 권리와 아울러 의무를 성직자 못지 않게 각자 처지대로 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미 교회의 사명은 주교나 신부들만의 사명이 아니요 평신도를 포함한 하느님 백성 전체의 사명임을 말했습니다. 이 인식이 교육을 통해서 우선 지도층에 있는 신자들부터라도 깊이 뿌리 박혀야 하고 또 생활화되어야 합니다. 한국 초대 교회, 그 속에도 군난 때 및 근자에도 평신도들이 한국 교회 발전에 기여한 바 큽니다. 이 훌륭한 전통을 새로운 의미로 전승시켜야 합니다. 다행히 지금 이 자리에 계시는 여러분은 다 이 같은 인식에서 이미 평신도 사도직을 열심히, 헌신적으로 수행하시지만 그러나 아직도 더 많은 분들이 이 인식을 갖게끔 교육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1975. 9. 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