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와의 만남(독일 가톨릭 청년들에게)
친애하는 여러분, 저는 오늘 독일의 젊은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이 나에게 기대하는 것은 훌륭한 말만의 강론이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구체적인 삶을 보여 주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자리에서 나의 참석 외에는 여러분에게 구체적인 것으로 보여 줄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어둠 속에 삶의 의미를 찾는 젊은이들 우리 나라에서도 젊은이는 구체적인 것을 더 기대합니다.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오늘의 한국 사회의 젊은이들은 그들이 신자이든 아니든 간에 주교인 나에게 혹은 교회로부터 무엇을 기대하고 있겠는가?" 그리고 "그들이 기대하고 있는 것은 의식, 무의식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중에서도 가난한 이들의 벗인 예수, 그들에게 말과 행동으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수, 눈먼 이에게는 시력을 주고 억눌린 이에게는 자유를 주며 묶인 이에게는 해방을 알리는 예수(루가 4, 18) 그리고 드디어는 이 모든 이를 위해서 구원의 십자가를 지고 가며 결국 그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를 보여 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주교인 내가 스스로 예수를 본받아 그의 십자가를 지고 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독일의 여러분도 여러분의 주교, 여러분의 본당 신부, 여러분이 속하는 교회에 대하여 같은 것을 기대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런 기대는 생각해 보면 온 세계가 교회에 대해서 지니고 있는 기대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사람들의 이와 같은 기대는 오늘날 그들이 체험하는 실망과 좌절을 거듭하는 가운데 희망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의미를 잃음으로써 모든 것이 어둠에 잠겨 있는 가운데서도 빛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세계는, 그중에서도 젊은 세대는 확실히 희망을 갖고 삶의 의미를 찾고 빛을 찾고 있습니다. 그들은 보다 나은, 보다 인간적인, 보다 정의로운 세계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찾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역설적인 이야기입니다. 고통과 절망, 죽음을 말하는 십자가에서 어떻게 희망과 빛을 찾는가? 그러나 여기에 깊은 진리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 저는 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지난 5월에 저의 교구의 한 젊은 사제는 26세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사인은 신장병입니다. 그런데 그는 죽기 전 약 3개월 전에 신장병에서 유발된 다른 병으로 완전 소경이 되었습니다. 불과 1개월 안에 시력을 잃게 되는 과정에서 또 그 후에도 그가 겪는 육체적 고통은 격심했습니다. 정신적 충격도 적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그는 이 갑작스러운 발병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로 지난 사순절의 어느 주일이었습니다. 그 날 저녁 제가 그를 방문했을 때, 그는 실명된 후 처음으로 기억을 더듬으며 미사를 봉헌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은 애처롭고 또 감격적이었습니다. 자신의 고통을 예수님의 희생 제물과 함께 병고에 신음하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의 기도를 바치기 직전, 그는 미사 양식에 있는 초대의 말 대신 다음 말을 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갑자기 실명을 하고 보니 누구의 안내를 받지 않고서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보다 깊이 `나는 길이다.'라고 하신 예수님 없이 이 고통에 쌓인 삶을 살 수 없다고 깨닫게 되었고 예수는 참으로 나의 길이다라고 깊이 믿게 됩니다. 우리의 길이신 예수님이 우리의 참된 삶을 위해 바치도록 가르쳐 주신 주의 기도를 함께 바치겠습니다."
고통받는 여공, 그가 바로 예수다 저는 그 순간 정말 지금까지 내가 들은 어느 강론에서보다도 이 짧은 말에서 더 깊은 것을 얻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는 그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오랜 사제 생활을 했고 그는 작년에 나로부터 서품을 받고 사제 된 지 1년밖에 안 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 예수는 나의 길이다라는 것을 믿고는 있어도 그렇게 힘 있게 남에게 전하지는 못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남을 밝혀 줄 만큼 길이신 예수님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은 그의 고통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성금요일에 그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자신의 몸으로 깊이 체험하는 것 같다고도 말했습니다. 그는 그 때 체험이라는 표현도 자신이 내적으로 느끼는 것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고 말했습니다. 이 젊은 사제는 분명히 고통 속에서 오히려 참된 빛을 얻었습니다. 고통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 사실을 통해서 동료 사제들에게도 참으로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 "나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그는 참으로 나에게 빛이신가? 길이신가? 생명이신가?" 물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와의 깊은 만남은 고통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그것 없이 우리는 그를 깊이 알 수 없고 그와 깊이 만날 수 없습니다. 왜 고통을 통해서인가? 그 이유는 자신을 열지 않고서는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열고 비우지 않고서는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열고 비우는 것은 예리한 칼날에 심장이 찔리는 아픔이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원을 받아들이기 위해 유한은 깨져야 합니다. 또 하나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한 3년 전입니다. 저는 우리 교구 JOC 지도 신부의 안내로 마더 데레사와 같이 캘커타에서 사랑의 선교 수사회(Missionary Brothers of Charity)를 세운 그 회의 총장인 앤드류 수사, 이렇게 두 분과 함께 서울에서, 공장에서 일하는 젊은 근로자들과 자리를 같이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벨라데타라고 하는 한 여성 근로자가 자기의 생활을 보고했습니다. 우선 그는 자신이 일하는 공장의 작업 환경, 함께 일하는 근로 여성들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그곳은 조그마한 공장으로서 작업 환경은 형편없는 곳이었습니다. 위생 시설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고 식당도 없어서 그들은 옥상에서 비오는 날엔 천막을 치고 도시락을 먹어야 했습니다. 노동 시간은 8시간 노동을 지키지 않고 그 배나 되는 고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거기다 함께 일하는 아이들은 대개 다 젊고 어린 20세 미만의 여자들이었고 그리고 교육 수준도 6년제 초등 학교밖에 나오지 않은 아이들이나 또 시골에서 올라온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노동자로서의 긍지나 의식은 없었고 자신들이 착취당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는 처지였습니다. 그들이 찾는 것은 여가엔 쉬는 것, 화장으로 꾸미는 것뿐이었습니다. 벨라데타는 여러 해 동안 JOC 활동을 해 온 처녀로서 이들의 문제를 알고 그들에게 노동자로서의 긍지를 심어 주고 인간 존엄성을 깨우쳐 주려고 무척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다 허사였습니다. 그는 몹시 괴로워했습니다. 아무 것도 얻어내지 못했습니다. 그럴 때 어느 날 이 여성은 "도대체 이런 곳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교회는 우리를 보고 이런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찾고 증거하라지만 그것은 아무런 쓸모 없는 가르침이다. 이런 것을 요구하는 교회, 추기경도 주교도 신부도 결국 위선자들이다. 바리사이들이다. 자기들은 여기서 살지도 않으면서 우리들 힘 없는 노동자들을 보고는 늘 그리스도를 증거하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 때, 저보고 "그리스도는 그 공장 어디에 계십니까? 계시면 왜 우리를 위해서 아무 것도 해주지 않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얼른 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저 스스로 벨라데타의 말 그대로 그들 속에 살지 않고 있고 그들의 아픔을 체험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때 캘커타에서 온 앤드류 신부가 "벨라데타, 바로 당신이 그 공장에서 일하는 아이들에게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에서 고통을 겪고 절망하신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 계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위해서는 그 가난한 여공들이 역시 고통받는 예수님이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한참 후에 벨라데타는 "그것을 저는 깨닫지 못했군요. 저는 늘 예수님을 우리의 고통 속에서가 아니고 그 밖에서 고통을 제거해 주는 분으로 찾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정의를 위해 위험도 무릅써야 그 이후 벨라데타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고통 속에 들어와 계신다, 나와 함께 역시 약한 자로 살고 계신다, 이렇게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작년에 그는 가난한 노동자들과 함께 사는 프라도 수녀회의 한 사람이 되어 지금은 더욱 기쁘게 가난한 사람들 속에 살면서, 그들과 계속 삶을 나눔으로써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벨라데타 역시 고통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더욱 깊이 만났습니다. 십자가가 빛이 아니고서 이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십자가가 빛이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그 안에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이 가장 잘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 안에 가장 깊은 의미로 사랑이시요 생명이신 하느님이 현존하십니다. 우리의 고통 속에 들어오시어 우리와 고통을 나누시는 하느님, 우리의 고통과 약함을 대신 지시는 하느님이 현존하십니다. 하느님은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씀대로 우리 자신보다도 우리에게 더 가까이 계시는 분으로서 고통 속에서 참으로 우리와 일체되십니다. 바로 이 때문에 십자가는 우리의 빛입니다. 우리를 구하는 구원의 힘입니다. 또한 부활한 생명의 원천입니다. 그 때문에 십자가는 죽음에 처한 인간에게 가장 큰 희망입니다. 저는 오늘날의 세계는 분명히 그 어느 때보다도 해방을 갈망하는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진리와 정의가 증진되고 인간 존엄성이 존중되기를 가장 바라는 세대가 오늘입니다. 그래서 비인간적인 모든 예속에서 해방되기를 갈구합니다. 이는 어쩌면 제3 세계에서 두드러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해방을 바라는 그 갈구에 대한 답은 무엇입니까? 그 힘은 어디에서 옵니까? 폭력입니까? 혁명입니까? 우리는 물론 이 답을 찾고 힘을 얻기 위해 인간 존엄성을 강조하고 정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위험도 따르고 박해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를 무릅쓰고 우리는 투쟁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정의 추구, 투쟁에 있어서 우리는 언제나 그리스도를 본받아 진정 사랑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붙이겠다는 마음가짐을 지녀야 합니다. 우리 안에 이 십자가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는 분명히 힘으로써, 기적으로써, 혹은 지혜로써, 세상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어리석은 십자가로써 세상을 구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허약함을 받아 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지셨습니다"(마태 8, 17). 이것이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하는 길입니다. 그리스도가 고통의 현장 속에 들어가 계시는 데 우리는 그 가장자리에 서서 방관만 한다면 우리는 세상을 구할 수도 없거니와 그리스도를 만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잃는 사람은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또 "밀씨는 땅에 떨어져 썩어야 많은 결실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밀씨가 땅에 떨어져 썩듯이 오늘의 교회도 그 밀씨처럼 땅에 떨어지고 또 그 속에서 썩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독일의 가톨릭 청년 여러분, 여러분은 이 말씀을 여러분의 삶의 이상으로 삼지 않겠습니까? 세계는 특히 제 3세계는 여러분의 이 사랑과 희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198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