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

제 1 장 모든 이가 하느님 백성으로 일치되기 위해 - 8 -

문성식 2011. 2. 20. 23:06
 

모든 이가 하느님 백성으로 일치되기 위해(교구장 사목 교서)

 

 

모든 이가 하느님 백성으로 일치되기 위해(교구장 사목 교서)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서로 도와 주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이는 사도 행전 2장 42절에 나오는 말씀으로서 성령 강림 직후 태어난 첫교회가 얼마나 성령에 감도되어 믿음과 사랑으로 일체가 되어 있었는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이 같은 일치의 아름다운 모습은 사도 행전 2장 44절에서 47절 4장 32절에서 37절에 다시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그들은 믿음에 일치해 있었을 뿐 아니라 재산까지 공유함으로써 동고 동락하는 진정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성령 강림 날 모여든 군중은 결코 단일적 성격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모두 유다교를 믿는 사람들이긴 하였지만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뿐 아니라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리비아 그 밖에 여러 지방, 여러 언어에 속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이질적인 사람들이 이렇게 한 가정의 형제 자매처럼 하나가 된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이는 참으로 성령의 일하심이었습니다. 서울 대교구는 올해 `하느님 백성의 일치'를 사목 목표로 삼으면서 이 성경 구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짧은 구절 속에 하느님 백성의 일치의 원리와 원칙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백성의 일치는 힘에 의한 일치는 물론 아니요 또 제도만의 일치도 아닙니다. 또 그것은 단순히 감상적 마음의 일치만도 아닙니다. 이 일치는 성령에 인도되어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의한 그리스도 안에 한몸을 이루는 일치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같이 믿고 거기에 모든 소망을 함께 걸며, 서로 형제와 같이 사랑하는 일치입니다. `본당 공동체와 사목 협의회'(김윤주 편역, 분도 출판사 발행)라는 책자 10항에 보면 본당이 공동체로서 가진 기능으로서 세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31-35면).
1) 하느님 말씀의 선포
2) 전례 생활
3) 애덕의 증거
이 세 가지 기능이 상호 작용하면서 함께 있을 때에 본당은 공동체로 성립되고 또 생활한 것이 됩니다.
이는 위에 인용한 사도 행전의 말씀과 그 정신에 그대로 부합됩니다.
1)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하느님 말씀의 선포
2) 빵을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전례 생활
3) 서로 도와 주며=애덕의 증거
이렇게 순서의 차이는 약간 있고 또 `빵을 나누는 것'에는 전례와 아울러 `애덕의 증거'되는 음식을 함께 나누는 뜻이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정신에 있어서 바로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 세 가지 점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는다=하느님 말씀의 선포
짧은 표현이지만 우리는 사도들이 무엇을 가르쳤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령 강림 날에 있은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사도 1, 14-36)에도 잘 나타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말하는 복음이었습니다. 하느님 백성의 일치를 위해서 공동체 안에 이 복음 곧 하느님 말씀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계속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믿음을 가지고 믿는 이들의 공동체가 형성되고 또 성장 발전하며 끝내는 전 인류를 포괄하는 하느님 백성의 일치가 이룩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믿는 이의 삶의 방식이요 따라서 공동체의 삶의 양식, 발전과 성장의 원동력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지 않으면 어떤 공동체도 죽습니다. 믿음이 살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느님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성현들이 남긴 뜻 깊은 말씀과 같은 것만이 아닙니다. 윤리적인 가르침, 삶의 지혜(예지)를 말해 주는 것만이 아닙니다. 또 하느님 말씀은 신학적, 성서적 지식이 아닙니다. 하느님 말씀은 그 자체로서 생명이 되고 빛이 되고 구원이 되는 말씀, 곧 생명의 말씀, 빛의 말씀, 구원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창세기에서 보듯이 맨 처음 "빛이 있으라."는 말씀부터 시작하여, 빛을 창조하고 우주 만물을 창조하였으며 생명을 낳고 기르며 인간을 낳고 살리며 역사를 형성하는 등 창조의 힘, 생명의 힘을 가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 말씀은 바로 "혈육을 취하신 하느님의 말씀"(요한 복음 시작; 교회 헌장 9항)-곧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의 말씀-예수 그리스도로 이해됨으로써 믿음의 대상이 되고 인격이 됩니다. 하느님 말씀이 혈육을 취하여 강생하셨고 강생하신 그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심은 누구보다도 요한 복음이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요한 1장). 다른 복음에서는 이렇게 직접 표현은 하지 않았으나 예수님의 말씀 자체가 죄를 사하고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일으키며, 구원을 가져오는 힘을 가졌다는 것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한마디 말씀으로 하느님 나라가 와 있다는 증거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예수님은 단지 예언자만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이 구약의 예언자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한다는 그런 표현은 신약에서는 한군데도 없습니다. 그분은 말씀의 주체, 주인공이라는 것을 복음 사가들은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당신 자신의 권능으로 제자들에게 풀고 맺는 권한(마태 18, 18), 죄를 사하고 사하지 않는 권한(요한 20, 23)을 직접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당신의 말씀으로 하느님과 인간의 새로운 계약을 세우셨고 그 표증으로 최후 만찬에서 성체 성사를 세우셨습니다(마태 26, 6). 우리가 또 사도 행전이나 사도들의 서간을 보면 더욱 뚜렷이 그들이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 한 예를 들면 사도 행전 13장 26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아브라함의 후손인 형제 여러분, 그리고 하느님을 공경하는 이방인 형제 여러분, 이 구원의 말씀은 바로 우리에게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과 지도자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단죄하였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잘 나타나듯이 예수와 구원의 말씀은 같습니다. 예수가 구원의 말씀이요 구원의 말씀이 예수입니다. 예수가 곧 하느님의 말씀, 창조의 힘, 생명을 가진 바로 그 하느님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사도들은 말씀을 전하는 데 전심 전력을 할 뿐 아니라, 목숨까지도 바치셨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말씀을 전하는 것은 우리가 오늘날 교리를 가르친다거나 강론을 통해서 교리적이요 윤리적인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요 바로 그 말씀 속에 그 말씀으로 우리 안에 살아 계시고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를 또 하느님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요한은 "우리는 생명의 말씀에 관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그 말씀은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듣고 눈으로 보고 실제로 목격하고 손으로 만져 보았습니다. 그 생명이 나타났을 때에 우리는 그 생명을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증언합니다…."(1요한 1, 1-2)라고 말합니다. 이 사도 요한의 말에서 우리는 분명히 그가 말하는 `말씀'이 어떤 의미와 깊이를 가졌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이 그냥 `말'이면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눈으로 보고 실제로 목격하고 손으로 만져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그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눈으로 보고 실제로 목격하고 손으로 만져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생명이라고 지적하며 또 천지 창조 이전부터 계셨다고 합니다. 이는 결국 본시 하느님의 성자로서 천지 창조 이전부터 계셨고 천지를 창조한 하느님의 말씀, Logos가 혈육을 취하여 강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하느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강조하는 것은
1) 우리가 듣는 복음 말씀 안에 그리스도께서-마치 성체 성사 안에 현존하시듯이-현존하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점은 개신교에 비해서 우리 가톨릭은 아주 인식이 부족한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공의회 이후 새 전례의 정신에 따르면 성당에는 감실 속에 성체를 모실 뿐 아니라 성경도 제대에 모셔 두는 것이 원칙입니다.) "성경 안에 예수님이 계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안에 적힌 말씀을 읽고 믿고 선포할 때, 거기 예수님은 또 하느님은 성령을 통해서 현존하십니다. 그래서 말씀을 `말씀의 성사'라고도 합니다.
2) 그리고 더 중요한 이유는 하느님 백성의 일치란 먼저 믿는 이들의 일치인데 믿음을 처음으로 가지게 하고 끊임없이 새롭게 하고 활기 차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3) 우리는 또한 그 말씀 안에 그리스도와 만나고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그리스도의 정신을 배우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고 이를 거울 삼아 계속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고쳐 나갈 수 있습니다.
4) 하느님은 당신을 주로 말씀을 통해 계시하셨습니다. 업적을 통해서도 계시하셨고 또 하고 계시지만 마지막에는 말씀을 보내어 계시를 완성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만날 수 없고 하느님과 만날 수 없다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우리는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으며, 믿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맺게 되며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음으로 성삼위 일체의 사랑의 친교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하여 사도 요한은 앞에 인용한 말씀에 이어서 "우리가 보고 들은 그것을 여러분에게 선포하는 목적은 우리가 아버지와 그리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는 친교를 여러분도 함께 나눌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의 선포는 곧 하느님 백성의 일치를 위해서 하느님과의 친밀한 일치, 그 일치 안에 모든 이가 `하나' 되어 서로 친교를 맺기 위해서입니다. 계시 헌장은 "하느님은 당신 인자와 지혜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고 당신 성의(聖意)의 비밀을 알게 하셨으며, 이로써 인간은 혈육을 취하신 말씀, 즉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성부께로 가까이 나아가고 천주성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이 계시로써 당신의 넘치는 사랑으로 마치 친구를 대하듯이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인간과 사귀시며 당신과 공동체를 이루도록 인간을 부르시고 받아들이신다."(계시 헌장 2항)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의 첫 신자들이 함께 사도들의 가르침을 들었듯이 우리도 그렇게 경건한 마음으로 말씀의 선포에 귀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미사 성제 때 말씀의 전례를 더 엄숙하게 더 효과 있게 거행할 뿐 아니라, 신자들의 단체 모임(사목 위원회, 반상회 등 사도직 단체 모임)에서 `말씀'을 함께 듣고 함께 기도하고 묵상하며, 서로 나누는 기회를 자주 갖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은-믿는 이들을 낳고 믿음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계속 말씀의 생명력으로 생활케 하며, 이렇게 생동하는 공동체는, 다시 하느님의 말씀을 더욱 살아 있는 생명의 말씀으로 전파되게 합니다. 교회의 성장이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의 전파입니다. 말씀의 전파 없이 교회의 성장이 없고 교회의 성장 없이는 하느님의 백성의 일치는 없습니다. 일치는 지금 믿는 사람들끼리 보다 밀접한 친교를 맺자는 데도 의미가 있지만 그것은 소극적인 일치입니다. 적극적인 일치는 말씀을 줄기차게 전파해서 믿지 않는 이들이 우리와 같이 믿는 이가 되고 그리스도 안에 하나가 되게 하는 데 있습니다. 한국 겨레가 다 믿음 속에 하나 되면 이 얼마나 뜻 깊은 일치입니까? 드디어는 온 인류가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민족, 국경, 인종, 남녀의 차별을 초월해서 하나 되면 이것이 또 얼마나 소망스러운 일입니까? 하느님이 원하시는 일치는 궁극에는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공동체가 말씀을 간직하고 살 뿐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많은 말씀의 봉사자가 나와야 합니다(2백주년 신자 배가 운동, 신앙 대회의 의미). 이방인들의 사도인 바오로는 얼마나 하느님 말씀, 복음을 전하는 데 집중하였는지 미쳤다는 말을 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미쳤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위해서 미친 것이고 우리가 온전하다면 그것은 여러분을 위해서 온전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그토록 강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2고린 5, 13-14). 이 바오로는 복음 때문에 감옥에 갇혔고 감옥에서도 편지를 써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시면서 "나는 이 복음을 위해서 고통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이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닙니다"(2디모 2, 9). 바오로를 감옥에 가둔 쇠사슬도 말씀을 묶어 둘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은 박해와 시련에도 불구하고 더욱 전파되었습니다. 이렇듯 말씀과 공동체는 상관 관계에 있습니다. 말씀이 공동체를 낳고 살리며 공동체가 말씀을 더욱 생활하게 합니다. 만일 공동체가 생명력을 잃고 만다면 말씀도 생명력을 어떤 의미로 잃게 될 것입니다.

2. 빵을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함=전례 생활
빵을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함을 우리는 한마디로 전례 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미사 성제가 가장 중심이 됩니다. 사도 행전에 나오는 "빵을 나누고"란 말이 반드시 미사 성제, 곧 성찬례로 해석할 것인지 아닌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그러나 2장 46절에 보면 역시 초대 교회의 신자들이 얼마나 서로 믿음으로 친교를 맺고 살았는지를 말하면서 "한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빵을 나누고"와 "음식을 함께 먹었다"가 구별되어 있습니다. 이런 구별로 보아서 "빵을 나누는 것"이 오늘 우리가 말하는 성찬이었든지 적어도 이에 가까운 종교적 친교의 의미를 담은 것이 아니었겠나 생각됩니다. 초대 교회는 사도 행전 20장 7절에 나오는 말씀으로 보아 대개 한 주에 한 번씩 안식일 다음날, 곧 오늘날의 주일에 주의 만찬을 지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빵을 나누는 것이 매번 성찬을 의미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수난하시기 전날 저녁에 "빵을 나누심으로" 성찬례를 이룩한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사도들은 주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 비록 빵을 나눌 때마다 성찬례를 지내지 않았다 할지라도 주님과의 그 마지막 만찬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런 의미로 초대 교회가 빵을 나눈 것을 성찬례, 곧 미사 성제의 뜻으로 알아듣고, 이것과 하느님 백성의 일치와의 깊은 상관 관계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성찬례 곧 성체 성사가 의미하는 것은
1) 주께서 우리를 당신의 몸과 피로 양육하신다는 것과
2) 그럼으로써 우리를 당신과 일치시키고
3) 또한 우리 서로를 일치시킨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본질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1) 먼저 양육이라는 요소는 요한 6장에서 힘 있게 강조되어 있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요한 6, 54). 예수의 생명, 예수의 영이 이 성사를 통하여 우리를 살리고 또 육신이 죽은 후에도 끝날에 부활시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할 것입니다.
2) 그리스도와의 일치도 같은 6장 56절에서 잘 말하고 있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3)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니, 곧 성체를 모시며 사는 모든 이 안에 사시니, 성체를 모신 모든 이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분의 영을 통해서 일치됨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고린토 전서 10장 16절에서 17절에 다음과 같이 명백히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감사를 드리면서 축복의 잔을 마시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를 나누어 마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빵을 떼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어 먹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그 한 덩어리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비록 우리가 여럿이지만 모두 한몸인 것입니다." 이 한마디 말씀에 성체 성사를 통한 우리와 그리스도의 일치 또 우리 상호간의 일치가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했는데 그 근본 이유는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를 모두가 함께 모심으로써 한몸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성체 성사와 하느님 백성의 일치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전례 헌장은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을 인용하여 성체 성사를 가리켜 "자비의 성사요 일치의 표징이요 사랑의 맺음"이라고 천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성체할 때에 대체로 이 성체 성사가 영적 양식이라는 생각 또는 이 성사로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얻는다는 생각은 갖지만 우리 서로가 그리스도의 한몸을 이룰 만큼 깊이 일치된다는 생각을 얼마나 지니고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런 반성 위에 성체를 모실 때에 믿는 모든 이들은 참으로 생활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더욱 깊이 일치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치에서 우리는 교우 형제들에게 어떻게 대하여야 할지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체를 모실 때 그리스도만을 모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면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리스도와 결합된 모든 이를 어떤 의미로 자신 안에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이 형제들을 제쳐놓고 그들을 거부하면서 그리스도를 모신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을 사랑하고 모신다면 그분이 사랑하는 모든 이를 함께 내 안에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이 점과 관련해서 다음으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성체 성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분의 수난, 십자가상의 죽음을 기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살리고 사랑으로 하나로 만들기 위해서 당신 자신을 희생시켰다는 것입니다. "내가 땅에서 높이 들리게 될 때에는 모든 사람을 이끌어 나에게 오게 할 것이다"(요한 12, 32). 당신이 십자가상에 높이 달려 죽으심으로써 그 사랑의 희생을 통해서 모든 이의 일치마저 오게 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세상에 평화를 가지고 오고 서로 원수였던 유다인과 이방인을 화해시켜 하나의 새 민족으로 만들었다."고 말씀하셨고(에페 2, 14)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은 사람들 사이에는 유다인이나 그리이스 사람의 차이도 없고 자유인이나 노예의 차이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의 차이도 없다. 그리스도 안에 한몸이다."라고 했습니다(갈라 3, 28; 골로 3, 11). 말하자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과 일치를 위해 모두 한몸을 이루기 위해서 남김없이 당신을 주신 것입니다. 당신의 전 존재, 생명까지 바치고 또 성체 성사에서 보듯이 우리의 음식으로까지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이 같은 전적인 사랑과 희생이 하느님 백성의 일치의 바탕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 역시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신을 사랑으로 내줄 때에 참으로 일치가 이룩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애덕의 증거, "서로 도와 주다"가 자연적 귀결로 나옵니다.

3. 서로 도와 주다=애덕의 증거
초대 교회에서 "서로 도와 주다"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사도 행전 2장 44절에서 47절에, 또 4장 32절에서 35절에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 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한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우러러보게 되었다"(사도 2, 44-47). "그 많은 신도들이 다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팔아서 그 돈을 사도들 앞에 가져다 놓고 저마다 쓸 만큼 나누어 받았기 때문이다"(사도 4, 32-35). 초대 교회는 명실 공히 공산주의적 공동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국가 자본주의적 현대 공산주의 체제와는 판이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복음 정신, 특히 다음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한 것 같습니다. "나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집이나 재산 등 자기가 가진 모든 것과 자기 자신까지 끊고 나를 따르라."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덕을 구하라. 나머지 것-衣食住-은 덤으로 주시리라." "하늘 나라를 얻고자 하면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신 말씀들을 그대로 살고자 한 데서였다고 봅니다. 이 같은 형제애와 상부 상조의 재산 공유 생활은 오늘날 수도 생활에서 어느 정도 그 형태를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는, 수도 단체를 제외하고는 이런 생활을 하는 데는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리스도 교회의 공동체로서의 이상형임은 틀림없습니다. 오늘날에는 여러 가지 여건에서 이 같은 이상을 문자 그대로 실현시킬 수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이 이상을 주어진 여건 속에서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이라도 실현시키려고 노력은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마음만 고쳐 갖는다면 우리의 이웃, 가난한 이웃을 진정 형제로 본다면 또 그들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마태오 복음 25장 31절에서 46절의 말씀을 실천해 보려고 한다면, 우리는 이 사회 안에서, 우리의 본당 안에서, 우리 이웃에게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웃 사랑을 실천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자선뿐 아니라 신용 조합, 소비 조합 등을 통해서, 그것을 그리스도교적 이웃 사랑으로 운영하여 우리 안에서부터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더는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문제는 사랑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더 데레사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은 실로 모든 종류의 병자, 고아, 죽어 가는 사람 등 버림받은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어머니 같은 사랑, 형제적 사랑으로 대하고 돌보고 있습니다. 전 세계 교회 안에서 그분만큼 그리스도의 복음적 사랑을 증거하고 있는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그는 교회 내에서뿐만 아니라 인류 세계 속에서 별처럼 빛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1979년도 노벨 평화상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이 사랑은 하느님 백성의 일치를 위해서 절대적인 요건입니다. 이 사랑 없이 하느님 백성은 일치될 수 없습니다. 한국 교회가 오늘날 보다 더 발전해서 많은 성당, 많은 단체 화려한 건물, 시설, 사업이 있다 할지라도 이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도 바오로의 사랑의 아가(雅歌)(1고린 13)에서처럼 우리가 외적으로 어떤 좋은 일을 한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비록 외적인 발전이 적고 수적으로 여전히 미약하더라도 교회가 이 사랑을 증거할 수 있다면 한국 교회는 참으로 살아 있는 교회 될 것입니다. 1984년 선교 200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 모두가 바라는 교회는 궁극적으로 이 같은 사랑, 곧 그리스도의 사랑에 가득 찬 교회 되는 것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