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와 해방과 성장의 동반자로서(APHD 실행 위원회 회의 강론)
참된 동반자 되기 위해 저는 오늘 이 미사에 함께 하시는 모든 분을 환영합니다. 특별히 한국까지 오신 외국의 대표들을 환영하고 여러분의 방문이 즐겁고 보람되기를 바라며 기도드립니다. 저의 오늘 강론은, `동반자 되기 위해'라는 제목이 붙은 APHD(아시아 인간 발전 협력체)의 1988년도 보고서의 시작 부분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먼저 이 문서를 작성하는 데 참여하신 분들에게 찬사를 보내는 바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그 내용이 아주 깊고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들 뿐 아니라 또한 매일의 체험을 신앙의 눈으로 보고 생각할 때 그 결과가 얼마나 좋은지를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APHD 실행 위원회 여러분은 그 내용을 잘 아시겠습니다만 이 자리에 참석한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저는 이제 APHD에서 동반자(Partnership)라는 말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 뜻을 음미해 보기 위해 세 구절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APHD, 즉 아시아 인간 발전 협력체 모임은 아시아, 유럽,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의 22개 가톨릭 개발 기구로 이루어진 모임이며 자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시아의 가난한 사람들, 즉 자신들의 개발을 위해 투쟁하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함으로써 그들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의 모든 면에 있어 주체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기구입니다. 참된 동반자는 주는 쪽이나 받는 쪽 양자가 함께 꾸준히 노력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동반자 되는 길은 언제나 쉬운 것이 아닙니다. 주는 쪽은 굶어 죽어 가는 어린이 모습을 아시아의 상징으로 생각하는 것을 머리에서 지워야 하고 받는 쪽은 오랜 세월에 걸쳐 주는 쪽의 거만한 자세로 말미암아 입게 된 상처로부터 치유되어야 합니다. 호주의 원주민 릴라 와트손은 이렇게 썼습니다. "당신이 나를 돕기 위해 여기 왔다면 그것은 시간 낭비입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 자신의 해방이 나의 해방에 매여 있기 때문에 왔다면 우리 함께 일해 봅시다." 이 짧고 소박한 말은 여러분이 설정한 인간 개발의 시발점과 목표가, 많은 근본적 문제들을 깊이 생각하게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 근본적 문제들이란 문화, 그리스도교적 나눔, 가난의 원인과 참된 해방의 요소 등입니다. 시간 관계상 저는 그리스도교적 나눔에 대하여서만 몇 가지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눔의 핵심은 함께 하는 것 여러분은 동반자란 아시아의 가난한 이들과 함께 있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함께 있다는 것, 이것은 그리스도교적 나눔의 핵심을 말하며 동시에 분별 없이 베푸는, 이른바 자선이 지닌 결함을 간접적으로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교적 나눔이란 마치 가난한 이들에게 돈이나 옷 또는 식량을 주는 것처럼 생각하는 잘못을 쉽사리 저지를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런 것을 주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첫째로 무엇보다도 우리는 돈이나 물질적인 것이 문제 해결인 양 생각하는 것을 고쳐야 합니다. 그런 것이 문제 해결이 아닙니다. 불의한 사회 구조를 고치고 우리 각자의 마음에서 악을 씻어 내는 것, 이것이 문제의 궁극적 해결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가난한 이들의 굶주림을 단지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고 보다 근본적인 것이며, 그것은 그들도 인간으로 인정받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 번째로는 성찬, 즉 성체 성사는 그리스도교적 나눔이 결코 넘쳐흐르는 데서 상징적으로 베푸는 선물이 아니라는 것을 잘 말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로는 그리고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 우리의 삶, 우리의 시간, 우리의 지식 또는 우리의 가치를 나누느냐 아니면 우리의 소유를 나누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나누느냐는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나누느냐에 따라서 이 일에 관련된 모든 사람을 인간화시킬 수도 있고 반대로 비인간화시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나눔은 힘의 행사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무엇을 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나를 힘 있는 자의 위치에 놓기 때문입니다. 힘은 지배하고 조작하고 통솔하는 데 쓰여질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파괴하는 데 쓰여질 수 있습니다. 또한 동시에 힘은 봉사하고 해방하며 무한한 성장을 위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이를 보장하는 데 쓰여질 수 있습니다.
`모든 이가 하나 되는' 복음이 중심 많은 형태의 나눔이 수혜자를 격하시킴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합당치 못한 나눔이 동시에 주는 사람 역시 비인간화시킨다는 것은 그다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 때문에 앞에 인용한 호주 원주민 여자의 말이 참으로 옳다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당신이 나를 돕기 위해 여기 왔다면 그것은 시간 낭비입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 자신의 해방이 나의 해방에 매여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왔다면 우리 함께 일해 봅시다." 동반자에 관한 여러분의 문헌에서 제가 의견을 조금 달리하는 한 구절이 있습니다. 즉 "동반자로 가는 길은 언제나 쉬운 것이 아니다."라고 한 말을 저는 "동반자로 가는 길은 절대로 쉽지 않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동반자가 된다는 것은 타인을 지배하고 소유하고 윗자리에 있고 통솔하고자 하며 타인 위에 힘을 행사하고 그들로 하여금 어떻게든지 내게 빚진 사람들로 만듦으로써 그들을 내 소유로 삼으려는 무의식적 욕망에서부터 나를 비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뜻에서 동반자라는 것은 바로 복음의 그 중심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최후의 만찬에서 "아버지,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모든 이로 하여금 하나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신 예수님의 마음의 중심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금 APHD를 창설하신 분들과 현재의 회원들이 이같이 진실로 그리스도교적인 비전을 표명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데 힘을 다하고 있음에 찬사를 보냅니다. 그럼 이제 이러한 안목이 널리 전파될 수 있도록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하고자 미사 성제를 거행합시다.
(1990. 5. 21. 장충동 분도 회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