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

제 1 장 모든 이가 하느님 백성으로 일치되기 위해 -11 -

문성식 2011. 2. 20. 22:52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아시아(마닐라 복음화 회의 강연) 제 1 장 - 11 -

 

 

일상 속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필요성
1. 그리스도 안에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보낼 수 있었던 이 며칠 동안은 기도와 나눔으로 가득 찬 아름다운 날들이었습니다. 이 회의를 거의 마무리하는 시간에 저는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아시아'라는 주제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본주제에 들어가기에 앞서 여러분들과 함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우리들'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아시아인으로서 우리 자신의 일상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필요성을 체험했을 때에만 그리스도에 대한 아시아의 필요성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한국, 필리핀, 인도, 중국인으로서 체험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필요성은 아프리카인과 유럽인 그리고 인간 각자가 체험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필요성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와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고 있음을 믿습니다. 이건 신앙과 체험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기원을 회고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만민의 유일한 구세주요 그분 홀로 하느님을 계시하고 하느님께로 만민을 인도할 수 있는 분이심을 인정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교회의 선교 사명 5항)라고 교황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인류를 비롯하여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창조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골로 1, 16). 만물의 근원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리스도는 만물의 목적이십니다. 인간의 죄악이 이 기본적 질서를 무너뜨리고 죽음과 자연의 파괴를 가져왔을 때 그리스도는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을 내어 주심으로써 죄의 용서와 부활에 대한 희망과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인류에게 가져다 주셨습니다. 약 20년 전인 1974년 아시아 주교 회의 총회가 처음으로 타이베이에서 개최되었을 때 우리 주교들은 성명서를 발표한 바 있습니다. 이 성명서 안에서 아시아 주교들은 "우리 민족들이 추구하는 목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 안에서, 그의 복음을 통하여 그리고 그리스도의 넘치는 성령을 통해서만이 실현"될 수 있음을 천명한 바 있으며 이어서 곧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 안에서만이 아시아인들이 추구하는 가치의 충만한 의미와 해방과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새겨진 소망인 형제적 사랑과 평화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수많은 종교, 문화의 정신적 전통들
2. 이 말이 뜻하는 바는 하느님의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강력한 효력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신자로서 이 사랑, 즉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이 사랑의 필요성을 인정한 것입니다. 아시아는 이 사랑을 필요로 합니까? 그렇습니다. 확실히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누구나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고 용서와 치유를 베푸시는 이 근본적 사랑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도대체 사랑의 절대적 실체를 만나기를 소망하지 않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모든 인간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하느님께 대한 목마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 영혼이 마침내 하느님 안에 안식을 얻을 그 때까지 찾아 헤매게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시아에는 수많은 종교와 문화의 정신적 전통들이 있습니다. 아시아는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 풍요로운 정신적 유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존하는 대종교들이 모두 아시아에서 기원하였습니다. 가장 잘 알려진 종교만 예로 들더라도 유다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조로아스터교, 힌두교, 불교, 유교, 도교… 등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많은 종교들이 아시아를 지상의 천국으로 만들어 주지는 못했습니다. 반대로 아시아는 종교, 문화, 인종적 차이점으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여기다가 아시아의 현대 역사는 새로운 분열들을 더해 주고 있는 실정입니다. 경제적 불평등과 이념의 차이는 국가 간에는 물론 심지어는 한 국가 안에까지도 인간 사이에 분단의 벽을 쌓게 하고 있습니다. 특히 나의 조국, 한반도의 비극적 분단과 중국 본토의 중화 인민 공화국과 대만의 자유 중국이 그 실례입니다. 이러한 모든 분열들은 긴장과 심지어는 전쟁과 물리적 알력을 일으키고 있으며 치유되기 힘든 깊은 상처와 원한을 사람들 마음속에 남겼습니다. 이외에도 얼마나 많은 아시아인들이 빈곤과 질병에 시달리고 있으며 자연적 재난으로 인한 불행과 고통 중에 살고 있습니까?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참으로 인간다운 삶에 대한 희망을 잃은 채 절망과 좌절에 허덕이고 있습니까? 누가 이들에게 미래의 희망과 길을 열어 줄 수 있을 것이며 누가 이들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습니까? 아시아, 아니 전 인류가 평화와 화해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아내야 할 것입니다. 3. 누가 그리고 무엇이 참된 평화를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겠습니까? 누가 그리고 무엇이 알력과 분열로 상처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해 줄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 화해와 용서를 가져다 줄 수 있습니까? 한때는 많은 사람들이 마르크시즘과 공산주의에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응답과 희망과 기대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동유럽의 몰락은 이러한 꿈들이 그릇된 것이었음을 명백하게 보여 주었고 이 이념을 선전한 자들에게 배신당했음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물론 이는 결코 하나의 세계, 부의 공정한 분배에 대한 이상과 이념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러한 이상과 이념은 아직 이룩되지 못한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갈증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저는 자본주의가 알력과 분열로 인한 아시아인들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길을 가지고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자본주의가 그 경제 발전의 원리와 함께 적절히 통솔된다면 아시아 전역에 경제 발전을 추진시킴으로써 빈곤한 국가들과 부유한 국가들 간의 빈부의 격차를 좁힐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인간 실존의 궁극적 질문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는 왜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해야 하는가? 고통과 죽음은 왜 있는가?" 등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도대체 인류와 세계에 대한 비전이나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인류에게 구원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에 도움 되는 타종교들
4. 우리는 아시아의 종교들과 문화들이 이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있는지 과감한 물음을 던져 보아야 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나라들은 토착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로 가난한 사람들, 특히 곤경에 처한 사람들이 여기에 의존합니다. 중국에는 도교, 한국과 여러 나라에는 샤머니즘이 있으며 일본에는 신도가 있습니다. 이러한 종교들은 그 신봉자들에게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겠지만 보편적 호소력이 없으며 특정 지역의 범위를 넘지 못하고 생생한 희망의 메시지를 모든 사람에게 제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수세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러 나라의 종교적 사상과 도덕적 철학에 깊은 영향을 끼치면서 폭넓게 연구되고 있는 경전과 종교 예식을 가지고 있고 많은 이가 거기에 따라 살고 있는 유교, 불교, 힌두교 혹은 이와 유사한 종교에 이르면 문제는 다릅니다. 이러한 종교들은 명백히 인간 실존의 깊이를 드러내고 인간의 도덕적 삶을 함양하는 종교들로서 영원한 생명을 불러일으키는 한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에 도움이 되는 종교로 고려될 수 있을 것입니다. 유교에서 가르치는 인(仁)과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심은 그리스도교의 사랑과 일맥 상통하는 것입니다. 또한 길을 의미하는 도교의 도(道)에 대한 개념은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로고스'에 가까운 의미와 깊이를 함축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공자나 석가모니나 노자를 들어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이시다." 혹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즉 임마누엘이다."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들 자신들이 이러한 주장을 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분들을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안내자 또는 스승으로, 참된 생명이신 그리스도께로 가는 길을 준비해 주는 분들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5. 한국에 가톨릭교가 들어온 것은 200년 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한국에 들어오게 된 경위는 대단히 뜻 깊습니다. 즉 이는 선교사들이 파견되어 와서 가르침으로써 혹은 식민지 지배국이 자기 문화를 강요함으로써가 아니라 조선의 유교 학자들이 `천주실의'라는 중국어로 된 마테오 리치의 저서를 접하게 됨으로써였습니다. 이 학자들은 유교에 통달했을 뿐 아니라 불교의 가치도 깊이 깨달은 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에 관한 교회 가르침에 접하고 그리스도께 대하여 듣고 만남으로써 이분들은 그들이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길, 진리, 생명을 드디어 발견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후 이분들의 뒤를 이어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발견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중에서도 한국에서 널리 알려진 학자로서 타계하신 지 40년이 채 안 되는 최남선(1890-1957)이라는 분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분은 유교와 불교에 깊이 통달하신 분이셨는데 가톨릭에 귀의하셨습니다. 그 때 가톨릭에 귀의하게 된 동기를 설명하면서 "가톨릭 교회의 신앙만이 영원하고 보편적이며 모든 인류가 추구하는 구원의 진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진리란 바로 부활하시어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6. 이런 일은 한국에서뿐 아니라 세계 어느 곳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교황 성하께서 최근에 발표한 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에서 아래와 같이 강조하신 것처럼 아시아는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나는 최근에 아시아의 주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교회가 비록 불교와 힌두교와 회교 전통 안에서 발견되는 참되고 신성한 것들이 모든 인간을 비추는 진리를 반영한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인정하지만, 그것 때문에 교회의 선교 의무가 감소되거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심 없이 선포하려는 굳은 결심이 약화될 수는 없다….' 다른 종교의 추종자들도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고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제도 밖에서도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될 수 있다는 사실이, 하느님께서 모든 백성에게 원하시는 신앙과 세례로 부르시는 것을 취소하지 않는다."

인간 삶을 직접 체험하신 하느님
7.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은 각 사람 안에 현존하시면서 우리의 마음을 열고 당신 사랑의 선물을 받아들이기를 겸손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또한 그리스도는 겸손의 모델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필립 2장). 그리스도는 인류의 죄를 스스로 짊어지시고 죽으심으로써 죽음을 쳐 이기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는 모든 이의 동반자이십니다. 가장 가난하고 가장 죄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들 모두의 충실한 동반자이십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몇 년 전에 그의 회칙 `인간의 구원자'(14항)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아무런 예외도 없이 누구나 그리스도께 구속(救贖)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인간을, 아무런 예외도 없이 누구나, 심지어 본인이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당신에게 일치시키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각자에게 또 누구에게나 빛과 힘을 주시어 사람으로 하여금 지극히 높으신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게 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인간의 삶을 직접 체험하시고 인간의 삶과 고통과 죽음을 함께 나누시려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하느님은 인류의 참된 의미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고통받는 모든 이들의 친구가 되시고 형제가 되셨습니다. "그분은 몸소 우리의 허약함을 맡아 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셨습니다"(이사 53장; 마태 8장). 이리하여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연민(Compassion of God)의 경이로움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라틴어에서 온 Compassion, 즉 연민(동정)이라는 단어는 "고통받는 이의 고통을 함께 나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고통 안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고통받는 모든 이들과 고통을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이해하게 해주십니다. 고통은 절대로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은 모든 인간들이 영원한 환희 속에서 하느님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8. 아시아는 고통이 산적해 있는 곳입니다. 가난과 질병, 억압과 착취, 무지와 폭력 등이 가득 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기 필리핀에서 `베렌'이라 부르는, 성탄 때 성당이나 경당에 차려진 말구유 곁으로 가난한 신자들이 따뜻한 정성과 사랑을 가슴에 품고 참배하러 찾아오는 모습을 볼 때, 또는 이 가난한 이들이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거나 성금요일 예수의 죽음을 묵상하며 그들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이들의 고통 중에 참으로 하느님께서 함께 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의 가난한 자들은 그들의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을 지키려는 매일의 투쟁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저는 여기서 여러분들에게 독일의 복음 교회 신학자인 위르겐 몰트만이 인간의 고통에 동참하시는 그리스도의 현존에 관해 쓴 것을 읽어 드리고 싶습니다. "불타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 박해당하시고 고독하신 그리스도, 하느님의 침묵 속에 고통받으시는 그리스도, 우리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실 때 그토록 철저히 버림받으신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믿고 의탁할 수 있는 형제이며 친구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인간에게 닥칠 수 있는 모든 고통을 또는 그 이상을 이미 다 겪으시고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J. Moltmann, "The Theology of the Cross" in His God and Hers, 1991).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한계성이나 취약성에 마음이 짓눌릴 때 우리의 모든 것을 그분에게 맡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고린 12, 5)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우리에게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옵니다. 연민이란 또한 "이웃을 도와 주려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찾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더 데레사는 우리에게 가르치기를 어떤 사람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임종자의 손을 따뜻이 잡아 줄 때 그 행위 자체가 이미 임종자에게 큰 의미를 준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일지라도 사랑이신 하느님의 현존을 주위 사람들에게 드러낼 수 있는 길은 언제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교회의 일원인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필요성과 그분의 현존에서 오는 기쁨과 성취감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생애에 걸쳐 그분과의 참된 만남이 한번이라도 있었다면 우리는 아마도 사도 요한이 서간 초두에서 하신 말씀을 여기서 다시 메아리 치게 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 생명이 나타났을 때 우리는 그 생명을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증언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는 이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있다가 우리에게 분명히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그것을 여러분에게 선포하는 목적은 우리가 아버지와 그리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는 친교를 여러분도 함께 나눌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충만한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 이 글을 써 보냅니다."

교회가 먼저 그리스도를 닮아야 한다
9. 그리스도는 우리에게서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와 가까이 계시며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심지어는 그분의 이름을 알지 못하고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지 못한 사람들과도 함께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사랑의 현존은 이를 알고 여기에 응답하는 자에 의해서만 생생하게 감지됩니다. 그리스도는 알려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에 교회가 왜 그리스도께 대하여 말하고 우리가 왜 그리스도를 아직 모르고 믿지 않는 이들에게 그분을 알려야 하는지의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이 세상에서부터 그리스도의 구원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사는 행복을 모든 이가 맛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참으로 교회가 모든 이를 한 아버지의 자녀로서 같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하고, 서로 사랑함으로써 보다 인간적이고 보다 아름다운 공동체가 평화롭게 생겨나며 마침내 모든 이가 그리스도의 몸에 일치하여 그분을 닮고 그분과 하나 될 수 있도록 한다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Caritas Christi urget nos!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요하고 있습니다(2고린 5, 14). 우리는 복음을 알려야 합니다. 복음을 통하여 인류는 어둠에서 빛에로 죽음에서 생명에로 무지에서 깨달음에로 인도되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이러한 그리스도를 필요로 합니다. 사람은 복음의 말씀을 듣고 싶어합니다. 아시아는 그리스도를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아시아는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필요로 합니다. 10. 그렇다면 우리는 지체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긴급한 과제가 있습니다. 이 과제는 바로 복음화입니다. 교회와 우리 각자가 먼저 그리스도에 의해 복음화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사랑과 자비와 생명의 메시지로써 우리들의 가슴을 가득 채워 주셔야 합니다. 아시아의 교회는 아시아적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를 닮아야 하고 그리스도를 투명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교회는 오늘의 세계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가시적 증표, 성사입니다. 이제 아시아 교회는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처럼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약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품에 감싸 안으며, 병자를 치유하고 궁핍한 이들에게 기쁨을 주며, 십자가에 죽으신 분의 능력으로써 사람들의 죄의 짐을 덜어 줄 수 있을지 방안을 찾으며 겸손되이 순례의 길을 나서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주 예수님, 고통에 시달리는 아시아를 굽어보십시오.
천진 난만한 아이들의 티 없는 동경이 상처입고
여성들이 유린당하며 가난한 이들이 좌절하고
많은 사람들이 어둠과 죄악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세상의 잔인함이 당신의 부드러운 사랑에 승복한다면
이 세상은 평화의 천국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 예수님,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십시오.
한 가닥 새로운 소망의 빛을 갈구하는
모든 이들의 눈을 열어 주십시오.
아시아의 당신 자녀들을 찾아 주시고
교회를 통하여 당신 사랑을
그들에게 널리 알리게 해주십시오.


당신의 사랑에 우리 마음 크게 열어 주시고
우리 입을 열어 당신을 찬미하게 하십시오.
우리 주위의 많은 영혼들이 당신을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님,
우리 또한 당신 사랑이 활짝 꽃피는 그 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사오니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하느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고 외치는 우리의
메시지가 진실된 것임을 세상이 알게 하여 주십시오.

(1992. 11.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