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말고 '어떻게'
풀이 자라는 데 이유가 없고
토끼가 사는 데 이유가 없듯이
사람이 사는 데에도
특별한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왜 사느냐?”
하는 것은 바른 질문이 아니고,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게 바른 질문입니다.
삶이 즐거운지 괴로운지는
자기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힘들다고 다 괴로운 게 아니에요.
군사훈련받느라 산에 올라갔다 오나
등산하러 산에 갔다 오나
육체적 고됨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군사훈련하느라 산에 오르면 괴롭고
등산으로 산에 오르면
고되지만 즐거울 수 있습니다.
자신이 원해서 하는 일을 하면
힘들어도 즐겁습니다.
그러니 원하는 일을 하면서 살면
힘들어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아이가 공부를 안해요
지금까지 공부를 잘 하던 아이가
고3이 되어 갑자기 우울해하며
공부를 안 하고 성적이 떨어져서
안타깝다고 질문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엄마가 자식을 볼 때
'공부'로 아이를 판단한다면
엄마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이가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
어떤 아픔으로 힘들어 했는지
봐줄 수 있는 것이 엄마이기 때문이죠.
자녀가 시험에 실패했거나
성적이 떨어져 힘들어하면
그 마음을 위로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학교도 중요하고, 성적도 중요하지만
마음이 건강하고 편안한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이름과 모양이 아닌
사람을 보는 눈을 가지고
정말 한 사람으로 아이를 아끼고
사랑해주면 아이를 치유할 수 있습니다.
먼저 마음의 건강을 회복한 후에
본인이 스스로 공부를
해보겠다고 하면 그 때 공부를 시켜도 늦지 않습니다.
천하가 다 나를 버려도
우리 엄마만큼은 나를 믿고
버리지 않는다는 믿음을 주세요.
세상의 중심은 나
내 앞자리 사람은 나의 앞이고
내 뒷자리 사람은 내 뒤입니다.
그러나 내 앞자리 사람에게 나는 뒷사람입니다.
내 뒷자리 사람에게 나는 앞사람입니다.
‘앞’이나‘뒤’라는 말을 같이 쓰지만
사실은 다른 자리입니다.
나의 인식은 상대적인 것이지
절대적인 게 아니에요.
이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시킨 것을
‘자기 생각에 빠졌다.’고 합니다.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없게 되는 거지요.
자기 생각에 빠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에요.
모든 인간은 원래
자기를 세상의 중심에 놓고 봐요.
그렇다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란 걸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상대방이 나와 다른 위치, 다른 관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
갈등이 안 생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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