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리한 남편들의 新바람 피우기 | ||||
아내에게 휴대전화도
공개하고 인터넷 이메일도 공개하지만, 아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그들만의 커뮤니티가 있다.아내에게 걸리지 않겠다고 작심하면 절대 남편을 찾지
못하는 곳에서 버젓이 커플 행세를 하고 있는 것. 동호회는 물론 블로그, MSN, 회사 근처 운동시설 등에서…. |
Scene 1 아줌마들, 그리고 아저씨 하나 “어머, 또 수인이 아빠가 나오셨네요. 여기 앉으세요. 커피 하실 거죠?” 역시나 맨 처음 반기는 건 304호 은아 엄마. 호들갑스러운 타입이지만 살갑게 구는 게 싫지만은 않아 내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1백만 와트짜리 미소를 선사한다. 오십줄에 접어든 반장 아줌마는 아직도 내가 거북한 듯 별 말이 없다. 흥, 당신한텐 관심 없수. 오늘은 반상회 날. 남자가 웬 반상회냐고? 보통은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상당히 재미있는 시간이다. 비교적 출퇴근이 규칙적인 나는 야근하는 아내 대신 반상회에 참석하는 일이 많다. 물론 처음에는 끌려, 밀려 반상회에 나갔다. 재작년에 이사 온 새 아파트의 입주자대표는 유난히 ‘박통’을 그리워하는 타입이었는지, 대표 회의에서 거론된 안건들을 각 동대표와 라인 반장을 통해 일사불란하게 전달한다. 상명하복의 분위기는 결국 매달 반상회 참가 독려(라기보다는 거의 강제)로 이어져 불참자에게는 강력한 경제적 제재가 가해지게 됐다. 반상회 불참금은 물경 5천원. 아마도 우리 아파트의 반상회 호응도가 전국 최고일걸? 지난해 8월인가, 야근하는 아내가 전화를 했다. 반상회 좀 나가달라고. 대뜸 거절했지만 바로 그 순간 반장이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수인이 엄마! 수인이 엄마! 수인아!” 딸아이가 냉큼 문을 열었고, 나는 라인별 거주자 도표를 들고 있는 반장을 일별했다. 반장의 목청이 어찌나 우렁찼는지, 전화기 속의 아내가 그녀의 목소리를 듣더니 혀를 차며 말했다. “거봐. 나 대신 좀 나가주라. 응?” 나는 티셔츠를 걸치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황소마냥 반장의 꽁무니를 따라 반상회에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경험한 서른여덟 생애 첫 반상회는, 오~ 신천지였다. 신도시보다 더 신도시인 우리 아파트는 평형 크기에 비해 거주자 연령층이 젊은 편이었는데, 대충 추측해도 20대 : 30대 : 40대(이상) 비율이 1 : 7 : 2인 서른 명의 여자들이 거실에 모여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아직 성하(盛夏)의 계절, 아줌마들 복장 상태는 아주 양호했다. 감상하기에 말이다. 층층시하 세 누나를 ‘모시고’ 살아야 했던 어린 시절 덕분에 보통 남자들은 견디기 어려워한다는 군녀일남(群女一男)의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은 나는 금세 아줌마들의 수다에 동화됐다. 그렇게 나의 반상회 이력은 시작되었다. Scene 2 남의 불륜은 내 엔터테인먼트 은아 엄마가 제 집인 양 주방을 휘저으며 커피와 쿠키를 담아 내온다. 고맙기도 하지. 어째 좀 묵은 듯한 향의 헤이즐넛을 마시며 주위를 둘러본다. “혜민이 엄마는 아직 안 오셨나봐요?” 아줌마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한다. 정보 공유의 범위를 나한테까지 넓힐까 말까 하는 눈치다. 은아 엄마가 그새를 못 참고 촉새처럼 입을 뗀다. “혜민이 엄만 이사 갔어요. 별로 좋지 않은 일이 있어서.” “아니, 남 바람피운 얘기를 뭐 재미있다고 자꾸 해?” 1203호다. “내가 뭐라고 했다고? 자기가 까발리네.” 은아 엄마가 소파에 앉아 있는 1203호를 흘겨본다. 이왕 밝혀진 일, 904호 아줌마가 소상히 설명한다. A가 운을 떼고 B가 양념을 치면 C가 정리한다…. 아줌마들의 대화란 언제나 이런 식이다. 어떻게 보면 각자의 역할 분담이 잘 이루어지는 긴밀한 조직 같다. 재미있을 것 같은데 얼른 이야기나 해주지. 904호의 이야기를 들어볼작시면, 혜민 엄마는 돌쟁이 딸을 안고 집을 나갔다는 거다.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남편이 바람을 피웠단다. 원래 그들 부부는 함께 장사를 했는데, 혜민 엄마는 임신 8개월째부터 지금까지 가게를 쉬고 있었다. 혼자서 출퇴근하기 시작한 남편은 처음엔 보쌈도 사오고 생선회도 사오고 사뭇 곰살스럽게 굴더니 혜민이가 태어나고 언젠가부터 행동이 요상해지더라는 것이다. 가게 사정이야 혜민 엄마도 빤히 아는데 툭하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늦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집에 들어와도 휴대전화를 절대 옷 주머니에서 꺼내놓지 않고, 어쩌다가 혜민 엄마가 꺼낼라치면 왜 주머니를 뒤지냐며 짜증을 부렸다. 일은 더 바빠졌다면서도 수입은 그전만 못했다(순진한 건지, 바보인 건지, 내가 들어도 혜민 아빠가 한심하다). 지난겨울, 급기야 혜민 엄마는 방학 중인 막내동생을 며칠 예정으로 불러들여놓고 이튿날 저녁 혜민이를 재운 뒤에 몰래 시장에 가서 가게를 살펴봤다. 남편은 여전히 성실해 보이고 별다른 이상 징후가 보이지 않아 그녀는 도리어 반성했다. 남편이 일찍 가게문을 닫길래 혜민 엄마는 처제도 와 있고 하니 그가 뭐라도 사들고 들어오려는 줄 알았다. 그런데 바로 옆가게 여자도 셔터를 내리기 시작했다. 혜민 아빠가 냉큼 쫓아가더니 여자를 비켜서게 하고 자기가 셔터를 내린 뒤 자물쇠를 잠그는 게 아닌가. 한 블록 떨어진 주차장에서 두 남녀가 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기까지, 혜민 엄마는 뒤를 밟으며 얼마나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렇게 꼬리를 잡은 혜민 엄마는 거의 한 달간 추적을 시도했고, 혜민 엄마가 시장에 나오지 않은 뒤로 업종과 주인이 바뀌었다는 옆가게 여자의 남편은 오랫동안 투병 중이라는 것까지 밝혀냈다. 남편과 그 여자는 심지어 단골 모텔도 만들어둘 정도였고. “그래서 혜민 엄마가 남편 앞에 이혼서류 딱 내밀고, 나 친정 가 있을 테니 도장 찍어 보내라! 그리고 혜민이 끼고 휑하니 나가버린 거지. 아유, 안 됐지 뭐야. 열통이 터지더라도 그걸 기회로 확 휘어잡고 말지 뭘 이혼을 할까. 여자 혼자 살기가….” 904호가 채 말을 맺기도 전에 704호가 끼어들었다. “그런 남편은 없는 게 나아요! 요즘 이혼한 게 뭐 대순가.” Scene 3 위험한 유혹 704호, 형진 엄마 고신미 씨다. 그녀는 남편에 대한 불만이 많다. 몇 년 전에 명퇴도 아니고 ‘그냥’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남편은 한두 해를 정말 놀아버렸고, 지금은 (그녀가 절대 밝히지 않는) 별볼일 없는 직장을 다니고 있다고 했다. 고신미 씨가 직장을 다니지 않았더라면 이 아파트에도 입주하지 못했을 것이라 했다. 요즘 세상에 누가 벌면 어때, 그럴 수도 있겠는데, 문제는 그녀가 바람둥이라는 거다. 멀쩡히 반상회에도 나올 정도니 그녀의 비밀은 아직 소문나지 않은 모양인데, 나는 그걸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지난해 말, 올 초의 학회 준비 관계로 마라톤 회의를 하고 자정을 훨씬 넘겨 귀가한 적이 있었다. 차를 세울 데가 없어 이 동 저 동 지하주차장을 전전하다가 마침 어떤 차가 시동을 켜는 소리를 듣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차 안에 있던 남녀가 진한 키스를 나누더니 여자가 내렸다. 곧 그 차가 나가길래 나는 내 차를 몰아갔고, 그 여자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고신미 씨였다. 술에 취한 그녀는 내가 차에서 내릴 때까지 서 있더니 날 보고 웃었다. “(코맹맹이 소리로)수인이 아빠도 여자 만나고 와요?” “아뇨, 저, 일이 늦게 끝나서.” “에이, 재미없다. 뭐 그래.” “아, 예. 술 많이 드셨나봐요.” “으응. 지금 나간 사람 누군지 알아? 내 애인이야. 후후.” 아이고, 이 여자 왜 이러는 거야? “저 남자 우리 팀장이다? 나랑은, 그냥, 섹스 파트너야.” 그러니까 고신미 씨는 직장 상사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건데, 회사 사람들은 아무도 모른단다. 물론 그녀의 남편이나 팀장의 아내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하기야 같은 직장 사람들끼리 바람피우기가 얼마나 쉬운가. 불장난을 할 기회를 잡기란 또 얼마나 쉬운가. 직장과 가정 양쪽에서 서로 반대쪽에 가 있으리라고 추측하는 균형 잡힌 비밀한 교집합을 이룰 수 있겠지. 남자든 여자든. 고신미 씨는 풍만한 자기 가슴을 찌르며 ‘오픈 마인드의 소유자’라고 했다. 그녀의 진술이 은근히 재미있어서 계속 듣고 있다가 급기야 그녀가 나까지 꼬드기려고 시도하는 순간 겁이 덜컥 났다. 그녀는 회사에도 하나, 집 근처에도 하나, 여러 애인을 두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난 이런 여자와 바람을 피울 정도로 배짱이 좋지는 못하다. Scene 4 등잔 밑이 어두운 법 미연이가 내 쿠키를 하나 집어가더니 오도독 깨문다. 유부녀 같지 않은 그녀의 팔뚝이 반팔 아래에서 환하게 빛나는 듯하다. 503호에 사는 그녀, 이미연, 서른한 살. 내 후배였다. 전 직장에서 그녀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영화 이야기로 의기투합해 이미 네 살짜리 아이 아버지였던 나는 약혼자가 있다는 그녀와 또 다른 애정을 키워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결혼을 앞두고 선언한 마지막 섹스가 끝난 어느 날,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살 집 구했어? ○○아파트 사라. 아직 미분양 남았는데, 그 동네 비전 있어.” 미연은 대답 없이 미소만을 남기고 호텔방을 나섰다. 그녀가 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도 직장을 옮겼다. 단 한 번의 연락도 없이 3년이 흐르는 동안 미연은 아릿한 추억이 되어갔다. 그러나 그녀는 내 말을 잊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어바웃 어 보이」에서 휴 그랜트가 ‘혼자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의 모임’에 나가 아줌마들을 목표로 삼았던 까닭을 완전히 이해하고, 지난 여름 이래 나는 은근히 반상회 날을 기다리며 아내가 또 늦기를 바라게 됐다. 그렇게 지난달 반상회에도 참석한 나는, 장난꾸러기 형제가 마룻바닥을 죄다 긁어놓은 1504호의 거실에서 이미연을 발견했다. 엊그제 이사 와서 짐도 다 못 풀었는데 끌려 나왔다며 결혼 4년차, 아이 없음, 맞벌이, 전세… 라고 소개하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생뚱맞게도 마음속으로 반장 아줌마에게 큰절을 올리고 있었다. 미연은 날 보더니 전동 드릴 있냐고 물었고 당연한 반상회 끝나면 가져다 주겠다고 말했다. 남편이 빌려오라고 했다지만 나는 알았다, 남편이 집에 없음을. 트레이닝 바지에 패딩 파카를 입고 한 손에 전동 드릴을 쥔 채 남의 집에서 남의 여자와 나눈 키스는 황홀했다. 나는 그날 밤 늦게 돌아온 아내에게 급조한 깜짝 선물을 미리 개봉했다. “당신 올 휴가는 나한테 맞추지 말고 장모님 생신에 맞춰라. 장모님 혼자 되시고 더 쓸쓸하신 모양인데, 당신이 모시고 유럽 여행 한 번 다녀와라, 더 나이 드시기 전에. 당신도 나랑 현수 다 잊고 엄마랑 둘이 기분 내봐. 현수는 시골에 보내지 뭐. 내가 이럴려고 2년 전부터 몰래 적금을 드는 게 있어. 여행 경비는 내가 댈게.” 아내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내 진짜 계획을 모르니 당연했다. 한 달이 지나 집 정리도 끝났을 테니 지금쯤이면 미연도 남편에게 올여름 휴가는 모처럼 친구들끼리 여행을 가기로 했다는 말을 했겠지. 쿠키 하나를 더 집으면서 우린 살포시 시선을 교환한다. 그나저나 미연은 알까, 내 목표는 그녀만이 아니라는 걸. 나무 한 그루를 숨기기에 가장 적당한 곳은 숲 속이다.
에디터 · 김자은 | 레몬트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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