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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밥은 좋은 쌀을 고르는 것에서 탄생한다

문성식 2015. 9. 9. 16:33

맛있는 밥은 좋은 쌀을 고르는 것에서 탄생한다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는 말처럼 한식을 논할 때 밥을 빼놓는 건 앙꼬 없는 찐빵을 먹는 것과 다름없다. 좋은 쌀로 갓 지은 포슬포슬한 밥 한 숟갈이면 그날의 시름은 눈 녹듯 사라진다.


										쌀밥
쌀밥
카베르네소비뇽, 피노누아, 메를로, 쉬라즈, 말벡, 샤르도네, 리슬링, 소비뇽블랑, 세미용…. 한창 와인에 빠져있을 때 줄줄 꿰던 포도 품종들이다. 명칭은 물론이거니와 품종의 특징, 산지의 자연환경까지 꼼꼼하게 살폈다. 제법 신경 써서 마시면 품종 정도는 어렵지 않게 맞추는 스스로의 감각에 우쭐해하기도 했다.

자메이카 블루마운틴, 에티오피아 시다모, 케냐 AA, 인도네시아 만델링, 과테말라 안티구아…. 커피붐이 일자 이번에는 커피 품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딱히 취미라기보다는 품종의 특징 정도는 알고 마시는 것이 현대인의 기본 상식이라 생각했다.

그러다 몇 해 전부터 밥(맛)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취재와 여행 목적으로 일본을 다니면서 일본의 밥맛이 유난히 좋다는 걸 깨닫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두 나라 모두 밥이 밥상의 주인공인데 일본의 밥이 유난히 맛있는 이유가 궁금했다. 맛도 맛이거니와 2000년도 훨씬 전에 벼농사 방법을 전해준 종주국으로서 이는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도 했다. 다른 건 몰라도 밥맛에 있어서만큼은 일본에 꿀리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밥맛은 좋은 품종의 쌀이 좌우한다

쌀과 밥에 대해 잘 모르던 시절에는 그저 맛있는 밥의 비결을 찾아 다녔다. 가마솥에 밥을 짓고 그 밥을 먹기 위해 손님들이 줄을 서는 음식점의 주인장과 인터뷰를 했다. 밥맛 좋기로 소문난 어느 암자의 공양주(供養主)를 만나러 가기도 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경험과 감각을 얘기했는데 이런 비계량적 요소를 맛있는 밥의 비결이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방향을 바꿔 좀더 근본적이고 과학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우리나라 벼 품종의 개발과 관리를 전담하고 있는 농업진흥청 국립식량과학원을 찾아갔고, 20년간 전기밥솥 개발에만 전념해온 연구자를 만났으며, 30년 동안 초밥을 만들어온 요리사를 만났고, 좋은 품질의 쌀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는 식품 전문 MD(머천다이저)도 만났다.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맛있는 밥은 좋은 품종의 쌀을 고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강조했다. 보관과 유통 그리고 소비자의 인식에서 차이가 있을 뿐 현재 우리나라의 벼 품종 개발 능력은 일본에 결코 뒤지지 않는 수준이라 했다.

놀라움에 앞서 부끄러웠다. 기호식품인 와인과 커피의 품종은 그렇게 줄줄 꿰고 있으면서 평생을 매일같이 먹고 있는 우리 쌀의 품종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소비자들 역시 비슷한 수준이었다. “대체 쌀의 품종 따위는 알아서 뭐하느냐?”는 투였다.

와인과 커피에 들이던 정성을 쌀에 쏟았다. 우리나라 국립종자원에는 현재 292개 품종의 쌀이 국가품종목록에 등재돼 있다. 이 중에서 164개는 고품질 품종으로 12개는 최고품질 품종으로 분류된다. 최고품질 품종은 2003년부터 우루과이라운드를 비롯한 시장 개방에 대비해 우리 쌀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국립식량과학원이 해마다 1개 품종씩 개발하는 야심작이다. 최고품질 품종은 외관, 완전미 비율, 내재해성(재해에 강한 정도) 등에서 일정 기준 이상을 충족해야 하는데 무엇보다 밥맛이 뛰어나야 한다. 현재 등록된 최고품질 품종에는 운광(조생종), 고품, 하이아미, 대보(중생종), 미풍, 삼광, 진수미, 칠보, 영호진미, 호품, 수광, 해품(중만생종) 등이 있다.

밥맛을 평가하는 다섯 가지 요소는 모양, 냄새, 맛, 찰기, 질감인데 이를 분석하려고 굳이 애쓸 필요는 없다. 그동안 매일 밥을 먹고 살아온 한국인이라면 누구에게나 본능은 잠재돼 있다. 좋은 품종의 쌀로 지은 밥은 그 본능을 단번에 깨운다.

맛있는 밥은 쌀알의 낱낱이 살아 있고 윤기가 흐른다

맛있는 밥은 우선 밥솥을 여는 순간 느낌이 온다. 낱낱의 쌀알이 살아 있고 기름이 자르르 흐르며 ‘제발 날 좀 잡숴 달라’ 아우성이라도 치는 듯 고개를 치켜들고 있다.

수증기에 실려 특유의 구수하고 달콤한 밥내가 후각을 자극한다. 한 입 먹으면 무르지도 단단하지도 않게 치아 사이에서 기분 좋은 마찰을 일으킨다. 씹으면 씹을수록 침이 고이면서 단맛이 더해지니 “밥맛이 달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런 밥에는 반찬의 가짓수 따위는 중요치 않다. 김치 한 보시기, 젓갈 한 종지, 김 몇 장이면 한 그릇의 밥이 주는 행복을 유감없이 만끽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는 약간의 수고가 필요하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1500개 정도의 브랜드 쌀이 있는데, 이 가운데 고작 10%만 품종이 표시돼 있고 나머지 90%는 여러 품종이 혼합돼 있다. 포도와 커피의 품종을 알아두면 한때가 즐겁지만 쌀의 품종을 알아두면 매일 매 끼니가 행복할 수 있다.

우리는 벼농사를 시작한 지난 5000년 이래로 가장 밥맛 좋은 시절을 살고 있다. 그러니 당신, 오늘은 무슨 품종으로 밥을 지으시렵니까?

박상현
음식의 역사적 배경과 사회적 맥락을 탐구하고 추적하는 일에 관심이 많은 맛 칼럼니스트. 현재 건국대학교 아시아콘텐츠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있으며, 페이스북에서 ‘여행자의 식탁’이라는 페이지를 통해 대중들에게 맛깔 나는 맛 얘기를 들려주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일본의 맛, 규슈를 먹다>가 있다.


에디터 김련옥

  • 글 박상현(맛 칼럼니스트) 포토그래퍼 김지아
  • 요리&스타일링 최수연(쿡피아) 월간헬스조선 6월호에 실린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