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 동구 중대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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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참조 및 출처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전통사찰종합정보 |
사진출처 : | 문화재청 |
대구광역시 동구 중대동 팔공산(八公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桐華寺)의 말사이다.
〔창 건〕
파계사는 <팔공산파계사사적기(八公山把溪寺事蹟記)>에는 804년(신라 애장왕 5)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처음 산문을 열었다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심지왕사가 동화사를 창건 내지 중창한 시기는 832년(흥덕왕 7)임을 볼 때 804년 창건설은 다소 무리가 있다. 아마도 파계사 창건은 동화사보다 뒤인 832년 이후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창건 이후의 파계사의 역사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사적기에서도 심지왕사의 창건 이후에는 조선시대 임진왜란 이후 중창사실을 적고 있을 뿐이다.
〔중 창〕
1605년(선조 38) 계관(戒寬)이 중창하였다고만 전하고 있다. 그런데 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팔공산에 현존하는 사찰로 파계사를 소개하고 있어 조선 초기까지 절이 존재하고 있었음은 짐작할 수 있다.
이후 1695년(숙종 21)에 현응(玄應)이 삼창공사를 추진하였다. 당시 현응은 숙종의 청에 따라 농산(聾山)과 함께 세자 잉태를 기원하는 백일기도를 실행하였고, 백일기도가 끝나는 날 농산이 숙빈 최씨에게 현몽하였으며 이후에 영조로 즉위하는 세자로 다시 태어났다고 한다. 이에 따라 현응의 공을 높이 산 숙종은 파계사 중수를 명함과 동시에 파계사를 중심으로 둘레 40리에 달하는 세금을 파계사에서 거두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현응은 세금 대신에 선대 임금의 위패를 모시게 하여 달라고 청원하여 경내에 기영각(祈永閣)을 짓고 선조(宣祖), 숙종(肅宗), 덕종(德宗), 영조(英祖) 네 분의 위령을 모심으로 써 지방 유생들의 행패를 막게 하였다. 이때 세워진 대소인개하마비(大小人皆下馬碑)가 현재의 사적비 부근에 남아 있으며, 전생에 농산화상이었던 영조가 11세 때 썼다는 ‘자응전(慈應殿)’이라는 현판이 지금까지 성전암(聖殿庵) 법당에 걸려 있다. 그런데 1979년 6월 파계사 원통전에 봉안된 관음보살상을 개금할 때 불상 안에서 영조의 어의(御衣)가 나와 중창설화의 신빙성을 더하여 주고 있다.
〔당우와 문화재〕
현존하는 당우로는 100여 평에 이르는 2층 누각인 진동루(鎭洞樓)가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구시 유형문화재 7호인 원통전(圓通殿) 안에는 목조관음보살좌상이 보물 제992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동쪽에 종무소로 사용되는 적묵당(寂默堂)은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9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쪽에 설선당(說禪堂)은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로서 口자형을 이루고 있다.
원통전 뒤쪽의 기영각은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1호로 숙종·영조·정조 3대의 어필을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필각(御筆閣)이라고 불렸으나 지금은 어필이 전하지 않는다. 그 옆으로 산령각, 그리고 응향각(凝香閣)이 있으며, 응향각 동북쪽에는 미타전(彌陀殿)이 있다.
이 밖에도 이 절에는 법당 앞에 높이 2m의 8각 석등이 있고, 숙종의 하사품인 병풍 2개와 구슬 2개가 있으며, 절 서쪽 200m 지점에는 1648년(인조 26)에 세워진 원의(圓義), 1658년(효종 9)에 세워진 전명(傳明), 1701년(숙종 27)에 세워진 현응 등 세 대사의 부도와 비가 있다.
〔부속암자〕
부속암자로는 현니암(弦尼庵) 금당암(金堂庵), 성전암(聖殿庵), 칠성암(七星庵)이 있다. 이 중 성전암에는 조선시대 것으로 보이는 현응의 영정과 벽화가 있는데, 또한 성전암은 경상북도의 3대 수도도량중 하나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외에 중요민속자료 220호로 지정된 영조대왕 도포가 있다. 한편 종각 옆 진동루 앞에는 영조와 파계사의 인연을 기념하여 ‘영조나무’로 이름 붙여진 250년 정도 된 느티나무가 남아 있다.
〔관련자료〕
〔사찰풍경〕
조선의 억불숭유정책과 유림들의 횡포를 한 스님의 지혜로 막아낸 사찰이 바로 파계사입니다. 파계사 중창주이신 영원스님은 숙종임금 으로부터 왕가의 위패를 사찰에 모시는 윤허를 받아내고 사세를 확장하였습니다. 파계사가 왕가의 비호를 받게 된 연유에는 영원스님의 다음과 같은 혜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조 숙종임금이 어느날 대궐 속으로 승려가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그 꿈이 너무 선명하여 신하를 시켜 남대문 밖을 살펴보게 하니, 정말 한 승려가 그 앞에서 쉬고 있었다. 그 승려가 바로 파계사의 영원선사였다. 기이하게 여긴 숙종임금은 영원선사에게 왕자탄생을 위한 백일기도를 부탁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숙빈 최씨에게 태기가 보였고, 이듬해에 왕자가 탄생하였으니 바로 영조대왕이다. 크게 기뻐한 숙종임금은 영원선사에게 현응이라는 호를 내리고, 40리에 걸쳐 나라에 거두던 세금을 모두 절에서 거두라고 했다. 스님은 거절하면서 대신 경내에 선대임금의 위패를 모시도록 윤허해 주시기를 간청, 윤허를 받았다. 스님은 절로 내려와 기영각을 세우고 선대왕의 위패를 모시니 지방 유생들과 양반의 행패는 자연히 사라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왕가의 비호속에 불사를 여법하게 성취 하였으며, 각종 부역의 피해 없이 승려들이 수행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게 하였다.”
왕가와 파계사는 관계는 기영각 이외에 아직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기영각에는 성종 숙종 덕종 영조의 위패가 모셔져있습니다. 숙종의 명으로 세워진 대소인개하마비(大小人皆下馬碑)는 일주문 지나 사적비 부근에 있는데, 하마비 자체가 왕의 권위를 상징하고 있어 유생들의 횡포를 막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숙종의 하사품인 병풍 2점과 구슬 2개도 남아 있습니다. 영조대왕이 11세에 썼다는 자응전(慈應殿) 편액은 성전암 법당에 걸려있으며, 영조대왕 어의는 원통전 관음보살상 복장에서 나왔습니다. 정조대왕의 어필 천향각 현판도 있습니다.
〔설 화〕
파계사에는 조선후기 숙종 때 현응대사(玄應大師)가 일으킨 삼중창 대한 설화가 전한다.
조선에 들어 억불정책으로 인해 사람 취급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스님들은 갖가지 부역에 시달려야만 했다. 이러한 사정은 파계사도 예외는 아니어서 어느 날 현응스님은 파계사만이라도 부역을 없애고자 하리라는 원(願)을 세우고, 7백여 리의 길을 걸어 한양성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에는 승려의 도성출입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남대문 밖에서 머물면서 한강물을 져다가 민가에 날라주며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느덧 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숙종은 남대문 2층에 올랐더니 남대문 밖의 세 번째 집 위에서 청룡과 황룡이 찬란한 광명을 놓아 하늘에 사무치는 꿈을 꾸었다. 그리하여 왕은 ‘남대문 밖 세 번째 집에 가서 사람이 있거든 데리고 오라’는 명령을 내렸고, 마침내 현응스님은 숙종을 알현하게 되었다. 왕은 스님에게 한양에 온 까닭을 물었다. 스님이 불교계의 어려움과 승려의 부역에 대해 자세히 아뢰면서 소원을 말하자, 아들이 없었던 숙종은 스님에게 한양백리 이내의 기도처에서 생남기원(生男祈願)을 해 줄 것을 청하였다.
현응스님은 쾌히 수락하고 때마침 한양가까이에 와 있던 금강산 만회암(萬灰庵)의 농산대사(聾山大師)와 각각 수락산 내원암(內院庵)과 북한산 금선암(金仙庵)에서 기도를 시작하였다. 70여일이 지났을 때 현응스님은 선정(禪定)에 들어 이 나라 백성들 중 임금의 지위에 오를 복을 지닌 사람을 관찰하였다. 그러나 한 나라의 앞날을 이끌만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왕의 소원을 이룰 수 있도록 하려면 자신이 죽든지 농산대사가 죽는 수밖에 없었다. 현응스님은 파계사의 일을 처리하기 전에는 죽을 수 없어 농산대사에게 간곡한 편지를 올려 왕자의 몸으로 태어날 것을 청하게 되었는데, 이에 농산대사는 “내가 나라의 위축(爲祝)기도를 맡은 것으로 인(因)을 삼았는데, 기도를 마치기도 전에 과(果)가 벌써 돌아왔구나, 아 50년 동안 망건을 쓰고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라 말하고 백일기도를 회향한 날 밤에 입적(入寂)하였다. 그날 밤 농산대사는 숙종과 숙빈(淑嬪) 최씨의 꿈에 현몽하였고, 그 이듬해인 1694년(갑술)에 왕자로 탄생하여 커서 영조가 되었는데, 실로 그의 예언대로 52년 동안 재위하였다.
이에 숙종은 파계사를 중창하도록 명하고, 파계사 반경 40리(里)에서 거두 들이는 세금 모두를 파계사에 주도록 하였다. 그러나 현응대사는 세금을 주는 대신 왕실의 위패(位牌)를 파계사 경내에 모심으로써 유생들의 행패는 물론 각종 부역의 피해 없이 승려들이 수행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게 하였다. 현재에도 부도밭 옆에는 ‘대소인개하마비(大小人皆下馬碑)’가 남아 있는데 이는 바로 그때 세운 것이라 한다.
현재 절에는 보물 제992호 관세음보살좌상, 보물 제1214호 영산회상탱, 유형문화재 제7호 원통전, 문화재자료 제7호 설선당, 문화재자료 제8호 산령각, 문화재자료 제9호 산령각, 문화재자료 제10호 진동루, 문화재자료 제11호 기영각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교통안내
경부고속도로 동대구 인터체인지에서 대구 동촌비행장 입구인 아양교를 건너 불로동, 봉무동을 경유하여 중대동을 거쳐 팔동산 순환도로 검문소가 파계사 진입로이다. 동대구 인터체인지에서 파계사까지는 19.6km이다.
현지교통
동대구역에서 파계사간 시내버스 운행(40분 소요)
주변관광지
입 장 료
성인 1,000원 / 청소년 800원 / 초등학생 500원
※ 65세 이상 무료
주차시설
등산로
주차장 - 파계사 - 파계재 - 동봉 - 동화사 - 매표소 (4시간 소요)
도움전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