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 충주시 소태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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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참조 및 출처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전통사찰종합정보 |
사진출처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청계산(淸溪山)에 있는 절. 한국불교법화종(韓國佛敎法華宗)에 속한다.
〔창건 및 연혁〕
청룡사의 연혁에 대해 알 수 있는 기록은 거의 없다. 현재 청룡사는 옛 절터의 북쪽에 새로 조성한 것으로 원래 청룡사의 모습도 전혀 알 수 없다. 따라서 청룡사의 창건과 그 후의 연혁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현재 청룡사 터에는 보각국사정혜원융탑과 탑비가 있어 고려 말 조선 초의 상황을 약간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탑비의 기록에 의하면 보각국사는 한때 청룡사 부근에 연회암(宴會庵)을 짓고 머물렀다고 한다. 또한 보각국사는 여러 명산을 돌아다니며 수행하다가 73세가 되던 조선 태조 원년(1392년)에 이곳 청룡사로 들어와 입적한다. 이에 태조는 탑과 탑비를 세우도록 함과 동시에 청룡사에 대사찰을 지을 것을 명령한다. 그러나 청룡사가 위치했던 곳은 그 터전이 넓지 않을 뿐 아니라 실제로 어느 정도의 불사가 이루어졌는지 전혀 알 길이 없다. 이로 미루어 청룡사는 고려시대 말에 존속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찰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 다만 보각국사가 입적하기 전까지 청룡사는 그다지 큰 사찰은 아니었으며, 입적 후 태조가 대사찰 건립을 명하는 것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는 어느 정도 번성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조선 초 이후의 연혁에 대해서도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보각국사정혜원융탑보다 아래쪽에 부도 2기가 있는데, 고려시대 말에서 조선시대 전반의 양식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에도 어느 정도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청룡사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만큼 조선 전기에 청룡사는 寺勢가 매우 미약했거나 폐사되었을 가능성까지 있다.문헌 기록에서 사라졌던 청룡사는 조선 후기에 다시 기록에 나타난다. 영조 때 편찬된 읍지인 "여지도서(輿地圖書)"의 충청도 충원(忠原) <사찰>조에 “在縣北五十里省台陽面”라 하였고, 그보다 약간 늦게 편찬된 "가람고(伽藍攷)" 충청도 충주 <청룡사>조에 “在省台陽面州北五十里”라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조선 후기에 와서 청룡사가 존속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현재 청룡사 터에는 조선 숙종 18년 ( 1692년)에 청룡사의 창건과 경영을 위한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신도들이 전답(田畓)을 기증한 내용을 적은 <청룡사위전비(靑龍寺位田碑)>가 있다. 이 비문에는 첫 번째 기록 후 2~3차례 추가한 부분이 있어 중창 공사는 이후 몇 차례로 나누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 미루어보아 이때 이미 청룡사는 거의 황폐한 지경에 이르렀고, 그 중창을 위한 시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의 중창으로 "여지도서"와 "가람고"에 청룡사의 존재를 알리는 기록이 남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의 문헌에서 청룡사는 다시 사라진다. 따라서 중창 후 영조대를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청룡사는 다시 폐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설 화〕
고려시대의 창건설화가 전래되고 있다.
어느 화창한 봄날 도승(道僧)이 이 근처를 지날 때,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급히 나무 밑으로 비를 피하는데, 공중에서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다가 땅에 떨어뜨렸다. 한 마리의 용이 날쌔게 여의주를 향해 내려오다가 청계산 위로 올라갔으며, 여의주는 큰 빛을 내다가 사라지고 용도 함께 사라졌으며 비도 멈추었다. 이를 이상히 여겨 산세를 두루 살핀 도승은 그곳이 비룡상천형(飛龍上天形)의 길지(吉地)임을 깨달았다.
용의 힘이 꼬리에 있다는 것을 상기한 그는 용의 꼬리에 해당하는 곳에 암자를 짓고 청룡사라 하였다 한다. 1392년(태조 1) 보각국사(普覺國師) 혼수(混修)가 이곳에 은거하다가 입적하자, 그의 죽음을 애도한 태조는 그곳에 대사찰을 중창하였다.
그 뒤 조선시대 굴지의 명찰로 내려오다가 조선 말기에 판서 민대룡(閔大龍)이 소실의 묘를 쓰려고 승려에게 많은 돈을 주고 불사르게 하였는데, 그 승려는 절을 불사르고 도망치다가 벼락을 맞아 죽었다고 한다.
현재의 청룡사는 옛터의 북쪽에 있는데, 원래 암자가 있던 곳으로 1665년(현종 6)에 중수하였고, 1921년에 혜종(惠宗)이 옛 당우를 뜯고 중건하였으며, 1959년에 다시 중수하였다. 1996년에는 현우가 요사를, 1998년에는 법당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우 및 문화재〕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과 삼성각·요사채가 있다. 그러나 옛 절터에는 국보 제197호인 보각국사 정혜원융탑(普覺國師定慧圓融塔), 보물 제656호인 보각국사 정혜원 융탑전 사자석등(普覺國師定慧圓融塔前獅子石燈), 보물 제658호인 보각국사 정혜원 융탑비(普覺國師定慧圓融塔碑)를 비롯하여 적운당사리탑(跡雲堂舍利塔)과 1692년(숙종 18)에 세운 청룡사위전비(靑龍寺位田碑)가 있다.
원래 정혜원 융탑 속에는 혼수의 유골을 비롯하여 옥촛대·금망아지·금잔 등이 있었으나 민족항일기에 도굴당하였다. 보각국사의 탑과 탑비·석등 등은 태조가 국사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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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에서 소태면까지 시내버스 8회 운행, 1시간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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