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도기행첩]은 표암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이 여름날 송도 유람을 하고 송도의 명승지를 그림으로 담아낸 화첩이다. 다가오는 여름 휴가철에 더위를 피해 바닷가, 워터파크, 리조트를 찾지만 전통적으로 최고의 피서지는 녹음이 우거지고 맑으면서도 찬물이 넘쳐흐르는 계곡일 것이다. 조선시대 선비들도 여름철에는 계곡물에 발을 담그면서 더위를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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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황, ‘태종대’, [송도기행첩] 제11면, 1757년 추정, 종이에 엷은 색, 32.8×54cm, 국립중앙박물관, 동원 이홍근 기증
여름 피서지, 개성 성거산 태종대
그림 오른쪽 위에 ‘태종대(太宗臺)’라고 적혀 있다. 태종대는 개성(송도) 북쪽 성거산(聖居山)에 있는 넓고 평평한 바위로조선 태종이 이곳에 놀러 온 후 그 이름을 따서 태종대가 되었다고 한다. 화면 중앙 아래쪽에는 넓적한 바위 위에 갓을 쓴 선비가 종이를 펼쳐놓고 그림을 그릴 준비를 하고 있다. 맞은편 바위에는 웃옷을 벗고 있는 사람, 바지만 걷어 올린 채 계곡에 발을 담그고 있는 사람, 이들을 서서 지켜보는 시종들이 보인다.
여름날 계곡 물놀이 풍경을 그린 이 그림은 [송도기행첩]으로 불리어지는 화첩에 포함되어 있다. 이 화첩에는 개성 지역의 명승지를 그린 16개의 그림과 3건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화첩 겉표지에 서예가 김태석(金台錫, 1875-1953)이 쓴 ‘표암선생유적(豹菴先生遺蹟)’ 표지가 붙어 있지만 이 화첩은 현재 ‘송도기행첩’으로 불린다. 표지 중 ‘표암’은 18세기 대표적인 사대부 문인화가이자 서예가, 평론가인 강세황의 호이다. ‘예원(藝苑)의 총수’라고 일컬어지는 그의 문화예술적 역량은 경기도 안산에서 꽃피웠다. 1744년 32세부터 영릉참봉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는 1773년 61세까지 30년을 안산에서 살면서 ‘안산 15학사’의 일원으로 활발한 예술 활동을 펼쳤다. 안산은 청나라로 향하는 뱃길이 항상 열려 있어서 청에서 새로 찍어낸 책과 화보를 쉽게 얻을 수 있는 곳으로 강세황은 이곳에서 새로운 문화 자극을 수용했다.
새로운 회화기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강세황 스스로가 “세상 사람들이 한 번도 보지 못한 것(此帖世人不曾一日擊)”으로 평한 이 화첩은 1757년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의 문집인 [표암유고]에 “박연(박연폭포)에서 놀고 돌아왔다”는 기록은 있으나 시기를 밝히지 않아 송도 방문 시기를 확인할 바 없었으나, 안산 15학사 중 한 명이자 그의 각별한 친구 허필(許佖, 1709-1768)이 그린 [묘길상도]에 적혀 있는 글에서 강세황이 45세가 되던 1757년 7월(음력)에 개성 여행을 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화첩의 화풍은 강세황의 40대 화풍과 상통하기 때문에 이 화첩을 1757년 송도 여행의 결과물로 추정한다. 그림 속의 녹음이 우거지고 개울에는 물이 가득하고 인물들은 웃옷을 벗고 탁족을 하는 풍경 또한 음력 7월에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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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대’ 세부. 표암 강세황은 조선후기 단골 명승지였던 송도를 유람한 후 그림을 남겼다.
지금은 가볼 수 없고 사진자료도 전해지지 않기에 태종대의 실제 모습을 확인할 수 없지만 조선후기에는 송도 여행의 단골 명승지였기에 태종대에 관한 기록은 많이 남아 있다. 조선 후기 문인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은 [송경유기]에서 “(…)태종대라는 데에 이르니 시냇물이 빙 둘러 흐르고 대의 옆에는 입석(立石)이 있으며 그 꼭대기엔 노송(老松)이 구불구불 기이하게 걸려 있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그림 속 풍경과 잘 들어맞는다. 전경의 태종대와 입석, 중경의 삐죽삐죽 솟은 암석들이 둘러쳐진 넓은 바위에서 물놀이 하는 사람들, 후경의 맑은 녹색으로 엷게 칠해진 산의 모습까지 태종대에서 바라본 풍경을 앞으로 끌어당겨서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는 그가 실경을 다룰 때 보이는 독특한 특징이다.
화면 중앙 하단부에 절단된 바위를 배치함으로써 그림을 보고 있는 사람이 강세황으로 추측되는 인물과 함께 태종대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효과를 낸다. 현장감을 높이는 데에 효과적인 구도이다. 구도뿐만 아니라 세부 표현에서도 사실감을 높였는데, 발을 담그고 있는 선비가 앉아 있는 바위 아래 부분을 불투명한 흰색으로 가볍게 칠해서 맑은 물에 잠겨 있는 바위를 표현한 모습도 조선시대 다른 그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다. 또한 바위에 음영을 가해서 입체감을 내려고 한 모습도 강세황이 수용한 서양화풍의 영향이다.
한국의 3대 폭포, 개성 박연폭포
태종대가 있는 성거산과 천마산 사이에는 송도삼절 중 하나인 박연폭포가 있다. 높이 37m로 한국 3대 폭포로 꼽힌다. 폭포 위에 박연이라는 못이 있고 폭포 밑에는 둘레 120m, 지름 40m 정도의 고모담(姑母潭)이 있다. 고모담에는 여러 명의 사람이 설 수 있는 큰 바위가 있으며 서쪽 기슭에는 범사정(泛斯亭)이 있다. 화면 상단 오른쪽에는 대흥산성의 북문인 성거관(盛居關) 문루(門樓)가 보인다. 강세황의 [박연폭포]는 현재의 박연폭포 풍경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박연폭포 주변의 경물 하나하나를 빠트리지 않고 성실하게 화폭에 옮겼다. 실제 경관에 어울리는 가로가 긴 화면에 거대한 암석이 층층이 쌓인 암벽을 구축하고 그 사이를 포말을 일으키며 시원스럽게 쏟아져 내려오는 물줄기를 그렸다. 암벽과 산, 나무는 갈색과 녹색 계열의 맑은 담채를 이용해서 여름철에 보이는 물기를 머금은 바위와 푸른 산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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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강세황, ‘박연폭포’, [송도기행첩] 제12면,(우)정선, [박연폭포], 개인소장
당대의 진경산수화가 정선도 박연폭포를 그렸는데 강세황과는 달리 세로로 긴 구도로 폭포의 높이를 과장하고 경물을 선택적으로 배치했다. 선택과 집중으로 위압적인 강한 인상을 주는 정선의 그림과는 달리 강세황의 박연폭포는 현실감 있게 전달하려는 의도로 필선과 담백한 색채로 맑고 깔끔하면서 단정한 인상을 주어 보는 이의 눈을 편안하면서도 시원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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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에 있는 박연폭포 모습. 한국의 3대 폭포 중 하나로 불린다.
송도기행첩의 제작 배경
강세황의 송도 여행은 당시 개성 유수(留守)를 지낸 오수채(吳遂采, 1692-1759)의 초청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경치가 좋은 곳에서 근무하던 지방관리들이 친구들을 불러 함께 유람을 하고 이를 시나 그림으로 남기는 일은 조선시대에 일반적인 일이다.
[송도기행첩]에는 오수채의 흔적이 남아 있다. [박연폭포] 그림 뒷면에 그의 시 ‘범사정(泛槎亭)’이 적혀 있고 그의 호인 체천(棣天)과 자인 사수(士受) 인장이 찍혀 있다. 또한 화첩 마지막 면에 있는 강세황의 시에는 ‘오제(五弟)’라는 인물이 화첩을 소유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는데 오제는 오수채의 손자 오언사(吳彦思, 1734-1776)로 보고 있다. 이러한 친분을 보이는 오수채와 강세황은 선친대부터 일찍부터 교유가 있었다.
강세황이 개성을 방문한 1757년에 개성의 유수로서 오수채는 1648년 편찬된 [송도지]를 보완하여 [송도속지]를 간행했다. 지리지 발간은 18세기에 전국적인 현상인데 동아시아 삼국의 공통된 현상이기도 하다. [송도속지]에는 범사정, 태안창, 대흥산성 등과 같이 [송도지] 발간 이후 새롭게 조성된 장소들이 기록되었을 것이다. [송도기행첩]에도 이곳을 그린 그림들이 수록되어 있다. 군량미 창고 태안창(泰安倉)에서 바라본 풍경 그림이 3점이나 있으며 군사적으로 중요한 대흥산성, 군기고 대흥사, 행궁인 대승당 그림이 포함되어 있다. 이 장소들이 다른 송도기행 문학에서는 다루어지지 않는 공적 기능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송도기행첩]과 다른 기행사경첩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강세황의 여름 여행의 추억을 담은 [송도기행첩]은 회화사적으로는 개성 주변 명승지 그림을 한데 모은 현존하는 유일한 화첩이라는 점과 음영법, 투시도법의 서양화법이나 중국의 새로운 화풍을 도입했다는 면에서 높이 평가 받고 있다. 그리고 문화사적으로는 조선시대 집안 간의 오랜 교유 관계와 문인들 사이에 크게 유행한 명승지를 유람하고 시와 그림으로 남기는 풍조를 보여주며 또한 지리서를 편찬한 관료의 공적을 기념하려는 측면도 반영하고 있는 다층적 의미의 화첩이다.
![]() [오수채 초상] 부분, 조선 19세기, 오주환 소장. |
![]() 강세황, ‘태안창’, [송도기행첩] 제15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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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이수경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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