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 강진군 성전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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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참조 및 출처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전통사찰종합정보 |
사진출처 : | 문화재청 |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월출산에 있는 절.
〔연 혁〕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大興寺)의 말사이다.
무위사는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관음사(觀音寺)라 칭했다는 기록이 『무위사사적(無爲寺事蹟)』에 전하나, 이는 원효스님의 생몰연대(617-686)와 맞지 않아 신빙성이 부족하다. 이후의 연혁은, 삼국통일 후 875년(헌강왕 1)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갈옥사(葛屋寺)로 창건한 것이 첫번째 중창이라 전한다.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905년(효공왕 9) 이후에 선종인 가지산문(迦智山門) 계통의 선각국사(先覺國師) 형미(逈微, 864~917)가 고려 태조 왕건의 요청으로 무위갑사(無爲岬寺)에 머무르면서 절을 중수하고 널리 교화를 펴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 선각국사 관련기록은 경내에 서 있는 「고려국 고무위갑사 선각대사편광영탑비명 병서」에 기록된 내용으로, 무위사는 선각국사가 주석했던 10세기 초 이전에 무위갑사라는 이름으로 이미 창건되어 있었고, 형미스님이 중창하면서 가지산문 소속의 선종사찰로 그 위치를 확고히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무위사사적』에 의하면 고려시대인 946년(정종 1)에 형미스님이 제 3창을 하면서 모옥사(茅屋寺)로 절 이름을 바꾸었다고 하나, 946년은 이미 형미스님이 입적한 30년 뒤 최언위가 지은 「선각대사편광영탑비」가 세워진 해이므로 믿기 어렵다. 이는 아마도 형미스님이 모옥(茅屋)이던 무위갑사를 왕건의 후원으로 크게 중창하면서 교화를 펼쳤던 사실을 후세사람들이 잘못 이해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 보인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무위사는 활기를 띠게 되는데, 1407년(태종 7) 12월 조정에서 각처의 명찰을 여러 고을의 자복사(資福寺)로 삼게 하였을 때 무위사는 천태종 17사 중의 하나로 소속되었다. 따라서 무위사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선종사찰에서 천태종으로 성격이 변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사격 변동은 고려후기 천태종 백련결사(白蓮結社)의 활발한 활동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인근에 있는 만덕산 중심의 백련결사 역시 천태종의 법화신앙에 입각한 결사운동으로 무위사의 사찰성격 변동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결국 무위사는 천태종 백련결사가 활발했던 고려후기에 천태종 소속 사찰이 되었다가 조선 초 사찰 통폐합의 2차 정리기인 1407년에 천태종 소속의 자복사로 남게 된 듯하다. 이 무렵의 연혁을 보면, 1430년(세종 12)에 극락보전이 건립되었는데 지금 극락보전 안에 모셔진 목조아미타삼존불도 이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1476년(성종 7)에는 극락보전 후불벽이 만들어지고 후불벽화가 조성되었음이 「무위사극락전묵서명(無爲寺極樂殿墨書銘)」을 통해 확인된다.
이 묵서명을 보면 극락보전 건립에 관직을 부여받은 승려들이 참여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이는 곧 극락보전이 조선 초기에 국가로부터 인정받은 고급 기술자의 손으로 만들어진 건물로서 국가적인 사업으로 추진된 것임을 짐작케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7 「강진현 불우조」에는 “세월이 오래되어 퇴락했던 무위사를 이제금 중수하고, 이로 인해 수륙사(水陸社)로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위사가 수륙사로 지정된 것과, 극락전을 건립하고 아미타삼존도ㆍ아미타여래도 등의 벽화를 조성한 것은 조성시기 및 신앙배경 등의 측면에서 상호 밀접한 관련성을 엿볼 수 있다. 왜냐하면 수륙사로 지정된 무위사는 수륙재(水陸齋)를 빈번하게 행하였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수륙재는 육지와 물 위를 떠도는 영혼을 부처님의 법력으로 천도(薦度)하는 의식으로서, 수륙사로 지정된 무위사에 극락전과 아미타불 벽화 등 서방 극락정토와 관련된 불사가 이루어진 것은 이와 같은 신앙구조 속에서 가능한 일일 것이다.
한편 『무위사사적』에 따르면 1555년(명종 10년)에 태감(太甘) 스님이 4창하고 무위사로 개칭했다고 기록하였으나, 앞서 보았듯이 무위사란 사찰명이 이보다 훨씬 앞선 시기인 1407(태종 7)에 이미 나타나고 있어 이 역시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임진ㆍ병자의 양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그다지 피해를 입지 않아, 절의 웅장하고 화려함이 일도(一道)에 으뜸이었다 한다.
그러나 이후 법당과 요사가 점차 퇴락하여 몇 개의 전각만 남게 되었으며, 1678년(숙종 4)에 극락보전 앞마당에 있는 괘불지주를 마련하였다. 1739년(영조 15)에 해초(海超) 스님의 공덕으로 미타전ㆍ천불전ㆍ시왕전을 보수하고, 당시 주지 극잠(克岑) 스님이 중심이 되어 앞에서 언급한 『무위사사적(無爲寺事蹟)』을 작성하였다.
1934년에 극락보전이 국보 제131호로 지정되었으며, 1956년 극락보전을 보수하고 보존각을 설립하여 이곳에 벽화를 봉안하였다. 1975년에 극락보전을 재보수하고 보존각을 새로 세웠으며, 편광영탑비와 사리탑 등에 대한 정화 불사에 이어 봉향각ㆍ해탈문ㆍ명부전ㆍ천불전을 다시 지었다. 근래에는 1991년에 산신각을 짓고 1995년에는 기존의 동쪽 요사를 늘려서 지었다.
〔문화재〕
이 중 극락보전은 국보 제13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벽에는 29점의 벽화가 있었으나 지금은 본존불 뒤의 가로 4m, 세로 7m 크기의 후불탱화만이 남아 있고, 28점은 보존각에 보관되어 있다.
이 벽화들은 법당이 완성된 뒤 찾아온 한 노거사(老居士)가 49일 동안 이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당부한 뒤 그렸다는 전설이 있다.
49일째되는 날, 주지가 문에 구멍을 뚫고 들여다보니 파랑새 한 마리가 입에 붓을 물고 마지막으로 후불탱화의 관음보살 눈동자를 그리고 있었는데, 새는 인기척을 느끼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지금도 후불탱화의 관음보살상에는 눈동자가 없다.
이 밖에도 선각대사변광탑비(先覺大師遍光塔碑)는 보물 제507호로 지정되어 있고, 그 옆에는 석탑형식을 취한 보기 드문 부도가 있는데, 선각대사변광영탑(先覺大師遍光靈塔)으로 명명되어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76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미륵전 안에는 고려 말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불입상이 있다.
지정문화재 목록 및 해설
〔설 화〕
극락보전 벽화를 그린 파랑새
무위사의 극락보전 벽화에는 독특한 전설이 전하고 있다. 사찰에 극락보전을 짓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았을 즈음, 한 노인이 찾아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이 법당의 벽화를 그릴 것이니, 그 대신 49일간 절대로 이 법당 안을 들여다보는 이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를 허락한 주지스님은 약속대로 기다렸으나, 도대체 저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증을 참을 길이 없었다. 마지막 49일째 되는 날, 주지스님은 ‘설마 작은 구멍으로 살짝 보는 것은 괜찮겠지’라고 생각하며 손가락으로 창호지에 작은 구멍을 뚫어 몰래 들여다보고 말았다.
그런데 법당 안에는 있어야 할 노인은 없고 파랑새 한 마리가 붓을 입에 물고 날아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있지 않은가? 화들짝 놀란 주지스님이 법당 문을 열고 들어서니 마지막으로 관음보살의 눈동자를 그리고 있던 파랑새는 입에 붓을 문 채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도 극락보전의 벽화 속 관음보살에는 눈동자가 없다고 한다.
〔사찰풍경〕
인위적 조작이 닿지 않은 맨 처음의 진리를 깨달으라는 ‘無爲’의 절이름처럼, 무위사는 월출산 남동쪽 기슭에서 한 점의 허세나 허튼 구석 없이 단정한 모습으로 찾는 이를 맞아준다.
신라시대에 설립되어 도선국사가 중창한 뒤, 태조 왕건의 요청으로 선종(禪宗)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선각국사(先覺國師)가 머무르며 널리 교화를 펼친 곳으로 유명하다. 따라서 사철 곳곳에는 선각스님의 유물과 흔적이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전하며, 가지산문 소속의 선종사찰로 확고한 위치를 다져온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조선 전기에 이르면 극락보전의 건립과 함께 무위사의 대명사격인 후불벽화(後佛壁畵) 불사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당시 사찰명이 수륙사(水陸社)로 개칭되면서 육지와 물 위를 떠도는 영혼 천도의례인 수륙재(水陸齋)를 빈번히 베풀었을 것이고, 이러한 배경 하에 극락전과 아미타불 벽화 등 서방 극락정토(極樂淨土)와 관련된 불사가 이뤄진 것은 동일한 신앙구조 속에서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꼭 필요한 부재만 사용하여 검박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맞아주는 조선 초기의 대표적 목조건축인 극락보전, 우리나라 불교벽화 가운데 가장 앞선 시기의 작품들로 흙벽[土壁]에 그려진 수십 점의 벽화들, 여의주를 문 용머리[龍頭] 거북이 비신(碑身)을 받친 채 온전한 모습을 드려내고 있는 선각대사 탑비 등은 무위사의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이다.
도로안내
호남고속도로 광산I.C→13번 국도→(53km)→송정.나주 거쳐 영암라이온스탑 앞 삼거리→ 왼쪽 13번 국도→(1km)→오리정 오거리→불티재→강진, 해남 가는 방면→백운교 지나 오른쪽으로 무위사 진입로→(3.3km)→무위사
현지교통
1) 광주종합버스터미널에서 강진행(20분 간격)이나 해남행(20분 간격) 직행버스 이용 -> 성전면에서 하차 (1시간 20분 정도 소요)
2) 성전에서 무위사까지 군내버스(하루 4회)나 택시 이용 (15분 소요)
3) 강진시외버스터미널에서 무위사행 군내버스 이용/하루 4회 운행 (25분 소요)
4) 강진-무위사행 군내버스 이용/ 4회운행/ 25분 소요 (첫차 06:40 막차 17:20)
주변관광지
입 장 료
주차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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