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제 불입상, 경북 경주시 구황동 삼층석탑 출토, 통일신라, 692년 경, 금, 높이 14.0cm, 국보 80호 |
![]() 금제 불좌상, 경북 경주시 구황동 삼층석탑 출토, 통일신라, 706년 경, 금, 높이 12.0cm, 국보 79호 |
사리함 속에서 나온 부처
1942년 황복사 터(皇福寺址)로 전해오는 경주시 구황동(九黃洞) 절터의 삼층석탑을 해체·복원할 때 2층 지붕돌 상부의 사리공에서 두 점의 불상이 발견되었다. 불상이 담겨있던 금동제 사리외함의 뚜껑 안쪽에는 해서체로 1행에 20자씩 총 18행의 명문과 99기의 작은 탑들이 새겨져 있다. 명문에 따르면 천수(天授) 3년(692) 신문왕(神文王)이 세상을 떠나자 신목태후(神穆太后)가 왕위를 이은 아들 효소왕(孝昭王)과 함께 종묘의 신성한 영령을 위해 선원가람에 삼층석탑을 세웠다. 성력(聖曆) 3년(700) 신목태후가 세상을 떠나고 대족(大足) 2년(702) 효소왕이 승하하자 뒤를 이은 성덕왕(聖德王)이 신룡(神龍) 2년(706)에 불사리 4과(顆)와 6촌(寸) 크기의 순금제 아미타상 1구, 그리고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1권을 석탑 2층에 안치하였다.

사리외함 및 사리외함 뚜껑 안쪽, 경북 경주시 구황동 삼층석탑 출토, 통일신라, 706년경
1942년 발견 당시에는 금제 불상 2점, 금제와 은제 방형 상자, 금제와 은제 고배, 유리판, 유리구슬 등이 발견되었다. 석탑 사리공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사리외함 측면에 점선으로 새겨진 수많은 소탑(小塔) 모양을 통해 704년 한역된 『다라니경』이 신라로 유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리갖춤, 금제·은제 방형합, 금제·은제 고배, 유리판, 유리옥, 경북 경주시 구황동 삼층석탑 출토, 통일신라, 706년경
불상의 제작 연대
사리함 속에서 발견된 두 점의 불상 가운데 하나는 입상이고 또 다른 하나는 좌상이지만 명문에는 불상의 자세가 기록되어 있지 않기에 불상의 제작 연대나 안치 순서가 명확하지는 않다. 그러나 두 불상의 양식이나 형식을 살펴보면 입상은 692년 석탑 건립시기에 봉안되고, 좌상은 706년에 봉안된 것으로 추정된다. 불입상의 얼굴을 살펴보면 이목구비의 경계와 윤곽이 부드럽고, 살짝 올라간 양 입가에 고졸한 미소가 어려 있다. 또한 두툼한 법의에 가려 신체가 드러나지 않게 표현되었기에 고식(古式), 즉 삼국시대 불상 양식이 남아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을 통해 볼 때 불입상은 아마도 692년 석탑을 세울 당시에 안치된 불상일 가능성이 높다.
반면 불좌상은 신체 표현이 사실적이고 풍만하며, 옷주름이 유려하고 자연스럽다. 이목구비의 경계가 분명한 점도 통일신라 불상의 특징이다. 한쪽 손은 올리고 다른 한손은 무릎에 얹는 등 7세기에 유행했던 아미타불의 수인(手印)을 갖추었고 중국 당(唐)의 영향을 받은 통일신라 불상 양식을 보여주기에 불좌상은 706년에 안치된 아미타상으로 추정된다.
![]() 금제 불입상 얼굴 부분 |
![]() 금제 불좌상 얼굴 부분 |
전통의 계승과 새로운 유행의 예고
불입상은 양 어깨를 덮은 법의를 왼쪽 등 뒤로 넘겼으며, 두터운 옷주름은 U자형을 이루며 층층이 흘러내려 온다. 신체에 비해 커다란 손은 사실적인 표현과는 거리가 멀며, 오른손은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여 들어 올렸고, 왼손에는 옷자락을 쥐고 있다. 옷자락을 쥔 형식은 인도의 마투라 불상이나 간다라 불상, 또는 중국의 6세기 불상에서도 발견되는 고식적인 요소이다.
![]() 금제 불입상 전면 |
![]() 금제 불입상 후면 |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고식적인 요소 속에서 통일신라시대에 크게 유행하게 되는 불상 형식이 엿보인다는 점이다. 불입상의 U자형 주름은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하는 옷주름의 선구적인 형태이다. 이처럼 아래로 층층이 흘러내리는 옷을 입은 불상을 아육왕상식(阿育王像式) 불상이라고도 하는데, 아육왕상은 인도의 아육왕이 만들었다는 전설 속의 불상이다. 중국에서는 ‘아육왕상’ 명문이 있는 불상 가운데 이처럼 U자 형태로 옷주름이 층층이 흘러내리는 예가 많고, 통일신라시대에는 불상에 명문은 없지만 이러한 옷주름이 표현된 불상들이 상당수 제작되었다.
광배에는 문양과 크기가 다른 동심원과 타오르는 불꽃 문양을 정교하고 섬세하게 맞새김하였으며, 불두 바로 뒤의 광배 중앙에는 연꽃잎이 덧대어 있다. 대좌는 낮은 연판과 12각형 받침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작 과정을 보여주는 흔적도 남아있어 흥미로운데, 머리와 가슴에는 불상의 원형과 거푸집을 고정하는 틀 고정용 못[주형지지재(鑄型支持材) 또는 형지(型持)]을 제거하고 마감한 흔적이 있다. 또한 등에는 완성 후 흙으로 만들었던 원형을 파냈던 구멍이 남아있다. 광배와 불상, 불상과 연화대좌는 별도로 주조하여 만든 후 고정하였다.
국제적 양식의 수용과 발전
불좌상은 8세기 전반, 통일신라의 불교미술이 당시 국제적으로 크게 유행하던 중국 당나라의 불상 양식을 새롭게 받아들여 어떻게 발전·전개시켰는지를 보여준다. 불좌상은 함께 발견된 불입상에 비해 전체적으로 양감이 풍부하고 얼굴 이목구비의 윤곽선이 뚜렷하며, 위엄과 권위가 있는 근엄한 모습이 특징이다. 양쪽 어깨를 덮은 법의는 훨씬 얇아졌고 신체에 밀착되어 몸체의 굴곡과 풍만한 인체를 그대로 드러낸다. 또한 삼도(三道)를 표현한 목의 가로 주름선이 뚜렷해지고 실제 손처럼 손금까지 표현할 정도로 신체 세부도 정밀하게 표현하였다. 연화대좌 아래로 흘러내린 법의의 표현은 중국 당나라 불상과 대좌 표현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형식이다. 특히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고, 왼손은 무릎에 내려놓은 이와 같은 손 모양 역시 중국에서 유행했던 아미타불상의 손모양과 유사하다.
![]() 금제 불좌상 전면 |
![]() 금제 불좌상 후면 |
불좌상은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표현을 수용하면서도 육감적이거나 관능적인 과장된 입체감을 배제하였다는 점에서 중국 불상과 차이를 보이며 석굴암으로 전개되는 통일신라 불상의 절정을 예고한다.
![]() 금제 불좌상, 경북 경주시 구황동 삼층석탑 출토, 통일신라, 706년 경, 금, 높이 12.0cm, 국보 79호 |
![]() 불좌상, 중국 산서성 루이청현(芮城縣) 펑링두(風陵渡) 출토, 唐, 710년 경, 석회암, 높이 93.0cm, 루이청현박물관(芮城縣博物館) 소장 (사진출처:『中国国宝展』, 東京国立博物館, 2004) |
![]() 금제 불좌상 광배와 대좌 |
광배와 불상, 그리고 대좌가 모두 별도로 제작되었는데 머리 주위의 빛을 형상화한 두광(頭光)과 신체 주위의 빛을 형상화한 신광(身光)이 하나의 광배로 표현되었다. 두광 부분에는 연꽃잎이 덧대어 있고 신광 중앙에는 넝쿨 문양이 표현되어 있다. 이들 주변에는 넝쿨 문양과 화염문이 정교하게 맞새김되어 있다. 대좌는 삼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원형이라는 점 역시 독특하다.
한 가지 의문점은 불좌상의 크기이다. 명문에 따르면 아미타상이 6촌이라고 했으나 실제 크기는 4촌이 안 된다는 점에서 이 점은 추후 해결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두 점의 불상은 사리장엄구로 불상을 봉안한 시원적인 사례이며 연대 추정이 가능한 왕실 발원의 순금제 불상이고, 광배와 대좌가 온전히 보존된 드문 예이다. 또한 전통을 계승하고 새로운 양식을 받아들인 통일신라 불교조각의 세련된 미감과 섬세한 주조 기술의 진면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통일신라 불상의 정수를 보여준다.
- 글
- 신소연 국립중앙박물관 연구사
'문화재,도자기,사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광주 하사창동 출토 철불 (0) | 2014.11.10 |
---|---|
청동연지형병향로 (0) | 2014.11.10 |
대가야 무덤에서 출토된 판갑옷과 투구 (0) | 2014.11.10 |
원주 흥법사지 삼층석탑 (原州 興法寺址 三層石塔) (0) | 2013.12.30 |
영동 영국사 삼층석탑 (永同 寧國寺 三層石塔) (0) | 2013.12.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