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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7호] 한지장(韓紙匠) | 중요 무형 문화제

문성식 2012. 3. 30. 05:40


종 목 중요무형문화재 제117호
명 칭 한지장(韓紙匠)
분 류 무형유산 / 공예기술/ 지공예/ 지공예
수량/면적
지 정 일 2005.09.23
소 재 지 경기 경기전역
시 대
소 유 자
관 리 자


※ 본문설명

'한지장(韓紙匠)'이란 전통한지를 제작하는 장인으로 한지는 닥나무와 황촉규(黃蜀葵)를 주재료 하여 고도의 숙련된 기술과 장인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완성된다. 닥나무를 베고, 찌고, 삶고, 말리고, 벗기고, 다시 삶고, 두들기고, 고르게 썩고, 뜨고, 말리는 아흔아홉 번의 손질을 거친 후 마지막 사람이 백번째로 만진다 하여 옛사람들은 한지를 "백지(百紙)"라 부르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의 한지는 고려시대부터 그 명성이 높아 중국인들도 제일 좋은 종이를 '고려지(高麗紙)'라 불렀고, 송나라 손목(孫穆)은 『계림유사(鷄林類事)』에서 고려의 닥종이는 빛이 희고 윤이 나서 사랑스러울 정도라고 극찬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태종대부터 조지서(造紙署)를 설치해 원료 조달과 종이의 규격화, 품질 개량을 위해 국가적 관심사로 관리해오다가 근·현대를 지나오면서 건축양식과 주거환경의 변화, 서양지의 수입으로 전통적인 한지의 명맥은 거의 단절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에도 한지제작은 생산원가와 제작공정의 편의로 닥나무 껍질 대신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수입한 펄프를 사용하고, 황촉규 대신 화학약품인 팜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숨김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이에 문화재청에서는 전통한지의 올바른 보존과 전승을 위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1934. 5. 10 ~ | 보유자 인정: 2005년 9월 23일

 

 

달빛은 길어올린다고 해서 길어올려지는 것이 아니에요.
달빛을 그대로 두고 마음으로 그 빛을 보듬을 때
비로소 한가득 길어올려지는 거에요.
- 영화 [달빛 길어올리기] 대사 중

시간과 더불어 스며 배이는 한지 미학

“견오백 지천년”이라는 말이 있다. 500년을 가는 비단에 비해 한지는 그 곱절에 해당하는 1,000년을 견딘다는 뜻이다. 한지는 닥나무와 황촉규를 주재료로 하여 고도의 숙련된 기술과 장인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완성된다. 닥나무를 베고, 찌고, 삶고, 말리고, 벗기고, 다시 삶고, 두들기고, 고르게 섞고, 뜨고, 말리는 아흔 아홉 번의 손질을 거친 후 마지막 사람이 백 번째로 만진다 하여 옛사람들은 한지를 ‘백지(百紙)’라 부르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의 한지는 고려 시대부터 그 명성이 높아 중국인들도 제일 좋은 종이를 ‘고려지(高麗紙)’라 불렀고, 손나라 손목은 [계림유사]에서 고려의 닥종이는 빛이 희고 윤이 나서 사랑스러울 정도라고 극찬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태종대부터 조지서(造紙署)를 설치해 원료 조달과 종이의 규격화, 품질 개량을 위해 국가적 관심사로 관리해오다가 근, 현대를 지나오면서 건축양식과 주거환경의 변화, 서양지의 수입으로 전통적인 한지의 명맥은 거의 단절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에도 한지제작은 생산원가와 제작공정의 편의로 닥나무 껍질 대신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수입한 펄프를 사용하고, 황촉규 대신 화학약품인 팜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숨김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이에 국가에서는 전통한지의 올바른 보존과 전승을 위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한지장 류행영

류행영 선생은 1932년 5월 10일 전북 완주군 삼례면 석전리에서 아버지 류흥태 선생과 어머니 이금례 여사 사이에 3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47년에 이리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이리농림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1948년 중퇴하고 집안일을 돕기 시작하였다. 이후 류행영 선생은 전통한지 제조법을 부친에게 배워 한지를 제작하던 김갑종 선생에게 전통한지 제조법을 전수받아 55여년 동안 전통한지 제작에 몰두해 왔다. 김갑종 선생은 보유자 매형의 형님으로 일제 강점기 군용지를 제조하여 납품하던 장인이었으며 그 제조기술을 유일하게 류행영 선생에게만 전수하였다. 전통한지 제조법을 전수받고 1959년 전주제지공업사에 입사하면서 사회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전남 장성군 장성읍 교정리에 위치한 제지공장과 마석 소재 주경환 선생이 경영하던 한지공장에서 일하다가 1973년에는 이 공장을 인수하여 간판을 영신제지로 바꾸고 자신의 주관으로 한지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잘 운영되던 공장이 운영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경남 의령으로 이주했다가 부산에 있던 닥나무 수출회사인 삼백물산에 입사해 한동안 근무했다.

 

1982년 안동대학교 권기운 교수의 지원으로 안동 소재 옹천제지를 경영하다가 1987년에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소재의 태봉암 아래에 전통한지 연구소 겸 공방을 설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동안 한국한지작가협회 회원, 기술표준원의 한지 표준화사업 자문위원, 한솔제지 전통한지 재현 자문위원, 한지문화연구회 감사 등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전통한지의 정맥을 잇기 위해 애쓰고 있다. 또한 용인 송담대학 전통한지연구소 특별연구원, 충북대학교, 성신여자대학교, 전주대학교, 핀란드 헬싱키 공과대학 및 예술대학 등에서 전통한지 특강과 시연회를 개최하여 한지의 우월성과 전통의 가치를 알리는데도 활발하게 활동해 왔다. 더불어 각종 방송과 언론매체에도 여러 차례 출연하여 전통한지의 대중적 관심을 높이는데도 기여했다. 2005년 9월 23일 중요무형문화재 한지장으로 인정되었고 이후, 건강이 여의치 않아 더 이상 현장에서 활동하기는 어려워 명예보유자로 인정된 것이 2008년 12월 30일이다. 60여년을 오로지 전통한지의 복원과 전승이라는 외길에 종사하면서 온갖 어려움과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뜻을 굽힌 적이 없다.

 

주요작품

전통염색한지, 류행영, 97X64cm

 

한지는 닥나무나 삼지닥나무 껍질을 원료로 하여 만들기 때문에 닥종이라고도 불리며, 질기고 오래가는 특성으로 1,000년이 지나도 변색이나 훼손이 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순백색의 정형을 기본으로 연한 갈색과 분홍빛, 하늘색에 가까운 다채로운 색채의 변주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가실한 질감과 어우러진 부드러운 파스텔 톤은 한지 특유의 색감인 동시에 거스름 없는 자연염색의 정화에 해당한다. 자연염색이 본디 천에 주로 쓰이지만, 의외로 한지에도 잘 어울린다.

 

류행영 선생의 한지는 일반적인 한지의 특징을 고르게 갖추었음은 물론, 특유의 기술적 성취를 이루었다. 얇은 박엽지에서 두터운 후지까지 높은 품질의 종이를 재현해 냈다. 순백의 종이는 말할 것도 없고, 다채로운 색지를 제작하는데 남다른 재능을 발휘해 왔다. 쪽, 소목, 황벽, 홍화, 치자 등 염재가 선생이 즐겨 쓰는 색재료다. 또, 섬세하기로 이름난 옥춘지를 제작할 수 있는 이도 류행영 선생이 유일하다. 옥춘지는 평량 8g/㎡을 넘지 않을 만큼 정밀한 종이지만, 질기고 기능적이어서 최상품에 해당한다.

작업과정

 

도침하는 모습


도침하는 모습

약간 덜 마른 종이를 포개거나 풀칠을 하여 디딜방아나 방망이로 두들겨서 종이가 치밀하고 매끄러우면서 윤기가 나도록 해주는 과정이다.

 

재료 및 도구

일반적으로 한지 재료로 쓰이는 것은 참닥나무, 삼지닥나무, 산닥나무가 있고, 닥나무 외에 섞어 쓰는 원료는 뽕나무과에 속하는 꾸지나무, 뽕나무, 박쥐나무가 있다. 닥나무는 섬유질이 매우 길고 질기기 때문에 한지를 제작하는데 가장 중요한 재료이다. 특히 국산 닥은 질이 뛰어나기로 유명하다. 따라서 가장 좋은 한지는 국산 닥으로 만든 한지이다.

 

한지의 제작도구로는 닥나무 껍질이나 흑피를 벗길 때 사용하는 닥칼, 닥나무를 삶을 때 사용하는 닥솥, 닥 백피를 삶아 두드릴 때 사용하는 닥방망이, 종이를 뜰 때 사용하는 발틀, 통물을 떠 섬유질만을 가라앉게 하는 발, 삶은 닥섬유를 두드릴 때 사용하는 닥돌과 이외에 해리통, 지통, 풀작대기, 베개머리, 압착기, 이릿대, 빗자루, 도침기, 건조기 등이 사용된다.

약력
1932
전북 완주 출생
1951
전북 완주 한지공장에서 김갑종 선생에게 전통한지 제조기술 사사
1991
한국한지작가협회 회원(한지 제작인)
1993
한솔제지 전통한지 재현 자문
1994
전통한지 장나 미술관 전시
1995
국립중앙과학관 전통한지 제조시연
1997
용인송담대학 전통한지 시연회, 충북대학교 전통한지 특강 및 시연회
2001
핀란드 헬싱키 공과대학 및 예술대학 등에서 전통한지 시연
2004
노동부 지정 기능전승자 선정(한지제작 및 가공분야)
2005
노동부 지정 기능전승자 선정(한지제작 및 가공분야)
2004
독일 주빈국 초청 전통한지 시연, 전주대 경영대학원 한지문화산업학과 객원교수
중요무형문화재 제117호 한지장 기능 보유자 인정
2008
중요무형문화재 제117호 한지장 명예보유자 인정

한국문화재보호재단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은 문화재보호법 제9조에 근거하여 우리 전통문화를 널리 보전, 선양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공공기관입니다.

 

공식블로그 : http://blog.naver.com/fpcp2010

 

사진 서헌강(문화재전문 사진작가)

한지장 장용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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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 11. 28. ~ | 보유자 인정: 2010년 2월 11일

비단 오백 년 종이 천 년을 증명하듯
우리 한지에 쪽물을 들인 감지(柑紙)는 천 년을 견딘다는데
그 종이 위에 금니은니로 우리 사랑의 시(詩)를 남긴다면
눈 맑은 사람아
그대 천 년 뒤에도 이 사랑 기억할 것인가
감지에 남긴 내 마음이 열어주는 길을 따라
경주 남산 돌 속에 잠든 나를 깨우러 올 것인가
풍화하는 산정 억새들이 여윈 잠을 자는 가을날
통도사 서운암 성파(性坡) 스님의 감지 한 장 얻어
그리운 이름 석 자 금오산 아래 묻으면
남산 돌부처 몰래 그대를 사랑한 죄가
내 죽어 받을 사랑의 형벌이 두렵지 않네
종이가 천 년을 간다는데
사람의 사랑이 그 세월 견디지 못하랴
돌 속에 잠겨 내 그대 한 천 년 기다리지 못하랴.

- 정일근 시인의 ‘감지(柑紙)의 사랑’, 시집 [감지의 사랑], (빛남, 1995) 중에서

살아 숨쉬며 천년을 견디는 종이, 한지

한지(韓紙)는 백지라고도 한다. 그 빛깔이 희고 고와 흰백(白)자를 써서 백지(白紙)라고도 하지만, 한 장의 종이를 만들려면 만드는 사람의 손이 아흔 아홉 번 가고 사용하는 사람의 손이 백 번째로 간다고 하여 일백백(百)자를 써서 백지(百紙)라고도 한다. 종이의 기원은 서기 105년 중국 후한시대의 채륜이 넝마를 찧어 만든 종이인 “채후지”가 인류 최초의 종이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 중국의 전한시대 유적에서 다수의 종이가 출토되어 채륜시대보다 200여 년 전에 이미 종이가 만들어지고 있었음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들 출토 종이는 모두 넝마를 원료로 한 마지(麻紙)였다. 종이의 제조법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시기는 명확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대략 2세기경에서 6세기 사이로 보고 있으며, 이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르다. 최소 7세기 초인 삼국시대에 제지기술이 한반도에 보편화된 것으로 보고 있다. 통일신라시대는 닥섬유로 만든 종이가 우리 종이로 정착된 시기로 볼 수 있는데, 당시의 종이를 계림지(鷄林紙)라고 불렀다. 우리 종이의 발전기라고 할 수 있는 고려시대는 각종 서적의 출판이 활발해졌으며 팔만대장경, 속장경 간행 등 거대한 인쇄사업이 반복되었다. 이 시대 만들어진 고려지(高麗紙)는 질기기로 유명하여 중국에서는 고려피지(高麗皮紙)라는 별칭으로 불렀으며 원나라가 고려에 요구한 물품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우수성이 입증된다.

조선전기는 우리나라 제지 기술의 완성 단계로 활자 인쇄술의 발달이 종이의 수요 증가를 가져와 제지업이 국가의 주요 산업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이르러 계속되는 외침과 삼정의 문란 등은 제지업 기반의 붕괴를 초래했으며 국영 제지산업 기반이 붕괴되고 조선시대 말까지 국가 수요의 종이 공급이 대부분 사찰제지업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후 조선시대 말엽 일본을 통해 서양식 기계로 제조한 종이가 수입되고 그간의 전통적인 종이를 “한지”라 하여 서양의 기계지인 “양지”와 구분하여 부르게 되었다.

한지의 종류

한지는 재료, 용도, 색채, 생산지 및 크기와 두께에 따라 다양한 종류가 있다.

재료에 따른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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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도에 따른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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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밖에 색채에 따라 쪽물 등의 염료로 감람색으로 물들인 종이인 감지(紺紙)와 남지(藍紙), 단목지(丹木紙) 등이 있으며 생산지와 크기 및 두께에 따라 많은 종류가 있다. 그러나 지금은 한지의 사양화로 거의 자취를 감추고 창호지, 장판지, 화선지, 배접지, 소지 등이 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100년 이어온 종이 가문, 한지장 장용훈 선생

“좋은 종이는 사람보다 오래 살지만, 좋은 사람의 손끝에서 나와야 오래 살 수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17호 한지장 기능보유자 장용훈 선생은 전남 장성에서 태어나 한국 전쟁이 발발한 17살 무렵부터 한지를 뜨기 시작했다. 한지 뜨는 일은 조부인 장경순 선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00여 년 전 겨울 농한기 때 질 좋은 닥나무를 거둬 한지를 만들기 시작한 조부와 그 조부를 따라 한지를 만드는 일을 평생 업으로 삼으신 부친 장세권 선생에 이어 3대째 한지 제작을 계승하고 있으며 장용훈 선생의 아들인 장성우 선생까지 4대째 이어오고 있다.

장용훈 선생의 부친은 아들이 종이 만드는 일을 하지 않길 바라셨다. 평생 고생한다며 만류하셨으나 선생은 부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좋아서 시작한 종이 만드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여러 차례 만류를 하였던 부친도 아들의 솜씨를 조용히 지켜본 후 결국 자신의 길을 걷게 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공문서 복원 사업으로 한지 수요가 급증하면서 수입이 늘어나기도 했지만 1970년대 들어서 양지가 보급되어 한지의 수요는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하고 한지 만드는 일도 침체되기 시작했다. 많은 이들이 떠났지만 선생은 이 일을 그만 둘 수가 없었다.

이후 경제적으로 힘든 세월을 보낸 선생은 얼마 남지 않은 돈을 털어 닥나무 품질이 좋은 경기도 가평으로 이사하여 공장을 세웠다. 다른 것은 생각지도 않고 음양지 제작기술을 고집했다. 종이 한 장에 다른 사람보다 몇 배 시간이 더 걸렸고 원가는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에 따라 사려는 사람도 없었다. 게다가 몇 년 후 홍수가 나서 공장이 물에 잠겨버렸다. 종이며 닥나무들이 모두 썩었다.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선생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만큼 종이가 좋았던 것이다. 물난리를 수습하고 난 후 군유지를 임차해 지금의 공장으로 옮겨 또다시 죽을 힘을 다해 종이를 만들었다. 이후 아들들이 함께 하기 시작했다. 힘든 과정에서도 선생은 아들들과 함께 종이 만드는 일에 정성을 쏟았고 시간이 지나 그 노력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국내외의 서예가와 화가들이 선생의 작품을 찾기 시작했고 작품 전시도 개최하게 되었다. 1998년에는 일본의 종이예술가 사카모토 나오아키 선생이 장지방을 찾았다. 일본에서 사라진 음양지에 대해 수소문 끝에 찾아온 것이다. 2005년 사카모토 선생은 서울에서 장지방의 음양지로 작품전을 열기도 하였다.

장용훈 선생은 그 동안의 고생에 대해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그냥 종이가 좋아 한평생을 바쳐온 일이고 이제 많은 이들이 다시 우리 한지를 다시 찾아줘서 고마워 할 뿐이다. 선생은 음양지는 물론이고 보수지의 대가다. 오래된 작품의 손상 부위를 복원하기 위해 극도로 얇게 뜬 종이인 보수지제작은 그만큼 뛰어난 기술이 필요하다. 현재 장용훈 선생은 청력을 거의 잃었고 연로하여 기억도 많이 잃은 상태라고 한다. 십여 년 전 원인 모를 두통으로 일 년을 앓고 난 후 생긴 일이다. 그러나 선생이 기억을 잊지 않은 것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종이를 뜨는 방법이다.

‘장씨 가족이 종이 만드는 공방’이라는 이름 뜻의 <장지방>을 운영하며 선생의 장남인 장성우 선생이 20년이 넘게 대를 이어 종이를 뜨고 있다. 많은 노력 끝에 명품 한지를 생산해 내어 내로라하는 국내외 화가들이 장지방 종이를 애용하고 브랜드화에도 성공하여 미국과 일본에 수출까지 하고 있다고 한다. 한편, 아버지 때로부터 시작하여 백 년 넘게 인연을 맺어온 한지장 홍춘수 선생과의 특별한 인연은 두 한지 장인의 전시회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기도 하였다.

주요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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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책(음양지), 45×60cm외발뜨기 방식으로 만든 한지를 음양지라고 하는데 두 장을 겹쳐 한 장의 종이로 만드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기법이기도 하다. 음양지로 만들어진 한지를 도침처리 후 여러 장을 묶어서 책으로 만들었다. 또한 표지는 옻칠로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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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빛깔(음양지), 자연빛깔(색지), 각 90×64cm자연빛깔(음양지) : 얇은 두 종이의 아래위를 엇갈리게 덧대어 만드는 종이로 석가탑에서 나온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이 음양지에 인쇄됐다고 한다.
자연빛깔(색지): 전통기법으로 한지에 천연재료로 염색한 작품

제작과정

한지는 닥나무 껍질로 만든다. 닥나무는 추수가 끝나고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1년생을 거둬 쓴다. 6~7시간 동안 푹 찐 닥나무 껍질(피닥)을 벗겨 물에 담가 불린다. 콩대·메밀대·목화대·고추대 등을 태운 재에 맑은 물을 부어 잿물을 만든다. 이 물에서 외피를 벗긴 피닥을 소뼈를 고듯 8~9시간 동안 푹 삶아 섬유질인 닥나무 껍질을 연하게 만든 후 피닥에서 검은 티 등을 잡아내 깨끗이 하고 곱게 빻은 다음 맑은 물에 섞는다. 한지에 윤기를 더하고 내구성을 강하게 하기 위해 닥풀 뿌리에서 채취한 점액을 첨가한다. 발틀 위에 대나무체를 얹어놓고 지통에서 찰랑찰랑 흔들면서 그 위에 종이를 뜬다. 말린 후 말린 종이를 겹겹이 쌓아놓고 곱고 질김이 강하면서 탄력있게 하기 위해 방망이질(도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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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닥섬유

닥방말이질 하기

풀어진 섬유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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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하기

물질하기(2)

도침하기

약력
  • 1937년              전남 장성 출생
  • 1955년              부친이 운영하던 ‘청웅한지’에서 전통한지 전수
  • 1994년              19회 전승공예대전 입선 (21회까지 3회 입선)
  • 1997년              22회 전승공예대전 장려상
  • 1996년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16호 지장 기능보유자 인정
  • 1996년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16호 지장 기능보유자 인정
  • 1997년              제27회 경기도 및 전국 공예품경진대회 특선
  • 1999년              일본 시고꾸, 아오미시마 등지에서 음양지 제작시연
  • 2000년              일본 도야마 국제물상전 초대전
  • 2005년              한 장의 종이를 통해 생겨난 우정전(인사동 쌈지길)
  • 2007년              현대작가 조니델 전통한지 기술 전수(베네수엘라)
  • 2008년              부천 세계 무형문화유산 엑스포 전시 및 체험행사
  • 2009년              필라델피아 미술관 크라프트쇼 전시 및 시연
  • 201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17호 한지장 기능보유자 인정
  • 2010년              한지장 장용훈·홍춘수 韓紙전 <천년한지, 백년인연>
이치헌/한국문화재보호재단 (http://www.chf.or.kr/)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은 문화재보호법 제9조에 근거하여 우리 전통문화를 널리 보전, 선양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공공기관입니다.
공식블로그 http://blog.naver.com/fpcp2010
사진
서헌강(문화재전문 사진작가)
발행2013.02.21

한지장 홍춘수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의 무형문화재이야기 중요무형문화재 제117호 한지장<br>
Master Artisan of Making a Hanji

1942. 11. 18. ~ | 보유자 인정: 2010년 2월 11일


저 허공의 질감이 어떻더냐
햇살 지나고 박살나는 피투성이 천둥 지나고 할퀴듯 사나운 폭풍 하며
연한 몸빛의 달빛 지나고 연한 쑥물 봄바람 지나고
그 다음에 늘씬하게 두들겨 태어나는 한지
종이의 질긴 정신은 죽음을 넘어왔다
세상이 뱉어내는 것들 다 안아 들인
그래서 낮은 보폭으로
깊은 침묵 안에
얼어붙는 겨울 대지에 쏘옥 고개 드는 싹
소리 없이
도도한 사람의 정신 여기 태어난다.

- 신달자 시인의 [한지(韓紙)], 격월간 <유심> 2010년 5~6월호

韓紙, 종이의 질긴 정신, 도도한 사람의 정신

‘닥종이’로 불리는 전통한지는 물과 불 등 자연환경의 조화로 만들어낸 훌륭한 완성품으로 보존성과 기능성에서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한지의 주재료인 수분을 머금은 닥나무는 벨 때부터 수세하고 초지하는 공정 동안 물과 항상 공존하게 되며, 원료를 유연하게 하고 건조하는 과정에서는 불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탈수 및 건조공정을 거치면서 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서 비로소 한지가 탄생하게 된다.

물과 불의 상호작용 외에도 한지는 닥나무와 황촉규를 주재료로 하여 고도의 숙련된 기술과 장인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완성된다. 닥나무를 베고, 찌고, 삶고, 말리고, 벗기고, 다시 삶고, 두들기고, 고르게 섞고, 뜨고, 말리는 아흔 아홉 번의 손질을 거친 후 마지막 사람이 백 번째로 만진다 하여 옛사람들은 한지를 ‘백지(百紙)’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렇듯 사람과 물과 불이 서로 어우러져 탄생한 한지는 그 제작방법의 특성상 홑지나 합지 형태의 두껍고 질긴 특성이 있다. 천 년을 견디어 내는 전통한지의 내구성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종이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통해 입증된다.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석가탑을 창건할 당시인 서기 751년 통일신라시대에 넣은 것으로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인쇄물로서 1200여년을 넘는 오랜 역사를 견뎌냈다.

한지장 홍춘수 선생

중요무형문화재 제117호 한지장 기능보유자 홍춘수 선생은 전북 완주군에서 태어나 부친이 운영하던 종이 공장에서 일을 배우면서 12살 때 처음 종이 뜨는 일을 접했다고 한다. 생업으로 종이를 만들어 내다 팔던 부친의 어깨너머로 자연스럽게 종이 뜨는 법을 접하여 60년이 넘는 세월동안 종이가 아닌 다른 것으로 밥벌이를 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19살 되던 해 선친과 함께 임실군 청웅면의 현 부지로 공장을 옮기고 본격적으로 한지 만드는 일에 뛰어들었다. 6.25전쟁 직후 정부가 유실된 호적대장을 복원하기 위해 대규모로 종이를 사들이면서 이들 부자의 가업도 활기를 띠게 되었는데 일상생활에서도 문에 바르는 창호지나 족보를 옮겨 적기 위한 복사지, 부채나 사군자에 쓰는 화선지, 청첩장용 태지(苔紙) 등으로 한지가 널리 쓰일 때여서 색깔과 두께, 질감을 각기 달리한 맞춤형 한지를 만들어 팔았다. ‘홍씨네 한지는 질기면서도 보드랍다’라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공장도 80년대 한때 기술자를 20명까지 둘 정도로 번창했다.

그러나 1990년대에 접어들어 기계로 만든 한지가 등장하기 시작하더니 중국산 화선지가 가짜 한지로 둔갑해 유통되면서 전통한지는 급속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전통방식으로 종이를 뜨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기계지 만드는 곳으로 빠져나갔다. 그러나 위기를 기회로 여기고 천연 재료를 사용해 현대적 감각에 맞춘 다양한 한지를 개발하기로 했다. 황토를 반죽에 섞어 만든 벽지용 ‘황토지’, 두 장의 한지 사이에 단풍잎을 끼워넣은 장식용 ‘단풍지’, 김을 뜯어 넣어 자연스런 무늬를 입힌 ‘김종이’ 등을 잇달아 내놓으며 한지의 전통과 우수성을 널리 알려 나갔다.

이후 1999년 노동부 지정 한지 기능전승자로 선정된 것을 시작으로 2002년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 장려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2006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35호 ‘지장(紙匠)’으로 인정되었다. 이후 2010년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117호 한지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맏사위인 노정훈씨가 기능을 전수받아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 한편, 아버지 때로부터 시작하여 백 년 넘게 인연을 맺어온 한지장 장용훈 선생과의 특별한 인연은 <천년한지, 백년인연>이라는 제목으로 2010년 열렸던 두 한지 장인의 전시회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기도 하였다.

주요작품

전통한지 / 64×90cm 닥나무와 황촉규를 주재료로 하여 닥나무를 베고, 찌고, 삶고, 말리고, 벗기고, 다시 삶고, 두들기고, 고르게 섞고, 뜨고, 말리는 아흔 아홉 번의 손질을 거친 후 마지막으로 사람이 백 번째로 만진다 하여 옛사람들은 한지를 ‘백지(百紙)’라 부르기도 하였다.

제작과정

한지는 닥나무를 하루 동안 삶아 벗겨낸 껍질을 주재료로 하는데 매년 11월에서 1월경 닥나무를 베어내 하루 동안 증기로 찌고 닥껍질을 벗겨내면 흑피가 된다. ‘피닥’이라고 부르는 껍질은 빳빳하게 될 때까지 볕에 말렸다가 다시 물에 불리면 속껍질만 벗겨낼 수 있다. ‘백닥’이라고 불리는 속껍질은 옅은 아이보리색을 띈다.

말린 메밀대와 콩대 줄기를 태워 우려낸 잿물에 백닥을 삶아 새하얗게 되도록 잡티를 긁어낸다. 새하얗게 삶아진 백닥을 짓이겨 흐물흐물한 반죽으로 만든 후 백닥 반죽을 맑은 물에 풀고 닥풀뿌리로 쑨 풀을 첨가해 걸쭉하게 만들면 ‘종이물’이 된다. 한지는 전통방식인 외발(흘림)로 뜨는데 물을 세로, 가로, 세로 방향으로 번갈아 흘려보내 우물정(井)자 모양으로 종이결을 얽히게 만든다. 특히 두 장의 습지를 하나로 합쳐 합지를 만들기 때문에 종이가 더욱 질기고 강해진다.

이렇게 떠낸 종이를 400~500장 쌓아두고 위에 무거운 돌을 올려 물을 뺀 뒤 젖은 종이를 펴고 비로 쓸어가면서 천천히 고르게 말린다. 마지막으로 말린 종이의 밀도를 높이고 표면을 윤기 있게 만들기 위해 디딜방아나 홍두깨로 두드린다. 한 공정을 마치는데 최소 한 달 이상이 걸리는 데다 수백 번의 손길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한지를 일컬어 ‘백지(百紙)’라 부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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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흑피를 벗긴 백닥 말리기

2. 닥 방망이질 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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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지통에 닥풀 넣고 젓기

4. 물질하기

5. 바탕 자리에 내리기

약력
  • 1942년                         출생
  • 1999년                         노동부 지정 한지 기능전승자 선정
  • 2002년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 장려상
  • 2006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35호 전통한지 기능 보유자 인정
  • 2008년                         전주시 조선왕조실록 복본화 창업 자문위원
  • 2010년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117호 한지장 기능보유자 인정

갤러리

이치헌/한국문화재보호재단 (http://www.chf.or.kr/)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은 문화재보호법 제9조에 근거하여 우리 전통문화를 널리 보전, 선양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공공기관입니다.
공식블로그 http://blog.naver.com/fpcp2010
작품사진
서헌강(문화재전문 사진작가)
발행2013.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