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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5호]염색장(染色匠) | 중요 무형 문화제

문성식 2012. 3. 30. 05:36


종 목 중요무형문화재 115호
명 칭 염색장(染色匠)
분 류 공예기술
지정일 2001.09.06
소재지 전남 나주시 문평면 북동리608(윤병운),대호동75 현대APT 103-704(정관채)



※ 본문설명

염색장이란 천연염료로 옷감을 물들이는 장인을 말한다.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염색장은 쪽염색을 하는 염색장이다.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염색을 담당하는 전문적인 장인이 있었을 정도로 염색은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하다.

옷감을 물들이는데 사용하는 천연염료는 식물, 광물, 동물 등에서 채취한 원료를 그대로 사용하거나 약간의 가공을 통해 만든 염료를 사용한다. 염색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 중 쪽염색은 쪽이라는 식물에서 추출한 염료를 가지고 옷감 등을 물들이는 것으로 염색과정이 가장 어렵고 까다로우며,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천연 염색은 근대화 이후 급속한 화학염색의 도입으로 인하여 전통이 끊겼으나 1970년대 이후 일부 장인들이 노력으로 그 맥을 살릴 수 있었다. 기능보유자인 윤병운, 정관채는 모두 전통방식의 쪽염색에 뛰어날 뿐만 아니라 필요한 모든 재료를 스스로 생산하여 사용하고 있다.

염색장 정관채

1959. 3. 23. ~ | 보유자 인정: 2001년 9월 6일

아, 그 모시의 쪽빛을 무어라 표현했으면 좋을까. 한바다였고 깊고 깊은 가을 하늘이었다..그것은 차라리 큰 슬픔이었다. 나는 정신을 잃고 보고 또 보곤 했다... 그 빛깔, 그 감촉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나는 한 마디밖에 모른다. 꿈결!

- 시인 김지하

자연의 색을 옷감에 담아내는 염색

 

염색장이란 천연염료로 옷감에 물들이는 장인을 말한다.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염색을 담당하는 전문적인 장인을 두고 있을 정도로 염색은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한 분야였다. 상고시대 우리나라 염직의 기록으로는 [후한서] 권85 [동이열전]에 화려한 무늬 비단과 자수 놓은 의복을 만들고 금은으로 장식한다는 뜻으로 색깔실을 사용한다는 기록이 있어 염색 기술이 상고시대부터 벌써 들어와 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왕은 비단관에 녹의를 입고 금화가 붙은 혁대를 하였으며 대신은 청라관(靑羅冠)이나 비단 장식을 쓰는데 양 옆에 새 깃털을 꽂고 금은으로 장식하였다고 나와 있다. 청라관은 쪽물로 물들인 비단관이고, 왕이 녹의를 입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쪽의 생엽염이나 쪽과 치자나 괴화의 복합염으로 초록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신당서] 동이전 백제조에서는 “왕복은 자색 명주포(袍: 도포)에 청색고(靑色袴: 바지)를 착용하고 여기에 소피대(素皮帶: 염색 안한 가죽혁대)를 매었다.”라고 하였듯이 자색, 청색으로 염색했고, 왕을 비롯한 대신들의 복색은 붉은색 계통이며 이 당시 많이 사용한 색은 자색, 적색, 청색, 황색, 조색, 비색 등이다.

백제시대의 특징은 일반 서민에게 자의(紫衣)와 비색 착용을 금함으로써 치자와 피치자의 구별을 하는 금색법을 남겼다는 점이다. 통일신라 이전의 신라의 공복에 사용되었던 염색은 자, 비, 청, 황, 록, 자, 비, 흑, 적, 청 등으로 직을 표시하는 품계에 따른 색을 사용하였다. 당시 색에 대한 관념이 상당히 발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식물성 염료가 많이 개발되었고 중앙 부서에 도염서(都染署)가 있어 직조된 천에 기량을 다하여 염색 가공을 하였다. 사영 공장과 관령 공장에서 염직물을 생산하였는데 특히 염색을 관장하기 위해 직염국(織染局)에 도염서(都染署)와 상의국(尙衣局)에 장복서(掌服署) 등의 제도가 있어 전문장인인 염료공과 염색공을 두어 염색을 담당케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경북대전 복식금제제도, 경공장에 청염장(靑染匠), 황단장(黃丹匠) 등 염색장이 분업화되어 염색을 색별로 관장하였다. 태종은 국초에 백색을 금지하고, 경천사상으로 인해 쪽염을 많이 했으며 왕복은 자색을 띤 홍색으로 하였고 궁중의 염색 색깔은 오방색, 오간색 등으로 다양한 염색기술을 보였다.

천연염료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문헌에 나타난 염재로 사용한 식물의 종류는 50여종이나 매염제와 염색법에 의해 100여가지의 색채를 낼 수 있음을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천연 염색은 근대화 이후 화학염색의 도입으로 전통의 맥이 끊겼다가 일부 장인들의 노력으로 그 맥을 되살리고 있다.

하늘빛을 머금은 색, 쪽빛

 

우리나라 전통 색채 개념은 음양오행적 색채관에 근거를 둔 것으로 다섯 가지의 오정색과 다섯 가지의 간색을 기본색으로 하여 오행(五行)의 원리에 따라 인식하고 사용하였다.이러한 오정색 가운데 청색은 쪽염으로 물들여진 색이다. 쪽염재로 염색을 하여 나타내었던 푸른색 계열의 색명으로는 청색·아청색·갈매색·벽색(碧色)·검푸른색·반물색·심청색(深靑色)·녹색·유록색(柳綠色)·두록색(豆綠色) 등이 있었다. 이중 오색에 포함되는 청색은 오행법상 본위(本位)로 동방을 나타내는 색이라 하여 흰옷을 즐겨 입던 당시 토서민(土庶民)에게 흰옷 대신 항상 권장되었던 색이었다.

궁중에서는 성종 이전까지 왕세자의 복식이 녹색이었고 백관(百官)의 복색이 아청색, 또한 대비 중전의 치마가 남(藍)스란 또는 남(藍)대란이었으며, 청색은 일반에게도 허용되었던 색인 만큼 조관에서 선비 그리고 평민에 이르기까지 널리 사용되었으며, 웃옷으로 입혀졌던 도포의 길복에 청색을 사용하기도 했다. 복식에 사용된 푸른색의 염료로는 남(藍:쪽), 닭의장풀이 가장 널리 사용되었고 그밖에 닥나무의 잎, 수장나무의 열매 등이 쓰이기도 하였다. 특히 쪽은 천연 염료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으로 견뢰도가 우수한 염료이다.

남(藍)빛을 의미하는 쪽의 주성분은 인디고(Indigo : C16H10O2N2)이다. 쪽의 특성은 수분과 열을 가하여 발효시키면 가수분해하여 인독실(Indoxyl)이 생성되며 이 색소물이 공기와 접촉하여 산화시켜 불용성의 염료가 되는 원리이다. 어원으로 보아 인도로부터 수입되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으며 후에 인디고(Indigo)라고 하여 청색 염료를 지칭하게 되었다. 쪽은 여뀌과 및 마디풀과에 속하는 요람(蓼藍)류의 쪽풀로 1년초 염료 식물이며, 인류 역사상 식물 염료로는 가장 먼저 사용되었다. 품종은 세계적으로 300여 종이나 되지만 우리나라에서 재배하고 있는 품종은 대부분 여뀌과 식물이다. 줄기는 마디가 있고 뿌리 근처에 털이 나와 있으며 키는 60~70cm 가량으로 장타원형 잎이다. 7~8월에 꽃대가 올라올 시점인 이삭형의 꽃이 필 무렵 잎에서 남빛 색소를 분리 추출하여 자연 염료로 널리 이용한다.

쪽염색의 특성은 그 색이 다른 색과는 다르게 자연에서 바로 재현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그런 이유로 천연염색 중 쪽염색은 염색과정이 어렵고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여느 천연염료와 달리 자연에서 바로 색을 얻을 수 없기에 녹색풀에서 온갖 쪽빛들을 깨워내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조개 가루와 잿물의 매염재로 형성되는 자연 염료로 산화와 환원이라는 화학적 변화를 거치면서 살아 있는 미생물의 발효 작용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고 고도의 숙련된 경험과 매우 복잡한 공정 과정을 거쳐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쪽 염료는 예부터 고가에 거래되던 귀한 염색 재료이다. 쪽색을 얻기까지는 노랑→회색→보라→연두→녹색→초록→청록색→파랑→남색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쪽 이파리에서 추출한 자연염료로 물들인 쪽빛 옷을 입으면 아토피와 각종 알레르기 증상이 개선되는 효과가 있다고 전해진다. 한때 우리나라에서 맥이 끊겼던 쪽 염색의 전통을 살려낸 정관채 선생의 작품은 연한 옥빛부터 짙푸른 현색(玄色)까지 신비한 쪽물의 세계를 오롯이 담고 있다.

우리 땅에서 사라져가는 쪽을 되살린 정관채 선생

 

중요무형문화재 제115호 염색장 기능보유자인 정관채 선생은 전남 나주시 다시면에서 2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고향인 샛골마을은 동네가 모두 정씨 친척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증조부로부터 선생까지 4대째 대를 이어 쪽 염색 일을 가업으로 계승하고 있다. 나주샛골지역은 그 주변의 지리적 상황과 천혜의 조건이 완벽히 구비된 쪽재배지이다. 광주를 비롯해 담양, 장성, 화순군 등 영산강을 이루는 물줄기와 바닷물이 합류했던 나주는 여름 장마철이면 홍수의 피해가 가장 극심했던 지역이다. 그런 연유로 홍수대체 식물로 재배되었던 것이 바로 이 쪽이다. 쪽재배지로 한창 성황했던 1900년대 초경에는 영산포 선착장에 전국은 물론 일본, 멀리 중국에까지 쪽 염료를 구입하러 오는 이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광복 전까지만 해도 혼수품으로 쪽물로 들인 아청이불을 꼭 해 가지고 가야 할 만큼 인기가 좋아 논이나 밭작물 대신 쪽 풀을 심는 농가가 늘어나 이를 국가에서 금지했을 만큼 성황이었다고 한다.

쪽물 염색으로 유명했던 전남 영산강변의 나주에서 태어난 선생은 대학시절 쪽 농사와 염색을 배웠고, 교직에 몸담으면서도 평생 ‘쪽물장이’ 농사꾼으로 살아왔다. 목포대 미대 1학년이던 1978년 염색을 가르치던 박복규 교수(현 성신여대 재직)에게서 쪽씨를 건네 받은 인연으로 쪽염색 장인의 길을 걷게 된다. 그 쪽씨는 박복규 교수가 민속문화 복원에 앞장섰던 예용해 선생께 얻은 것이었다고 한다. 예용해 선생은 어렵게 구한 쪽씨를 박교수에게 건네며 우리 땅에서 사라진 쪽을 되살릴 곳은 나주밖에 없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박교수가 쪽씨를 키울 학생을 찾다가 마침 나주 다시면 출신인 정관채 선생을 발견하고 쪽 농사를 맡겼던 것이다.

귀한 쪽씨를 받았지만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야 재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젊은 시절 쪽 농사를 짓고 쪽물을 들이며 살아온 어머니와 할머니의 경험이 밑거름이 됐다. 1984년 정관채 선생은 쪽빛으로 곱게 물들인 무명천을 들고 박복규 교수와 함께 예용해 선생을 만나러 서울로 올라왔다. 그때 예용해 선생은 쪽빛 무명베를 보며 ‘와, 쪽빛이 이런 색이로구나!’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친환경이나 유기농, 생태란 말이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하던 시절, 선생은 해마다 쪽 농사를 짓고 쪽물을 들였다.

선생은 가업으로 물려받은 쪽 장인으로 계속 일하면서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초빙교수와 나주시 영산포중학교 미술 교사로 재직 중이다. 대학 졸업 후부터 지금까지 선생은 중·고등학교 미술교사로 일하고 있다. 아이들을 가르치며 쪽 농사와 염색까지 하기가 쉽진 않지만 그나마 방학이 있어 일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의 봉사활동과 수업이 끝나고 나면 바로 쪽공방으로 돌아와 주말이나 방학 때면 늘상 공방에서 염색 장인의 생활로 돌아와 있다. 선생이 현재 공방으로 사용하고 있는 곳은 출생지이자 조상 대대로 이어온 집이기도 하다. 2001년 어느 더운 날 쪽을 베다가 왼손 무명지 윗마디가 잘려나가는 사고를 당한 적이 있다. 잘린 부분을 가지고 곧장 병원으로 달려가 미세접합수술을 받은 덕에 가까스로 손가락을 붙일 수 있었는데, 수술이 끝나고 보니 멀쩡한 손톱이 뽑혀 있었다고 한다. 의사가 쪽물이 든 손톱을 보고 썩은 것으로 착각하여 마취한 김에 손톱까지 뽑았다고 한다. 쪽 염료를 만드는 과정이 한여름 삼복더위에 몰려 있어 집중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선생의 공방이기도 한 천연염색전수관 앞과 인근에는 쪽밭이 위치해 있다. 가만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삼복더위에 냄새 나고 힘든 노동을 하는 선생을 보고 사람들은 ‘사서 고생한다’며 혀를 찼다고 한다. 부인의 원래 직업은 은행원이었다. 교사와 은행원이라는 안정되고 고상한 직업을 가진 젊은 부부가 쪽물에 매달리자 주변에서는 모두 말렸지만 선생의 어머니만은 지지하고 도와주었다. 선생의 어머니는 염색에 필요한 잿물을 만들기 위해 콩대를 태운 재를 거두다가 세상을 떴다고 한다. 선생은 주변의 염려와 따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전통을 계승해 온 결과 2001년 당시 공예분야 최연소(당시 42세)로 중요무형문화재 염색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선생은 현대의 PH나 온도계 없이 즉석에서 침전쪽(쪽 앙금)과정, 발효과정, 스스로 만든 황토 가마에서 구워서 만들고 있는 양질의 석회 만들기와 쪽물염색의 기능 등 쪽 염색 전 과정의 기능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전통색을 구현하기 위해 찾았던 유물인 철릭과 신발, 쪽 책표지, 저고리, 쪽이불 등의 수집과 더불어 쪽물염색의 기량이 하나도 빠짐없이 나타내 보이는 우수한 장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선생은 부인과 함께 쪽염색의 가업을 이어나가고 있으며 아들 역시 쪽 염색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천연염색 공개강좌, 서울대학교 등 각 대학 특강과 천연염색 전시회 및 시연회 등 작품활동과 천연염색의 우수성을 대내외에 알리며, 후진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주요 작품

 

쪽염색원단 30×1830cm7·8월에 채취한 쪽잎과 굴껍질을 태워 만든 석회 가루를 섞어 삭히면 침전물이 생기는데 이를 잿물과 섞어 아랫목에서 한 달여 묵히면 염액이 완성된다. 여기에 천을 담가 염색을 하는데 천을 염액에 넣을 때는 녹색이지만 천을 물 밖으로 꺼내면 산화되면서 고운 쪽빛으로 변한다.

한국 전통쪽 염색 40×1800cm한국 전통 기법으로 비단에 염색한 작품

제작과정

 

나주지역의 쪽염색 작업과정을 살펴보면 팔월 초순경 쪽이 60~70cm 정도 자랐을 때 쪽을 베어 항아리에 넣고 삭히다. 이틀 후 쪽대를 걷어내고 쪽물에 굴껍질을 구워서 만든 석회를 넣으면 색소 앙금이 가라앉으면서 침전 쪽이 생긴다. 이때 항아리의 윗물을 버리고 바닥에 침전된 쪽 앙금을 퍼내 고체 상태가 되도록 물기를 완전히 제거한 뒤 쪽 앙금에 잿물을 넣어 7~10일 동안 발효시키면 색소와 석회가 분리되면서 거품이 생긴다. 이 과정을 ‘꽃물 만들기’라고 하며, 이때 비로소 염료 물감으로 사용할 수 있다. 천을 담가 염색염색하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서 말리기를 반복한다. 반복적으로 염색하여 짙은 색을 얻는다. 처음 꽃물에 염색하면 연녹색이었다가 공기 중에 펴면 녹색·파랑으로 변하며, 가장 진하게 염색하려면 20회까지 반복하지만 보통은 8회 정도로 물들인다.

1) 석회 제조

2) 잿물 만들기

3) 쪽풀을 독에 담는다
4) 쪽물(꽃물) 만들기. 쪽물이 발효가 되면 물발이 선다
5) 쪽물 들이기

약력
  • 1959년                         출생
  • 1978년                         최정님 모친으로부터 쪽 염색 전수
  • 1985년                         나주 영산포중학교 재직
  • 1998년                         문화관광부장관표창, 자랑스런 전남도민의 상 수상
  • 1996년                         ‘자연속의 삶’ 전통천연염색전시회
  • 1997년                         한국전통천연염색공예전
  • 1998년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천연염색 초대전
  • 1999년                         교육부장관 표창
  • 1999년                         아시아민족조형문화연구소 한국학회 이사
  • 2000년                         모범공무원 표창
  • 2000년                         한얼전통천연염색연구협회 이사
  • 2000년                         명지대학교 나주대학 강사
  • 200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15호 염색장 기능보유자 인정
  • 2001년                         국제천연염색연구협회 한국학회 이사
  • 2001년                         국제 색채학 한국학회 전시회. 국제천연염색 교류전
                                               국제 천연염색 학술대회 시연회, 일본九州염색연구소 초청강사
  • 2002년                         대구애뉴얼 천연염색 초대전
  • 2004년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초빙교수
  • 2004년                         세계박물관총회 한국전통 쪽 염색 학술발표(코엑스)
  • 2005년                         남북교류 명품 전시회(국립고궁박물관)
  • 2007년                         대한민국 명품전시회(미국뉴욕 UN본부)
이치헌/한국문화재보호재단 (http://www.chf.or.kr/)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은 문화재보호법 제9조에 근거하여 우리 전통문화를 널리 보전, 선양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공공기관입니다.
공식블로그 http://blog.naver.com/fpcp2010
사진
서헌강(문화재전문 사진작가)
발행2012.12.13

염색장 故 윤병운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의 무형문화재이야기 중요무형문화재 제115호 염색장<br>
Master Artisan of Dyeing Holder

1921.4.3. ~ 2010.8.4. | 보유자 인정: 2001년 9월 6일


靑出於藍靑於藍 청출어람청어람

- 순자(荀子) [권학편(勸學篇)]

쪽에서 뽑아낸 푸른 물감이 쪽보다 더 푸르다

 

전통적으로 천연 염색은 옛날 사람들이 아름다운 색을 함유하고 있는 식물의 꽃이나 열매, 잎, 뿌리, 껍질, 그리고 동물, 광물, 해조류, 암균, 버섯, 이끼류 등에서 색을 나타내는 물질을 추출하여 이용해 왔다. 예전에는 염색의 염료가 대부분 식물 염재였는데, 그 중 쪽 염료가 가장 많이 사용됐다. 일반적으로 식물성 섬유에 주로 염색되었고, 견이나 양모와 같은 동물성 섬유에도 잘 물들여져 생활 속의 염색과 전통공예로 자리 잡아 왔다.

남(藍)이라는 말은 단순한 식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남(藍)의 색소를 함유하는 초목을 총칭하는 것이며 한국이나 중국, 일본 등의 문헌에서는 남(藍)이라 기록되어 있지만 전통적으로 한글 용어로는 쪽이나 쪽물이라고 불렸다. 쪽은 인도, 이집트를 시작으로 전파되어 중국, 한국, 일본으로 건너갔다. 기원전 3세기 중국 문헌 중 순자가 저술한 권학편(勸學篇)에 ‘청출어람(靑出於藍)’[청(靑)은 남(藍)에서 나와 남(藍)보다 푸르다: 스승보다 뛰어난 제자를 가리키는 뜻]이라는 문구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 쪽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고시대 우리나라 염직의 기록으로는 [후한서] 권85 [동이열전]에 화려한 무늬 비단과 자수 놓은 의복을 만들고 금은으로 장식한다는 뜻으로 색깔실을 사용한다는 기록이 있어 염색 기술이 상고시대부터 벌써 들어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백제 고이왕 때 복색 착용 제도를 정비하고 신라 때에는 염관에 11인의 염장(染匠)을 두었고 홍전, 능색전, 소방전 등의 염색에 관련된 부서가 있었다.

고려에 와서는 염색을 관장하기 위해 직염국(織染局)에 도염서(都染署)를 두어 전문 장인인 염료공과 염색공을 두어 염색을 담당하게 하였다. 그 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경공장에 청염장, 홍염장, 황단장 등 염색을 분업화시켜 염색을 색깔별로 관장하면서 염색 기술이 고도화되어 갔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민간 수공업으로 전환되어 민가의 부업이나 가내의 생필 목적으로 자급자족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반가 이상의 서민층에서도 염색의 욕구가 고조되어 혼수품으로 의류 및 이불, 생활용품, 보자기 등 다양한 전통염색이 가내의 비법으로 발달되어 왔다. 그러나 1856년 합성염료의 출현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잠시 단절되다가 1970년대 후반부터 계승, 재현되어 환경오염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는 오늘날 일반대중들 사이에 가장 선호하는 전통공예로 부각되고 있는 분야이다.

쪽염색은 옛날 처녀들이 시집갈 때 쪽물들인 이불을 해가는 게 소원이었을 정도로 부자들이 소장할 있는 고급품이었으며, 쪽의 특성상 벌레의 접근을 막는다 하여 미술품을 배접할 때 사용되기도 하였다.

전통 쪽염색의 온전한 전승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故 윤병운 선생

 

중요무형문화재 제115호 염색장 기능보유자인 윤병운 선생은 1921년 전남 나주시 문평면 명하마을에서 쪽염을 생업으로 하는 가정에서 태어나 13세부터 쪽염을 시작하여 한평생 쪽염색을 해왔다. 증조부(윤치문)-조부(윤태홍)-부친(윤주식)에 이어 전통염색을 가업으로 이어왔다.

선생이 태어난 명하마을은 영산강의 지류인 고막천가에 자리잡은 곳으로 과거에는 1여호가 염색을 하였으나 이후 윤병운 선생 집안만이 전통염색법으로 쪽염색을 이어왔다. 선생은 쪽에 대한 이론을 공부한 것은 아니지만 평생 쪽염색을 해오면서 명인의 경지에 올랐다. 1년 내내 쪽물들인 내의를 입고 손톱밑은 푸르다 못해 검게 변하였다.

선생은 1934년부터 1950년까지 전통식물염색을 생업으로 해오다 한국전쟁과 이후 혼란기에 잠시 일을 쉬었다가 1974년 다시 쪽 재배를 시작하였다. 쪽씨를 보관했다가 다시 할 수 있을 때 발아시키면 되지 않을까 생각되겠지만, 쪽씨는 일 년만 지나도 발아율이 현저하게 떨어져 쪽 농사를 계속 유지하지 않으면 염색도 불가능해진다. 더불어 1950년대 이후 화학섬유가 국내로 유입되면서 천연염색이 설 자리가 좁아졌다.

그러다가 조일순 여사가 일본에서 쪽씨를 가지고 와서 이곳저곳 다니면서 발아시키고자 노력했는데, 모두 성공하지 못하다가 윤병운 선생이 마침내 성공시키게 된다. 종자를 늘리는 작업부터 채취, 그리고 발효까지 훌륭하게 성공한 것이다. 전승이 완전히 끊겼음에도 가능했던 이유는 쪽염색 기술을 잠깐 동안 한 것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온전히 몸으로 배워나갔기 때문에 가능했다.

윤병운 선생이 쪽염색을 성공시키자, 그때부터 다시 천연염색을 향한 다양한 사람들의 노력이 이어졌다. 이후 선생의 전통 쪽염색에 대한 관심이 쏟아져 1990년대에는 방송 및 신문사 등에서 선생의 쪽염색에 대한 소개가 앞다퉈 다뤄지기 시작했다. 1994년 전승공예대전에 모시한복 2점을 출품하여 입선하기도 했으며, 1995년에는 산업인력관리공단 기능전승자로 선정되었고 1997년에는 자랑스런 전남인으로 선정되어 전남도지사 표창을 받기도 하였다.

2001년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115호 염색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전통 쪽염색의 온전한 전승을 위하여 평생을 헌신했던 故 윤병운 선생은 2010년 8월 향년 90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4대째 이어온 가업은 선생의 아들인 윤대중(염색장 전수교육조교)선생으로 그 맥이 이어져 오고 있으며, 쪽염색을 이용한 다양한 상품들도 개발하고 있다.

주요 작품

 

쪽염색(비단천) / 40×1800cm 실크천은 동물성 섬유이고 쪽물염색은 동물성 섬유에는 견뢰도가 떨어지는 편이므로 30번의 염색을 한 상태이다. 그 후로 잿물 제거를 위해 15번 미지근한 물에 담궈 건조했다.

제작과정

 

옷감에 쪽빛을 물들이기 위해서는 발효된 쪽물에 천연원단을 물들여서 산화, 발색하는 과정을 10~15회 반복한다. 염색 횟수를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따라 그 빛깔도 천차만별이다. 대략적인 염색과정을 살펴보면, 석회만들기 - 항아리담기 - 석회 넣고 당그레질 - 쪽염료 분리 - 양잿물 만들기 - 쪽염료 배합 - 6일후 염색 시작(10회 정도 반복) - 맑은 물에서 잿물빼기 - 완성품만들기 순으로 진행된다.

사용되는 도구와 재료로는 채, 고무래, 널베기, 받침대, 시루, 독항아리, 굴껍질, 무명베, 양잿물, 쪽염료 등이 있다. 쪽은 물들이는 횟수에 따라 연한 옥색에서부터 진한 감색까지 색이 다양하다. 그중 보라색이 약간 섞인 남색을 가장 아름다운 쪽빛으로 친다. 쪽빛이 아름답게 물든 옷감을 얻는 일은 긴 시간 동안 인내하여 얻어낸 달콤한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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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석회 만들기

2. 널베기 위에 삼발이나 나무막대를 얹고 시루를 얹어 재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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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쪽물조합

4. 고무래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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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쪽물들이기

6. 처음에는 초록색이었다가 산화되어 푸른빛으로 물들여짐

약력
  • 1921년                         출생
  • 1994년                         제24회 전승공예대전 입상
  • 1995년                         한국산업인력공단 고유 기능 전승자 선정
  • 200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15호 염색장 기능보유자 인정
  • 2002년                         천연 염색 축제 <천연염색 패션쇼-빛깔>전 출품
  • 2002년                         남도 천연염색 <고운 빛깔>전
  • 2010년                         노환으로 별세
이치헌/한국문화재보호재단 (http://www.ch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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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유자사진
최원진(사진작가, 혜천대 교수)
작품사진
서헌강(문화재전문 사진작가)
발행2013.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