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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9호]화각장 (華角匠) | 중요 무형 문화제

문성식 2012. 3. 30. 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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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중요무형문화재 109호
명 칭 화각장 (華角匠)
분 류 공예기술
지정일 1996.12.31
소재지 인천전역



※ 본문설명

화각(華角)은 쇠뿔을 얇게 갈아 투명하게 만든 판을 말하며, 이러한 화각을 이용해서 공예품을 만드는 사람을 화각장이라 한다. 화각공예는 재료가 귀하고 공정이 까다로워 생산이 많지 않았으므로 특수 귀족층들의 기호품이나 애장품으로 이용되었고 일반대중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희귀 공예품이다.

화각공예가 언제부터 만들어졌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고려 나전칠기의 경함(經函), 염주합(念珠盒)에 복채기법으로 된 대모(玳瑁)가 나전과 같이 사용되었다. 조선 전기, 중기의 나전에까지 이어졌으나 중기 이후부터는 화각으로만 장식한 화각공예품이 발달하였다.

화각공예는 투명도가 높은 쇠뿔을 종잇장처럼 얇게 편 다음 뒷면에 오색찬란한 단청안료로 갖가지 문양을 그리고 채색하여, 나무 등으로 만든 각종 기물인 백골(白骨) 위에 붙이고 백골의 내부와 뼈대 등 화각 이외의 여백은 옻칠을 하여 마감하는 기법이다. 화각공예품으로는 장·농·사방탁자·문갑과 같은 가구류와 작은 예물함, 경대, 필통, 화약통, 바느질자, 경상(經床), 연상(硯床), 반짇고리, 부채, 붓대 등이 있다.

화각공예는 회화적인 성격을 띤 각질공예로서 나전칠기와 함께 전통왕실공예이다. 또한 우리나라의 독창적인 공예로서 앞으로 무한한 발전이 가능한 작품이라 할 수 있으며, 이재만 씨가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 보충설명


화각공예는 쇠뿔을 얇게 갈면 투명하게 된다. 이 투명한 얇은 판을 화각이라 하며 화각판 뒷면에 적, 청, 황, 백, 먹 등 석채(石彩)로 채색그림을 그려서 백골 위에 붙이고 백골의 내부와 뼈대 등 화각 이외의 여백은 옻칠을 하여 마감하는 기법이다.

화각공예가 언제부터 만들어졌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고려 나전칠기의 경함(經函), 염주합(念珠盒)에 복채기법으로 된 대모(玳瑁)가 나전과 같이 사용되었고 조선시대 초기, 중기의 나전에 까지 이어졌으나 중기 이후부터는 화각으로만 장식한 화각공예품이 발달하였다.

화각은 함을 비롯하여 가구 침선구(針線具)에 이르기 까지 널리 보급되면서 민족적인 공예로 발전된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독특한 공예기법이다. 일본의 왕실보고인 쇼소인(정창원(正倉院))에 소장되어 있는 유물 중 신라에서 건너간 것으로 추정되는 비파(琵琶)와 육각형으로된 복채책상과 도쿠가와미술관(덕천미술관(德川美術館)) 소장의 고려나전국당초문경함과 도마지(부마사(富麻寺)) 소장의 흑칠나전당초문염주합 등에는 대모복채로 시문되어 있으며 이러한 나전칠기와 더불어 조선시대 중기까지 나전상자에 대모 사용이 이어져 계승되었음을 각종 문헌기록과 현존하는 유물을 통하여 입증되고 있다.

이러한 대모 사용은 중국을 비롯하여 동남아 여러나라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대모의 재료가 흔하지 않아 그것을 이용한 공예품이나 장식품들은 상류계급에서나 사용이 가능하였을뿐 일반 서민들은 국법으로 규제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나전칠기에 대모를 사용한 기물은 상류계급의 전용물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대모 구입이 어려워짐으로서 대모와 재질이 유사한 쇠뿔을 대체 재료로 선택한 것이 아닌가 추측할수 있다.

나전칠기에 시문한 대모의 복채기법이 조선시대 중기 이후 화각공예의 창안에 토대가 되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화각공예품을 만드는 기법은 칠기의 제작공과 같으나 나전(자개) 대신 화각을 사용하므로 화각공예로 따로이 불리운다. 조선조 문헌인 서유구(徐有구)의 저서 임원경제지 해생우각법(解生牛角法)에 의하면 '쇠뿔을 종이 송판 같이 얇게 만든다' 라 하였으며 또 염골각법(染骨角法)에 따르면 오색의 염료 적, 청, 황, 백, 흑으로 염색하였던 사실은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었으며 화각을 이용한 여러가지 공예가 성행되었던 것임을 알수있다.

화각공예품으로는 경상(經床), 연상(硯床), 버선장, 2,3,4층 농, 사방탁자, 문갑, 함, 침선구인 실패, 밀대, 자, 반짇고리, 참빗, 베갯모, 붓자루, 부채 등이 전세품(傳世品)으로 전해지고 있다.

1953. 1. 17. ~ | 보유자 인정: 1996년 12월 31일 

얼마나 아팠겠느냐? 얼마나 괴로웠겠느냐?
그 정갈하던 서체가 이토록 흐트러지다니...형선아! (예, 전하.)
부제조 상궁에게 일러 화각함을 찾아오라 이르거라. (예?)
기억이 나질 않는다. 연우의 서체가...기억이 나질 않아...
보아야겠다. 내게 주었던 그 서찰을... 다시 한 번 보아야겠다. 

 

- 드라마 [해를 품은 달] 10회 훤의 대사 중

쇠뿔에 혼을 그려 넣는 화각장

화각(華角)공예는 쇠뿔을 얇게 종잇장처럼 얇게 갈아 투명하게 만든 뒷면에 색채로 그림을 그려 비쳐 보이게 한 후 목재로 된 기물의 표면에 접착제로 붙여 치장하는 것을 말하며, 이러한 기능을 가진 장인을 화각장(華角匠)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기술은 원래 중국의 당나라 시대부터 있었던 대모복채(玳瑁伏彩) 장식 기술에서 기인한다. 대모(열대, 아열대 지역에 분포한 거북이의 일종)의 등딱지를 얇게 갈아서 그림을 복채하여 목공예품의 표면에 붙여 치장하는 당대의 기술이 당과 교역이 많던 통일신라로 이입되었고,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기술이다. 그러나 국내에는 이를 증명할 확실한 유물도 문헌의 기록도 없다. 다만 일본의 고대 보물 창고인 쇼소인(正倉院)에 소장되어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대모복채칼집과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나전칠기에 자개무늬와 더불어 사용된 대모전(玳瑁鈿)에서 그 기술의 맥락을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대모전 사용기법도 고려시대 중기 이전에는 성행했으나 수입품인 대모의 수급이 원활하지 못한 이유와 더불어 대모는 빗과 장신구 등의 제작 재료로서 뿐만 아니라 한방의 중요한 약재로도 사용되어 그 사용처가 점점 더 많아져 귀해졌기 때문에 점차 쇠퇴하게 된다. 이후 대모가 쇠뿔(牛角)로 대체되어 18세기경 조선시대에 화각 공예가 성행하게 된다. 다만, 쇠뿔로 만든 화각공예품의 경우 부패되어 18세기 이전의 것으로 판단되는 유물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은 까닭에 쇠뿔을 이용한 화각공예의 출발은 18세기 이전으로 보여 진다. 이러한 기술이 지금까지 전승될 수 있었던 것은 한말(고종시대)부터 3대째 각질장(角質匠) 겸 대모공장(玳瑁工匠)이었던 음일천 선생이 1920년대 초부터 화각장 공예 기술에 대한 조사 연구와 수련을 거쳐 화각공예품 제작에 전념하여 1970년대 초까지 꾸준히 활동해 왔기 때문이며, 선생에게서 기술을 전수받은 이재만 선생이 국가 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109호 화각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됨으로써 지금까지 그 기술 전승이 이루어지고 있다.

화각공예의 맥을 잇는 유일한 중요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 이재만 선생

화각장 기능보유자인 이재만 선생은 대목장(大木匠)이었던 아버지 이금달 선생(조부는 단청장이었다고 한다)과 자수 솜씨가 뛰어났던 어머니 정경희 여사의 슬하에 4남 1녀의 막내로 1953년에 태어나 서울 성수동에서 성장하였다. 이재만 선생은 한 살이 조금 지났을 무렵 넘어지면서 두 손으로 화롯불을 잘못 짚어 큰 화상을 입은 후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여 열 손가락 가운데 온전한 손가락이 몇 남지 않았으며 상당수의 손가락이 끝 마디 또는 둘째 마디까지 손실되었다. 그럼에도 그림 솜씨가 뛰어나 초등학교 시절에 전국미술실기대회에서 수 차례 입상한 경험이 있다.

 

만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선생은 만 열여섯 살 때 우연한 기회에 친구의 소개로 음일천 선생의 공방에 들렸다가 음일천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게 된다. 어린 나이에 주경야독의 생활은 대단히 힘겨웠다. 초기 1년 반 동안은 당시 인기 만화가 이상호 선생의 조수로 발탁되어 만화를 그리는 생활을 즐기며 극장 간판을 그리는 부업도 가끔 갖는 등 화각 기술의 전수활동에 한때 게을리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외도를 하다 보니 화각 공예에 대한 가치 인식이 오히려 높아졌고 장래 직업을 생각하면서부터 음일천 선생의 지시대로 충실하게 기술 연마에 정진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하일동 공방의 갑작스런 화재와 더불어 스승에게 수족 마비 증세가 생겨 급기야는 공방을 폐쇄하게 되었고 이후 이재만 선생은 독립하여 작업을 하게 되었다. 1960년대 말경 화각장 공예에 대한 이론적 연구를 위해 음일천 선생의 공방을 자주 드나들던 정명호 교수(당시 원광대학교 강사)의 청탁으로 이재만 선생은 1971년경부터 정명호 교수의 자택에서 각종의 화각 공예품을 제작해 주었고, 1984년에는 당시 삼성동의 무형문화재전수회관(현 중요무형문화재전수회관의 전신)의 화각 공방 관리 책임자로 있으면서 작업을 전담해 주며 자신의 작품도 만들었다고 한다. 이후 꾸준한 작품활동으로 전승공예대전 등 다양한 공예전에서 입상을 하였으며, 한국문화재보호재단에서 운영하는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당시 경복궁 내에 위치한 한국전통공예미술관의 부설 교육기관)에서 화각 공예기술을 강의하는 등 전수 교육활동에도 힘썼다.

 

199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09호 화각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된 선생은 많은 품목의 문화상품 개발에도 적극적이다. 화각 공예품의 생활화에 큰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다. 공예 품목의 다양화는 공예품의 생활화로 이어지며 과거의 전통공예품들이 실용품이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공예의 생활화를 위한 다양한 용도의 품목 개발은 공예인다운 정신의 발로라 하겠다.

주요작품

화각 구절판, 이재만, 34X10cm
아홉 칸으로 나뉜 목기를 말하는 것으로 아홉 가지 (음식)재료를 담았다 하여 구절판(九折坂) 이라고 한다. 십장생 문양으로 장수하는 의미를 함께 담았다.

 

화각사주함, 이재만, 59x33x34cm

화각서류함, 이재만, 36.5x28.5x12cm

 

화각예물함, 이재만, 50x29x28cm

화각좌경, 이재만, 26x34x23cm

제작과정 및 제작도구

화각 공예는 크게 네 가지 공정으로 이루어지는데, 쇠뿔과 뼈를 가공하는 골각(骨角)작업공정과 목재로 만드는 기물 바탕, 즉 백골을 만들기 위한 목공 작업 공정, 각지에 무늬(그림)를 그려 넣고 백골 표면에 그것을 붙이며 각지가 붙지 않는 여백 부분(기물의 밑바닥 또는 내부 등)에 옻칠을 하는 채화 및 옻칠 작업공정과 경첩·들쇠 등 금속 장식을 만들기 위한 장석 제작 공정으로 이루어진다.

 

주된 재료는 종잇장처럼 얇고 투명한 각지(角紙)를 만들기 위한 재료인 쇠뿔과 각지를 이어 붙인 경계선 부분에 박는 계선재인 쇠뼈, 이들을 기물의 본 바탕인 백골에 부착하기 위한 접착제인 부레풀, 무늬의 채색을 위한 채료(彩料), 각지를 붙이지 않는 백골 부분에 칠하는 도장재인 옻, 그리고 각지와 옻칠된 표면에 윤을 내는 광택제로 나뉜다.

 

이외에 제작도구로는 뿔과 뼈를 자르거나 켜는데 사용하는 틀톱, 실톱, 계선톱, 과기와 갈기칼, 조각도, 가위, 평줄과 벌줄 및 금환, 인두와 다리미, 압착기와 누름쇠판 및 누름쇠, 황새집게, 뿔방망이틀, 풍로와 석쇠 및 풍구, 작두, 기타 제도 용구 등이 사용된다.

 

1) 반투명지에 그려놓은 연필 무늬 그림에 먹선을 넣는 모습

2) 완성된 먹선화를 뒤집어 놓은 상태

3) 채색 작업

4) 화각 공예의 재료인 쇠뿔과 작업 중인 이재만 선생

약력
1953년
출생
1974년
제8회 동아공예대전 입선
1979년
원석화각공방 개설, 세계공예협의회 인도전시회 출품
1983년
산림박물관 개관 기념전 초대출품
1984년
무형문화재전수회관 내 화각공방 위탁운영
1986년
제11회 전승공예대전 보석함 입선
- 12회·13회·16회·17회 입선, 14회·19회 장려상, 18회 문화체육부장관상, 21회 문화재관리국장상
1990년
한국문화재보호재단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 화각반 강사
1993년
일본 다카시마야 한국전통공예대전 출품
1995년
인천광역시공예인협회 창립 초대 회장
1996년
제21회 전승공예대전 문화체육부장관상 수상
199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09호 화각장 기능보유자 인정
1997년
IPU 서울총회 기념전 출품
1998년
중요무형문화재전수회관 화각공방 운영
2001년
중국 공예전시관 <한국전통공예특별전> 출품
2002년
일본 교토 전통공예전시 <한국전통문화의 향기>전 출품

 

이치헌/한국문화재보호재단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은 문화재보호법 제9조에 근거하여 우리 전통문화를 널리 보전, 선양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공공기관입니다.

 

공식블로그 : http://blog.naver.com/fpcp2010

 

사진 서헌강(문화재전문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