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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1호]금속활자장 (金屬活字匠) | 중요 무형 문화제

문성식 2012. 3. 30. 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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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중요무형문화재 101호
명 칭 금속활자장 (金屬活字匠)
분 류 공예기술
지정일 1996.02.01
소재지 충북전역



※ 본문설명

금속활자장은 금속으로 활자를 만들어서 각종 서적을 인쇄하는 장인을 말한다. 금속활자 인쇄기술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고려시대에 창안되었으나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고종 19년(1232) 강화도에 천도한 고려 조정이 개경의 서적점(書籍店)에서 찍은 금속활자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를 다시 새겨낸 것이 전하며, 국가전례서인 『상정예문(詳定禮文)』을 금속활자로 찍은 것으로 보아, 이 시기 이전에 금속활자 인쇄가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중앙관서를 중심으로 단계적으로 개량·발전시켰다.

우리나라의 금속활자는 주조기법으로 제작된다. 금속활자의 제작과정은 글자본만들기, 원형만들기, 주조작업, 마무리작업 등 크게 4과정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주조기법에 따라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활자 하나하나를 밀랍으로 만드는 밀랍주조기법으로 초기에 주로 쓰인 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활자의 원형으로 주물틀을 만든 후 찍는 모래주조기법으로 조선시대 초조갑인자 이후 보편화된 방법이다.

금속활자는 글씨를 바탕으로 여러가지 과학과 기술을 총망라하여 만들어낸 종합예술품으로서,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전통공예기술이다. 그러나 근대이후, 서양문화가 전래되면서 금속활자 인쇄술이 사라져서 약 100여 년간 단절되었다. 최근 단절된 인쇄술을 스스로 찾아 원형의 발굴·복원에 전념하는 오국진 씨가 금속활자장의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어 잊혀졌던 전통기법을 복원·전수해 가고 있다.

※ 보충설명

금속활자장은 금속으로 활자를 만들어서 각종 서적을 인쇄하는 장인이다.

금속활자 인쇄기술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우리나라 고려시대때 창안되었다. 현재 정확한 창안시기는 알 수 없으나, 1232년 강화도에 천도한 고려 조정이 개경의 서적점(書籍店)에서 찍은 금속활자본(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를 다시 새겨낸 것이 전하며, 국가전례서인 (상정예문(詳定禮文))을 금속활자로 찍은 것으로 보아, 이 시기 이전에 금속활자 인쇄가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청주 지방의 흥덕사(興德寺)에서는 1377년 금속활자로 (직지심체(直指心體)) 등의 불교서적을 인쇄하여 보급할 정도로 그 기술이 널리 알려졌다. 조선시대에는 중앙관서를 중심으로 금속활자의 주조방법과 조판법을 단계적으로 개량·발전시켰다. 1403년에 주조한 계미자(癸未字)를 시작으로 1420년의 경자자(庚子字)를 거쳐 1434년의 초조갑인자(初造甲寅字) 제작때가 되면 조선시대의 금속활자 인쇄술이 절정에 다다르게 된다.

이후 다양한 활자들이 제작되었지만, 근대에 들어서면서 전통적인 금속활자 제조기법은 급속하게 쇠퇴하여 그 맥이 끊어졌다가 최근 금속활자의 제작기술에 대한 연구와 복원이 활발해지면서 금속활자장을 중요무형문화재로 새로 지정하였다.

우리나라의 금속활자는 주조기법으로 제작된다. 금속활자의 제작과정은 글자본 만들기, 원형만들기, 주조작업, 마무리 작업 등 크게 4과정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주조기법에 따라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초기의 밀랍주조(蜜蠟鑄造) 기법인데, 이것은 활자 하나하나를 밀랍으로 만들어서 주조하기 때문에 동일한 글자의 활자가 각기 다른 모양을 하고 있으며 활자의 크기도 가지런하지 않아서 조판할 때 각 줄마다 글자수가 다르며 옆줄이 수평선을 이루지 못하고 위아래글자가 서로 겹치기도 한다.

보다 발전된 방식은 모래주조 기법을 사용하는 것으로 조선시대의 초조갑인자 이후 보편화된 방법이다. 먼저 황양목으로 활자의 원형(어미자)을 만든 후 주물틀에 갯벌흙(주물사(鑄物沙))를 넣고 다진 다음 어미자와 가지쇠를 박고 또 하나의 주물틀을 그 위에 결합하여 주물사를 넣고 다져서 암틀과 수틀을 만든다. 가지쇠는 후에 쇳물이 흘러 들어갈 홈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주물틀이 완성되면 위 틀을 분리하여 어미자와 가지쇠를 들어내고 다시 결합하여 위쪽에 난 구멍으로 쇳물을 부어서 활자를 주조한다. 이 기법은 동일한 글자의 활자가 서로 같고 각 활자의 크기와 모양이 가지런하게 되므로 매우 정교하고 아름답다.

현재는 이 두가지 기법을 모두 사용하지만, 전통적인 기법만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화된 장비와 주물제작기법을 함께 활용하여 제작하고 있다. 금속활자는 글씨를 바탕으로 여러가지 과학과 기술을 총망라하여 만들어낸 종합예술품으로서,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전통공예기술이다. 인쇄술은 활자를 만드는 방법뿐 아니라 찍을 때 사용하는 먹과 종이가 발달해야 하기 때문에, 인쇄술의 발달은 우리나라 한지와 먹의 우수성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근대이후, 서양문화가 전래되면서 한지의 우수성이 사라짐과 함께 한지 인쇄도 역시 사라져서 약 100여년간 단절되어 있었다. 최근 단절된 인쇄술 분야를 스스로 찾아서 원형을 발굴·복원하고 있던 오국진(吳國鎭)이 중요무형문화재 금속활자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어 잊혀졌던 전통기법을 복원·전수해가고 있다.

 

1944.7.15 ~ 2008. 3. 24 | 보유자 인정: 1996년 2월 1일

 

 

“활자문화가 없다면 칠흑 같은 어둠이 계속된다”
- 빅토르 위고 (1862년 [레미제라블] 출판기념회에서)

13세기 초기부터 시작된 금속활자 인쇄

금속활자는 활판 인쇄를 하기 위해 쇠붙이를 녹여 주형에 부어 만든 각종 크기의 활자이다. 금속활자는 활자를 만드는데 사용된 금속의 성질에 따라 석활자, 연활자, 동활자, 철활자 등으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금속활자라고 하면 그 재료가 어떤 금속임을 막론하고 금속성이 있는 재료로 만든 활자를 총칭한다.


한국에서 금속활자 인쇄 기원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13세기 초기에는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예로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와 [상정예문(詳定禮文)]을 꼽을 수 있다.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의 끝부분에 있는 최이의 발문에 따르면, 증도가는 참선하는데 매우 요긴한 책이지만 전래되지 않아 기존에 금속활자로 간행된 이 책을 1239년에 다시 목판으로 새겼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신인상정예문발미(新印詳定禮文跋尾)]에 따르면, 고려 정부는 금속활자로 [상정예문] 28부를 찍어 해당 관청에 나누어 주고 보관하게 하였다는 기록 등 늦어도 13세기 초기에는 우리나라에서 금속활자 인쇄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13세기에 개경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 정부에서 성행한 금속활자 인쇄술은 지방으로 전파되어 고려 말까지 사용되었는데,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간행된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 대표적인 금속활자본이다. 이 책은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오국진 선생, 수많은 고문서를 활자로 복원하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01호 금속활자장 기능보유자인 오국진(吳國鎭) 선생은 1944년 7월 15일 충북 청원군 현도면 달계리 182번지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한학자인 할아버지에게서 글을 익혔다. 1964년 2월 대전공업고등학교 토목과를 졸업하고 충청남도 측량설계 지정대행사였던 삼실기업사에서, 1975년부터는 청주주물공장에 근무하였다. 1978년부터는 충청북도 내무국 주택과 제도사로 근무하였다.


오국진 선생은 어려서부터 우송 이상복 선생에게 입문하여 금석문을 비롯한 고증학과 서예를 본격적으로 배웠다. 동림이라는 아호도 우송 선생이 지어줬다. 쇳물 녹이고 활자 배우는 법을 배운 건 1972년 직지가 공개된 이후다. 1975년에는 장인이 운영하던 주물공장에서 주물의 기능을 익혔다. 일찍이 성오 신학균 선생에게서 각자술을 배운 후, 친척 형님인 중요무형문화재 제106호 각자장 기능보유자인 철재 오옥진(吳玉鎭) 선생(1996.11.1 기능보유자 인정)에게서 서각기법을 전수받아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의 목판을 복원하는 등의 활동과 더불어 서예전과 서각전에서 수차례에 걸쳐 입선하기도 하였다. 1984년 충북미술대전 초대작가를 비롯, 1996년에는 한국서가협회 초대작가로 활동한 바 있으며, 1998년 12월 29일에는 올림픽 기장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1991년 다니던 직장을 퇴직한 후 이듬해 청주 북문로에 10평짜리 공방을 차리고 옛 문서를 활자로 복원하는 작업에 본격 나섰다. 대표적인 서각으로는 [대동여지도], [무구정광대다라니경], [훈민정음] 서문, [금강반야바라밀다심경] 등이 있다.

 

선생은 특히 [불조직지심체요절] 첫 장을 비롯하여 조선초기의 활자를 복원하는 등 고려에서 조선초기의 금속활자 제작방법을 실증적으로 재현해 내고 있는 유일한 기능자로 조사되어 1996년 2월 1일 중요무형문화재 제101호 금속활자장으로 인정되었다. 선생이 복원한 문서는 1만 3357자에 이르는 직지 하권과 월인천강지곡 첫 장 말고도 대동여지도 전도, 조선조 활자인 계미자, 경자자, 갑인자,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남명천화상송증도가 등이 있다. 2007년 명예보유자로 인정되었다가 2008년 3월 지병으로 별세하였다. 오국진 선생의 뒤를 이어 임인호 선생이 2009년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아 활발한 작품활동 및 전수활동을 하고 있다.

 

주요작품

남명천화상송증도가, 오국진

남명천화상송증도가 (南明泉和尙頌證道歌)
1239년(고려 고종 20)에 중서령이었던 최이가 쓴 발문에 의하면 이 책은 선불교의 중추가 되는 것으로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기존에 인쇄된 금속활자본을 바탕으로 목판에 다시 새겨낸 책이다. 이 책으로 말미암아 우리나라가 늦어도 1239년에는 금속활자 인쇄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은 오국진 선생이 복원한 재현 작품이다.

월인천강지곡, 오국진

월인천강지곡 (月印千江之曲)
오국진 선생이 복원한 작품으로, 1447년 왕명에 따라 수양대군이 어머니인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석보상절]을 지어 올리자 세종대왕이 석가의 공덕을 찬송하여 지은 노래이다. [월인천강지곡]이란 부처가 나서 교화한 자취를 칭송한 노래라는 뜻으로, 상, 중, 하 3권에 500여 수의 노래가 수록되어 있다.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오국진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
2001년 오국진 선생이 복원한 작품으로 금속활자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의 상권은 남아 있지 않아 목판본 상권의 내용을 기본으로, 금속활자본 하권의 글자체를 바탕으로 복원한 활자 및 활자판이다.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은 청주목 외곡의 흥덕사에서 1377년(고려 우왕 3)에 금속활자로 찍은 책으로, 1972년 ‘세계도서의 해’에 처음으로 실물이 알려졌으며,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현재 금속활자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은 하권 1책만이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전해지고 있다.

동국정운, 오국진

동국정운 (東國正韻))
동국정운은 조선 세종 때 신숙주, 최항, 박팽년 등이 왕의 명으로 편찬하여 세종 30년(1448)에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표준음에 관한 책으로, 사진은 오국진 선생에 의해 복원된 활자판이다. 중국의 운(韻)에 관한 책인 [홍무정운]에 대비되는 것으로, ‘동국정운’이란 우리나라의 바른 음이라는 뜻이다. 당시 혼란스럽던 우리나라의 한자음을 바로잡아 통일된 표준음을 정하려는 목적으로 편찬, 간행되었다.
제작도구 및 제작과정

 

금속활자를 만드는 데에 사용되는 금속재료로는 구리를 비롯하여 주석, 아연, 납, 철 등의 여러 가지가 있다. 금속활자 제작에 사용되는 도구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먼저, 종이, 모필, 먹, 벼루 등 문방사우를 지칭하는 서사 도구류가 있고 칼과 가위, 톱, 작두 등 각종 종이류, 목재, 금속재 등의 절단을 위하여 사용되는 절단 도구류와 평칼, 창칼, 원칼, 삼각칼 등 각종 목재나 금속재의 조각을 위하여 사용되는 조각 도구류가 있다. 조각 도구류는 금속활자의 제작에서는 밀랍이나 나무에 어미자를 새길 때에 사용된다. 그 다음 화덕, 도가니, 물판, 갯토, 주형 등 밀랍이나 각종 금속재의 끓이기를 위하여 사용되는 도구들이 있으며, 칼, 줄 등 각종 목재나 금속재의 연마를 위해 사용되는 도구들이 있다. 인판틀과 활자 고르게 활자 다지게 등 조판 도구, 인출도구, 활자보관함 등 수많은 제작도구들이 사용된다.


과거에 우리나라에서 금속활자를 주조한 방법은 통일된 한가지의 방법이 아니었다. 여기서는 금속활자장 기능보유자인 오국진 선생의 재현을 통해서 밝혀낸 밀랍주조법에 의한 금속활자 제작과정을 살펴본다.


자본(字本)제작 : 자본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자본을 선정하고 제작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원형의 제작 : 금속활자의 제작에 있어서 원형제작은 어미자를 제작하는 것이다.


활자제작 : 주물토을 제작하고 주형틀을 만든 후, 주형틀 속에 이미 밀랍으로 만든 어미자가지를 넣고 기포가 생기지 않도록 주물토를 채운다. 어미자 녹여내기, 쇳물 녹이기, 쇳물 붓기, 활자가지쇠 분리, 활자 떼어내기, 활자 다듬기 등의 과정을 거쳐 완성된 활자를 일정한 순서에 따라 활자 보관함에 장치하고 조판에 대비한다. 다음은 서적을 인출하기 위해 조판과 인출하는 과정이다. 인판틀을 제작하고 인판틀에 인출하고자 하는 내용을 활자를 조판하여야 하는데 조판 방법에는 고착식 조판법과 조립식 조판법이 있다. 고착식 조판법은 네 귀퉁이가 고정된 틀에 위, 아래 변이나 계선까지 붙은 고착식 인판틀을 마련하고 그 바닥에 밀랍을 간 다음 그 위에 활자를 배열하는 방법이다. 조립식 조판법은 네 귀퉁이가 고정된 인판틀에 위, 아래 변이나 계선이 붙지 않은 조립식 인판틀에 활자를 배열하는 방법이다. 이 조판법은 조선의 경자자에 이르러 비로소 사용된 조판법이다.

 

약력
1944년 7월 15일 
출생
1992년 
무구정광대다라니경(국보 126호) 복원
1996년 2월 1일
중요무형문화재 제101호 금속활자장 보유자 인정
1996~2006년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 작품전 출품
2007년 9월 17일
명예보유자 인정
2008년 3월 24일
지병으로 별세

한국문화재보호재단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은 문화재보호법 제9조에 근거하여 우리 전통문화를 널리 보전, 선양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공공기관입니다.

 

공식블로그 : http://blog.naver.com/fpcp2010

 

사진 서헌강(문화재전문 사진작가)

1964. 12. 20. ~ | 보유자 인정: 2009년 12월 3일

“활자는 표류하는 정보 세계의 닻이다. 인간은 지금 넘쳐나는 정보 속에서 당황하고 있다. 영상이나 음향을 탄 정보는 자극적이지만 계속해서 흐르고 떠다니면서 도무지 두서가 없다. 일관되게 정리하여 의미를 파악하려 하면 그림도 소리도 그 질을 바꾸어 버린다. 말만이 그리고 활자만이, 현실을 응축해 의미 있는 것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중략) 문자는 인간의 역사와 함께 태어났고, 활자는 지식이 전 인류의 것이 되었을 때에 태어났다. 활자 문화는 인간 본연의 인간다운 자세 그 자체이다. 21세기에 더욱 더 성장해야 할 정보 세계가 무질서하게 표류하는 비만아가 되지 않으려면, 확실한 닻과 골격을 준비해야 한다."

야마자키 마사카즈 (일본 21세기 활자문화프로젝트 추진위원장, 일본 도아대학교 학장)

위대한 유산,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금속활자장은 금속으로 활자를 만들어서 각종 서적을 인쇄하는 장인을 말한다. 금속활자 인쇄기술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고려시대에 창안되었으나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중국에서 비교적 일찍 발명되었던 교니활자 인쇄술과 목활자 인쇄술의 활자 제작 기술을 도입한 우리나라는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중국보다 먼저 금속활자 인쇄술을 발명하고 이를 실용화하는데 성공하였다.

고려는 개국 초부터 목판 인쇄술이 성행하여 전반기에는 불교와 유교의 양대 문화가 눈부시게 발전하고 문물 제도가 잘 정비되었으나, 후반기로 접어들어 이자겸과 묘청의 난, 그리고 무인의 난이 일어나 문신들이 대거 학살되고 궁궐이 불타, 그동안 여러 전각에 가득 비치해 놓았던 귀중한 전적들이 모두 소실되는 등 문운이 크게 위축되었다. 이러한 난세가 수습되기 시작한 것은 최충헌 일가가 무신정치의 토대를 잡은 13세기 초부터였다. 무신정치가 토대를 구축하기 시작했으나, 서적의 간행은 여전히 위축되어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국토가 좁고 인구가 적어서 독서나 학문하는 사람이 한정적이었는데 서적에 있어서도 그 부수는 적으면서 학문의 여러 주제 분야에 걸친 다양한 서적이 필요하였다. 그 결과 고안된 것이 금속활자를 만들어 잘 간직하면서 여러 학문 또는 주제 분야의 필요한 서적을 수시로 인출하여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우리 선조들은 예로부터 청동을 불려 범종, 불상, 동전 등을 주조하는데 훌륭한 기술을 체험해 왔으므로, 금속활자를 주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에 조판용의 점착성 물질과 금속에 잘 묻는 먹물만 개발하면 금속활자인쇄술은 충분히 가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금속활자 인쇄술에 관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언제 누구에 의하여 어떤 방법으로 금속활자가 주조되고 인쇄되었는지에 관하여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고려의 고종 19종(1232)에 개경의 서적점(書籍店)에서 찍은 금속활자 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가 전하며, 국가전례서인 [상정예문(詳定禮文)]을 금속활자로 찍은 것으로 보아 이 시기 이전부터 금속활자 인쇄가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중앙관서를 중심으로 단계적으로 개량·발전하였다. 지금까지 고려시대의 금속활자 중에서 실물이 전해지는 것은 개성의 개인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고려 ‘복(㠅)’ 활자와 고려의 왕궁이 있었던 개성 만월대 신봉문에서 출토된 개성박물관 소장의 고려 ‘전’ 활자가 있을 뿐이다.

복 활자. 고려시대. 개성의 개인무덤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며, 조선시대 활자와는 모양이 다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전 활자. 고려시대. 1958년에 개성의 만월대 신봉문 터로부터 서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곳에서 발굴된 것으로 활자에 새겨진 글자는 ‘이마 전’자이고 글자의 크기는 가로 세로 각각 10mm. (개성역사박물관 소장)

이들 활자는 한결같이 누가 무슨 용도로 언제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전해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들 활자는 고려시대 금속활자의 주조와 인출을 실증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는 활자들이다. 여러 가지 특징과 정황을 고려할 때 고려후기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시대의 금속활자

증도가자 : [남명천화상송증도가]를 인출한 금속활자로 이 활자를 고려관주활자라고도 한다. 남명법천선사가 선종의 진리를 한층 오묘하게 논설한 본서의 초간본은 1076년 중국의 절강성의 괄창이라는 곳에서 간행되었는데, 이때 축황의 서문을 권말에 붙이고 그 다음 해 7월에 오용의 서문을 권수에 첨부한 것이다. 증도가 말미에는 원래 금속활자로 인쇄한 책을 1239년 목판으로 번각해 찍었다고 적혀 있어 적어도 1239년 이전 금속활자로 [증도가]를 인쇄했음을 추정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상정예문자 : [상정예문]을 인출한 금속활자로 인종 때에 최윤의 등을 비롯한 17명의 문신들이 임금의 명령으로 고금의 예의를 수집하고 이를 참고로 하여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도록 50권으로 편찬한 전례서이나, 그 실물은 현재 전하고 있지 않다. 간행 시기는 1234년에서 1241년 사이로 추정된다.

흥덕사자 : 청주목 외곡에 있었던 흥덕사에서 [불조직지심체요절]과 [자비도량참법집해] 등을 인출한 금속활자이다. [불조직지심체요절]은 백운화상(1298~1374)이 우라나라의 학승들이 학습하게되는 여러 서적에서 선의 요체를 깨닫는데 필요한 것을 초록하여 상·하 2권으로 나누어 편찬한 것이다. 금속활자본 [불조직지심체요절]은 첫장이 결락된 총 38장의 하권 1책만이 프랑스 국립도서관 동양문헌실에 보존되고 있다.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으로 유네스코 ‘세계의 기억(Memory of the World)'에 등재된 세계기록유산이다.

조선시대의 금속활자

계미자 : 태종 3년(계미, 1403)에 만들어진 동활자로 조선시대 처음으로 주조된 금속활자이다. 태종은 고려말기 서적원의 제도를 본받아 주자소를 설치하고 활자를 주성해 내도록 명하였는데 태종 3년 2월 18일에 착수하여 수개월 결려 대자, 소자, 특소자 등을 합쳐 수십만 자가 주조되었다.
경자자 : 세종 2년(경자, 1420)에 계미자의 단점을 보완하여 주성된 동활자.
초주 갑인자 : 세종 16년(갑인, 1434)에 만들어진 동활자로 경자자가 가늘고 빽빽하여 보기가 어려워 다시 금속으로 주조한 활자. 초주 갑인자에는 한글활자가 병용되었는데 세종29(종묘, 1447)년 무렵에 만들어진 청동활자로 자체는 강직하고 굵은 고딕인서체이다. 인본으로는 [월인천강지곡], [석보상절]이 있다.
병진자 : 세종18년(병진, 1436)에 만들어진 연활자로 보양자라고도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연활자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경오자 : 문종 즉위년(경오, 1450)에 만들어진 동활자로 자본은 당시 명필가로 알려진 안평대군이 쓴 박력있는 독특한 글씨체였다.
을해자 : 세조 원년(을해, 1455)에 만들어진 동활자로 자본은 강희안의 글씨로 하였다.
정축자 : 세조 3년(정축, 1457) 9월에 만들어진 동활자
무인자 : 세조 4년(무인, 1458) 1월에서 7월 사이에 만들어진 동활자
을유자 : 세조 11년(을유, 1465)에 만들어진 한자활자와 한글활장의 동활자
갑진자 : 성종 15년(갑진, 1484)에 만들어진 동활자
계축자 : 성종 24년(계축, 1493)에 만들어진 동활자
병자자 : 중종 11년(1526)과 중종 13년(1529)에 만들어진 동활자
경진자 : 선조 13년(경진, 1580)에 갑인자를 두 번째로 주조한 동활자
을해자체 경서자 : 소학언해, 대학언해, 중용언해, 논어언해, 맹자언해 등의 국역본 사서와 효경언해 등의 국역본 경서를 인출해내는데 사용된 호라자로 세조 원년(14555)에 주조되었다.
인력자 : 관상감(서운관)에서 일력을 인출하는 데에 사용된 철활자로 관상감(서운관)철활자라고도 한다. 자세한 주조시기는 알 수 없고 임진왜란 이전으로 추정된다.
무오자 : 광해군 10년(무오, 1618)에 만들어진 동활자. 임진왜란으로 중단되었던 종래의 주자인쇄제도를 복구하고자 광해군 9년에 주자도감을 설치하고 갑인자를 다시 주조하기 시작해 이듬해 7월에 완성시킨 활자이다.
무신자 : 현종 9년(1668)에 김좌명이 호조 및 병조의 물자와 인력을 이용하여 수어청에서 주성한 동활자
병진왜언자 : 숙종 2년(1676)에 주조된 동활자
낙동계자 : 민가의 낙동계라는 사사단체에서 현종 14년(1673) 무렵에 주성하여 사용하던 동활자
현종실록자 : 숙종 3년(1677)에 현종실록을 인출하기 위하여 ‘낙동계’의 활자를 구득하고 여기에 새로이 주조하여 섞은 동활자
한구자 : 3차에 걸쳐서 주도된 동활자로 초주 한구자는 숙종조 초에, 재주 한구자는 정조 6년에, 삼주 한구자는 철종 9년에 주조되었다.
교서관 인서체자 : 2차에 걸쳐서 주조된 철활자로 전기 교서관 인서체자는 숙종 초에, 후기 교서관 인서체자는 대략 경종 초로 추정하고 있다.
원종자 : 숙종 19년(1693)에 인조의 부왕인 원종이 슨 글자를 바탕으로 주조한 동활자로 한자활자와 한글활자였다.
숙종자 : 숙종 19년(1693)에 숙종의 어필을 자본으로 주조한 동활자
율곡전서자 : 홍계희가 스승인 도암 이재의 [율곡선생전서]를 인출하고자 문하생을 비롯한 벗들과 더불어 사사로이 주조한 철활자
임진자 : 정조가 동궁으로 있던 영조 48년(1772)에 갑인자로 인출한 『심경』과 『만병회춘』을 자보으로 주조한 15만자의 동활자이다.
정유자 : 정조 원년(1777)에 평양감사 서명응이 왕명에 따라 15만여자의 갑인자를 더 주조한 동활자
정리자 : [정리의궤통편]을 인출하기 위하여 주조한 데에서 붙여진 명칭으로 초주 정리자는 정조 20년(1796)에, 재주 정리자는 철종 9년(1858)에 한자활자와 한글활자로 주성된 동활자이다.
정리자체 철활자 : 정조 말기에 민간이 정리자와 유사하게 주조한 철활자
전사자 :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오빠 박종경이 순조 16년(1816)에 주성한 인서체 동활자
필서체 철활자 : 순조 초에 민간에서 주조하여 상업적으로 사용해 오던 활자에 사자원의 서체를 바탕으로 주조한 철활자.
신연활자 : 19세기 후반에 우리나라에 도입된 서양 근대의 신식 연활자

선조들의 기록정신이 담긴 금속활자 복원에 열정을 바친 임인호 선생

중요무형문화재 제101호 금속활자장 기능보유자인 임인호 선생은 현재 살고 있는 충북 괴산군 연풍면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적 생활이 어려워 수업료를 내지 못해 복도에서 손을 들고 있거나 벌을 서기를 거의 매일같이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중학교 재학 중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어렵게 중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음성고등학교에 응시해 합격했지만 생활은 계속 어려웠다. 18살 때 무작정 서울로 상경해 구두닦이와 미장 등 막노동을 하기도 했고 나무로 문틀을 자는 목공과 용접일 등으로 생활을 이어 나갔다.

1984년에 서각에 입문하여 3년 후인 1987년부터 故 신영창 선생에게 정식으로 서각을 배우게 된다. 이후 1992년 고향인 연풍에 ‘무설조각실’을 차렸는데 처음 선생에게 서각을 가르쳐 준 신영창 선생이 지어준 호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무의 세계를 걸으라는 선생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 임인호 선생은 ‘세상은 공평하다. 돈을 버리니 명예가 따라왔다’는 믿음을 잊지 않는다고 한다. 1997년 10월 즈음 중요무형문화재 제101호 금속활자장 기능보유자인 故 오국진 선생의 문하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금속활자를 배웠다.“짬나면 한번 들러 보라”는 스승의 말을 쫓아 7년을 꼬박 조각칼과 쇳물, 활자와 씨름한 끝에 2004년 3월 스승의 뒤를 이을 전수교육조교가 되었다.


“ 오 선생님을 처음 뵈었을 때 가슴이 쿵쿵 뛰었어요.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안정이 안 되더라고요. 오 선생님이 쇳물을 주조에 부을 때 모습이 너무 아름답게 보였어요. 그 모습을 잊을 수 없어요. 너무 멋있게 보여 이후 작업실에 틈만 나면 들렀어요. 6개월이 지난 어느날 ‘한번 배워 볼래’라고 묻더라구요. 너무 기뻤어요.”

선생은 이때부터 오국진 선생의 제자가 되어 연풍의 작업실을 정리하고, 오국진 선생이 쓰러진 2005년까지 8년 넘게 청주로 출퇴근을 했다. 스승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 복원에 힘을 쏟았다. 오국진 선생이 타계한 뒤 스승의 뒤를 이어 2009년 12월 40대 나이로 제2대 금속활자장 기능보유자가 되었다. 선생의 손은 온갖 흉터투성이다. 상처가 났다 아물어 가칠하고 뭉툭해진 모습은 장인의 손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다. 선생은 금속활자 제작을 천직으로 알고 있다. 철저히 전통 제작방식을 고수하는 선생은 밀랍주조에 있어서도 전통 재현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순수 밀을 얻기 위해 10여 년 전부터 직접 토종벌을 기르며 일년에 딱 한번, 11월 토종꿀의 찌꺼기에서 순수밀을 취하고 있다.


“인쇄문화는 곧 기록문화죠. 선조가 만들어 사용했던 금속활자를 복원시킬 때 희열을 느낍니다.”

현재도 선생은 날마다 10여시간씩 활자와 씨름하고 있다. 글씨를 새기고, 주물 틀을 만들고, 활자를 다듬고, 글자를 맞추는 조판, 인쇄하는 일가지 모든 과정이 선생의 손을 거친다. 선조들이 사용하다 맥이 귾긴 금속활자 복원에 온 심혈을 다하고 있다. 2007년부터 조선시대 주요 활자 복원에 나서 조선시대 첫 금속활자인 계미자 등을 복원했고 경자자, 병진자, 한구자, 율곡전서자 등 조선시대 금속활자 30종과 동국정운자, 인경목활자 등 목활자 8종이 선생의 손을 거쳐 되살아났다. 금년 초에는 직지심체요절 상·하권 3만 자 가운데 5천여 자를 복원하는데 성공했다. 밀랍주조법으로 진행된 복원작업은 한 번에 100여자 이상을 주조하는 다량 주조방식이 사용되었다. 이 방법은 고려시대 직지 활자 때 쓰인 것으로 그동안 실험적으로 이뤄졌으나 판형대로 복원한 것인 이번이 처음이었다.

선생은 “배우면 배울수록, 익히면 익힐수록, 알면 알수록 오묘하고 신비로운 것이 옛 활자”라며 “혼을 담아 천년 뒤에도 살아 꿈틀거리는 우리 활자를 만들고 싶다. 세계에서 유일한 금속활자 주조법을 지키고 명맥을 이어 나가는 것을 삶의 소명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한다.

작품

대명숭정구년세차병자대통력(大明崇禎九年歲次丙子大統曆)_50×38cm숭정병자(崇禎丙子), 즉 1636년의 대통력(大統曆)이다. 대통력이란 명나라 때의 역법(曆法)으로 1384년에 누각박사 원통이 수시력에 약간의 수정을 더하고 그해를 역의 기원으로 한 대통력법통궤를 만들었다. 우리나라에는 고려말기에 전해져 1653년(효종4) 시헌력을 쓸 때까지 통용되었다.

풍고집 _ 51×31×7cm풍고집 정리자본(조선 정조20년에 주자소에서 만든 동활자)으로 18권 8책이며 1858년(고종5) 안동김씨 문중에서 간행하였다.

능화판_60x25cm

동국정운(東國正韻)48x30cm

석보상절(釋譜詳節)_55.5x31.5x7.5cm

월인천강지곡_52x31cm

제작과정

우리나라의 금속활자는 주조기법으로 제작된다. 금속활자의 제작과정은 글자본 만들기, 원형만들기, 주조작업, 마무리작업 등 크게 4과정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주조기법에 따라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활자 하나하나를 밀랍으로 만드는 밀랍주조기법으로 초기에 주로 쓰인 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모래로 주물틀을 만드는 모래주조기법으로 조선시대 초조갑인자 이후 보편화된 방법이다. 금속활자는 여러 가지 과학과 기술을 총망라한 종합예술품으로서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전통공예기술이다.

밀랍주조기법으로 하는 제작과정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글자본 선정 : 간행하고자 하는 책의 내용에 따라 글자본을 먼저 선정한다.
2) 자본 붙이기 : 밀랍 판형 위에 선정된 글씨를 열을 가해 뒤집어 붙인다.
3) 어미자 새기기 : 밀랍에 붙은 자본을 조각칼로 한자 한자 새긴 뒤 낱개로 잘라낸다.
4) 가지쇠 붙이기 : 낱개의 어미자를 주물이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만든 뒤 붙이는 작업이다.
5) 주형틀 만들기 : 황토와 이암을 적절한 비율로 섞어 쇳물이 들어갈 수 있는 거푸집을 만든다.
6) 쇳물 붓기 : 섭씨 1100~1200도의 온도로 녹인 청동(구리+주석) 쇳물을 주형에 붓는다.
7) 조판하기 : 쇳물을 부어 응고된 낱개의 활자를 책의 내용에 따라 조판틀에 맞추어 배열한다.
8) 인출(인쇄) : 금속에 잘 묻는 유연먹을 사용해 먹을 칠하고 한지에 애벌인쇄를 한 뒤 교정을 본 후 인쇄한다.

1) 어미자 가지만들기               2) 어미자 가지만들기                3) 활자 가지쇠 분리하기

4) 활자 가지쇠 분리하기             5) 활자 떼어내기                   6) 활자 떼어내기

7) 완성된 활자들

약력
  • 1964년               출생
  • 2005년               노무현 대통령 영부인 2005FBF주빈국 명예위원장 추대패 제작
  • 2005년               독일 2005FBF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금속활자 주조 시연
  • 2007년               문화재청장 표창
  • 2008년              <조선왕실 주조 금속활자> 계미자 등 11종 복원
  • 2009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01호 금속활자 기능보유자 인정
이치헌/한국문화재보호재단 (http://www.chf.or.kr/)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은 문화재보호법 제9조에 근거하여 우리 전통문화를 널리 보전, 선양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공공기관입니다.
공식블로그 http://blog.naver.com/fpcp2010
사진
서헌강(문화재전문 사진작가)
발행2012.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