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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호] 옹기장 (甕器匠) | 중요 무형 문화제

문성식 2012. 3. 30. 05:04


종 목 중요무형문화재 96호
명 칭 옹기장 (甕器匠)
분 류 공예기술
지정일 1990.05.08
소재지 전남전역



※ 본문설명

옹기는 질그릇(진흙만으로 반죽해 구운 후 잿물을 입히지 않아 윤기나지 않는 그릇)과 오지그릇(질그릇에 잿물을 입혀 구워 윤이 나고 단단한 그릇) 을 총칭하는 말이었으나 근대 이후 질그릇의 사용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오지그릇을 지칭하는 말로 바뀌게 되었다. 옹기장은 옹기를 만드는 기술 또는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옹기는 상고시대부터 관·제기·식기·솥 등에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에서는 와기전(瓦器典)이라 하여 옹기의 생산을 담당하는 기관을 두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도 서울과 지방에 100여 명의 옹기장을 두었다.

옹기점의 시설로는 수비장(질 좋은 흙을 얻기 위한 시설), 움(작업장), 물레(그릇제작용 받침틀), 송침(건조시설), 찬간(저장시설), 가마(그릇 굽는 시설) 등이 있으며 가마의 형태는 경사진 곳에 길게 비스듬히 축조한 등요가 일반적이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음식물의 저장, 발효용구로서 옹기가 필수적인 생활용기로 쓰여 왔다. 그러나 과학문명의 발달과 서구문명이 들어오면서 식기재료의 발달과 주택공간의 현대화 등으로 인하여 옹기수요가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게다가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옹기생산에 필수적인 땔나무의 부족과 생산비 절감을 위한 재료의 대체로 전통적인 제작기법이 사라져감에 따라 전통적인 옹기제작기술의 전승이 끊어질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옹기장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기능전승에 힘쓰고 있다.

※ 보충설명

옹기를 만드는 기술을 옹기장이라고도 하며 그 일에 종사하는 장인(匠人) 또는 도공(陶工)을 일컬어 옹기장이라 하기도 한다. 옹기는 질그릇과 오지그릇을 총칭하는 말이었으나 근대 이후 질그릇의 사용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오지그릇을 지칭하는 말로 바뀌게 되었다. 현존하는 옹기점(甕器店)은 광범한 도토공업(陶土工業) 분야 중 가장 최근까지 널리 보급되어 전래되어 온 우리나라의 유일한 전통적인 요업(窯業) 중의 하나이다.

옹기는 상고시대 때부터 관용제기(祭器)식기솥 등에 광범위하게 사용되어왔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와기전(瓦器典)이라 하여 도기류(陶器類)의 생산을 담당하는 기관이 있었는데 경덕왕 때 잠시 도등국(陶登局)으로 고친 일이 있으며, 소속관원으로는 간(干) 1인과 사(史) 6인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초기의 『경국대전 』공전(工典) 경공장조(京工匠條)에 보면 공장의 직종 중 사기장(沙器匠)이 가장 많은 386인으로 사옹원(司饔院) 소속에 380인, 내수사(內需司)에 6인이 종사하였는데, 옹장은 본조(本曹)봉상시(奉常寺) 등 14개 기관에 104인이 종사하였으며 각도·각읍에 공장의 명색이 있으나 18세기의 『대전통편 大典通編 』공전(工典)에는 외공장 의 성적(成籍)을 각도에 비장(備藏)하는 법규가 없어지고 관부에 사역이 있으면 사공(私工)을 임용하도록 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경상도 초계군(草係郡)과 진주목(晋州牧)에 황옹(黃甕)만을 굽는 가마가 세 군데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경국대전』공전 외공장조에는 충청도 임주(林州)에 황옹장 1인이 있다고 하였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음식물의 저장발효용구로서 옹기가 필수적인 생활용기로 쓰여 왔다. 그러나 과학문명의 발달과 서구문명이 들어오면서 실용성 있는 금형제품과 화공수지(化工樹脂) 제품 등 식기재료의 발달과 주택공간의 현대화 등으로 인하여 옹기수요는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게다가 6. 25사변을 전후하여 옹기생산에 필수적인 땔나무의 부족과 고가(高價)의 생산비 절감을 위한 재료대체로 전통적인 제작기법이 사라져감으로써 전통적인 옹기제작기술의 전승이 끊어질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국가에서는 1990년 5월 중요무형문화재 제96호로 옹기장을 지정하였고, 전라남도 보성군 미력면 도개리 옹기점의 이옥동(李玉童)이래원(李來元)을 인정하였다. 도개리 옹기점의 이옥동·이래원 형제는 7, 8대를 계승하여 왔으나 모두 사망하여 현재 보유자는 없다.

1919. 8. 2~2000. 8. 1 | 보유자 인정: 1990년 5월 8일

 

“늦저녁 때쯤 해서 불질이 시작됐다. 불질. 결국은 이 불질이 독을 쓰게도 못 쓰게도 만드는 것이다. 지은 독에 따라서 세게 때야 할 때 약하게 때도, 약하게 때야 할 때 지나치게 세게 때도, 또는 불을 더 때도 덜 때도 안 된다. 처음에 슬슬 때다가 점점 세게 때기 시작하여 서너 시간 지나면 하얗던 독들이 흑색으로 변한다. 거기서 또 너더댓 시간 때면 독들은 다시 처음의 하얗던 대로 되고, 다음에 적색으로 됐다가 이번에는 아주 샛말갛게 되는데, 그것은 마치 쇠가 녹은 듯, 하늘의 해를 쳐다보는 듯이 된다. 그리고 정말 다음날 하늘에는 맑은 가을 햇빛이 빛나고 있었다.”

                                 - 황순원의 [독 짓는 늙은이] 중에서

 

일상에서 중요한 생활그릇이었던 옹기

오늘날 옹기는 주로 된장이나 김치 등의 발효음식을 담가 먹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훨씬 다양한 용도로 옹기가 사용되었음을 알게 된다. 옹기는 주로 음식과 관련된 용도로 사용되었다. 발효음식을 담가 먹는 것뿐만 아니라 음식을 맛깔스럽게 해주는 양념을 모아두는 양념단지, 떡을 찌는 시루, 곡물 등을 빻는데 사용하는 확과 확독, 술을 담아서 다닐 수 있는 술병과 직접 술을 내리는데 쓰는 소줏고리 등 음식의 발효, 저장, 조리, 운반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사용되었다. 음식과 관련된 것 이외에도 거름을 저장하거나 논밭에 뿌리는 똥장군, 굴뚝을 구성하는 데 쓰이는 연통과 연가, 난방에 쓰이는 화로, 방을 밝히는 촛대 등 그 외에도 다양하게 옹기가 쓰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언제부터 옹기가 쓰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삼국시대 이후 그릇을 만드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토기는 점차 단단하고 가벼운 도기로 만들어졌고 음식물이나 곡식을 보관, 저장할 수 있게 되었다.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청자, 분청사기, 백자와 같은 새로운 도자기가 만들어졌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여전히 옹기가 중요한 생활그릇으로 사용되었다.

 

 

8대에 걸쳐 옹기업을 이어온 집안에서 태어나다

해방 이후 우리의 주택문화와 음식문화가 급격하게 서구화되고 근대화와 더불어 아파트와 냉장고가 널리 보급되면서 옹기는 점차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1960년대에는 충청북도 진천뿐 아니라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과 공주지방에 산재해 있었으나 모두 파점된 상태였다. 이에 1990년 국가에서는 중요무형문화재 제96호 옹기장을 지정하였고, 충남 동성리옹기점의 이종각 선생과 보성 미륵리옹기점의 이옥동 선생, 그리고 그의 동생 이내원 선생을 보유자로 인정하였다.

 

이내원 선생의 집안은 전남지역에서 8대째 옹기업을 이어오고 있었으며, 부친이던 이상근 선생의 3남으로서 장남인 이옥동 선생과 함께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특히 그는 전남지방에서 발달한 그릇 벽을 세우는 기법인 체바퀴타래미기법에 장기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전통적인 재래유약인 잿물을 사용하여 제작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이내원 선생의 전통 옹기제작 기술은 그의 조카인 이학수 선생이 전수받아 이어오고 있다.

 

 

주요작품

 

방퉁이, 이내원, 45X45X52cm

방퉁이(Jar)
방퉁이는 항아리를 가리키는 전라남도 방언이다. 손잡이는 타래꼭지로 기울여 손이 들어가게 움푹 패여 잡기 쉽고, 뚜껑과 목은 약간 길고 아구리는 넓으며 바닥은 평평하여 안정감이 있다. 어깨 위는 테를 두르고 불룩한 배에는 단순한 초화무늬를 쓱쓱 그려 넣는다. 우리나라 모든 가정의 뒤뜰과 정원에는 반드시 장독대가 있었다. 저장을 목적으로 만든 항아리는 우리 민족 모두가 애용해 왔으며 생활 용기로써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갖고 계승된 전승 공예품이다. 전라도 출신인 옹기 장인이 그 지역 옹기의 특징을 잘 살려낸 것이다.

떡시루, 이내원

옹기떡시루
떡시루는 떡을 찌기 위해 솥 위에 올려놓고 사용하도록 고안된 그릇이다. 바닥에 구멍이 여러 개 뚫려 있어 불을 때면, 솥 안에서 뜨거워진 수증기가 시루 바닥의 구멍을 통해 위로 올라가 시루 안에 넣어둔 내용물을 푹 익힐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 옹기떡시루도 그러한 시루의 기능적 특징을 잘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장인의 솜씨를 발휘하여 시루 표면에 시원한 곡선을 쓱쓱 그려 넣음으로써 생활 속의 쓰임새뿐 아니라 눈으로 보는 즐거움까지 주고 있다.

 

옹기주병, 이내원, 34X34X17cm

옹기주병(Onggi Bottle)
병은 술이나 물을 담았다가 따라 먹는 용도로 많이 사용되는 그릇이다. 병의 형태는 대체로 비슷하여 주둥이가 넓적하고 목이 비교적 길며, 몸체는 좁은 어깨로부터 곡선을 이루며 배가 점차 부르다가 다시 약간 잘록해지는 것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토기, 청자나 백자 등 다양하게 제작되어 널리 사용되었다. 청자나 백자로 만든 주병이 귀족이나 사대부의 미감에 맞춰 정갈하고 세련된 데 비해, 이 옹기주병은 목이 짧고 배가 불러 소박한 서민의 일상을 닮은 모습이다. 진솔하면서도 투박한 형태에서 장인 이내원의 마음도 엿볼 수 있다.

질시루, 이내원, 52X43X29cm

질시루(Steamer)
질그릇은 잿물을 씌우지 않고 진흙으로만 구은 그릇으로 표면에 윤기가 반드르르 돌지 않고 질박한 것이 특징이다. 이 시루 또한 는 떡이나 쌀 등을 찌는 데 쓰고자 질그릇으로 만들었는데, 자배기 모양의 바닥에 구멍이 여러 개 숭숭 뚫려 있다. 주로 토기나 옹기로 만드는 이유는 수증기에 들어있는 습기를 받아도 그릇이 터지지 않기 때문이다. 시루는 솥 위에 올려야 하므로, 시루 안에 넣은 재료가 구멍을 통해 솥으로 빠지지 않도록 칡덩굴 등으로 시루밑을 깔아 사용한다. 질박한 형태와 간일한 선이 돋보인다.

 

 

작업도구 및 제작과정

옹기는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진흙으로 그릇을 만들어 가마에 넣어 굽는데, 잿물을 바르지 않은 질그릇이나 잿물을 입힌 오지그릇을 통틀어 가리킨다. 옹기의 제작과정은 1) 좋은 흙[질]을 얻기 위한 수비(水飛) 단계, 2) 물레에 올려 형태를 만드는 단계{成形], 3) 건조하는 단계, 4) 가마에 넣고 번조하는 단계로 진행된다. 각 과정마다 여러 가지 도구가 사용되는데, 특히 그릇의 형태를 만들 때 사용되는 도구가 다양하다.

 

물레 : 점토를 올려놓고 회전력을 이용해 옹기를 성형할 수 있도록 만든 도구이다. 물레는 위판과 아래판이 나무토막으로 연결되어 있다. 물레의 재질은 소나무이다. 구조는‘工’자 형태에 밑박, 심봉, 심대, 윗박으로 간단하게 구성되어 있다.

수레와 도개[조막] : 점토를 때려서 옹기의 형태를 만드는 도구이다. 수레와 도개는 한쌍으로 사용한다. 수레와 도개에는 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 무늬는 점토가 달라붙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수레의 경우 한 면에는 무늬가 있고, 다른 면에는 무늬가 없는데 이는 무늬가 있는 면으로 우선 점토를 쳐서 옹기의 형태를 만든 후에 무늬가 없는 면으로 쳐서 기벽에 새겨진 무늬 자국을 지우기 위한 것이다. 재질은 소나무로 만든다.

근개 : 옹기의 표면을 매끄럽게 다듬는 도구이다. 마찰에 강한 감나무나 오리나무로 만든다.

가새 : 옹기의 아가리와 바닥 부분에 있는 여분의 점토를 잘라낼 때 사용한다. ‘가새’는 가위를 뜻하는 전라도 방언이다.

물가죽 : 옹기의 아가리 형태를 만들 때 사용하는 도구이다. 물에 적신 물가죽을 손에 쥐고 있는 상태에서 아가리 부분을 잡고 물레를 회전시켜 형태를 만든다.

 

 

 

약력

1919. 8
출생
1990
롯데월드 민속박물관 옹기특별전
1990
대전엑스포 전통공예관 시연
1990. 5
중요무형문화재 제96호 옹기장 기능보유자 인정
1991~2000
중요무형문화재보유자작품전 출품
1991~2000
중요무형문화재보유자작품전 출품
1994
보성다향제 전통옹기 특별전
1998
보성다향제 전통공예전
2000. 8
별세

한국문화재보호재단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은 문화재보호법 제9조에 근거하여 우리 전통문화를 널리 보전, 선양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공공기관입니다.

 

공식블로그 : http://blog.naver.com/fpcp2010

 

사진 서헌강(문화재전문 사진작가)

1941. 12. 13. ~ | 보유자 인정: 2010년 2월 11일

 

 

질그릇 하나 부서지고 있다.
질그릇의 밑바닥에 잠긴 바다가
조용히 부서지고 있다.
스스로 부서져 흙이 되는
저 흔들리는 바다.
질그릇에 담긴 생선(生鮮)의 뼈,
질그릇에 담긴 폭풍(暴風),
질그릇에 담긴 공간(空間),
그 공간(空間) 하나 스스로 부서지고 있다.
              

- 오세영 시인의 <질그릇>

 

숨 쉬는 그릇, 옹기

 

옹기장(甕器匠)은 독과 항아리 등을 만드는 장인을 말한다. 옹기는 질그릇(진흙만으로 반죽해 구운 후 잿물을 입히지 않아 윤이 나지 않는 그릇)과 오지그릇(질그릇에 잿물을 입혀 구워 윤이 나고 단단한 그릇)을 총칭하는 말이었으나 근대 이후 질그릇의 사용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오지그릇을 지칭하는 말로 바뀌게 되었다. 옹기는 상고시대부터 제기, 식기, 솥 등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에서는 옹기 생산을 담당하는 와기전(瓦器典)이라는 기관을 두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서울과 지방에 100여 명의 옹기장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모든 나라마다 음식을 보관하는 그릇이나 용기가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그 사회와 문화를 담고 있으며 각각의 형태나 모양이 다르다. 우리나라의 옹기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모양을 갖고 있다. 이러한 까닭에 2006년도에는 옹기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선정한 100가지 민족 상징의 하나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옛날의 한국 여성들은 화장대와 장독대의 두 세계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하나는 외면의 얼굴이고 또 하나는 마음의 얼굴이다. 그리고 그녀들은 화장대 앞에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가꾸고 지켜갔듯이 장독대 앞에서는 가정의 맛과 그 화평을 가꾸고 지켜갔다. 장독대가 주부와 그 가정의 내면을 비쳐주는 화장대라는 비유가 조금도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는 것은 “장맛을 보면 그 집안을 알 수 있다”는 한국 속담만 보아도 알 수 있다.

- 우리문화박물지(이어령 저 / 2007년, 디자인하우스 발행) 중에서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음식물의 저장, 발효용구로서 옹기가 필수적인 생활용기로 쓰여 왔다. 그러나 과학문명의 발달과 서구 문명이 들어오면서 식기재료의 발달과 주택공간의 현대화 등으로 인하여 옹기수요가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옹기의 특성

 

우리의 음식문화와 깊이 연관되어 있는 옹기의 특성으로, 저장성·통기성·보온성·방부성·자연환원성 등을 들 수 있다. 우리는 옹기 하면 장독·김칫독을 떠올리게 되고, 옹기에 담긴 음식물이 신선도나 맛에서 다른 그릇보다 월등함을 안다. 그 이유는 미생물의 활동을 조절해서 발효를 돕고 음식이 오래 보존되도록 하기 때문인데, 이는 즉 옹기가 숨을 쉬기 때문이다. 옹기는 고운 흙으로 만든 청자나 백자와는 달리 작은 알갱이가 섞여 있는 질(점토)로 만들어지는데, 가마에서 소성될 때 질이 녹으면서 미세한 구멍이 형성된다. 이 미세한 기공으로 공기·미생물·효모 등이 통과할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온도·습도 등도 흡수 조절할 수 있어서 발효식품을 썩지 않게 오랫동안 숙성 저장하는 데 가장 큰 장점을 지니고 있다. 한편, 옹기는 단열에도 뛰어나 여름철의 직사광선이나 겨울철의 한랭한 바깥 온도를 조절해 준다. 그리고 깨어진 옹기를 땅에 버려 두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 파편으로 남지 않고 흙으로 다시 돌아갔다가 옹기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데, 이것이 옹기의 자연환원적 특성이다.

 

옹기의 종류

 

옹기의 이름은 그 역사만큼이나 용도에 따라 종류도 다양하고 지역마다 특징있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살림 그릇으로 사용되는 옹기의 종류를 간단히 살펴보면, 운두가 높고 중배가 부르며 키가 큰 ‘독’, 위아래가 좁고 배가 부른 ‘항아리’,  독보다 조금 작고 배가 부른 ‘중두리’, 중두리보다 배가 부르고 키가 작은 ‘바탱이’ 등이 있다. 그리고 굽 없는 접시 모양의 넓은 그릇으로 독의 뚜껑으로도 쓰이는 ‘소래기’, 둥글넓적하고 아가리가 쫙 벌어진 ‘자배기’, 자배기보다 조금 크고 속이 깊은 ‘버치’, 물을 길어 와 부어 놓고 쓰는 ‘두멍’, 몸이 둥글고 아가리가 넓으며 양 옆에 손잡이가 달려 있는 ‘동이’, 아주 작은 자배기인 ‘옹자배기(옹박지, 옹배기)’, 아래는 좁고 위는 확 벌어진 ‘푼주’, 위가 좀 벌쭉하고 밑에 높직한 굽이 달려 있으며 양쪽에 손잡이가 달려 있는 ‘소라(식소라)’ 등은 항아리보다 낮고 넓은 형태의 옹기들이다.

 

 또한, 귀가 달린 그릇인 ‘귀때동이’, 동이보다 배가 부른 ‘동방구리’, 자그마한 항아리로 배가 부르고 목이 짧은 ‘단지’, 동이의 밑쪽을 마주 붙이고 꼭지를 달아 소주를 내리게 만든 ‘소줏고리’, 간장·기름 등을 병에 옮겨 부을 때 쓰는 ‘귀때’, 아주 작은 단지를 두 개에서 다섯 개 정도를 붙여 손잡이를 붙인 ‘양념단지’ 등도 있다. 이 외에도 장군·시루·촛병·확·확독·굴뚝·떡살 등 생활에 필요했던 모든 것들이 옹기로 만들어져 사용되었다. 그리고 알방구리·알항아리·알백이·방구리·썰단지·청단지·중단지·방퉁이·동우방퉁이·꼬맥이·맛탱이·전달이·물버지기·멍챙이·삼중단지·소락지·불백이 등 다소 촌스럽지만 구수하고 익살스러운 옹기의 이름이 지역에 따라 불리고 있다.

 

반백년 전통의 숨결을 빚어온 김일만 선생

 

중요무형문화재 제96호 옹기장 기능보유자인 김일만 선생의 옹기 제작은 5대조 할아버지 때부터 이어온 가업(家業)이라고 한다. 1941년 12월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양복리에서 부친 김운용 선생과 모신 서갑순 여사 사이에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옹기를 건조하거나 뒷일을 돕는 건아꾼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부친을 따라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자랐는데 10살 때 강화도에서 한국전쟁을 맞이했다. 북쪽과 가까웠던 강화도는 일찍 점령당한 상황이었는데 부친의 기지로 강화도를 무사히 빠져 나와 백부가 있는 안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장호원으로 다시 거처를 옮겨간 김일만 선생은 본격적으로 옹기 일을 배우기 시작한다. 15살 나이에 수비꾼((점토를 물에 풀어 이물질을 걸러내는 일을 함), 16살에 생질꾼(밖에 있는 흙에 물을 뿌린 후 작업장에 들이는 일을 함), 17살에는 건아꾼(옹기를 건조하거나 유약을 입히는 등의 일을 함)으로 일했다. 18살이 되어서야 경기도 여주에 와서 비로소 물레질을 본격적으로 배워서 대장(옹기를 만들거나 굽는 일을 함)으로 인정받았다. 대장의 일을 배우는 동안 옹기점 주인이 요구하는 온갖 허드렛일을 다 해주며 품삯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이렇듯 공밥을 먹으며 물레질을 배우는 것은 이 당시 일반적인 옹기점의 관행이었다.

 

21살 되던 해 부모님이 계시는 장호원으로 다시 옮기고 22살 되던 해 부인 신종애 여사를 만나 혼인하고 이듬해 큰아들을 낳았다. 25살 되던 해에는 경기도 용인에 있는 옹기점에 가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는 건아꾼이 아닌 대장으로서 본인의 몫을 제대로 받기 시작했다. 이후 37살에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에 자신의 옹기점을 처음 설립했는데 기존에 운영되고 있던 옹기점을 매입한 것이 아닌 새롭게 옹기점을 설립한 것이어서 가마를 새로 박는 등 모든 것을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야 했다. 옹기의 품질은 결국 가마에서 굽혀 나오는 상태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처음 박은 통가마의 불을 잡지 못해 옹기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첫 해 실패를 하며 가마를 손보아 다음해부터는 소성 성공률을 높였다. 그런데 가마에서 불을 땔 때 발생하는 나뭇재가 주변 나무에 해를 끼친다고 인근 주민들이 문제를 제기하며 마찰이 일어났다.

 

결국 옹기점을 1980년 12월 여주군 금사면 궁리로 옮기고 대장 4명, 건아꾼 2명, 생질꾼 2멷을 고용하여 본격적으로 옹기점을 운영했다. 1983년에는 공장을 한 곳 더 확장하여 두 곳으로 공장을 나누어 운영하였다. 이때에는 대장이 10명, 건아꾼이 6명이나 되었는데, 두 공장의 사람들이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 매일같이 다툼이 일어나 결국 위쪽에 있는 공장을 폐쇄하였다. 1980년대를 지나면서 옹기점의 상황이 악화되었다. 직원을 따로 쓰면서 옹기점을 운영할 상황이 못되어 결국 가족들로만 옹기점을 운영했다.

 

그러나 경제적인 어려움은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1990년대 초 어느 잡지에 선생의 옹기점이 소개되고 이를 계기로 방송에 출연하는 등 서서히 대중에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옹기점 명칭이 원래 ‘금사토기’였으나 방송작가가 김일만 선생과 네명의 아들이 함께 하니 ‘오부자 옹기’가 어떻겠냐는 의견을 내놓아 이후부터 ‘오부자 옹기’로 알려지게 되었다. 2001년에는 화재로 인해 작업장이 소실되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2002년 10월에 선생이 사용하는 질가마 1개, 통가마 2개가 경기도 민속자료 11호로 지정되었다.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주변 건물을 자유롭게 변경하는 것에 제약이 생겼다. 이 때문에 화재 후 작업장 건립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가마가 문화재로 지정된 바로 그해 11월 경기도 무형문화재 옹기장으로 인정되기도 하였다. 이후 2010년에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96호 옹기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작품

소주독_ 11×44cm / 주병 _ 9×30cm
옹기토를 사용하여 발물레로 성형한 후 잿물을 입혀 옹기가마에서 7일간 소성하였다. 소주독은 직선적인 형태로 짧은 목에 손잡이가 부착되어 있다. 주병은 큰 몸통에 긴 목을 가지고 있다. 두 작품 모두 술을 저장하고 보관하며 운반하는 등 술과 관련된 작품이다.

질그릇 항아리 _ 30×50cm
질그릇은 황토로 성형한 후 잿물을 입히지 않고 구워 윤기가 나지 않는 그릇을 말한다. 이 작품은 주로 쌀과 잡곡 등의 곡물을 보관하던 항아리로 중부지방에서 많이 보이는 형태다. 간결한 형태와 기물의 어깨부분에 그은 선문(線紋)이 고요하면서 중후한 느낌을 준다.

 

질독_35x37cm

질독_37x52.5cm

 

제작과정

 

옹기점의 시설로는 수비장(질 좋은 흙을 얻기 위한 시설), 움(작업장), 물레(그릇 제작용 받침틀), 송침(건조시설), 찬간(저장시설), 가마(그릇 굽는 시설) 등이 필요하며 가마의 형태는 경사진 곳에 길게 비스듬히 축조한 등요(登窯)가 일반적이다.

 

옹기제작의 시작은 재료인 점토를 채취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한다. 채취된 점토는 숙성을 시키고 반죽을 하고 옹기를 성형하기 위해서 흙을 가래떡 모양으로 만드는데 이를 흙가래 만들기라고 한다. 독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바닥을 만든다. 일반적인 단지나 독 등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옹기는 밑에서부터 위로 쌓아 올라가며 만든다. 이후 몸체를 만드는데 타림질(흙가래를 이용해 맨손으로 기벽을 쌓아 올리는 방법), 수레질(타림질 후에 수레와 도개로 기벽을 쳐서 형체와 두께를 조절하는 과정), 근개질(수레질 후에 마지막으로 기벽을 매끄럽게 다듬는 과정)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타림질, 수레질, 근개질을 반복해 옹기의 몸체를 완성하면 전을 잡는데 전이란 옹기 아가리 부분의 테두리를 뜻한다. 전을 잡아줌으로써 소성 과정에서 아가리가 뒤틀리지 않도록 견고하게 해준다. 이후 무늬를 넣고 옹기 형태가 완성되면 물레에서 떼어내기 위해 밑가새로 바닥 둘레를 깎는데 이를 ‘밑 가신다’고 한다.

 

옹기 성형이 끝나면 건조를 위해 물레에서 옹기를 들어내고 건조와 시유를 한다. 시유는 유약을 입히는 것으로 옹기장들은 ‘잿물 칠한다’ 혹은 ‘잿물 입힌다’라고 한다. 건조는 시유 전 초벌 건조와 시유 후 두벌 건조로 나누어진다. 이후 가마재임을 하게 되는데 이는 소성을 위해 옹기를 가마에 쌓는 것을 뜻한다. 이후 옹기 소성작업이 진행되는데 옹기 소성은 화목을 준비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피움불(보통 3~4일 정도 때지만 옹기, 가마, 기후의 상태 등에 따라 기간이 달라진다.)에서 온도를 높여 가면 중불로 들어서고 이때부터 화목으로 참나무가 아닌 소나무를 사용하게 된다. 중불을 계속 키워서 하루 정도 지나면 큰불로 들어선다. 큰불은 옹기에 칠한 잿물을 녹일 수 있도록 1000℃ 이상 화도를 높이는 단계이다. 큰불을 계속 키워서 가마 안의 온도를 1200℃ 가까이 높여 나간다. 가마를 식히고 난 후 옹기를 꺼내기 위해 화문을 허문다. 통가마에서 전통 방식으로 소성했을 때 제대로 굽힌 것이 50%이상만 되면 성공한 것이라고 한다. 화목으로 소성하면 동일한 가마라고 하더라도 외부 환경과 불을 다루는 옹기장의 능력, 화목의 상태 등 변수가 많아 일률적인 결과물을 장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1) 바닥만들기_점토을 바닥에 내리치며 원형으로 만든다

2) 바닥만들기_방망이질

 

3) 청타림 붙이기

4) 수레질(타림질 후에 수레와 도개로 기벽을 쳐서 형체와두께를 조절하는 과정)

5) 전(옹기 아가리 부분의 테두리) 잡기

6) 질가마에 넣기 위해 쌓아둔 질그릇

 

7) 옹기 소성

8) 질가마 소성

9) 가마 벽쪽에 창솔넣기

10) 소성된 옹기

약력
1941년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출생
1996년
기능전승자 96-8호 옹기장
2000년
경기으뜸이 옹기장
2002년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37호 옹기장 인정
2002년
대한민국산업포장
2004년
경기도 문화상 수상
201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96호 옹기장 기능보유자 인정

 

이치헌/한국문화재보호재단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은 문화재보호법 제9조에 근거하여 우리 전통문화를 널리 보전, 선양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공공기관입니다.

 

공식블로그 : http://blog.naver.com/fpcp2010

 

사진 서헌강(문화재전문 사진작가)

1942. 4. 15. ~ | 보유자 인정: 2010년 2월 11일

 

 

버려지고 잊혀진 자의 가슴은 무척 아팠습니다. 항아리가 된 내가 그 무엇을 위해 소중하게 쓰여지는 존재가 될 줄 알았으나, 나는 버려진 항아리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소나기가 지나가면 빗물이 고였습니다. 빗물에 구름이 잠깐 머물다가 지나갔습니다. 가끔 가랑잎이 찾아와 맴돌 때도 있었습니다. 밤에는 이따금 별빛들이 찾아와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만일 그들마저 찾아와 주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그대로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만을 위해 존재하고 있기에는 나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고 안타까웠습니다. 나는 그 누군가를 위해 사용되는 가장 소중한 그 무엇이 되고 싶었습니다.

- 항아리 [정호승(시인) 저, 열림원, 1999] 중에서

 

 

우리네 삶과 신앙이 담긴 옹기

옹기는 질그릇(진흙만으로 반죽해 구운 후 잿물을 입히지 않아 윤이 나지 않는 그릇)과 오지그릇(질그릇에 잿물을 입혀 구워 윤이 나고 단단한 그릇)을 총칭하는 말이었으나 근대 이후 질그릇의 사용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오지그릇을 지칭하는 말로 바뀌게 되었다. 한자로는 ‘甕’ 또는 ‘瓮’이라고 쓰고 영문으로는 ‘Onggi’로 표기한다. ‘옹(瓮)’이라는 단어가 문헌에 처음으로 보이는 것은 [삼국유사] ‘기이편’ 혜공왕조에 “천구성이 동루 남쪽에 떨어졌는데, 그 머리가 독처럼 생겼고...”라는 내용으로 그릇으로서의 옹기를 언급한 것이 아닌 하늘에서 떨어진 유성의 크기를 항아리에 비유한 언급이 있다. 옹기는 기형에 따라 옹(甕)·항(缸)·호(壺)·앙(㼜)·병(甁) 등으로 분류된다. ‘옹’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대옹(大甕)’ 또는 ‘큰독’이라 하고, ‘딜리골독’이라고도 부른다.

 

항아리는 ‘옹’보다는 작은 크기이며, 최세진이 지은 [훈몽자회]에 따르면 “키가 크면 ‘병’이고 목이 낮으면 ‘호’라 부른다 하였다. ‘앙’은 동이로, ‘분(盆)’이라고도 부르며 ‘부(缶)’와도 같은 의미이다. 큰 형태의 동이로 항아리보다 키가 작고 퉁퉁한 두멍이 있는데, 이는 지방에 따라 ‘드므’라 부르기도 한다. 북부지방의 두멍은 입이 점차 좁아지는 형태이고 남부지방의 것은 비교적 입이 넓다. 옹기의 이름은 그 역사만큼이나 용도에 따라 종류도 다양하고 지역마다 특징 있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밥을 담아 먹는 하얀 막사발과 함께 질그릇에 흑갈유의 잿물을 입힌, 생활용기로서의 옹기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본래 옹기는 그 쓰임새를 정해 놓고 만들었다기보다는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쓰였다. 청자나 백자는 장식적인 그릇인 반면 옹기는 실용적인 그릇이었다. 주거 공간의 배치에 따라 옹기는 부엌·곳간·장독대 등에 놓이는데, 대개 쓰임새가 그 놓여진 공간의 용도와 일치하게 된다. 그 쓰임새에 따라 대개 보관용, 운반용, 제조용, 생활용, 민간신앙용 등으로 나눠 볼 수 있다. 보관용(저장용) 옹기는 발효식품을 저장해 두는 식생활 용기로, 농경사회에서 곡식이나 씨앗을 보관하는 용기로 적합했다. 간장, 된장, 고추장 등의 장류를 비롯하여 여러 종류의 김치를 저장하는데 필요한 항아리와 쌀독, 물독, 씨앗단지 등이 있으며, 양념단지, 간장병, 술병, 수저통, 주전자, 푼주 등이 있다. 운반용 옹기는 집안에서 밖으로, 또는 집 밖에서 안으로 무언가를 운반할 때에 필요한 옹기였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 와 나르던 동이나 술을 담아 운반했던 술병, 물이나 술, 분뇨 등을 담아 운반했던 물장군, 술장군, 오줌장군, 똥장군 등이 있다. 물이 귀한 제주도에서는 물을 길어 운반했던 허벅이 있다.

 

제조용 옹기는 주로 음식을 만드는데 쓰였으나 간혹 의료용으로 사용된 것도 있다. 떡을 찔 때 사용되는 떡시루, 소주를 내릴 때 쓰는 소줏고리, 콩나물을 길렀던 콩나물시루, 식초를 만들어 담는 식초병, 마늘이나 고추를 갈던 확과 확독 등이 있으며 밥이나 국을 끓이던 옹기솥과 뚝배기, 새우나 멸치 등 어패류의 살이나 내장을 담아 발효시키는 젓갈독 등이 있다. 의료용으로는 한약을 달이던 약탕기, 부황을 뜰 때 사용하던 부황단지가 있으며, 뜸돌, 약연 등이 있다. 일상 생활용 옹기로는 불을 밝히는 등잔과 호롱, 방안에서 사용했던 연적, 필세, 필통, 재떨이, 화로, 요강, 다리미받침, 집 처마 밑에 세워진 굴뚝의 연통과 연가가 있다. 민간신앙용으로는 집안을 지키는 가신(家神)을 모시는데 사용되기도 했다. 성주단지는 집안의 가신으로 집을 지켜 주는 성주를 모시며, 조상단지는 종가집에서 조상신을 모셔 놓기 위해 사용했던 단지이다. 업단지는 재산운을 관장하는 업을 모시던 단지로 쌀이나 뱀·두꺼비 등을 신으로 믿었다. 이 밖에 풍년을 기원하며 농업신을 모신 용(龍)단지나 사람의 수명을 관장하는 칠성신(七星神)을 위해 장독대에 정화수를 올려 놓고 식구들의 건강을 기원하던 칠성단지 등도 있다.

 

 

옹기의 문양

옹기에 나타난 문양들은 작품을 만드는 과정이나 재료의 특성을 살린 시유방법과 다양한 점토를 이용한 옹기만의 미를 갖고 있다. 이는 어떤 형식이나 사고에 의해 그려진 그림이 아닌 단순한 손놀림을 이용해서 생긴 문양인데, 이러한 작업을 흔히 ‘환을 친다’라고 말한다.

 

손가락 그림은 기물을 만들고 잿물을 입힌 후 잿물이 마르기 전에 손가락을 이용해서 그림을 그려 넣는 방법으로 표현된 그림을 말한다. 옹기에 그려지는 가장 대표적이고 특색 있는 방법으로 꽃과 동물, 산 등 자연을 소재로 한 것들이 많다. 어떤 물체의 형태를 그대로 본떠 그린 그림과는 달리 옹기 장인이 손가락이 가는 대로 그리는 문양들(대나무잎문, 활문, 산문, 물결문, 용수철문 등)과 어떤 특정 물체의 형태를 본떠 그린 그림들(풀꽃문, 구름문, 동물문, 글자문, 도형문 등)로 구분한다. 이외에 항아리에는 띠를 이루면서 몸체를 한 바퀴 둘러 표현된 문양들이 많이 나타난다. 이러한 띠 문양들은 크게 근개띠, 목질띠, 누름띠, 양손띠, 꽃잎띠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띠 문양은 항아리의 어깨부분에 많이 나타나며 잿물을 바르기 이전, 즉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작업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근개띠나 누름띠, 양손띠는 음각 또는 양각으로 표현되며, 목질띠나 꽃잎띠는 항아리 기벽에 덧대어 붙여지는 방식으로 표현된다. 문양은 허허로움을 채워주는 미적 기능이 가장 크지만 옹기에 있어서 다른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옹기는 가마에 포개어 쌓기 때문에 같은 모양의 옹기라도 아래쪽에 놓는 것은 좀더 두껍고 튼튼하게 만들며, 위쪽에 놓는 것은 얇게 만든다. 이 때문에 문양을 넣어서 위아래에 놓일 옹기를 구분하기도 한다. 조선 후기에는 천주교를 믿는 옹기장들이 신자들만이 알 수 있는 표시를 남몰래 옹기에 새겨 넣어 자신의 믿음을 표현하거나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표식으로 삼기도 했다.

 

 

봉황마을 옹기의 명맥을 이어온 정윤석 선생

옹기장 정윤석 선생은 1942년 4월 15일 부친 정인옥 선생과 모친 이화엽 여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옹기를 만들지는 못했으나 옹기를 판매하던 상인이었다. 집안 사정으로 초등학교 4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쉬었다가 16세 되어서야 졸업할 수 있었다. 어려운 형편에 중학교 진학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학업의 길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선생은 스스로 돈을 벌어서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홀로 서울에 올라가 여인숙에서 2달간 일을 하다 장래성이 없다고 생각해 다시 강진군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선생의 고향이자 친가와 외가 모두 거주하였던 강진군 칠량면 봉황마을은 옹기로 유명한 마을이었다. 고향에 돌아온 후 다른 일에 비해서 많은 품삯을 받는 옹기장을 보고 옹기 제작기술을 익히기로 결심하게 된다. 옹기점에서 일하고 있던 외숙부 이동근 선생을 찾아가 흙을 판 형태로 만드는 기초부터 익히기 시작하였다. 전라도는 쳇바퀴타림이라는 다른 지역과 확연히 다른 방법으로 옹기를 만든다. 다른 지역은 옹기를 성형할 때 흙을 가래떡처럼 만들어서 사용한다. 그러나 전라도는 흙을 넓게 판처럼 펴서 질판을 이용하여 옹기를 성형한다. 다른 지역은 흙가래를 건아꾼이 만들지만 전라도는 대장이 직접 질판을 제작했다. 이 때문에 전라도에서 대장이 되려면 질판을 만드는 방법부터 익혀야 했다. 16살에 외숙부에게 옹기 제작을 배우기 시작했던 선생도 초기에는 질판을 제작하며 흙이 손에 익도록 만들었다. 외숙부 밑에서 옹기제작에 관하여 하나씩 배워나간 선생은 봉황마을에 있는 옹기점에서 일을 하게 된다.

 

1963년 결혼을 하고 그해 음력 6월에 군대에 입대하였는데 휴가 때마다 옹기점에서 일을 하고 받은 품삯은 집안살림에 보태었다. 1970년대 초 봉황마을보다 품삯이 높은 광주 삼소동에 있는 옹기점에서 3~4개월 일을 하다가 다시 봉황마을로 내려가 옹기를 만드는 것과 더불어 바지락 양식을 하기 시작하였다. 봉황마을에서는 배를 소유한 선주가 옹기점에서 옹기를 구입해 판매하였는데 그에 따라 봉황마을의 옹기장은 자신이 만든 옹기의 수에 따라 품삯을 지불 받았다. 물가는 지속적으로 상승한 반면에 옹기의 가격은 크게 변화가 없어 옹기장의 품삯은 상대적으로 낮아져 갔다.

 

생계유지에 어려움을 느낀 선생은 직접 옹기를 판매하기로 결심하고 장흥군 해진면에 있는 한 마을에 옹기를 쌓아두고 부인과 함께 인근에 있는 마을에 직접 옹기를 팔았다. 36세 되던 무렵 직접 옹기점을 운영하게 되었는데 혼자 옹기를 만들어 판매까지 하려니 일의 능률이 오르지 않아 다른 옹기장(박영곤 선생) 한 명과 함께 옹기를 만들고 판매도 같이 하게 되었다. 1970년대부터 점차적으로 옹기의 소비가 감소되어 봉황마을의 옹기점도 하나둘씩 문을 닫게 되었다. 1980년대 말에는 20곳이 넘던 옹기점이 단 2곳 밖에 남지 않았다. 그중 한 곳을 운영하던 옹기점 주인이 1989년 봄에 작고하면서 정윤석 선생이 유일하게 봉황마을에서 옹기점을 운영하는 옹기장이 되었다. 어려워진 환경으로 선생은 옹기장의 길을 자신의 대에서 끝내려고 하였으나 막내아들(정영균氏)이 군대에서 제대한 후 옹기장의 길을 걷겠다고 나섰다. 처음에 만류하였으나 봉황마을의 옹기점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아들의 뜻에 결국 허락하게 되었다. 선생은 2004년 9월 20일 전남 무형문화재 옹기장으로 인정되고 2010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96호 옹기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작품

방퉁이&앵병 [45x26cm, 19x61cm]
방퉁이 : 처진 어깨에 배가 부르며 배지름과 높이가 비슷하고 밑지름이 넓어서 안정감을 풍긴다.
앵병 : 병과 항아리의 중간 형태로 액체의 운반 혹은 저장에 쓰이는 용기이다.

 

 

 

항아리 [26x24x39cm]
옹기는 황토로 성형한 후 잿물을 입혀 구운 것으로 윤이 나고 단단한 그릇을 말한다. 조미료와 주식, 부식물의 저장용구나 주류 발효 도구, 음료수 저장 용구 등으로 사용한다.

 

댕구항아리_42x43cm

쌀독항아리_35x45cm

 

 

제작과정

1) 점토 가공
점토는 선생이 살고 있는 마을이 속한 칠량면에서 채취한다. 점토의 상태는 손으로 만져서 점력과 모래 성분이 혼합된 정도를 보고 판단한다. 옹기장은 옹기를 만들기 좋도록 적당히 차지면서도 불에 강한 점토를 사용한다. 반죽하고 가공하기 이전의 점토를 생흙이라고 부르는데 생흙을 반죽하려면 물을 부어서 적당히 차지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것을 ‘질물 맞춘다’고 한다. 이후 점토를 뚝메로 쳐서 다져주는 뚝메질을 한다. 뚝메질로 다져진 점토더미는 깨끼질을 한다. 점토를 깨끼로 깎아서 돌과 같은 이물질을 골라내는 작업이다. 이후 옆메질과 메통질을 하여 옹기 성형에 쓸 타래미를 만든다. 다른 지역에서는 점토를 가래떡 형태로 만든 흙가래를 이용해 옹기 성형을 하는데 전라도에서는 점토를 판처럼 만든 ‘타래미’ 혹은 ‘질판’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옹기 성형을 한다.
2) 옹기 성형
옹기의 바닥을 먼저 만든 후 몸체를 만드는데 점토를 넓은 판형으로 만든 타래미로 몸체를 만든다. 타래미를 올려서 둥글게 붙인 모습이 마치 쳇바퀴처럼 생겼다고 해서 이러한 성형기법을 ‘쳇바퀴타림’이라고 한다. 옹기의 몸체는 타림질, 수레질, 근개질의 세 가지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만들어진다. 그리고 마지막에 아가리 부위인 전을 잡고 무늬를 넣음으로써 옹기가 완성된다. 몸체 만들기가 끝나면 무늬를 넣는다. 무른 점토를 이용해 옹기에 양각으로 넣는 띠를 목질띠라고 하는데 목질띠를 넣을 때는 우선 바깥훑테 모서리를 이용해 음각으로 엷게 띠 넣을 자리를 표시한다. 무른 목질을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우고 음각으로 표시한 띠 자리에 댄다. 그리고 물레를 회전시키면서 목질띠를 넣는다. 옹기가 완성되면 물레에서 떼어내기 위해 밑가새로 바닥둘레를 깎는 밑 가시기를 한다. 전라도 옹기는 윗배가 많이 나온 전체적으로 배가 부른 형태이다.
3) 건조 및 시유
성형이 끝난 옹기는 물레에서 들어내 건조를 한다. 건조 과정은 시유 전 1차 건조와 시유 후 2차 건조로 나누어진다.
4) 가마재임
가마재임은 소성을 위해 옹기를 가마에 쌓는 것을 뜻한다. 통가마 측면에 있는 출입구인 대새기를 통해 옹기를 가마 안으로 운반한다. 가마재임이 끝나면 옹기를 운반하던 통로인 대새기를 흙벽돌로 막고, 그 사이에 점토를 발라서 열기기 새는 것을 막는다. 옹기장의 노력이 마지막으로 결실을 맺는 순간은 가마에서 옹기를 구워내는 때이다. 이 때문에 옹기가 잘 구워지게 해 달라고 제사상을 차려놓고 고사를 지낸다.
5) 옹기 소성
가마와 옹기 속에 포함된 습기를 제거하기 위하여 피움불은 급하지 않게 서서히 불을 지핀다. 피움불에서 온도를 높여 나가면 돋군불로 들어선다. 불을 땔 때는 중앙보다 가마 양쪽 벽에 더 많은 화목을 넣는다. 불이 양쪽 벽에서 안쪽으로 휘감아 돌며 옹기가 전체적으로 골고루 익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대새기에 흙칠을 한 번 더 해주는데 이것을 ‘맥질’이라고 한다. 돋군불을 계속 키우면 녹임불로 들어선다. 옹기에 칠한 잿물을 녹이기 위한 준비 단계로 화목을 지속적으로 투입하여 1000℃이상 화도를 높인다. 화도가 1200℃에 가까워지면 화목이 연소되어 불이 사그라지길 기다렸다가 4~5분 후에 가마 입구가 가득 찰 정도로 나무를 투입하기를 반복하는데 이것을 다룸불이라고 한다. 가마 입구와 가까운 옹기의 겉에 칠한 유약이 녹아서 윤기가 나면 창불을 뗄 시기가 된 것이다. 창불은 마지막 불로서 창구멍을 통해 옹기에 근접하게 소나무를 투입하여 땐다. 순간적인 고열을 이용하여 유약을 녹이며 옹기를 익히는 것이 창불의 목적이다.
6) 가마에서 옹기 꺼내기
가마를 식히고 난 후에 옹기를 꺼내기 위해서 막았던 대새기를 허문다. 공뚜껑을 사용해도 옹기에 칠한 잿물이 고열에 녹아서 붙는 현상이 조금씩 발생하기 때문에 창칼로 옹기를 떼어낸다. 그리고 대새기와 가마 입구를 통하여 옹기를 꺼낸다.

 

 

1_흙치기

2_몸체만들기_웃타래미 올리기

 

3_성형하기_수레질

4_성형하기_훑테질

5_무늬넣기_막띠 넣기

약력
1942년
출생
1955년
전국공예품 경진대회 특선
1996년
노동부 옹기 기능 전승자
2002년
노동부 장관 표창
2005년
워싱턴 D.C. 스미스소니언박물관 상설전시
201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96호 옹기장 기능보유자 인정

 

이치헌/한국문화재보호재단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은 문화재보호법 제9조에 근거하여 우리 전통문화를 널리 보전, 선양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공공기관입니다.

 

공식블로그 : http://blog.naver.com/fpcp2010

 

사진 서헌강(문화재전문 사진작가)

발행일  2012.0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