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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호]침선장(針線匠) | 중요 무형 문화제

문성식 2012. 3. 30. 0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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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중요무형문화재 89호
명 칭 침선장(針線匠)
분 류 공예기술
지정일 1988.08.01
소재지 서울전역



※ 본문설명

침선이란 바늘에 실을 꿰어 꿰맴을 말하는 것으로, 복식의 전반이라 할 수 있다. 복식이란 의복과 장식을 총칭하므로 그 범위는 바늘에 실을 꿰어 바느질로써 만들 수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이러한 침선기술과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을 침선장이라 한다.

사람이 바느질을 시작한 것은 역사 이전부터였다고 한다. 지금의 바늘과 흡사한 신라시대 금속제가 발견되었고, 삼국시대에 이미 상당한 수준의 침선이 고구려벽화나『삼국사기』를 통해 잘 나타나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로 이어지면서 더욱 발달하여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다.

침선에 필요한 용구로는 옷감, 바늘, 실, 실패, 골무, 가위, 자, 인두, 인두판, 다리미, 다리미판, 못바늘 등이다. 옷감으로는 주로 비단, 무명, 모시, 마 등이 쓰인다. 실은 무명실을 많이 사용하며, 실의 선택은 옷감의 재질, 색상, 두께 등에 따라 달라진다. 바느질 방법은 기초적인 감침질과 홈질, 박음질, 상침질, 휘갑치기, 사뜨기, 공그리기 등으로 옷의 부위에 따라 필요한 바느질법을 사용한다. 계절변화에 따라 여름에는 홑으로 솔기를 가늘게 바느질하고, 봄·가을에는 겹으로 바느질하며, 겨울에는 솜을 넣어 따뜻한 옷을 만든다.

예전에는 여자면 누구나 침선을 할 줄 알아야만 했기에 집안에서 바느질법을 익히고 솜씨를 전수받아서 침선법이 계속 이어져왔다. 궁중에서도 침방이 있어 기법이 전승된 때도 있었으나 이제는 전승자가 다 작고하고 일반적으로 가정에서 계승해왔는데 이제는 그것마저 불가능하게 되었다. 현재는 중요무형문화재 침선장 기능보유자인 정정완 씨가 우리의 고유한 침선기법을 전승하고 있다.

※ 보충설명

침선이란 바늘에 실을 꿰어 꿰맴을 말하는 것으로 복식 전반을 만드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옷을 마름질하여 꿰매는 바느질일 뿐만 아니라, 거기에 더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어울리는 무늬에 수를 놓는 것, 또는 옷에 더하여 장식하는 노리개 등을 만드는 것이다.

사람이 바느질을 한 것은 역사 이전부터였다고 생각되며 이러한 바느질로 증명이 된다. 그러나 이 바늘이 옷감을 꿰매기 위한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후의 유물로서 지금의 바늘과 비슷한 신라시대 금속제품이 발굴되었는데, 옷을 꿰매는 바늘이 틀림없을 것이다. 고구려벽화를 통하여 보면 삼국시대에는 높은 수준의 침선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문화의 발달과 더불어 침선도 발전하였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장식요소도 늘어나고 구성의 변화도 다양해졌다.

조선조에서는 계절에 따라서 옷감과 바느질 방법이 달라져서 오묘한 아름다움을 지녔다. 겨울에는 솜을 넣어 따뜻한 옷을 지었고 봄 가을이 되면 겹으로 하되 이른 봄 늦가을에는 다듬이질 한 옷감으로 바느질하고 늦은 봄 이른 가을에는 쟁친 옷감으로 바느질하였다. 여름이 되면 생올로 된 옷감에 홑으로 솔기를 가늘게 바느질하였다. 지금은 한복이 없어져가고 양장화되었지만 아직도 의례용으로는 우리 전통 의복을 고수하고 있어 다행한 일이다.

예전에는 여자면 누구나 침선을 할 줄 알아야만 했다. 따라서 여자들은 집안에서 바느질법을 익히고 솜씨를 전수받아 침선법은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 우리나라의 침선기법은 궁중에서는 침방이 있어 기법이 전승된 때도 있었으나 이제는 전승자가 다 작고하고 일반적으로는 가정에서 계승하여 온 것이었는데 이제는 그것마저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현재 침선장으로 정정완여사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고 후배 양성에 전념하고 있다.

1913. 8. 1~2007. 4. 27 | 보유자 인정: 1988년 8월 1일

 

 

 

“아깝다 바늘이여, 어여쁘다 바늘이여. 네 미묘한 품질과 재질을 가졌으니 물중(物中)의 영물(靈物)이요, 철중(鐵中)에 쟁쟁(錚錚)이라. 민첩하고 날래기는 백대(百代)의 협객이요, 굳세고 곧기는 만고의 충절이라. 능라와 비단에 난봉공작(鸞鳳孔雀)을 수 놓을 제. 그 민첩하고 신기함은 귀신이 돕는 듯하니, 어찌 인력이 비칠 바리오 (…) 누비며 호며 감치며 박으며 공그를 때에 겹실을 꾀었으니 봉미(鳳尾)를 두르는 듯 땀땀이 떠갈 적에 수미(首尾)가 상응하고 솔솔이 붙여내매 조화가 무궁하다”

조선 순조 때 유씨부인의 [조침문(弔針文)] 중에서

바느질, 인간의 역사와 함께해 온 오래된 기술

침선이란 원래 바늘과 실이라는 말로써 바늘에 실을 꿰어 바느질하는 일을 총칭한다. 바느질하는 방법으로는 그 기초가 되는 감침질하는 법, 홈질하는 법, 박음질하는 법, 상침 뜨는 법, 휘감치는 법, 사뜨는 법, 공그리는 법, 솔기하는 법 등이 있다. 옷에 따라 그 곳에 필요한 방법을 썼으며 계절에 따라 홑바느질, 겹바느질, 솜두는 바느질 등 이에 알맞은 바느질 법을 사용하여 왔다.

 

바느질은 인간이 옷을 입은 역사와 함께하여 매우 오래된 ‘기술’ 중 하나다. 우리 민족 고유의 복식은 자연 환경적 요인으로 지정학적 기후 풍토에 적합한 형식을 갖추면서, 또한 사회 환경적 요인으로 말미암아 그 시대 문명에 상응하는 것으로 발전해 내려왔다. 우리 민족의 기원은 북방 기마민족으로 중앙아시아 고원지대에서 동북쪽으로 이동하면서 만주, 한반도에 자리를 잡으며 수렵(狩獵)과 유목(遊牧)생활에서 농경생활로 정착하였다. 따라서 의복은 추위를 막고 수렵하기에 알맞아 했고, 농경에도 불편이 없어야 했다. 상체에는 저고리, 하체에는 바지, 머리에는 관모를 썼으며, 허리에는 띠를 매고, 발에는 화(靴) 또는 리(履)를 신어 포피(包皮)로서의 의복의 형태를 갖추고, 그 위에 두루마기를 더한 하대성(寒帶性) 복식이었다. 흔히, 이를 북방 호복(胡服)계통의 의복이라 지칭하고 있는데, 이것은 한반도의 온대성(溫帶性)에도 적합했다. 여기에 상대복식의 기본형의 하나가 된 여자 전용의 치마는 뒤에 중국 한족을 통한 남방계열의 복식에서 온 것이라 한다.

 

우리 한복은 비단, 주, 무명, 모시, 마, 생명주, 생모시 또는 사가 주류를 이뤘다. 여름에는 홑으로, 봄 가을에는 여름감을 겹으로 하였으며 겨울에는 비단을 사용하여 안팎 사이에 솜을 두어 보온을 높이기도 하였다. 실은 목실을 사용하였고 굵은 실은 삼합사, 보통실은 이합사였다. 고운 바느질은 당실이라 하여 그늘고 꼬임새가 단단한 것으로 하였다.

위당 정인보 선생의 맏딸로 태어나 사대부와 왕실의 침선기법 배워

우리나라 침선기법은 따로 사사(師事)한 계보가 있어 온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 궁중에는 침방이 있어 침선비에 의해 전승되었을 뿐 가정에서 대대로 전승되어 왔다. 현대에는 이렇게 바느질을 하는 장인을 침선장이라 부른다.

 

한편 근대기 이후 일상생활에서 한복보다 양복을 입으며 생활문화가 변화되면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옷을 짓는 기술은 사라질 위기에 처하였다. 이에 1988년 국가에서는 중요무형문화재 제89호 침선장을 지정하였고, 故 정정완 선생을 기능보유자로 인정하였다. 정 선생은 위당 정인보 선생과 성계숙 여사의 맏딸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잘 알다시피 우리나라 대표적인 선비집안으로 위엄한 가풍을 갖추고 있었다. 정 선생은 열 일곱 살에 광평대군 가문의 외아들 이규일과 혼인하게 된다. 이로써 사대부 가문과 함께 왕실 가문의 침선기법까지 함께 배울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급격한 의생활 문화의 변화로 인해 전통 바느질 기법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보유자로 인정된 이후 그녀는 열심히 바느질을 하여 전통기술을 널리 알리다가 명예보유자로 인정되었다가 2007년 타계하였다. 정 선생의 뒤를 이어 맏며느리인 구혜자 선생이 2007년 7월 침선장 보유자로 인정되어 대를 이어 침선 기능을 전수하고 있다.

주요작품

까치두루마기(남아), 정정완, 화장 71×55cm

까치두루마기(Gobangja Durumagi-overcoat)
오방위를 상징하는 다섯 가지 색깔의 천으로 만들되 어린이가 까치설날(섣달 그믐날로 설날 전날에 까치가 기쁜 소식을 전해준다고 하여 설날의 기쁨을 미리 누리게 하려는 데서 생겨났다)에 착용하는 오색 두루마기이다. 까치두루마기 특징은 소매를 청, 백, 홍, 자주색 등 오방색 천을 바느질하지 않고 배접(천을 여러 겹 포개어 풀로 붙임)하여 만드는데 있다. 전체적인 색감이 조화를 이루어 안정감이 있으면서도 한복이지만 발랄한 느낌을 준다.

사규삼, 정정완, 화장 110×70cm

사규삼(Sagyusam-Coat with Wide Sleeves)
사규삼은 옷자락이 네 폭으로 갈라진 옷이라는 데서 나온 명칭이다. 조선시대에 나이 어린 세자가 관례를 치르기 전에 입는 평상복이다. 소매가 넓고 깃이 곧으며 양 옆의 겨드랑이가 트이고, 깃과 도련, 소매 끝 둘레에 선을 두르며, 그곳에 뜻이 좋은 여러 글자와 복을 기원하는 박쥐문양 등을 금박으로 찍는다. 근래의 것은 돌쟁이 남자 아이의 두루마기 위에 입힌다.

 

심의, 정정완, 화장 206×160cm

심의(Simui - Man's Outfit)
관직에 나가 있다가 관직을 떠난 선비가 집에 거처하면서 한가롭게 입는 연거복(燕居服)이다. 평생 글을 읽는 선비들의 학과 같이 고고한 기품을 반영하여 학자의 기품처럼 흰색 옷감으로 만든다. 전체적인 형태는 두루마기와 같으나 소매를 넓게 하고 검은 천으로 깃과 소매부리, 가장자리를 테로 둘러 마감하는 게 특징이다. 선비 집안에서 나고 살았던 정정완 선생의 눈썰미를 엿볼 수 있다.

앵삼, 정정완, 화장 180×150cm

앵삼(Aengsam-Students' Formal Clothing)
조선시대 때 나이 어린 소년이 생원(生員), 진사(進士)에 합격하였을 때 입던 예복으로 앵무새의 빛깔을 닮았다고 하여 앵삼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붙였다. 앵삼을 입을 때는 어사화를 꽂은 복두를 머리에 쓰고 허리에는 띠를 두르며 가죽신을 신었다. 겉감은 연한 연두색 생주(生紬)이고, 안감은 노랑 명주를 받쳐서 은은한 꾀꼬리 색을 내는 것이 특징이다. 목깃과 소매끝, 앞섶 등 가장자리에는 검정색 생주로 선을 둘러 단정하면서도 정돈한 모습을 연출한 정 선생의 솜씨가 돋보인다.
작업도구- 바늘과 바늘꽂이

식구들의 옷을 지어 입히려 바느질(침선)을 했던 어머니들에게 바느질 도구는 평생을 함께 한 친구나 다름없다. 때문에 옛 사람들은 바늘, 자, 가위, 인두, 다리미, 실, 골무 일곱 가지를 여인들의 벗이라 여겨 규중칠우(閨中七友)라 부르기도 했다. 이러한 도구는 옷감을 마름질해서 꿰매어 일정한 형태를 완성시키는데 소용되는 재봉도구라 할 수 있다.

 

바늘(침, 針): 바느질 도구 중 으뜸이다. 옷을 지으려면 자로 치수를 재고 가위로 잘라 마르는데, 이것을 옷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바늘로 한 땀 한 땀 꿰매야 한다. 이렇게 일일이 꿰매는 일은 가장 더디고 공도 많이 드는 일이다.


인두: 옷감이나 옷을 다리는 도구. 바느질할 선이 풀어지지 않도록 꺾어 눌러 주거나, 옷깃이나 동정처럼 가늘고 좁은 곳을 다릴 때 유용하다.


다리미: 구겨진 옷감의 주름살을 펼 때 사용한다.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빨래의 양끝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면서 문질러야 한다.
골무: 바늘을 눌러 말기 위해 둘째손가락 끝에 끼우는 것으로, 손끝이 찔리는 것을 막기 위해 사용한다.

 

약력

1913년 8월
출생
1985년
일본 오사카 민속박물관 도포제작 전시
1986년
이화여대 의류직물학과 대학원 도포관련 지도
1995년
성균관대학 의류학과 대학원 복식 구성 강의
1997년
일본고베 fashion 박물관 초청 순방
1999년
정정완 전시회(서울중요무형문화재 전수회관)
2002년
쿄토 전통공예전시 “한국 전통문화의 향기전”
2007년 4월
노환으로 별세

한국문화재보호재단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은 문화재보호법 제9조에 근거하여 우리 전통문화를 널리 보전, 선양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공공기관입니다.

 

공식블로그 : http://blog.naver.com/fpcp2010

 

사진 서헌강(문화재전문 사진작가)

1942. 7. 30. ~ | 보유자 인정: 2007년 7월 9일 

 

 

풀어 해진 소매 끝을 깁는다.
흐트러진 마음도 / 함께 기우며
한 땀 한 땀 / 바늘 길을 운전한다.

 

창밖 / 눈은 소복소복 내리 쌓이고
세월의 뒤안길에 / 서성이며
그 옛날 / 내 어린 시절
설빔을 짓느라 / 색동명주 인두질 하시던 / 울 어머니 생각

 

눈물 한 방울 / 뚝 / 손등 위로 / 떨어진다.

 

- 강숙자 시인의 <바느질>

여인의 정성과 사랑, 소망이 깃든 바느질

침선이란 바느질로 의복과 장신구를 만드는 일로 이러한 침선기술을 가진 사람을 침선장(針線匠)이라고 한다. 오늘날의 바늘과 흡사한 금속제가 신라시대에 발견되었으며, 고구려 고분벽화와 「삼국사기」기록을 통해 침선이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예전에는 여자면 누구나 침선을 할 줄 알아야 했기에 집안에서 바느질법을 배웠으며 궁중에도 침방이 있어 그 기법이 전승되기도 했다. 침선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로 이어지면서 더욱 발달하여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다.

바느질의 역사

바느질은 인류의 생활과 함께 발전하여 왔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바느질 관련 유물은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발견된 바늘과 가락바퀴[紡錘車]이다. 또한, 2600년 이전의 유물로 추정되는 직물의 파편과 실이 꿰어진 바늘이 발굴되어 그 이전부터 바느질이 행해졌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예의를 숭상하는 우리 조상들은 의복을 정갈하게 갖추어 입는 것에서부터 예(禮)가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여인들에게 바느질은 부덕·용모·말·길쌈과 더불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목의 하나로 여겨졌다. 옷을 지을 때는 바늘 한땀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고 때를 가려서 옷마르기 좋은 날과 피해야 하는 날을 정해 두었고, 동짓날의 양기를 받으면 유익하다고 하여 동짓날 시어른의 버선을 지어 그 양기를 밟게 하기도 했다. 바느질 할 때에도 옷에 때가 묻거나 일하던 중간에 도구나 재료가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미리 준비해야 했다. 그래서 바느질 한 땀 한 땀에는 여인의 정성과 사랑, 소망이 깃들여 있었다. 대부분 가정에서 옷을 만드는 것은 여자들의 몫이었다. 그러나 왕실과 사대부를 비롯한 특수층의 경우에는 그들 스스로 의복 제작활동에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솜씨가 뛰어난 장인을 관장(官匠) 또는 사장(私匠)의 형태로 고용하여 조달하였다. 또한 서민층의 옷이라 하더라도 평상복이 아닌 관혼상제(冠婚喪祭) 등에 필요한 특수복은 솜씨 있는 사람에게 의존하였다.

 

조선시대 경공장(京工匠)에는 10명의 침선장이 공조(工曹)에 소속되어 있었고, 외공장(外工匠)에도 2개소에 64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옷을 만드는 일은 바느질 기술은 물론 여러 공정을 거쳐 완성되는 복잡한 작업이다. 실을 만드는 제사장(制絲匠), 실이나 천에 물을 들이는 청염장(靑染匠)·홍염장(紅染匠)·옷감을 짜는 직조장(織造匠)·능라장(綾羅匠), 천을 다듬고 손질하는 도련장(擣練匠), 옷감을 재단하는 재작장(裁作匠), 금박(金箔)이나 자수(刺繡) 등 무늬를 놓는 금박장(金箔匠)·자수장(刺繡匠) 등 여러 장인의 협업(協業)에 의해서 옷은 완성된다. 그러나 옷의 맵시나 품위, 효용성 등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장인은 바느질을 직접 담당하는 침선장(針線匠)이다.

 

바느질을 담당하였던 침선장들은 옷감을 장만할 때 춘하추동 어느 때 입을 옷인지, 옷 임자의 나이와 신분은 어떠한지, 일상 옷인지 나들이 옷인지, 현재의 유행은 어떠하며 옷 임자의 성품은 어떠한지, 어디에서 난 물건이 좋은지, 옷감은 얼마나 들며 물건에는 흠이 없는지, 빛깔이 변하는지, 줄지나 않는지, 안감은 무엇으로 할 것인지 등을 심사숙고 했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침선장은 혼자 힘으로 디자이너·재단사·패턴사 겸 재봉사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기에 야무진 솜씨와 천성적인 미의식과 색감 등이 갖추어져야만 침선장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1900년대 들어와 재봉틀의 등장으로 그때까지 수공(手工)으로 유지되어 온 바느질은 변화하여 마침내 기계를 이용한 대량생산체계로 넘어 가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바느질 담당자였던 여성들이 일에서 해방되어 사회로 진출하는 것을 촉진시켜 준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전통 침선 기법의 맥이 끊어지는 위기를 낳기도 했다.

우리 옷 바느질의 특징 _ 인간을 감싸주는 융통성 있는 문화

우리 옷은 남자의 경우 바지·저고리, 여자는 치마·저고리 위에 긴 덧옷인 포(袍)를 입고 관모를 쓰는 것이 기본형이다. 이러한 상하 분할형의 기본 양식으로 인해 바느질에서도 몇 가지의 특징이 나타난다.

 

첫째, 상하의를 따로 재단하여 바느질한다. 둘째, 모든 옷이 평면 구성으로 되어 있다. 입체인 몸에 평면의 의복을 착용함으로써 의복이 일반적으로 넓고 여유가 있으며, 또한 인체의 굴곡에 따라 선은 거의 다 주름의 형태로 드러나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우리 옷이 가지고 있는 융통성의 미학에 대해 이어령 교수는 <우리문화박물지>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한국 바지의 허리춤은 세계에서 가장 넓은 것으로 누가 입어도 되도록 융통성을 부여한 데 그 특징이 있다. 그러므로 몸이 불어나면 좀 덜 조이면 되고, 마르면 더 조여 입으면 된다. (중략) 옷은 사람이 입기 위해 있는 것이다. 양복은 사람이 벗어놓아도 입체적인 자기 형태를 갖고 있다. 그래서 옷걸이에 걸어놓아야만 한다. 그러나 한국의 옷은 입으면 인체와 마찬가지로 3차원의 형태를 하고 벗으면 2차원의 평면으로 돌아간다. 그러니까 한국 옷은 걸지 않고 개켜둔다. 한국의 바지저고리는 그리고 치마는 사람이 입었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으로 자기 형태라는 것을 따로 갖고 있지 않다. 치수가 잘못되면 사람이 옷에 맞추어야만 하는 주객전도의 양복문화 그것이 인간소외현상을 낳은 것이라면, 넉넉한 한국의 괴춤은 끝없이 인간을 감싸주는 융통성 있는 문화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우리문화박물지」(이어령 저) _ 바지, 치수 없는 옷 중

셋째, 정교하고 세밀한 손바느질이 발달하였다. 넷째, 저고리나 포의 진동선 및 겨드랑이 부분 등 심한 동작을 받는 곳은 어깨선이 직선이고 의복이 전체적으로 여유가 있더라도 삼각형의 조그마한 천을 대어 굴곡선을 처리하였다. 속바지의 바지 밑이나 옆터짐의 바느질법도 매우 정밀하여, 홑적삼에 부착하는 단추 고리나 매듭 단추는 헝겊을 말아서 끈으로 만들어 엮는 방법으로 튼튼하면서도 모양새가 좋도록 하였다. 다섯째, 우리 옷은 대체로 소매가 길어 손등을 거의 가릴 정도이다. 또한, 여자의 치마는 폭이 넓고 속에 받쳐 입는 속옷도 많아 전체적으로 넓고 풍성한 실루엣을 만들어 낸다. 여섯째, 선을 댄 의복의 경우 귀의 처리는 반드시 대각선 처리를 한다. 그것은 모서리를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고 양편에 고루 배치하고자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전통 복식 바느질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도련과 깃이었다. 두 곳의 바느질 솜씨에 따라 옷맵시가 좌우되었으므로 부녀자들은 이 부분에 특히 많은 정성를 기울였다.

몸의 곡선을 살려 내는 우리 옷 짓기

“한복은 옷 입은 사람이 움직여야 비로소 감춰져 있던 아름다운 선이 드러나게 됩니다. 한복은 치마을 입어야 입체성이 살아나고 움직일 때 몸의 곡선이 만들어지죠. 그래서 한복의 멋은 부드러운 선에 있는 겁니다.”

 

한복의 매력에 반해 40년 동안 한복을 짓고 있는 중요무형문화재 제89호 침선장 기능 보유자 구혜자 선생은 한복의 매력은 부드러운 선에서 완성된다고 강조한다. 치마는 저고리에서 시작해 아래로 일직선으로 흐르지만 동시에 입은 사람의 몸이 만들어내는 곡선으로 순간순간 살아난다는 것이다.

시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매운 바느질 솜씨

한복과의 인연은 1970년 결혼과 함께 시작됐다. 맏며느리로 시집온 구혜자 선생은 침선장 1대 기능보유자였던 시어머니(故 정정완 선생)를 모시고 살면서 단지 가족들을 위해 옷 몇 점을 지을까 하는 생각에 바늘을 잡았다. 처음 시집을 왔을 때 시댁에서는 달마다 제사를 지내고 설과 추석에 따로 차례를 지냈다. 아버지가 목사인 기독교 집안에서, 응접실에 소파가 놓여있고 서재가 따로 있는 서양식 집에서 자라난 선생이 맏며느리가 되어 시댁의 한옥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시어머니가 1988년 초대 침선장으로 인정된 후 후학을 키우는 문제로 고심하셨다. 남편이 권했지만 한참을 머뭇거렸다. 맏며느리로 신경 써야 할 집안일도 만만치 않은 데다 친정어머니도 아닌 시어머니한테 배운다고 생각하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몸이 약해 남들이 1년에 할 수 있는 걸 2년에 하자 생각하면서 시어머니께 배워보겠다고 말씀 드렸다. “바느질이 골치 아픈 일이다. 자식들에게는 이걸 시키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래도 하고 싶으면 해라”라고 말씀하시는 시어머니를 보며 기뻐하시는 건지 꺼리시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도 집안일을 소홀히 할까 내심 걱정하셨던 게 아닌가 싶다.

 

우리 옷의 멋과 아름다움에 빠져 40년 세월을 한복과 더불어 온 구혜자 선생


좋아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한복을 만드는 일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가위질부터 서툴렀고 실수를 할 때가 많았다. 옷감이 귀한 시절이라서 가위질을 잘못해 혼줄이 난 적도 여러 번이었다. 여간 해서는 장인인 시어머니 눈에 들기 어려웠다. 친정어머니도 아닌 시어머니한테서 배우려니 힘들고 어려운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꾸중 듣는 일이 다반사였기에 이를 악물고 연습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일로는 단 한가지도 꾸지람을 들은 적이 없었지만 유일하게 꾸중 들으며 배운 게 바로 바느질 일이었다.

 

학생들이 오지 않는 휴일에 어머님을 찾아 뵈면 내내 학생들을 가르치느라 피곤한 어머니가 누워 계셨다. 그 어머니께 치마며 저고리 만드는 법, 혼례복과 수의 만드는 법 등을 여쭤봤고 어머님은 꼼꼼하게 가르쳐 주셨다. 어머님 말씀을 적은 메모를 모아 만든 책이 [한복만들기-구혜자의 침선노트](한국문화재보호재단 발행)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머님 댁을 찾아 바느질을 배우던 어느 날, 어머님이 향교에서 도포 열 벌을 주문 받으셨다면서 만들어 보라고 하셨다. 밤새워 만든 도포를 보고는 “웬만큼 흉내는 냈구나.” 라는 이야기를 들은 게 최고의 칭찬이었다고 회상한다. 바느질을 가르쳐준 시어머니가 세상을 등졌을 때 제일 마음이 아팠다고 한다. 삶의 스승으로서 평생 의지하고 지냈던 시어머니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세상이 무너지는 듯 캄캄했다고 한다. 2007년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될 즈음 “ 구 선생이 알아서 다 하고 있으니 나는 괜찮소. 우리 큰 며느리가 최고다.” 라고 말씀하셨던 어머님의 말씀이 두고두고 잊혀 지지 않는다고 한다.

 

스승이자 침선장 대선배이기도 한 시어머니가 전통복식을 그대로 구현하고 계승했다면, 구혜자 선생은 이를 체계화하고 계량화하는 역할을 해왔다. 한복 제작뿐 아니라 조선시대 복식사 연구와 재현 작업도 꾸준히 이어 왔다. 실, 바늘과 평생을 씨름 하다 보니 직업병도 생겼다. 눈과 어깨의 피로다. 옛날에는 바닥에 앉아 장시간 동안 작업했지만 요즘은 책상과 의자에 앉아서 하니까 그나마 환경이 나아진 편이라고 한다.

이건 그쪽이 생각하는 그런 옷이 아니야 우리나라 장인이 한땀~한땀 손바늘질한

“손바느질로 하면 사람의 정성과 노력이 담겼다는 가치도 있지만 재봉질로 만들면 옷 선이 다소 거칠고 딱딱해지는 반면, 손바느질로 만든 건 옷 태가 아주 부드럽게 나와요. 다만, 바느질을 아주 잘 해야만 해요.” 전통 바느질이 쉽지 않음은 제자들을 가르칠 때 더 확연히 드러난다. 올해 일흔인 나이에도 후학들에게 침선을 전수하느라 하루 24시간이 부족할 정도다. 현재 한국문화재보호재단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에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강좌를 맡고 있는 구혜자 선생은 의상학과 학생들에서부터 전업 주부에 이르기까지 연령과 계층이 다양한 수강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대학원 강의 뿐만 아니라 한복 만드는 교재개발에도 힘쓰고 있어, 현재 「한복만들기-구혜자의 침선노트」세 번째 시리즈가 2010년에 출간됐다. 문화가 많이 변화됐지만 우리 것에 관심 갖는 젊은 사람들을 만날 때면 뿌듯함이 크다. 실과 바늘을 전혀 쥐어보지 않았던 젊은 주부가 찾아와서 취미를 붙이고 따라오는 모습을 볼 때면 누구에게나 우리 것에 대한 애착이 남아 있구나 생각하게 된다.

 

구혜자 선생은 우리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끈기를 갖고 옷 짓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기에 지금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선생의 손에서 나온 옷은 박물관에 전시된 작품용이 많다. 때로는 영화의상 제작의뢰도 들어온다. 2003년 배용준, 전도연 주연의 영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의상을 제작하기도 했다. 구혜자 선생은 생각했던 대로 작품이 나오지 않으면 같은 옷이라도 두 번 짓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바느질 한 땀마다 장인의 숨결과 실력이 함께 꿰매진다.

주요작품

오방장 두루마기
조선시대 말기 여야용 오색 두루마기. 여아는 연두색 길, 색동 소매, 남색 무, 노랑 겉섶, 분홍색 안섶에 자주 깃과 고름을 단다. 다섯 가지 색을 모아 만들어 오방장이라 한다.

동달이
조선시대 무관들이 입던 군복의 한 종류로 무관인 포도대장,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 훈련도감의 관원 등이 갖추어 입었다. 동달이는 소매에 붉은 천을 덧댐으로서 유사시 응급용으로 사용되었다는 특징이 있으며, 전복과 함께 뒷 중심선이 트여 있어 마상의로서 적합하고 군(軍)의 복장으로서 면모를 갖춘 옷이다.

 

18세기 치마저고리_길이127cm

광해군 솜 중치막_86x117cm

 

금관 조복_130x100cm

노의_100x129cm

 

방령포(이응해장군묘출토복식)_120x130cm

세자빈노의_100x147cm

도구 및 제작과정

침선에 필요한 용구는 옷감, 바늘, 실, 실패, 골무, 가위, 자, 인두, 인두판 등이며, 옷감으로는 비단, 무명, 모시, 마 등이 쓰인다. 실은 무명실을 많이 사용하지만, 옷감의 재질, 색상, 두께 등에 따라 달라진다.

 

바느질 도구는 크게 재봉 도구와 정리 도구로 나눌 수 있다. 재봉도구는 옷감을 마름질해서 꿰매어 일정한 형태를 완성시키는데 소용되는 일체의 도구로, 자·누비 밀대·바늘·골무·가위·인두·다리미 등이 여기에 속한다. 정리도구는 자질구레한 재봉 도구를 넣어 둘 수 있는 반짇고리를 비롯하여 바늘과 실을 정리할 수 있는 바늘집·바늘쌈·바늘꽂이 및 실첩과 각종 실패 등을 말한다.

 

바느질 방법은 매우 다양하고 정교해서 홈질, 박음질, 감침질, 상침질, 휘감치기, 사뜨기, 공그르기 등으로 옷의 부분에 따라 필요한 바느질법을 활용한다. 또 계절에 따라 여름에는 홑으로 솔기를 가늘게 바느질하고, 봄·가을에는 겹으로 바느질하며, 겨울에는 솜을 넣어 따뜻한 옷을 만든다.

 

제작과정

바늘과 바늘꽂이

바느질

섶 달기하는 모습

 

안감 마름질

치수재기

침선에서 홈질은 박음질, 반박음질, 공구르기와 함께 가장 기본적인 바느질 기법이다

약력
1942년
출생
1989~1990년
전승공예대전 입선,장려상, 특별상 수상
2004년
국립한경대학, 배재대학 강사
200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89호 침선장 기능보유자 인정
2012년
현 한국문화재보호재단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 침선반 강사

이치헌/한국문화재보호재단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은 문화재보호법 제9조에 근거하여 우리 전통문화를 널리 보전, 선양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공공기관입니다.

 

공식블로그 : http://blog.naver.com/fpcp2010

사진 서헌강(문화재전문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