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목 중요무형문화재 87호 명 칭 명주짜기 (명주짜기) 분 류 공예기술 지정일 1988.04.01 소재지 경북전역
※ 본문설명
명주는 누에고치에서 풀어낸 견사(絹紗)로 짠 무늬가 없는 평직 직물이다. 일반적으로 견사로 만든 견직물을 ‘비단’이라고 하지만 견사 종류와 세직 및 무늬에 따라 종류가 다양하다.
우리나라의 양잠은 그와 관련된 기록이 고조선 때부터 나타날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신라시대에는 정교한 직물을 당나라에 보내기도 하였을 정도로 섬세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보다 질이 좋은 견직물이 생산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종류가 다양해서 색과 품질로 이름이 붙게 되었다. 그 중 명주가 가장 많이 생산되어 일상적인 옷감재료로 사용되었다. 제직방법과 제직상태, 산지와 원료 등에 따라 각기 달리 불리다가 근래에 명주라는 이름으로 통칭하게 된 것이다.
명주는 뽕나무를 재배하고 누에를 치는 일부터 시작된다. 명주실은 누에고치를 끓는 물에 넣고 실 끝을 풀어서 자새·왕챙이 등의 기구로 실켜기를 해 타래실을 만든 것이다. 이 명주실로 날실을 날고 베메기로 날실에 풀을 먹여 도투마리에 감아서 베틀에 올려 잉아실을 걸고 날실 끝을 말코에 매면 명주짜기 준비가 모두 끝난다. 직녀가 베틀 앉을깨에 앉아 부티를 허리에 걸고 베틀신을 신고 발을 앞뒤로 밀고 당기며 날실을 개구(開口)시켜 북속의 씨실꾸리에서 씨실을 넣고 바디로 치면 명주가 짜이게 된다.
예전에는 전국 각지의 가정에서 베틀로 명주를 짜 자급자족하였는데, 조선 후기이후 개량식 직기로 대량 제직함에 따라 재래식 명주짜기는 급격히 쇠퇴하게 되었다. 더구나 오늘날에는 화려한 견직물에 밀려 명주의 수요가 줄어듦에 간신히 그 명맥만을 이어오고 있다. 이에 명주의 제작기술에 대한 전통을 잇기 위하여 성주 두리실의 명주짜기를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으며, 기능보유자로 조옥이씨가 인정되어,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 보충설명
우리나라에서는 문헌을 통해 볼 때 기원전 2∼3세기, 즉 삼한시대부터 직물을 짜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견직물도 이때부터 남부지방에서 생산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시대로 접어들면서 직물이 발달하여 주(紬)가 생산되었다. 주는 굵은 실로 짜여진 것으로 주로 중류층의 속옷으로, 또는 평인의 옷으로 사용되었다. 고려로 넘어오면서도 생산기법에는 큰 변화가 없이 이전의 것을 계승하여 왔으나 질이 좋은 고운 주가 본격적으로 생산되어 품질을 구분하기도 하였다. 조선조에 오면서는 종류가 다양해져서 색과 품질로써 이름이 붙게 되었다. 그리고 견중에서 명주가 가장 많이 생산되어 남녀노소 모두에게 일상적인 의료(衣料)로서 사용되었다.
명주는 뽕나무를 키워서 그 잎으로 누에를 키우고, 누에가 만든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서 수직기로 여자들이 짜낸 것으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현재는 기계생산에 의하여 공장에서 짜여지며 수의용으로 쓰여져왔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서는 우리의 것을 찾는 마음에서 또 그 가치를 인정하면서 명주로 옷을 하는 사람이 늘어나게 되었다. 우리옷은 단아하고 청초하며 품위를 지녀야만 아름다움을 보여주며, 따라서 한복의 옷감으로는 명주를 으뜸으로 생각해왔다. 명주야말로 한복의 미의 특성을 잘 살려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옛부터 내려오는 명주짜기의 기법을 계승하고 있는 경상도 성주 두리실에서는 뽕나무를 재배하고 명주를 짜서 왕실에 바쳐왔다. 그러나 지금은 중요무형문화재 제87호로 지정된 두리실 명주짜기의 조옥이할머니가 명맥을 이어 계승하고 있다. 또한 길쌈하는 데 필요한 도구들을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데, 그 중에서도 명주짜는 바디와 북을 각각 100점 이상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명주의 질감은 어떤 견직물보다도 포근하고 따스하며 우아하다. 그러나 손질법이 복잡하여 애용되지 못했으나, 앞으로 가공법을 연구하여 우리 것을 살리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1920.5.27 ~ 2007. 10. 30 | 보유자 인정: 1988년 5월 27일
큰 냇물 건너가서 쑥대밭을 쫓아내어/ 한쪽에는 뽕을 심고 한쪽에는 목화심어/ 뽕잎일랑 누에치고 목화송이 솜을 타서/ 고치고치 새고치를 오리오리 잦아내어/ 모슴모슴 뽑아내어 무명 명주 짜내보세/ 명주 한 필 매어노니 베틀 연장 전이 없네
- 두리실 명주짜는 베틀노래 (경북 성주군 용암면 본리)
고조선 때부터 그 기록이 남아있는 양잠
명주는 누에고치에서 실을 자아 베틀 위에서 짠, 무늬가 없는 비단의 일종이다. 일반적으로 비단은 실의 종류, 올의 굵기, 무늬의 종류에 따라 다양한데, 명주는 그 중에서도 누에고치에서 풀어낸 견사(絹紗)로 짠 무늬가 없는 평직 직물이다. 우리나라의 양잠은 그와 관련된 기록이 고조선 때부터 나타날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신라시대에는 정교한 직물을 당나라에 보내기도 하였을 정도로 섬세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보다 질이 좋은 견직물이 생산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종류가 다양해서 색과 품질로 이름이 붙게 되었다. 그 중 명주가 가장 많이 생산되어 일상적인 옷감재료로 사용되었다. 제작방법과 제작상태, 산지와 원료 등에 따라 각기 달리 불리다가 근래에 명주라는 이름으로 통칭하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태종 연간부터 누에씨를 국가에서 공급하는 등 누에고치를 개량하여 얇고 가는 명주를 짜 중국에 조공품으로 연간 만필 정도를 보낼 정도로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옷감을 짜는 장인 중 무늬를 넣어 짜는 장인인 능라장은 상의원에, 무늬가 없는 직물을 짜는 방직장은 제용감에 소속되어 있었다. 근대기에 나일론이 발명되고 방직공장이 세워지면서 전통 직물을 짜는 기술은 쇠퇴했다. 특히 누에를 키우고 명주를 짜는 기술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여 1988년 국가에서는 중요무형문화재 제87호 명주짜기를 지정하였다. 당시 전국에서 경상북도 성주군 두리실의 안동 권씨 마을에서만 뽕나무를 재배하고 명주를 짜는 전통 기술이 남아 있었다. 이때 권씨댁 맏며느리인 강석경 선생은 나이가 많아 대신 둘째 며느리인 조옥이 선생을 보유자로 인정하였다.
생이별한 남편을 기다리며 밤낮으로 베를 짜다
명주 짜기의 고향은 경상북도 성주이다. 조옥이 선생은 열아홉 살에 안동 권씨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 안동 권씨 집안은 대대로 아낙들에게 밭일을 시키지 않았다. 그런 연유로 여인네들은 집안에 틀어박혀 길쌈에 매달렸다. 안동 권씨 집안에서는 자연스럽게 이름난 길쌈꾼들이 많이 나왔다. 조옥이 선생의 시어머니 홍남이 선생이 그렇고, 큰 동서 강석경 선생도 전승공예대전에서 솜씨를 자랑하던 베짜기 장인이었다. 그뿐 아니라 조옥이 선생의 넷째 동서 백문기 선생도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16호 무명짜기 기능보유자이며, 다섯째 동서인 이규종 선생도 조옥이 선생의 뒤를 잇는 명주짜기 전수교육조교로 각각 베틀 인생을 살고 있다.
조옥이 선생은 열아홉에 시집을 가서 그 이듬해 젖먹이 딸 하나를 둔 상태에서 남편과 생이별을 해야 했다. 남편이 일본으로 돈을 벌러 떠난 후 소식이 끊겼다. 여러 해 지난 후 선생의 남편은 만주 등지를 떠돌다가 전염병으로 객사하였다고 한다. 조옥이 선생의 명주짜기는 길쌈으로 낙을 삼고 이제나 저제나 남편이 오기를 기다리며 한숨짓던 평생의 업이었다. 남편도 없는 시집에서 선생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집안 살림을 돌보고, 밤낮으로 베를 짜는 일뿐이었다. 길쌈으로 생계를 꾸리기 위해서는 정성 들여 만든 명주를 내다 파는 일도 베짜기 못지않게 중요했다.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새벽같이 봇짐을 이고 장터로 향했다. 장꾼들에게 애써 지은 명주를 내놓으면 조옥이 선생의 명주는 가장 먼저 동이 났으며, 값도 가장 잘 쳐주었다. 그만큼 솜씨가 좋았던 것이다.
선생은 198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87호 명주짜기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었으며, 2006년 명예보유자로 인정되었다가 2007년 노환으로 별세했다. 조옥이 선생의 뒤를 이어 막내 동서인 이규종 선생이 전수교육조교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작품
명주, 조옥이, 35cm
명주 (Silk)
조옥이 선생의 베짜는 솜씨는 성주 시내에 소문이 자자하여 선생이 짠 명주를 서로 탐을 내고 사가려고 주문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오일장이 설 때마다 시장에 나가면 “베가 곱다”면서 서로 웃돈을 주고 사가, 선생은 밤낮으로 베를 짜기에 바빴다고 한다. 특히 명주의 경우 열넉새나 보름새로 짜서 매우 곱고 치밀하게 짜는 솜씨가 필요하기 때문에 선생처럼 섬세하고 차분한 성격에 어울리는 작업이었다.
선생이 사용하던 작업도구
제작과정
명주를 짜는 순서는 1)실 써기(製絲)와 2)실내리기(解絲), 3)날실 걸기(整經), 4)풀 먹이기(加糊), 5)베 짜기(織造)의 순서로 진행된다. 명주를 짜기 위해서는 누에고치에서 명주실을 뽑아내야 한다. 이렇게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고[실 써기], 그것을 가락에 내려 감는 [실 내리기] 과정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제작과정이다. 다 자란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기 위해 ‘자새’와 ‘왕쳉이’(물레의 경상도 사투리)를 준비한다. 마당과 마루 사이에 화로를 마련하여 솥을 건 다음 물을 팔팔 끓여 뜨거워진 물에 고치를 가득 넣고 삶으면서 놋젓가락으로 휘젓는다. 왼손의 젓가락에 몇 가닥의 고치실이 걸려 올라오면 일정한 두께의 실을 건져 자새에 걸어 꼬면서[合絲], 오른손으로 왕쳉이를 돌리면 명주실이 만들어진다. 이것이 ‘실 써기’ 과정이다.
이렇게 고치에서 뽑아낸 명주실을 광주리에 사려 담고, 실끝을 ‘물레’에 건 다음 오른손으로 물레를 돌려 실을 잣는다. 물레질이 끝나면 ‘돌것’에 타래실을 걸어 일정한 속도로 돌리면서 ‘가락’에 내려 감으면 ‘실 내리기’가 끝나게 된다. 그 밖의 나머지 과정은 삼베나 모시베나 무명베를 짜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약력
1920년 5월
출생
1986~1992 년
전승공예대전 출품
1988년 5월
중요무형문화재 제87호 명주짜기 기능보유자 인정
1988~2007년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 작품전 출품
2006년 4월
명예보유자 인정
2007년 10월
노환으로 별세
글 한국문화재보호재단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은 문화재보호법 제9조에 근거하여 우리 전통문화를 널리 보전, 선양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공공기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