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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호]유기장 (鍮器匠) | 중요 무형 문화제

문성식 2012. 3. 30. 04:34


종 목 중요무형문화재 77호
명 칭 유기장 (鍮器匠)
분 류 공예기술
지정일 1983.06.01
소재지 전국



※ 본문설명

유기장은 놋쇠로 각종 기물을 만드는 기술과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우리나라 유기의 역사는 청동기시대부터 시작되었고 신라시대에는 유기를 만드는 국가의 전문기관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더욱 발달하여 얇고 광택이 아름다운 유기를 만들었다. 조선 전기에 기술이 퇴화한 듯하였으나 18세기에 이르러 다시 성행하여 사대부 귀족들이 안성에다 유기를 주문생산케하여 안성유기가 발전하였다.

유기는 대표적인 구리합금 금속으로서 각 성분비율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다. 구리와 주석을 7:3으로 합금하여 만든 놋그릇을 방짜유기라 하고 구리와 아연을 합금하여 만든 그릇을 황동유기라 하는데 두 종류는 노르스름한 빛깔에 은은한 광택이 난다. 구리에다 니켈을 합금한 것은 백동유기라 하며 흰 빛을 띤다. 제작기법에 따라 방짜와 주물, 반방짜 등이 있다. 가장 질이 좋은 유기로 알려진 방짜유기는 일명 양반쇠라고도 하는데, 북한의 납청유기가 가장 유명하다. 방짜유기는 녹인 쇳물로 바둑알 같이 둥근 놋쇠덩어리를 만든 후 여러 명이 망치로 쳐서 그릇의 형태로 만든다. 방짜로는 징이나 꽹과리, 식기, 놋대야 등을 만들 수 있다. 주물유기는 일명 ‘퉁쇠’라 부르는데 제작방법이 방짜에 비해 쉽기 때문에 각지에서 제작되며 안성유기가 가장 유명하다. 안성의 맞춤유기는 ‘안성맞춤’이란 속담이 생겨날 정도로 유명하게 되어 수요가 늘자 일일이 두드려 만드는 방짜기법 대신에 쇳물을 형태에 부어 그릇을 만드는 주물기법으로 만들게 되었다. 반방짜유기는 절반은 주물로 만들고, 절반은 방짜기법으로 만드는 것으로 전남 순천에서 성행하였다.

유기장은 전통적인 금속공예기술로서 지역별로 독특한 양상으로 발전하였고 실용성이 높은 고유의 공예품으로서 그 가치가 인정되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현재 김근수(주물), 이봉주(방짜), 한상춘(반방짜) 씨 등이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어 있다.

※ 보충설명

우리나라 유기의 역사는 멀리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부터 시작되었다. 삼국시대(三國時代)에도 유전(鍮典)이란 것이 있었는데 국가에서 유기를 전담하는 기관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시대(高麗時代)의 유기 제작기술은 매우 발달하여 얇고 정교한 유기를 제작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朝鮮時代) 초기(初期)에는 유기 제작기술이 퇴화한 듯하였으나 말기(末期)부터 안성(安城)유기가 유명해졌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전해진 유기 제작기법은 납청(納淸)의 방짜유기와 순천(順天)의 반방짜와 안성(安城)의 주물유기가 있다. 안성의 주물(鑄物)유기는 제작기교가 매우 발달되어 기형이 아름답고 정교하며, 합금(合金)이 우수하여 '안성마춤'이란 속담까지 나오게 되었다.

현재 안성유기의 제작기법을 전통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사람은 김근수(金根洙) 씨로서 당국에서는 1983년 6월에 중요무형문화재(重要無形文化財) 제77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1916.7.12~2009.3.6 | 보유자 인정: 1983년 6월 1일

 

 

몸을 비추는 것이 모두 거울은 아니지만 몸을 비추면서도 제 속까지를 다 비추는 물은 더 없이 아름다운 거울이다. 유년시절, 물가에 앉아 놋그릇을 닦으시던 어머니의 손은 온통 황토 범벅이 돼 있었다. 나는 종종 어머니의 곁에서 내 몫으로 남겨진 조그만 놋그릇을 닦곤 했다. 벗겨진 녹이 차츰 풀려 물은 청동거울 같았다. 짚수세미에 황토를 묻혀 천천히 놋그릇을 닦는 일, 세상살이도 그렇게 녹을 벗겨 내듯 하라던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나는 돌멩이를 주워 물위에 던졌다. 
                                                                                                                     - 시현실 2000년 겨울호, 김충규 [놋그릇] 중에서

 

 

조선시대 때부터 많은 이들이 갖고 싶어 했던 ‘안성맞춤’

 

유기란 좁은 의미로는 놋쇠로 만든 그릇이라는 뜻이지만, 넓은 의미로는 동(銅)을 기본으로 하는 비철금속의 합금으로 만든 여러 가지 기물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식기의 경우 여름에는 백자, 겨울에는 유기를 즐겨 썼으며 그 밖의 갖가지 세간에도 유기제품을 사용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유기를 언제부터 사용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넓은 의미에서 동합금의 일종인 청동기 시대의 동검이나 동경 같은 물건으로 보아 청동기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본격적으로 사용이 확대된 시기는 삼국시대부터이다. 삼국시대에는 주로 불교와 관련되어 불상, 범종, 반자 등을 청동으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면서 불교에서뿐만 아니라 제기, 수저, 밥그릇, 향로 등 생활의 전반에 걸쳐서 동제품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나, 상류층에서 주로 사용하였다. 유기가 일반 대중들에게까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부터이다.

 

같은 유기라도 제작방법에 의해 구분 짓고 있다. 주조해서 만드는 곳은 ‘퉁점’이며 여기서 만든 주물 유기는 ‘붓배기’라 하며 안성이 유명하고, 단조해서 만드는 곳은 ‘놋점’이라 하며, 여기서 만드는 단조품은 ‘방짜’라 부르며 납청 일대가 유명하다. 특히 안성은 행세깨나 한다는 집에서는 갖고 싶어한다는 ‘안성맞춤’으로 이름 높았다. 안성의 유기가 다른 지방보다 유명한 것은 서울 반상가의 그릇을 주문 받아 제작하였기 때문이다. 안성맞춤 유기는 일반인이 사용하는 보통 그릇인 ‘장내기’에 비해 품질이 우수하였다.

 

 

유기회사에 입사, 장인 김기준에게 유기를 배우다

 

근대기에 안성에는 크고 작은 유기제작 공장이 많이 있었는데, 그 중에 가장 큰 것이 안성유기제조주식회사였다. 김근수 선생은 20세때 유기회사에 외무사원으로 입사하여 처음으로 유기와 관련을 맺어 공장에서 유기 만드는 기술을 숙련된 장인인 김기준 선생으로부터 배웠다. 이후 1960년대에 안성유기공업사로, 이후 풍화유기공업사로, 그리고 신시산업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꾸며 유기작업을 계속하였다. 1982년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된 후 활발하게 유기 작품을 제작하였고 명예보유자로 인정되었다가 2009년 타계하였다. 선생의 사후 주물 유기 제작기술은 그의 아들 김수영 선생이 대를 이어 2008년 유기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어 전수활동을 펼쳐나가고 있다. 김근수 선생의 대표적인 작품들은 종묘제기, 능제기 같은 제기류와 칠첩반상기, 주전자세트 같은 식기류, 대야나 화로 같은 일상기물, 불구 등 각종 기명들이 있다.

 

 

주요작품

 

보, 김근수, 31x25x21cm

보(Bo, Ritual Vessel)
종묘제기는 변이나 두(豆)와 같이 중국 고대 국가에서 사용하던 제가들과 형태는 닮았고, 재료는 대나무, 나무, 자기, 놋쇠 등으로 29종 5,000여 개의 제기가 사용되었다. 이중 놋쇠로 만든 제기는 한 신실에 66종인데, 그 중 종묘에서만 사용하는 대표적인 제기가 보이다. 보의 형태는 네모져 땅을 상징하며, 둥근 형태의 궤와 한 짝을 이룬다. 보에는 쌀과 기장을 담는데, 뚜껑이 있으며 표면에는 직선형 뇌문을 빽빽하게 새기며, 네 귀에는 용머리를 부각하여 붙인다. 이 작품은 김근수 선생이 종묘제기를 복제하여 주물로 새겨서 만든 것이다.

궤, 김근수, 31x16x22cm

궤(Box)
종묘제례가 거행될 때 보궤는 제사상의 가장 중앙에 진설되는 제기이다. 궤는 네모진 보와 달리 전체적으로 둥근 형태이며, 제례 때에는 메기장과 피를 담는다. 뚜껑을 만들어 덮는데, 뚜껑에는 구름모양이 높게 솟아 있다. 궤의 몸통에는 여의두형 물결무늬를 촘촘하게 새기며 양쪽 손잡이에는 용머리를 길게 늘인 형태로 만든다. 굽에 해당되는 네 다리는 도깨비의 얼굴을 얕게 부조하는데, 전체적으로 김근수 선생의 치밀한 장인정신을 엿볼 수 있다.

 

옥바리 7첩반상기, 김근수

옥바리 7첩반상기(Brass Tableware 1Set)
반상기는 우리나라의 독특한 상차림이다. 그릇의 형태는 옥바리(오목반상기), 연엽식기, 합식기로 나뉜다. 옥바리는 위가 좁고 속이 오목한 형태로 주물기법으로 제작한 것이다. 반상기 위에는 밥그릇인 주발, 국그릇인 탕기, 그리고 장류를 담는 종지, 숭늉을 담는 대접을 놓는다. 대접은 항상 밑을 받치는 쟁반과 한 벌을 이룬다. 7첩 반상의 음식은 반찬 가짓수가 5첩 반상보다 늘어난 것이다. 종지는 초고추장을 더해 3개이고, 찜이 추가되며, 전이 더 놓이며, 회를 올려 놓은 것이다. 유기로 만든 반상기 중 안성의 것은 안성맞춤이라 조선시대부터 많은 이들이 갖고 싶어 찾던 그릇이다.

용문향로, 김근수, 18x17x34cm

용문향로(Incense Burner with Dragon Design)
제사에서 향을 사르는 것은 돌아가신 이의 혼을 부르기도 하고, 제사 공간을 정화하는 기능도 하고 있어 매우 중요하다. 이렇게 향을 사르는 향로는 향을 담는 향합과 한 쌍을 이루어 종묘제례 때 각 신실마다 향탁 위에 한 쌍으로 놓이게 된다. 특히 용문향로는 향로의 뚜껑에 구름 사이로 용의 몸통을 투각한 위로 용머리가 위로 불쑥 튀어나온 조형적인 모습으로 왕실 제기의 특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유등, 김근수

유등
유등은 전기가 없던 시절에 어둠을 밝힐 수 있는 조명기구 중 하나이다. 유등은 세 가지 구조로 되어 있는데 가장 아래쪽에는 판 형태의 원형 접시를 놓고, 그 위로 기름종지를 매달 수 있도록 수직의 기둥을 세우며, 기둥에 기름을 넣는 작은 종지를 넣을 수 있는 구조이다. 건물의 규모에 따라 유등의 크기도 달라져 궁궐의 전각에는 크기가 큰 유등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간결하면서도 구조적인 형태가 잘 살아나 있다.

제기 일습, 김근수

제기 일습(Ritual Vessels)
제사는 조상신을 추모하는 효의 표상이다. 제기는 이러한 제사를 드리는데 사용하는 의식용 그릇이다. 사대부 집안의 제사에서는 신위를 올려놓는 영좌교의와 제기를 진설하는 제사상, 향로와 향합이 놓이는 향상과 술상이 놓인다. 제기는 촛대 1쌍과 함께 굽이 높은 제기를 사용한다. 조선시대에 행세하는 집안의 제기는 유기를 사용하였는데, 구삼벌이라 하여(촛대 1쌍, 향로 1, 향합 1)을 비롯하여, 제주발, 갱기, 수저, 젓가락, 제잔 및 잔탁, 탕그릇, 편틀, 적틀, 포틀, 약기, 제종지, 제접시, 모사기[모래그릇], 퇴주그릇, 주전자, 시접 등을 유기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러한 유기로 만든 제기는 일반 그릇과 달리 굽이 달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유기장 김근수의 제기는 전통적인 제기의 구성을 잘 알고 정성을 다해 제작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작업도구 및 제작과정

주조방법으로 유기를 제작하는 과정은 1) 번기 만들기와 쇳물 붓기를 하는 부질간 작업, 2) 표면을 깎고 본색을 내는 가질간 작업, 3) 표면에 장식을 더하는 장식간 작업으로 분업화되어 있다. 각 공정마다 필요한 여러 가지 다양한 도구가 사용된다.

 

부질이란 녹인 쇳물을 주형[틀]에 부어 원하는 기물을 만드는 과정이다. 부질간에는 풀무질로 바람을 넣어 쇠를녹이는 화덕이 있다. 쇳물을 준비하는 동안 쇳물이 들어가 기물이 될 번기의 형태를 만든다. 이 과정은 먼저 원본을 ‘향남틀’ 속에 넣고 ‘송탄가루’를 뿌린 다음 갯토를 채워 넣고 ‘달구개’로 다지고 ‘흙칼’로 표면을 고른다. 이렇게 주물사(鑄物沙)를 만들고, 주형 만들기를 한 다음 물칠을 하여 ‘무집’을 붙인다. 암틀과 수틀도 같은 방법으로 만든 다음 암틀의 번기 주변에 ‘숟가락’으로 도랑을 파듯 물줄을 내고 표면의 이물질은 ‘깃털’로 제거하고 다듬으며, 쇳물이 잘 스며들도록 그을음질을 한다.

 

 

향남틀

부질간 작업에서 사용하는 도구들

 

 

 

번기를 만드는 동안 미리 화덕에 불을 지펴 놓고 재료를 용해시켜 그을음질이 끝난 번기가 식지 않는 상태에서 쇳물을 주입할 수 있도록 준비해 놓는다. 그 사이에 구리 72%와 주석 28%를 저울로 달아 ‘도가니’에 넣고 풀무질을 계속하여 900도 이상에서 끓인다. 도가니를 ‘집게’로 들어올려 ‘부지래’로 불순물을 제거한 후 쇳물을 붓는다.

 

가질은 부질하여 만든 기물의 표면을 깎고 다듬어 유기가 가진 본래의 색을 내는 과정이다. 가질대의 회전축에 ‘머리목’을 끼우고 기물을 ‘망치’로 쳐서 고정시킨 다음 ‘질나무’를 걸쳐 점점 안쪽으로 위치를 조정한다. ‘물멕이’로 ‘물통’의 물을 찍어 기물에 물칠한다.

 

 

가질과 장식간 작업에서 사용하는 다양한 도구들

 

 

약력

 

1916년 7월
출생
1975년
안성맞춤 유기공방 경영
1979년
제4회 인간문화재 공예전 국무총리상 수상
1983년 6월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 기능보유자 인정
1990년
전국공예품 경진대회 특선
1992년
중요무형문화재기능보존회 회장
1983~2009년
중요무형문화재보유자 작품전 출품
1998년
보성다향제 전통공예전
2009년 3월
별세

유기장 이봉주

1926. 2. 8. ~ | 보유자 인정: 1983년 6월 1일

징이여, 바람의 손잡이 잡고 등짝을 한번 후려쳐봐 울림이 클탱께

아궁이 단속 심했던 대장장이가 벌겋게 달아오른 노을을 마흔아홉 번이나 구부렸다 폈다 만들어낸 걸작이 바로 저 강이여

동담티 무당년이 찾아와 낚아채듯 뺏어간 날이 아마 그믐이었지 빨간 깃발 펄럭이고 아침저녁으로 울부짖는 소리 들리지 그 집이 몸땡이 풀어놓은 딘디 주인이 나이도 많고 고집불통인데다 말도 통하지 않아 맨날 굿판이 벌어지고 있지
내가 징이여, 소리에도 색깔 있어 울림 큰 음색이 특장인디 워쩌
오늘밤 한번 둘어볼텨 징채라도 있으면 맘껏 후려쳐봐 이빨 꽉 깨물고 견뎌볼 탱께
- 육근상 시인의 ‘징’, 시집 [절창]

두드려 단련한 질 좋은 놋쇠 방짜유기

 

유기장은 놋쇠로 각종 기물을 만드는 기술을 가진 장인을 말한다. 우리나라 유기의 역사는 청동기시대부터 시작되었는데, 이 시기는 인류 역사에 있어 최초로 합금술이 발명된 때이다. 신라시대에는 유기를 만드는 국가 전문기관인 “철유전(鐵鍮典)”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더욱 발달하여 얇고 광택이 아름다운 유기를 만들었으며, 품질도 우수해 신라동(新羅銅), 고려동(高麗銅)이라 불리며 수출하였다.

유기는 제작기법에 따라 방짜와 주물, 반방짜 등으로 나뉘는데 가장 질이 좋은 것으로 알려진 방짜유기는 일명 양반쇠라고도 하며 북한의 납청유기가 가장 유명하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질이 좋은 놋쇠는 전통적인 유기제작 방법인 방짜(方字)기법으로 제작했는데, 이는 동(銅)과 석(錫)을 정확한 비율로 합금하여 두드려서 만드는 놋제품이다. 이 방짜유기는 금속조직을 늘여서 만드는 것이라 떨어뜨려도 찌그러질 뿐 깨지지 않아서 사람들이 매우 선호했다. 그러나 조선조 중엽에 이르러 수요가 늘어나자 손으로 두드려서 만드는 방짜기법 대신 손쉬운 주물기법으로도 제작하게 되었다.

주물유기는 방짜유기의 합금과는 달리 구리와 아연의 합금인 황동이나 기타 잡금속을 섞어 녹인 금속을 주형에 부어 대량으로 생산해낸 것이다. 정확한 합금비율로 만든 전통적인 방짜유기와 주물유기는 성분이 다소 다르지만 잡주물로 만든 유기까지를 포함해서 넓은 의미로 유기라고 알려져 왔다. 이렇게 잡금속을 섞어서 대량생산하던 합금쇠를 통쇠라고 했으며, 전통적인 놋쇠와는 엄격히 구분지어 사용하였다. 그 이유는 퉁쇠는 주물한 것이라 금속의 단면이 유연성이 적어 그릇을 떨어뜨리면 깨지기 쉽기 때문이다.

해방 이전만 해도 방짜기법으로 만든 유기를 최고로 여겼으며, 특히 상질의 놋그릇으로 유명한 납청에서는 방짜유기점은 놋점, 주물유기점은 퉁점이라고 구분해서 불렀으며 놋쇠로 만든 그릇은 놋성기, 퉁쇠로 만든 그릇은 퉁성기라고 구분해서 불렀다. 방짜유기는 녹인 쇳물로 바둑알 같이 둥근 쇳덩어리를 만든 후 여러 사람이 동시에 망치로 쳐서 형태로 만드는데 주로 징이나 꽹과리, 식기, 놋대야 등을 만들 때 사용된다.

한편, 방짜 유기 제작으로 유명한 평북 납청은 조선시대부터 유기 제작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납청은 정주읍과 박천읍 사이에 있는 산간지방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내공업으로 유기업을 하여 생활했던 곳이다. 이 지방은 일찍이 유기제작이 크게 발전하여 각 지방에서 유기 도매상들이 모여들었으며, 일제초기까지만 해도 성시를 이루었던 곳이다. 납청에서는 방짜를 양대(良大)라고 불렀으며, 모든 생활기명이나 악기를 만들어 내었는데, 놋쇠의 질이 좋아 견고하고 소리도 맑고 파장이 길어 각광을 받았다.

이렇듯 납청에서 유기가 성행하게 된 원인 중의 하나는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이다. 또한 유기공장에서 사용하는 화력 좋은 소나무 숯이 가장 많이 생산된 것도 유리한 조건이었다. 당시 납청의 유기는 평안도에서는 물론 황해도, 함경도까지 그 판로가 형성되어 수요가 매우 많았다. 유기전통은 근대 말에 이르러 일본에 의한 유기공출이라는 이름 아래 집집마다 거의 모든 유기를 전쟁물자로 차출당하는 어려움을 겪었으나 해방 이후까지 그 명맥이 유지되다 1950년대 이후 연탄을 사용하면서부터 연탄가스에 변색되기 쉬운 놋쇠의 성질 때문에 사용하기가 불편해졌을 뿐 아니라 스테인리스 그릇에 밀려 점차 유기공장들이 사라져 갔다.

현재는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 이봉주 선생에 의해 방짜유기의 기술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예부터 음식을 담는 반상기로 쓰인 방짜유기는 독성이 없고, 항균, 멸균 효과가 뛰어나며 농약 성분을 가려주는 역할을 한다. 방짜기술을 가진 나라는 열손가락에 꼽을 정도라고 한다. 더구나 그릇을 방짜기술로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다고 알려져 있다.

65년 꼿꼿한 집념으로 방짜유기의 맥을 잇는 유기장 이봉주 선생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 기능보유자인 이봉주 선생은 1926년에 납청에서 약 8km 떨어진 평북 정주군 덕언면에서 모친이 놋성기 장사로 생계를 이었던 집안에서 태어났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3세 때부터 납청의 점주 김용도 선생의 집에 취직을 하여 유기 제작일을 접하게 되었지만 기술은 배우지 못하였다고 한다.

일제가 조선청년들을 전쟁터로 마구 내몰던 시절 열일곱 살이던 선생은 군대에 끌려가기엔 어렸지만 취직하지 않으면 강제노역에 붙들려가야 하기에 아연광산에 취직해 직원 숙소에 불 때는 일을 맡았다. 금속과 불, 이 두 가지도 선생과 인연이 깊다. 결혼을 위해 고향에 돌아온 선생은 농사를 짓던 중 광복을 맞았다. 잇단 흉년과 과도한 현물세에 시달리던 아버지는 항의를 모의하다 북한 정권에 끌려가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선생은 첫 딸을 잃었다. 희망이 보이지 않다는 것을 느낀 선생은 1948년 겨울 송아지 판 돈 5,000원을 들고 월남을 결심하게 된다. 아내는 어머니가 말리는 바람에 남게 됐고 그것으로 아내와의 인연도 끊어지고 만다. 여러 소식을 통해 훗날 들은 바에 의하면 아내는 평생 고아를 돌보며 살다가 2008년 여든둘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고 한다.

납청 출신이지만 고향에선 정작 방짜유기 제작 기술을 배울 기회가 없었고, 해방 후 22세 때인 1948년에 월남하여 서울 용산구 후암동에서 납청 방짜유기 공장을 크게 하던 탁창여 선생의 양대공장에 입사하여 기능을 익히기 시작했다. 탁창여 선생은 아내의 이모부였고 이러한 인연으로 방짜 유기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선생은 탁창여 선생의 은혜를 평생 잊지 않았다. 지금도 문경에 있는 선생의 공장 마당 가운데에는 탁 선생의 공적비가 서 있다. 이 공장에는 모두 납청출신의 유기 장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능을 익혀 2년만에 점주가 되었고 전쟁이 나자 군에 입대하고 제대 후 다시 공장에 들어가 점주로 일을 하였다.

1957년에는 구로동에 자신이 직접 ‘평부양대유기공장’을 설립하여 대장겸 점주 그리고 경영까지 하여 생산 기술자인 동시에 판매자까지 겸하게 되었다. 그러나 1950년대 말부터 생활문화가 변하면서 연탄을 집집마다 사용하게 되자 연탄가스에 쉽게 변색되는 유기는 심한 타격을 받게 된다. 계속되는 불경기로 선생의 공장도 문을 닫고 만다. 그 뒤 노동판에 나가기도 하고 물고기를 잡으러 다니기도 했는데 마음을 잡지 못하고 다시 1960년말 공방을 새로 시작하기로 했다. 이때는 잘 팔리지 않는 그릇 대신 징이나 꽹과리와 같은 악기를 주로 만들었다. 마침 대학가에서 농악이 붐을 일으키던 때라 잘 팔려나갔다.

선생은 1978년 경기도 안양시 박달동으로 이주하여 진유공사를 세워 공장 시설을 개량하고 계속 양대유기를 제작하였다. 1982년 전승공예대전에서 문화공보부장관상을 수상하고 이듬해인 1983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의 방짜유기 부문의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1980년대에 들어서자 반상기를 방짜로 만들어달라는 주문이 쇄도하기 시작하였다. 편리한 스테인리스 스틸과 플라스틱에 밀려났던 놋그릇은 시절이 바뀌면서 새 국면을 맞은 것이다. 인체에 나쁜 성분을 만나면 변색되는 신비한 효능이 알려지고 언론에 선생의 방짜기술이 소개되면서 방짜그릇을 찾는 사람이 점점 늘어갔다.

1926년 일제 식민지하에서 태어난 선생은 광복의 혼란기에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었고, 전쟁과 근대화의 소용돌이를 온몸으로 겪었다. 1948년 혈혈단신으로 서울에 도착하여 겨우 고무신 한 켤레 살 돈밖에 없던 스물 두 살 청년이 50여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지금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가 되기까지 참으로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1983년에는 쇳농이 튀어 한쪽 눈을 잃었고, 2008년에는 담낭에 탈이 생겨 세 차례나 수술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평생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빠져 평생을 살아왔다는 이유로 본인 행운아라고 생각한다.

1994년에는 안산 시화공단으로 확장 이전하여 각종 방짜유기를 생산하였다. 이후 경북 문경시에 ‘납청방짜유기전수관’을 짓고 후진양성과 작품활동에 정진하여 왔다. 이 주변은 고향인 납청처럼 소나무 숲이 많고, 논은 적어 마을 사람들이 농사를 할 수 없는 지역이다. 이런 이유로 청년들에게 유기 제작 기술을 가르쳐 유기가 산촌의 주된 사업으로 성장하게 되면, 결국 납청마을과 같이 지역민들의 생계에 도움이 될 것으로 믿고 이곳을 유기마을로 키워가고 있다.

선생의 대표작은 대징과 꽹과리, 좌종, 편종과 같은 악기들이다. 방짜쇠의 맑은 울림과 긴 파장을 이용한 것으로 현대식 스텐레스스틸이나 황동으로 만든 악기와 비교해보면 소리의 웅장함과 여운이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선생이 만든 대징은 직경 160cm, 무게 98kg의 세계 최대의 크기로 기네스북에도 올라 있다. 납청유기는 조시 부시 전 미국 대통령 방한때 청와대 만찬에 사용되기도 했으며, 세계 최대 타악기 회사인 질리안에 의해 그 기술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최고가 아니면 만들지 않는다.’ 납청유기 연구, 계승을 위해 고집스럽게 한 길 만을 걸어온 이봉주 선생의 좌우명이다. 아들인 이형근 선생이 전수교육조교로 활동하며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주요작품

 

놋상, 51×30×21cm구리와 주석을 합금하여 불로 달군 후 망치로 치고 늘려 형태를 만드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는 단조기법으로 만들었다.

좌종, 42×41cm여러 불교국가에서 예로부터 크고 작은 종들을 조성하여 왔다. 좌종은 법당 안에서 쓰이는 “종”을 말하는데, 지역에 따라서는 울림주발 또는 경종이라고도 한다.

제작과정

 

방짜유기는 용해, 네핌질, 우김질, 냄질, 닥침질, 제질 및 담금질, 벼름질, 가질 등의 순서로 제작된다. 먼저 도가니네 열을 올린 다음 구리와 주석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배율을 맞춰 섞어 1200도가 넘는 온도에 끓여 녹여 낸다. 녹인 쇳물을 물판에 부으면 바둑 모양의 둥근 합금 덩어리가 나오는데 그 모양이 바둑알 같아고 하여 ‘바둑’ 또는 ‘바데기’라고 부른다.

성형 재료인 바둑이 나오면 소나무 숯으로만 불을 지펴 다음 작업에 들어간다. 보통 11명이 한 조가 되어 바둑을 불에 달구고 망치로 치는 과정(네핌질)을 되풀이해 가며 얇게 늘려낸다. 얇게 편 판은 여러 장 겹쳐 우김질로 틀을 만들면 우묵한 그릇의 틀이 잡힌다. 이를 당기며 쳐 늘리는 작업인 닥침질이 끝나면 간수를 발라서 물에 담갔다가 내어 완제품에 가까운 형태로 완성시킨다. 담금질을 하고 나면 놋쇠의 경도와 인성이 낮아져 질이 연해진다. 마지막 과정인 가질에서는 벼름질이 끝난 재료에 산화 피막이 형성되고 흠이 난 것을 제거해 놋쇠 특유의 색이 나오도록 전체 또는 일부를 깎아낸다.



   1) 용해 (용탕만들기)

   2) 바둑 들어내기

   3) 겹쳐진 바둑 우김질하기

   4) 닥침질하기

   5) 망치로 벼름질하기

 

 

이치헌/한국문화재보호재단 (http://www.chf.or.kr/)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은 문화재보호법 제9조에 근거하여 우리 전통문화를 널리 보전, 선양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공공기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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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서헌강(문화재전문 사진작가)
발행2013.01.24

유기장 김수영 한국문화재재단의 무형문화재 이야기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br>Master Artisan of Brassware-making

1949. 10. 12. ~ | 보유자 인정: 2008년 8월 5일


분가한 오빠에게 제사를 물리시고
놋그릇 한 벌씩을 건네시는 어머니
꽃대의 무게중심이 꽃잎으로 번진 날

종부의 긴 침묵이 고봉밥에 담겼다
몇 백 년을 궤짝에서 저들끼리 얽혀서
굵게 밴 쓴맛짠맛이 닦여서 지워진 길

살풋 건드리면 종소리 울리는 저녁
노란 국화 짧게 꺾어 소복이 담는다
어머니 늦은 팔십 평생 환하게 피고 있다.

-정희경 시인의 「놋그릇, 꽃피다」/ 시조시학 2012 여름호

안성맞춤, 안성을 대표하는 산물 유기(鍮器)

우리나라에서 유기를 언제부터 사용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넓은 의미에서 동합금의 일종인 청동기 시대의 동검이나 동경 같은 물건으로 보아 청동기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본격적으로 사용이 확대된 시기는 삼국시대부터이다. 삼국시대에는 주로 불교와 관련되어 불상, 범종, 반자 등을 청동으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면서 불교에서뿐만 아니라 제기, 수저, 밥그릇, 향로 등 생활의 전반에 걸쳐서 동제품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나, 상류층에서 주로 사용하였다. 유기가 일반 대중들에게까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부터이다.

같은 유기라도 제작방법에 의해 구분 짓고 있다. 주조해서 만드는 곳은 ‘퉁점’이며 여기서 만든 주물 유기는 ‘붓배기’라 하며 안성이 유명하고, 단조해서 만드는 곳은 ‘놋점’이라 하며, 여기서 만드는 단조품은 ‘방짜’라 부르며 납청 일대가 유명하다. 특히 안성은 행세깨나 한다는 집에서는 갖고 싶어 한다는 ‘안성맞춤’으로 이름 높았다.

예전의 안성은 대구, 전주 지역과 더불어 큰 장(場)이 서던 상업의 요충지였다. 안성장에서 팔리는 질이 좋은 물건에는 다른 지역에서 유입된 것도 있었고, 이 지역에서 직접 제작한 것도 있었다. 이 중 안성의 유기(놋그릇)는 튼튼하고 질이 좋기로 전국적으로 유명하여 ‘갓’하면 통영이 떠올랐던 것처럼 ‘유기’하면 안성을 떠올렸다.

안성의 유기에는 장에다 내다 팔기 위해 대량으로 만든 ‘장내기 유기’와 주문에 의해 만든 ‘맞춤 유기’의 두 종류가 있었는데, 보통의 집안에서는 장날에 나는 ‘장내기 유기’를 사서 이용하였지만, 행세깨나 하는 집안에서는 직접 안성 유기점에 주문해서 사용하였다고 한다. ‘안성맞춤’이란 말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일제강점기 안성의 풍습을 비롯한 모든 분야를 망라한 추수 김태영 선생의 [안성기략(安城記略)]에 의하면 “안성은 고래로 유기가 명산이다. 안성유기는 견고하고 정교하게 제조하여 전국에서 환영을 받아왔으니”라고 하여 안성맞춤이라는 말이 안성유기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안성맞춤의 고장에서 3대째 가업을 이어가는 유기장 김수영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 기능보유자 김수영

중요무형문화재 제 77호 유기장 기능보유자 김수영 선생은 1949년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했다. 어렸을 때부터 부친인 故 김근수 선생의 옆에서 유기일을 보고 자라며 일손을 돕다가 자연스럽게 이 일로 들어서게 되었다. 경기도 안성시 봉남동에 위치한 안성맞춤유기공방은 아버지로부터 지금까지 70년 이상 가업을 이어받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다. 또한 그의 아들까지 가업을 이으려고 하고 있으니 3대째 이어지는 셈이다.

김수영 선생은 그릇 외에 촛대나 종 등 장식품도 만든다. 17명의 기술자들과 함께 작업하는 공방에서는 박물관 유물 복제, 종묘 제기 복원 등의 정교한 작업도 하고 있다. 시간도 오래 걸리고 공도 많이 드는 작업이지만 보다 우수한 제품을 만들기 위해 수작업을 고집한다. 또한 조상들의 삶의 지혜를 배우고 소중한 문화유산을 전승하고 널리 알리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2012년 안성마춤유기박물관을 개관하기도 했다. 박물관 1층은 유기제작 과정을 모형으로 소개하고, 2~3층은 부친인 故 김근수 선생이 제작한 유기와 평생 수집한 청동기와 생활용기 등 1,00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

힘들고 고된 일을 왜 하냐는 질문에 김수영 선생은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며 아들들도 자신의 뜻을 따라줘 든든하다고 이야기한다. 작품에 낙관을 찍어 이름을 남기는 만큼 책임감을 가지고 몇 대씩 대물림할 수 있는 유기를 만들겠다는 생각이다. 김수영 선생은 2008년 부친을 이어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었으며, 뛰어난 기량과 함께 이론적 지식 또한 고루 갖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 청경 김수영 선생의 돌도장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새겨져 있다.

금이 뜨거운 불을 따라 유구한 시간을 흐른다.
흐르고 흘러 마침내 형태가 되고
그 빛깔은 빛나고 빛나
영화롭게 빛난다

김수영(金壽榮)선생의 이름자의 의미로 한글시가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선생의 작품세계와 닮아 있다. 유기를 다루는 선생의 마음이 시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하겠다.

주요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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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바리 칠첩 반상기 / 6×7~16×7cm반상기는 우리나라의 독특한 상차림이다. 그릇의 형태는 옥바리(오목반상기), 연엽식기, 합식기로 나뉜다. 옥바리는 위가 좁고 속이 오목한 형태로 주물기법으로 제작한 것이다. 반상기 위에는 밥그릇인 주발, 국그릇인 탕기, 그리고 장류를 담는 종지, 숭늉을 담는 대접을 놓는다. 대접은 항상 밑을 받치는 쟁반과 한 벌을 이룬다. 7첩 반상의 음식은 반찬 가짓수가 5첩 반상보다 늘어난 것이다. 종지는 초고추장을 더해 3개이고, 찜이 추가되며, 전이 더 놓이며, 회를 올려 놓은 것이다. 유기로 만든 반상기 중 안성의 것은 안성맞춤이라 조선시대부터 많은 이들이 갖고 싶어 찾던 그릇이다.

주전자 / 44×30×35cm주형(鑄型)을 제작한 후 구리와 주석을 합금하여 녹인 쇳물을 부어 제작하는 주물기법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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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제촛대 / 24×22×88cm전통 주물기법으로 주재료는 구리와 주석이 사용되었다.

유등 / 21×53cm유등은 전기가 없던 시절에 어둠을 밝힐 수 있는 조명기구 중 하나이다. 유등은 세 가지 구조로 되어 있는데 가장 아래쪽에는 판 형태의 원형 접시를 놓고, 그 위로 기름종지를 매달 수 있도록 수직의 기둥을 세우며, 기둥에 기름을 넣는 작은 종지를 넣을 수 있는 구조이다. 건물의 규모에 따라 유등의 크기도 달라져 궁궐의 전각에는 크기가 큰 유등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제작과정

주조방법으로 유기를 제작하는 과정은 1) 번기 만들기와 쇳물 붓기를 하는 부질간 작업, 2) 표면을 깎고 본색을 내는 가질간 작업, 3) 표면에 장식을 더하는 장식간 작업으로 분업화되어 있다. 각 공정마다 필요한 여러 가지 다양한 도구가 사용된다.

부질이란 녹인 쇳물을 주형[틀]에 부어 원하는 기물을 만드는 과정이다. 부질간에는 풀무질로 바람을 넣어 쇠를 녹이는 화덕이 있다. 쇳물을 준비하는 동안 쇳물이 들어가 기물이 될 번기의 형태를 만든다. 이 과정은 먼저 원본을 ‘향남틀’ 속에 넣고 ‘송탄가루’를 뿌린 다음 갯토를 채워 넣고 ‘달구개’로 다지고 ‘흙칼’로 표면을 고른다. 이렇게 주물사(鑄物沙)를 만들고, 주형 만들기를 한 다음 물칠을 하여 ‘무집’을 붙인다. 암틀과 수틀도 같은 방법으로 만든 다음 암틀의 번기 주변에 ‘숟가락’으로 도랑을 파듯 물줄을 내고 표면의 이물질은 ‘깃털’로 제거하고 다듬으며, 쇳물이 잘 스며들도록 그을음질을 한다.

번기를 만드는 동안 미리 화덕에 불을 지펴 놓고 재료를 용해시켜 그을음질이 끝난 번기가 식지 않는 상태에서 쇳물을 주입할 수 있도록 준비해 놓는다. 그 사이에 구리 72%와 주석 28%를 저울로 달아 ‘도가니’에 넣고 풀무질을 계속하여 900도 이상에서 끓인다. 도가니를 ‘집게’로 들어올려 ‘부지래’로 불순물을 제거한 후 쇳물을 붓는다.

가질은 부질하여 만든 기물의 표면을 깎고 다듬어 유기가 가진 본래의 색을 내는 과정이다. 가질대의 회전축에 ‘머리목’을 끼우고 기물을 ‘망치’로 쳐서 고정시킨 다음 ‘질나무’를 걸쳐 점점 안쪽으로 위치를 조정한다. ‘물멕이’로 ‘물통’의 물을 찍어 기물에 물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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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쇳물붓기

2. 갯토 뿌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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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기물 빼내기1

4. 기물 빼내기2

약력
  • 1949년 10월 12일           안성 출생
  • 1986년~87년                 전승공예대전 입선(11~12회)
  • 1991년                         경기도 우수공예기능인 지정
  • 1991년                         제23회 전승공예대전 장려상
  • 1992년                         제22회전국공예품경진대회특선
  • 1993년                         제23회전국공예품경진대회특선
  • 1998년                         제28회경기도공예품경진대회특선
  • 1999년                         제2회전국관광기념품공모전특선
  • 2000년                         제1회경기도우수관광기념품공모전동상
  • 2008년 8월 5일              문화재청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 기능보유자 인정
  • 2006년                         소상공인 대통령상 수상
  • 2013년                         재단법인 예올 올해의 장인 선정
  • 2014년 6월~7월             진흥원 구 서울역사 박물관 전시(‘2014 공예플랫폼’)

‘뜨거운 쇳물에 혼을 녹이다’ 유기장 김수영

‘뜨거운 쇳물에 혼을 녹이다’ 유기장 김수영(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 보유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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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헌
사진
서헌강 문화재전문 사진작가
영상자료
문화유산채널 http://www.k-heritage.tv
발행2014.0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