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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4호]대목장(大木匠) | 중요 무형 문화제

문성식 2012. 3. 30.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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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중요무형문화재 74호
명 칭 대목장(大木匠)
분 류 공예기술
지정일 1982.06.01
소재지 전국



※ 본문설명

대목장은 나무를 재목으로 하여 집짓는 일에서 재목을 마름질하고 다듬는 기술설계는 물론 공사의 감리까지 겸하는 목수로서 궁궐, 사찰, 군영시설 등을 건축하는 도편수로 지칭하기도 한다. 대목장은 문짝, 난간 등 소규모의 목공일을 맡아 하는 소목장과 구분한 데서 나온 명칭이며, 와장·드잡이·석장·미장이·단청장 등과 힘을 합하여 집의 완성까지 모두 책임진다. 즉 현대의 건축가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목조건축이 발달하여 궁궐과 사찰건물이 모두 목조였다. 따라서 목수에 주어진 벼슬 또한 상당하였다. 통일신라의 관직을 보면 목척(木尺)이 70인이라 하였는데, 그 가운데 상당수가 전문직으로서의 목수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목업에 벼슬이 주어졌고 조선시대에는 60인의 목장을 선공감에 두었고, 세종(재위 1418∼1450) 때 서울 남대문 재건기록에 의하면 대목이 정5품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목수에게 벼슬을 주는 제도가 없어졌다. 오늘날에는 사찰이나 개인의 집을 목조로 짓는 것으로 기술의 명맥이 전수되어 오는 형편이다.

대목장은 그 기법이 엄격히 전승되기 때문에 기문(技門)이 형성되어 있다. 기문은 기술로서 한 가문이 만들어지는 것인데, 기문에서의 대목장은 절대권위를 누린다. 대목장은 능력에 따라 새로운 기법이 도입되기도 하고 기능이 향상되기도 하며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기도 한다.

대목장은 전통적인 공예기술로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대목장 기능보유자로는 경복궁을 중건할 때 활약하였던 도편수 최원식-조원재-이광규로 이어지는 기문의 계승자로 신응수 씨와 김덕희·김중희 계열의 전흥수와 최기영 씨, 그리고 조원재·배희한으로 이어지는 고택영 씨가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 보충설명

대목은 궁궐이나 불전(佛殿), 가옥과 같은 것을 축조하는 목수를 말한다.

나라에서 큰 역사가 시작되면 도감(都監)이 열린다. 도제조(都提調)를 비롯하여 제조(提調)와 감역관(監役官)들이 정해지면 지유(指諭)에게 명하여 행수(行首)들로 하여금 목장(木匠), 석장(石匠), 야장(冶匠), 와장(瓦匠), 화원(畵員)들을 동원 조직하게 한다.

목조건축물일 경우는 목장이 위주가 되는데 목장은 국가에 예속된 사람들과 민간에서 차출된 기능인들로 구성되며 전문에 따라 분야를 맡는다. 조선조에서의 조직은 도변수(都邊首), 편수 (片手)를 정점으로 삼는다. 도대목(都大木)이라고도 하는데 일을 총괄하는 우두머리로 지을 집의 법식(法式)을 정하고 맡을 일의 분담과 기법을 지도하는 소임을 감당한다. 현대의 건축가라 할 수 있다.

신라에 초빙된 백제의 아비지(阿非知)도 그런 건축가였다. 신라의 대소장인을 동원하여 황룡사구층탑(皇龍寺九層塔)을 짓는데 현존하는 유지(遺址)에서 보면 사용된 기와마저도 백제의 특성을 갖고 있다. 아비지가 모든 분야를 관장하였다는 증거가 된다. 이런 도대목의 능력은 후대에도 계승된다.

서울의 남대문을 비롯한 여러 건축물의 상량문(上樑文)이나 묵서명(墨書銘)에 기록된 내용에서 당시 대목들의 조직과 이름을 읽을 수 있는데 남대문의 경우는 좌우의 부변수(副邊首), 부사목(副司木)을 도편수가 거느렸다. 부편수들은 치목(治木)과 조립(組立)을 각기 분담하는데 치목(治木)에서는 목재의 벌목과 운반, 제재까지 관여하고 조립에서 방의 수장과 두껍닫이 설치까지 관장한다. 전공정을 두 분야에서 다 맡아 처리하는 방식이다. 이를 위하여 부편수들은 각 분야의 전문집단을 통솔한다. 제재하는 일만 도맡은 기거장(岐鋸匠)이나 큰 나무를 다듬어내는 선장(船匠) 등도 그의 수하에 든다. 도목수는 석수(石手), 야장(冶匠), 소목장(小木匠), 이장(泥匠), 와장(瓦匠), 도배장(途褙匠), 화원(畵員)까지도 지휘한다. 대목들이 구축해주는 뼈대가 진척되어야 시공이 가능하기 때문에 일은 저절로 그렇게밖에 진행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건축의 공역은 민간에서도 이루어진다. 마을에서 소문난 대목(大木)을 초빙한다. 능력있다고 평가된 기문(技門)의 소속 도대목이 그 일을 맡아 조직을 단출하게 해서 일을 했다.

대목장 보유자로 인정된 고 배희한과 신응수는 각기의 특질을 지녔다. 배옹(裵翁)은 사가(私家)의 일을 차근히 하는 데 특장이 있는 분이고 신응수는 도대목(都大木)으로서 큰 조직을 운영하고 지휘하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다. 배옹이 섬세하고 새틋한 작품을 차분하게 완성시킨다면 신옹은 수십 명의 조직을 가동시켜 불국사(佛國寺) 대웅전(大雄殿)의 일부를 조성하는 등 대규모 공역을 감당한다.

1914. 7. 13 - 2004. 12. 19 | 보유자 인정: 1997년 3월 24일

 

한옥의 전경은 어딘가 모르게 반듯한 선비의 기개를 닮았다. 곧은 수평선이 여러 겹 겹치면서 중심을 단단히 잡는다. 가벼운 감정에 휩쓸려 촐랑대고 출렁거려서는 안 되며 하늘을 향한 허황된 과욕을 엄하게 경계한다. 한눈 팔지 않고 앞을 똑바로 응시하며 인간의 본성에 치중해서 인격을 갈고 닦으라는 유교의 인본주의 가르침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하루에도 십 수 번을 들락거리며 바라보고 그 속에 직접 들어가서 매일을 생활하는 곳이 집이기 때문에 집이 어떻게 생겼느냐는 사람의 인격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이는 현대의 환경심리학을 통해서도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이려니와, 한옥에서는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집의 교화기능을 알아채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 임석재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

집 짓는 건축가, 대목장

대목장은 나무를 재목으로 삼아 집을 짓는 목수를 일컬으며, 문짝이나 가구 등 소규모의 목공일을 맡아 하는 소목장과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목조건물을 지을 때에는 와장, 드잡이, 석장, 미장이, 단청장 등과 힘을 합하여 재목을 마름질하고 다듬는 기술설계부터 공사의 감리까지 책임지고 완성시켜야 하므로 현대의 건축가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고건축을 이룩한 장인에 대한 기록을 더듬는 데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궁궐영견의궤주례고공기] 등이 인용되고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장인(匠人)을 공장(工匠), 대장(大匠), 목업(木業), 공기(工技), 도편수(都邊手, 都片手), 편수(片手), 장인(匠人), 상대목(上大木) 등으로 이름하였다. 고려시대의 건축직제는 건축기술진이 총책임자를 목업지유라 하고 부책임자는 석업지유로 하였으며, 그 하부에 화업지유, 소목장지유, 목업행수교위(木業行首校尉), 조각장지유, 야장행수(冶匠行首)를 두었다. 조선시대에는 세종 때 숭례문(서울 남대문) 수리공사에 종사하는 공장 가운데 목공의 총책임자를 대목이라 하였고 정오품 사직이라는 관직도 부여하였다. 성종 때 대목의 관직은 정상품 어모장군(御侮將軍)에 봉하였다. 조선 고종 때 서울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울 동대문) 중건의 건축직제는 목수편수(木手邊手)를 총책임자로 하고 그 하부에 공답, 연목, 수장, 단청, 조각, 목혜, 가칠, 석수, 야장, 정현 등의 편수와 선장소임, 기거소임 등을 편성하였다.


목수장인에 대하여 고려와 조선초기에는 대목장이라는 명칭으로 불렸으나 조선후기에는 도편수라는 명칭이 등장하고 있다. 해방 이후 전통 목조 건축을 짓는 기술이 사라져갈 위기에 처하자, 이러한 도편수의 기술을 보존하고 전승하기 위하여 198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을 지정하였다. 당시 보유자로는 이광규 선생과 조원재 선생이 인정되었으나, 그분들의 사후 조원재, 이광규 선생의 맥을 이은 신응수 선생이 1990년 인정되었고, 조원재, 배희한 선생의 맥을 이은 고택영 선생이 1997년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선생의 손길이 닿은 전국 150여 채의 고건축들

고택영 선생은 1914년 7월 13일 전북 부안군 동진면 동전리에서 태어났다. 11세까지 한문을 수학하고 29세 되던 해인 1941년 전북 부안군 동진면 동전리에서 당숙 고은천 선생이 목수였던 관계로 목공일에 뛰어 들게 되었다. 당시 목수는 배고픈 직업이라는 이유로 당숙이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목수가 될 것을 결심한 고택영 선생은 도목수 심태점 선생에게서 한옥 목수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1942년에는 정읍군 운학동에 위치한 나용균 선생(전 국회부의장)의 문중에서 실을 짓는데 참여하여 목수의 자질을 인정받았고 본격적으로 목수수업을 하기 위해 상경하게 된다.


서울에 올라와서 당시 답십리 인근에서 한옥 짓는 일에 종사하다가 종로에 있는 조계사에서 대목공사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조계사로 찾아갔다. 이때 조계사에서는 6.25 한국전쟁 때 파괴된 대웅전(우측: 동 측추녀가 파손됨)을 보수하고 있었다. 여기서 조원재  선생을 만나게 되는데 이때부터 조원재 선생의 문하생이 되어 한식목공기법을 정식으로 배우게 된다. 조계사 대웅전 보수 시에 고택영 선생에게 꽃살문을 짜게 했는데 그때 만든 문이 지금도 남아 있다. 조원재 선생은 꽃살문을 만든 것을 보고 그 섬세함과 정교함에 목수로서 대성할 것을 기대하고 남대문 수리현장에도 종사하게 하였다. 10여년 동안 전북지방에서 작은 민가를 지으면서 자귀질, 대패질, 끌질 등 치목의 포에서 일을 하였으나 서울에 올라와서는 궁궐이나 사원의 법당건축에서 포집 등 거대하고 복잡한 건물을 대하게 되자 민가에서 하는 것과 같이 간단하게 되지 않았다. 고택영 선생은 고건축에 대한 전통기법을 알고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설계도본작성법, 먹줄치는 법, 선자연(扇子椽)거는 법 등에 대해서 조원재 선생으로부터 체계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이후 1960년에 배희한  대목장을 사사하게 된다. 이때, 충북 증원군 연풍면 정기용 박사 고택을 보수하면서 한옥건물의 해체 및 조립에 대해 배우게 된다. 또한 고건축 기능을 보유하면서 풍수지를 연구하게 된다. 도편수로서 건물을 지을 때는 좌향(坐向)과 장풍(藏風) 등 기본적인 배치원리를 알아야 하는데 고택영 선생은 어렸을 때 배운 한문을 토대로 하여 근래의 목수로서는 보기 드물게 풍수에 일가견을 갖고 있었다. 김복술 선생에게 좌향론을 배워 집터 잡는 법을 깨우치고 본인이 이를 정리하여 양지배합생기법(陽地配合生氣法)이라는 이론을 세우고 옛 선현들께서 지어 놓은 집과 명당을 찾아 다니면서 본인이 세운 이론과 맞는지의 여부를 확인하는 학술적인 장인이라 할 수 있다. 고택영 선생의 손길이 닿은 고건축은 100여건 150여 채에 이른다. 사찰로는 영암 도갑사 해탈문, 합천 해인사 장경판고, 강화 전등사 원통전, 구례 화엄사 대웅전, 김제 금산사 대적광전, 전주 정혜사 보광전, 승주 송광사 국사전, 장흥 보림사 대적광전 등이 있고, 일반 고건축으로는 서울 남대문과 경복궁, 파주 자운서원 등이 있다. 선생에게서 기술을 전수받은 김인서, 전명복, 장춘종, 김영성, 이의찬 등 20명의 문하생들은 ‘해강회(海崗會)’를 조직하고 대목기술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주요작품
 
장흥보림사 대적광전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이다. 원표(元表)가 세운 암자에다 860년경 신라 헌안왕(憲安王)의 권유로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이 창건하여 선종(禪宗)의 도입과 동시에 맨 먼저 선종이 정착된 곳이기도 하다. 가지산파(迦智山派)의 근본도량이었으며, 인도 가지산의 보림사, 중국 가지산의 보림사와 함께 3보림이라 일컬어졌다
 
완주 화암사극락전 / 하앙식 구조
포장형식 중에서 특수한 예로, 국내에서는 완주 화암사 극락전에 유일한 예가 남아있다. 하앙식이란 하앙이라 부르는 살미 부재가 서까래와 같은 경사를 가지고 처마도리와 중도리를 지렛대 형식으로 받치고 있는 공포 형식을 말한다.
고택영 선생이 사용하던 작업도구

대목장은 목조건물을 짓는 목수 중 우두머리이다. 대목일은 현대의 건축가와 마찬가지로 초석을 까는 석수, 기둥을 세우는 목수, 벽체를 바르는 미장, 기와를 씌우는 와장 등 수 십 명에서 수백 명을 총괄한다. 집을 지을 때에는 규모가 큰 나무를 켜고 자르고 다듬어야 하므로 소목과 같은 종류의 도구라 하더라도 크기가 큰 톱이나 자귀, 대패 등을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1)탕개톱(틀톱): 톱에 틀이 붙어 두 사람이 서로 밀고 당기어 켜게 되는 톱이다. 톱 위에 탕개줄을 엮고 중간에 탕개목을 설치하여 탕개목을 돌려 탕개줄이 단단히 고정되면 사용한다.

 

2)평대패: 가슴에서 밖으로 밀어내는 우리 전통 대패로 덧날 없이 어미날만을 가지고 깎는다. 평면을 만드는 대패로 경쾌하게 잘 깎이는 장점이 있지만 다소 거칠고 엇결 및 옹이 등을 깎을 때 어려운 단점이 있다. 이처럼 전통대패는 앞으로 밀어 깎는 방식이나 근래에는 앞으로 당기는 일본식 대패를 사용하고 있다. 크고 긴 부재를 대패질 할 때는 미는 대패가 능률적이고 세밀한 작업에는 당기는 대패가 좋다. 보통 마름질에 따라 막대패(초년대패), 중대패, 잔대패(마무리대패)로 구분한다.

 

3)도끼: 원목의 겉목을 치거나 가지치기, 옹이를 제거할 때 주로 사용한다.

약력
1914년 7월
출생
1954년
서울 조계사, 진주 촉석루 보수공사 참여
1965년
경남 합쳔 해인사 장경판고 보수공사
1970년
전남 구례 화엄사 대웅전, 명부전, 천왕문, 금강문 해체 보수공사
1974년
경복궁 경회루 보수공사
1986년
논산 관음사 대웅전 신축공사
1989년
충남연기군 미암사 대웅전 신축공사
1996년
전남 장흥 보림사 대적광전 신축공사
1997년 3월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 기능보유자 인정
2001년
전북 부안군 실상사 복원공사
2004년 12월
노환으로 별세

한국문화재보호재단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은 문화재보호법 제9조에 근거하여 우리 전통문화를 널리 보전, 선양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공공기관입니다.

 

공식블로그 : http://blog.naver.com/fpcp2010

사진 서헌강(문화재전문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