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목 중요무형문화재 67호
명 칭 탕건장 (宕巾匠)
분 류 공예기술
지정일 1980.11.17
소재지 제주전역
※ 본문설명
탕건은 남자들이 갓을 쓸 때 받쳐 쓰는 모자의 일종으로, 사모(紗帽)나 갓 대신 평상시 집안에서 쓰며 말총이나 쇠꼬리털로 만든다. 이러한 탕건을 만드는 기술과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을 탕건장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관직자가 평상시에 관을 대신하여 썼고, 속칭 ‘감투’라고도 하여 벼슬에 오르는 것을 일컫는 ‘감투쓴다’는 표현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한국의 탕건은 중국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고구려 벽화나 고대의 관모에서 변화된 것인지 밝히기가 어렵지만, 고려시대에는 중국 송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신라의 최치원이나 고려시대 인물인 이색, 정몽주 등을 그린 고려 후기의 초상화에서 쓰고 있는 모자가 탕건모양과 같기 때문이다. 이 모양은 조선 전기까지 이어진다.
탕건은 우리나라의 말총이 대부분 제주도에서 생산되기 때문에 제주도에서 가장 많이 만들어졌다. 탕건은 홑탕건과 겹탕건, 바둑탕건으로 분류된다. 모두 형태는 같으나 겹으로 또는 2중, 3중으로 엮어 나가는 방법에 따라 모양이 달라진 것이다. 바둑탕건은 사각무늬를 놓은 것인데, 이는 탕건이 독립된 모자 구실을 함에 따라 장식화된 것이다.
탕건장은 전통적인 공예기술로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제주도 김공춘 씨가 탕건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어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 보충설명
탕건은 말총이나 쇠꼬리털로 제작하는 남성용 모자의 일종이다. 총모자라고 하면 갓의 위로 솟은 모자 부분, 즉 총대우를 가리키는데 비하여 탕건은 독립된 모자 역할을 하는 점이 다르다. 즉 탕건은 사모(紗帽)나 갓 대신 평상시에 쓰는 모자이다. 갓이 외출할 때 의관을 정제하는 데 필요한 것이라면 탕건은 집 안에서 맨 상투로 놔둘 수 없기 때문에 간편하게 착용하는 것으로 정자관(程子冠)사방관(四方冠) 등과 성격을 같이한다.
탕건은 그 형대로 보아 복두, 사모 따위의 영향을 받아 생긴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복두와 사모가 뒤쪽에서 좌우로 길게 뿔을 꽂아 쓰는 데 비하여 탕건에는 그런 뿔을 덧붙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탕건은 앞면을 오금하고 잘룩하게 맵시를 부려서 꾸몄지만 딱딱한 구조가 아니라 말총의 유연한 엮음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평소 착용하는 데 부담을 주지 않고 또 잘 망가지지도 않는다. 말총은 또한 깁과 달라서 땀이나 기름때가 잘 묻지 않는다.
『경국대전』의 경공장(京工匠)에는 탕건장이라는 장색(匠色)이 없고 종모아장이 총감투를 제작했다. 정조 연간의 기록에 의하면 상의원에 속한 총장이 탕건과 총모자를 제조 판매하는데, 그 판매권을 놓고 상점과 분쟁했음을 보면 이미 사사로운 제조 판매품으로 널리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규합총서』에서는 팔도물산(八道物産)을 열거하는 가운데 평북 정주의 탕건과 평남 안주의 총감투를 들었다. 『오주연문장전산고 五洲衍文長箋散藁』의 물산변증설(物産辯證說)에서는 정주(定州)의 총건을 명물로 꼽았다. 이것으로 보면 총모자 일은 확실히 관서지방에서 성행되었는데 현재로선 그 잔재를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18세기초 이형상(李衡祥)의 『남환박물지 南宦博物志』공조(貢條)에 보이듯이 제주도에 있어서의 총결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제주도에는 탕건을 엮을 줄 아는 여성이 적지 않으며 또 남도지방에 산재 하는 탕건장 역시 제주 태생의 여성들이 대부분이다. 제주의 탕건은 홑탕건(소탕 疏宕)과 겹탕건(밀탕 密宕)이 있으며 그밖에도 바둑탕건이 있다. 바둑탕건이란 이중사망(二重絲網), 삼중사망(三重絲網), 오중사망(五重絲網)의 기법으로 사각 무늬를 놓은 것이며, 이는 탕건이 독립된 모자 구실을 함에 따라 장식화한 변형이다.
1918. 5. 2 ~ | 보유자 인정: 1980년 1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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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발전한 독특한 관모공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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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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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탕건, 김공춘, 21x16cm
- 바둑탕건
- 바둑무늬의 탕건으로 남자들이 갓을 쓸 때 받쳐쓰는 모자의 일종으로 사모나 갓대신 평상시 집안에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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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탕건, 김공춘, 21x16cm
- 접탕건
- 남자들이 갓을 쓸 때 받쳐 쓰는 모자의 일종으로 사모나 갓대신 평상시 집안에서 쓴다.
제작도구와 작업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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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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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관 제작모습
정자관은 첫관, 중간관, 막관을 따로 제작한 후 줄머리, 관꼭대기를 연결하여 만든다.
정자관의 막관을 제작하는 모습
약력
- 1918
- 제주도 화북 출생
- 1975
- 제3회 육영수여사배 전국공예품 경진대회 입상
- 1980
- 제5회 전승공예전 입선
- 1980
- 중요무형문화재 제67호 탕건장 기능보유자 인정
- 1981-1992
- 제6회 전승공예전(한국민속박물관)~제12회 전승공예전 출품
- 1982
-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 행사 감사패
- 1985 / 2000
- 중요무형문화재 기록영화 제작
- 2009
- 중요무형문화재 제67호 탕건장 명예보유자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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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 10. 18. ~ | 보유자 인정: 2009년 9월 25일
둘째양반은 뿔관(정자관)을 쓰고 셋째양반은 감투(탕건)를 쓰고 부채를 들고 병신 걸음으로 등장. 새맥시는 노란저고리에 붉은 치마에 전복을 입고 족도리를 썼다. 춤을 추면서 장내를 한 바퀴 돌고 중앙에 오면 말뚝이가 난데없이 등장한다. - 은율탈춤 제4과장 양반춤 중에서
남자의 품격, 탕건
탕건은 남자들이 갓을 쓸 때 받쳐 쓰는 모자의 일종으로 머리를 보호하고 상투가 흐트러지지 않게 하기 위해 사용하였는데, 사모(紗帽)나 갓 대신 평상시 집안에서 쓰는 모자로 독립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탕건을 만드는 기술과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을 탕건장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평상시에 관을 대신해 썼는데 속칭 ‘감투’라고도 하며, 벼슬에 오르는 것을 일컫는 ‘감투 쓴다’는 표현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한국의 탕건은 중국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고구려 벽화나 고대의 관모에서 변화된 것인지 밝히기가 어렵지만, 고려시대에는 중국 송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신라의 최치원이나 고려시대 인물인 이색, 정몽주 등을 그린 고려 후기의 초상화에서 쓰고 있는 모자가 탕건모양과 같기 때문이다. 이 모양은 조선전기까지 이어진다. 탕건의 재료로는 말총이 사용되었는데 특히 제주도의 조랑말총은 말총이 가늘고 질기며 부드럽고 매끈하기 때문에 최고의 재료로 꼽혀 탕건은 제주도에서 가장 많이 만들어졌다. 제주도는 본래 육지보다 시국이 안정되고 조용한 곳이어서 관모공예가 성행하였는데 그 이유는 제주도에서 좋은 말총이 생산되어 제주도 부녀자들이 차분히 앉아서 가내공업으로 탕건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말총은 흠이 있으면 도중에 끊어지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흠이 있으면 안된다. 짧은 것보다는 긴 것이 좋다. 제주도 말총은 대부분 노란 것이 많아서 작품이 완성된 후 까만 염색을 한다. 만들기 전에 염색을 하면 신축성이 없고 부드럽지 못해서 쓰기가 불편하다. 한편, 탕건은 홑탕건과 겹탕건, 바둑탕건으로 분류된다. 모두 형태는 같으나 겹으로 또는 2중, 3중으로 엮어 나가는 방법에 따라 모양이 달라진다.
바둑탕건은 사각무늬를 놓은 것인데 이는 탕건이 독립된 모자 구실을 함에 따라 장식화된 것이다. 정자관은 정자[程子, 중국 송나라의 정명도(程明道, 1032~1085)와 정이천(程伊川, 1033~1107) 두 형제를 말하며 이(二)정자라고도 한다]가 창안하여 만들어 썼다고 전해지는 것으로 고려시대 선비들이 많이 사용했으며 모양이 탕건과 비슷하고 만드는 방식도 같았다. 정자관은 가장 높은 관직이 사용하던 3층 정자관부터 2층, 단층까지 3종류로 나뉜다.
조선시대의 관제에는 정자관 외에도 동파관, 충정관 등이 있었는데 각자 자신의 취향대로 개성에 맞는 관을 선택하여 즐겨 썼다. 위의 세봉우리는 터져 있는 형태인데, 대체로 지위가 높을수록 층이 많은 것을 썼다. 탕건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신분적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됐으나, 1894년 단발령 이후 그 제작과 생산이 줄어들면서 쇠퇴하게 되었다.
모녀간 전승되는 제주 여인의 삶, 2대 탕건장 김혜정 선생
중요무형문화재 제67호 탕건장 기능보유자인 김혜정 선생은 어머니인 김공춘 선생(탕건장 명예보유자)으로부터 10여 세 전후의 어린 나이부터 탕건 제작 기술을 배웠다. 탕건장 1대 기능보유자인 어머니의 성정과 솜씨를 고스란히 물려받아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탕건을 만들어 왔다.
15살쯤 되었을 때 탕건청이라고 부르는 일청에서 여럿이 일을 했다. 그때부터 탕건 하나를 거뜬하게 짜냈다고 한다. 당시에는 조천읍과 화북동, 삼양동 등지에 밀집되어 있던 탕건청은 오늘날의 공예촌을 방불케 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일을 했다고 한다.
선생의 집안은 증조할머니부터 집안 대대로 탕건을 짜왔다고 한다. 어머니는 7살 때 고모님께 탕건을 배웠고 김혜정 선생은 어머니인 김공춘 선생의 솜씨를 물려 받은 것이다. 1950년대 이후 제주도에서 말총공예가 급격히 사라지기 시작하였는데 당시 탕건 한 개의 값이 쌀 1되가 못되었다고 한다. 1986년에는 15일에 한 개를 만드는 홑탕건과 겹탕건이 한 개에 6만원, 바둑탕건은 한 개에 7만원 정도를 받았다.
“부드러운 것만을 골라서 손질한 말총이 머리카락 같지요? 이게 이렇게 가늘고 부드러워도 엄청 질겨요.”
말총의 성질은 형태가 뒤틀어지지 않아 관모 제작에 무척 적합하다. 게다가 말총은 가볍고 땀을 잘 흡수할 뿐만 아니라 더러움이 잘 타지 않아 위생적이기까지 하다. 말이 제공해 주는 질 좋은 말총을 허투루 보지 않았던 선조들의 지혜를 새삼 깨닫게 한다. 이처럼 말총을 재료로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뽐내는 탕건은 앞은 낮고 뒤는 높으며, 중간에 턱이 진 모양으로 결을 내는 방법에 따라 ‘홑탕건’과 ‘겹탕건’으로 나뉜다. 여기에 더 섬세한 작업으로 아름다운 바둑문양이 들어간 바둑탕건이 있다. 이와 같은 섬세한 기술이 필요한 제작기법이 오늘날 김혜정 선생의 손을 통해서만 전승되고 있는 것이다. 선생은 어머니인 김공춘 선생이 명예보유자로 인정되면서 2009년 중요무형문화재 탕건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탕건일은 다시 보유자 집안의 가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딸이 객지생활을 고집하지 않고 탕건일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뒤를 이어 제주 여성들이 간직했던 솜씨를 이어가는 탕건장 김혜정 선생이 조선시대의 관모 문화와 제주가 낳은 말총공예의 내일을 다시 선생의 딸과 함께 엮어가고 있는 것이다.
주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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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관, 36×27cm정자관은 벼슬이 높고 격식을 갖춘 재상들이 집에서 망건과 탕건 위에 덧쓰던 관으로 위는 터지고 세봉우리로 되어 있다. 말총으로 세 개의 관을 각각 만든 후 연결시켜서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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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탕건, 20×17cm탕건은 남자들이 갓을 쓸 때 받쳐 쓰는 모자의 일종이며 집에서도 의관을 정제하기 위해 간편하게 착용하기도 하였다.
제작과정
홑탕건과 겹탕건은 탕건을 엮어 나가는 방법에 따라 홑으로 1번만 엮어나가면 홑탕건, 2중·3중으로 엮어 나가면 겹탕건이 된다. 또 겹으로 엮어 나가면서 문양과 모양이 달라진다. 홑탕건이란 엮어 나갈 때 홑겹으로 하는 것을 말하며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다.
탕건 제작은 탕건과 비슷하게 만들어진 크고 작은 탕건골에다 대고 매듭으로 엮어 나가는데 탕건을 엮어서 완성될 때까지는 여러 가지 단계를 거치게 된다. 탕건은 세공제작이기 때문에 공구 역시 그렇게 복잡하지 않고 규모도 크지 않다. 탕건은 말총으로 만들기 때문에 말총을 다루는 공구가 발전하였는데 탕건의 모양을 이루는 탕건틀과 같은 공구가 대부분이고 그 외에 체떼기, 바늘과 칼 등이 있을 뿐이다.
![]() 1. 말총가닥 빼서 고르기 |
![]() 2. 맺어가기 |
![]() 3. 맺어가기 (2) |
![]() 4.맺어가기 (3) |
-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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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년 출생
- 1981년 제6회 전승공예대전 입선 (그외 7,8,9,10,11,16회 입선)
- 198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67호 탕건장 이수자
- 2008년 중요무형문화재보유자작품전 출품
- 2009년 부천 세계무형문화엑스포 출품
- 2009년 중요무형문화재 제67호 탕건장 기능보유자 인정
- 2010년 무형문화재전수회관 제주전통학교 강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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