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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호]탕건장 (宕巾匠)중요 무형 문화제

문성식 2012. 3. 30. 04:22


종 목 중요무형문화재 67호
명 칭 탕건장 (宕巾匠)
분 류 공예기술
지정일 1980.11.17
소재지 제주전역



※ 본문설명

탕건은 남자들이 갓을 쓸 때 받쳐 쓰는 모자의 일종으로, 사모(紗帽)나 갓 대신 평상시 집안에서 쓰며 말총이나 쇠꼬리털로 만든다. 이러한 탕건을 만드는 기술과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을 탕건장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관직자가 평상시에 관을 대신하여 썼고, 속칭 ‘감투’라고도 하여 벼슬에 오르는 것을 일컫는 ‘감투쓴다’는 표현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한국의 탕건은 중국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고구려 벽화나 고대의 관모에서 변화된 것인지 밝히기가 어렵지만, 고려시대에는 중국 송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신라의 최치원이나 고려시대 인물인 이색, 정몽주 등을 그린 고려 후기의 초상화에서 쓰고 있는 모자가 탕건모양과 같기 때문이다. 이 모양은 조선 전기까지 이어진다.

탕건은 우리나라의 말총이 대부분 제주도에서 생산되기 때문에 제주도에서 가장 많이 만들어졌다. 탕건은 홑탕건과 겹탕건, 바둑탕건으로 분류된다. 모두 형태는 같으나 겹으로 또는 2중, 3중으로 엮어 나가는 방법에 따라 모양이 달라진 것이다. 바둑탕건은 사각무늬를 놓은 것인데, 이는 탕건이 독립된 모자 구실을 함에 따라 장식화된 것이다.

탕건장은 전통적인 공예기술로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제주도 김공춘 씨가 탕건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어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 보충설명


탕건은 말총이나 쇠꼬리털로 제작하는 남성용 모자의 일종이다. 총모자라고 하면 갓의 위로 솟은 모자 부분, 즉 총대우를 가리키는데 비하여 탕건은 독립된 모자 역할을 하는 점이 다르다. 즉 탕건은 사모(紗帽)나 갓 대신 평상시에 쓰는 모자이다. 갓이 외출할 때 의관을 정제하는 데 필요한 것이라면 탕건은 집 안에서 맨 상투로 놔둘 수 없기 때문에 간편하게 착용하는 것으로 정자관(程子冠)사방관(四方冠) 등과 성격을 같이한다.

탕건은 그 형대로 보아 복두, 사모 따위의 영향을 받아 생긴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복두와 사모가 뒤쪽에서 좌우로 길게 뿔을 꽂아 쓰는 데 비하여 탕건에는 그런 뿔을 덧붙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탕건은 앞면을 오금하고 잘룩하게 맵시를 부려서 꾸몄지만 딱딱한 구조가 아니라 말총의 유연한 엮음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평소 착용하는 데 부담을 주지 않고 또 잘 망가지지도 않는다. 말총은 또한 깁과 달라서 땀이나 기름때가 잘 묻지 않는다.

『경국대전』의 경공장(京工匠)에는 탕건장이라는 장색(匠色)이 없고 종모아장이 총감투를 제작했다. 정조 연간의 기록에 의하면 상의원에 속한 총장이 탕건과 총모자를 제조 판매하는데, 그 판매권을 놓고 상점과 분쟁했음을 보면 이미 사사로운 제조 판매품으로 널리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규합총서』에서는 팔도물산(八道物産)을 열거하는 가운데 평북 정주의 탕건과 평남 안주의 총감투를 들었다. 『오주연문장전산고 五洲衍文長箋散藁』의 물산변증설(物産辯證說)에서는 정주(定州)의 총건을 명물로 꼽았다. 이것으로 보면 총모자 일은 확실히 관서지방에서 성행되었는데 현재로선 그 잔재를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18세기초 이형상(李衡祥)의 『남환박물지 南宦博物志』공조(貢條)에 보이듯이 제주도에 있어서의 총결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제주도에는 탕건을 엮을 줄 아는 여성이 적지 않으며 또 남도지방에 산재 하는 탕건장 역시 제주 태생의 여성들이 대부분이다. 제주의 탕건은 홑탕건(소탕 疏宕)과 겹탕건(밀탕 密宕)이 있으며 그밖에도 바둑탕건이 있다. 바둑탕건이란 이중사망(二重絲網), 삼중사망(三重絲網), 오중사망(五重絲網)의 기법으로 사각 무늬를 놓은 것이며, 이는 탕건이 독립된 모자 구실을 함에 따라 장식화한 변형이다.

1918. 5. 2 ~ | 보유자 인정: 1980년 11월 17일

 

 

 

각읍 수령이 겁을 내여
탕건(宕巾)바람 보선발로 대숲으로 달아나며
"통인아 공사궤(公事櫃) 급창아 탕건 주워라."
대도집어 내던지고 병부 입으로 물고
힐근 실근 달아날 제
본관이 겁을 내어 골방으로 달아나며
통인의 목을 부여안고
"날 살려라 통인아 날 살려라"

 

-[춘향전]의 암행어사 출두 대목

조선에서 발전한 독특한 관모공예

탕건은 조선에서 발전한 독특한 모자[冠]로, 성인 남자들이 갓을 쓸 때 받쳐 쓰는 의관이다. 탕건과 같은 종류의 남성용 관모는 중국이나 한국에서 모두 상투형 머리 모양[髮式]을 취한 다음 착용하였다. 탕건은 머리를 보호하고 상투가 흐트러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사용하였고, 또한, 갓 대신 평상시에 쓰는 모자로 독립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원래 탕건은 갓 속에 겹쳐 쓰던 것인데 후에 평상용으로 바뀐 것이다.

 

탕건은 언제부터 비롯하였는지 분명하지 않다. 다만 탕건의 유래와 관련해서 최남선이 견해를 제시하였다. 우리나라 고유의 관모 세 종류 중 탕건은 감투[坎頭]나 복두의 발전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이중 ‘감투’는 한자 ‘감두’라는 글자가 와전되었다고 보았는데, 조선 초기에는 사용 계층을 제한하는 논의가 여러 차례 보인다. 태종 16년(1416)에 관복 제도를 고치면서, 향리들이 평상시에 감투를 쓰고 평민이 쓰는 것은 금지하였다. 세종28년(1446)에는 감투를 비롯한 복색의 조건을 집현전이 의논하여, 3년 뒤인 세종 31년(1449)에 비로소 유품조사(流品朝士), 의관자제 등으로 제한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관직에 나간 벼슬아치로 계층을 제한하여 사용하던 감투는 머리를 감싸는 ‘머리동이’나 ‘두건’이라는 형식에서 복두나 사모의 영향을 받아서 형식적인 변모를 거쳤다. 감투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평상시에 거처할 때 착용하던 관모였는데, 중종 20년(1525)에는 조계상이라는 사람이 집에서 바둑을 둘 때 비단감투를 썼던 기록으로 확인된다.

 

그 밖에도 선비들이 썼던 다양한 관모에 대해서는 명종조 이제신이 [청강쇄어]에서 정자관, 주자관, 염계관, 동파관, 충정관, 방건 등의 관모를 열거하였다. 특히 이들 관모는 정자나 주자 및 소동파 등 중국의 유명한 학자들이 즐겨 쓰던 모자들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모자들은 실제로 조선에서 제작되고 유행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렇게 다양한 관모 중에도 탕건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탕건이라는 용어에 대한 용례는 1614년에 편찬된 [지봉유설]에서 정주의 탕건을 안주의 총감투나 통영의 총갓양태, 석성의 망건 등 여러 말총 공예품과 함께 팔도의 특산품으로 열거한 것이 최초이다. 이로 미루어 17세기경에는 이미 말총을 재료로 삼아서 총감투와 총갓, 망건과 탕건 등 여러 종류의 관모를 제작, 유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섬세한 손놀림으로 만들어지는 손끝공예

탕건장의 섬세한 손놀림으로 한 올 한 올 떠올려 만들어지는 탕건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애용하던 모자공예품이었다. 조선시대에 발간된 공인들의 법전이라고 할 수 있는 [대전회통 ]에 의하면 서울 중앙의 공전(工典)의 조직에는 경공(京工)과 상의원(尙衣院)에 사모장(紗帽匠) 등이 있으나 탕건을 어느 곳에서 만들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제주도에서 탕건이 성행한 것은 어느 때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조선시대 중엽 이후부터 시작되어 한말에 이르러 가장 성행하였다. 제주도는 본래 육지보다 시국이 안정되고 조용한 곳이어서 차분한 관모공예가 성행하였다. 고려 때는 몽고인들이 침입하여 몽고의 방갓, 즉 돌하루방의 모자와 같은 것이 성행하였는데 그 후 차츰 갓, 망건, 탕건 등이 성행하게 되었다.

 

제주의 탕건은 홑탕건[疎宕]과 겹탕건[密宕]이 있으며 그밖에도 바둑탕건이 있다. 바둑탕건이란 이중사망(二重絲網), 삼중사망(三重絲網), 오중사망(五重絲網)의 기법으로 사각 무늬를 놓은 것이며, 이는 탕건이 독립된 모자구실을 함에 따라 장식화한 변형이다. 말총이 풍부한 제주도는 말총공예의 본고장이었고, 탕건은 제주 여인이 삶을 영위하기 위한 생계 수단이었다. 가느다란 말총을 엮어 만든 탕건을 제작하는 탕건장은 타고난 집중력과 유연한 손놀림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데, 그 기술은 엄마에서 딸로 모녀간에 세습되었다.

모녀간에 세습되는 제주 탕건 기술

김공춘 선생은 1918년 5월 2일, 제주도 화북에서 아버지 김홍윤 선생과 어머니 박영선 여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평범한 편이었다. 7살(1925년)에 아버지가 일본의 공장에 취직하여 부모님은 일본으로 건너갔고, 선생은 할머니, 고모와 살면서 탕건 제작기술을 배웠다. 9살(1927년)이 되던 해에 일본에 가서 부모님과 상봉했으나, 이듬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제주도로 다시 건너와 살았다.

 

제주도에서 탕건 짜는 기술은 주로 모녀간에 세습되는 작업이었다. 제주도에서 태어난 여자 어린이가 10여세에 이르면 어머니의 무릎 앞에 앉아서 탕건 짜는 기술을 보고 익히면서, 15세쯤 되면 한 사람 몫을 스스로 해내게 된다. 선생도 다른 제주 여인들과 마찬가지로 가족에게 탕건을 배웠고 대대로 탕건을 짜던 가정으로, 할머니와 어머니가 모두 탕건을 잘 짰다. 선생이 예닐곱 살 되던 해에 열 살 위인 고모 김수윤 선생으로부터 탕건 짜는 기술을 배우기 시작하여, 일본에서 돌아온 13~14세 무렵부터는 내다 팔 수 있게 되었다. 선생이 어렸을 당시 화북에서는 해녀를 천하게 여겼기 때문에 바다에 나가지 못하게 했다. 따라서 일반가정에서도 특별히 다른 부업이 없으면, 해녀로서 물질을 하러 나가는 대신 온 동네의 아낙네들이 모여 탕건과 양태 및 총모자 등 말총 공예품을 부업으로 삼았다.

 

제주도에서 행해지는 탕건 작업은 제집 방안에 작업하던 탕건도구를 두고 밭일이나 바깥일을 보다가 여유 있을 때마다 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화북동에서는 대개 2~3명 혹은 6~7명의 또래들이 혼자 사는 동리의 여인 집에 모여 제작했다. 모여서 일하던 곳을 ‘일청’ 혹은 ‘탕근청(탕건청)’이라 불렀다. 선생도 탕건청에 가서 작업했는데, 탕건청은 대개 동네에서 혼자 사는 과부의 집이었다고 한다. 탕건청에 모이는 동네 처녀들은 비슷한 나이로 10~20명이 모여서 초저녁부터 11시경까지 작업하고 새벽에 일어나 집에 가서 밥을 먹고 밭일을 하러 나왔다. 동리의 탕건청에서는 또래들끼리 따로 모여 탕건을 만드는 풍습도 있었다. 탕건청에서 탕건을 만들 당시의 김공춘 선생은 젊은 나이에 눈도 밝았기 때문에 엉성한 탕건은 3일에 한 개 정도를 짰다고 한다. 이렇게 며칠이 걸려 완성시킨 탕건이 5개나 10개가 되면, 관덕정이나 화북 주변에 있는 삼양, 조천, 서안 등지에서 5일장이 서는 날 새벽에 내다 팔았다. 1970년대 들어서 새마을운동의 여파로 제주시 화북과 삼양동 일대에 새마을공장이 세워졌다. 이 공장에는 선생을 비롯하여 탕건 제작기능을 지닌 화북동 인근의 수백 명의 여성이 취직하여 관광기념품을 제작했다. 당시는 이미 전통 관모가 소비되지 않던 시절이었기에 탕건을 비롯한 총모자, 망건 등 말총공예의 여러 기법을 응용하여 여성용 모자, 브로치 등을 개발했다. 1975년 10월 9일에 있었던 제3회 육영수여사배 전국공예품경진대회에서 입상한 바 있는 선생은 당시에도 솜씨 좋은 축에 들었다. 1980년에 기능보유자가 된 뒤 매년 전승공예대전 및 기능보유자 작품전에 탕건이나 정자관 등을 빠짐없이 출품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2009년 2월 명예보유자로 인정되었으며, 딸인 김혜정 선생이 2009년 탕건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어, 대를 이어 탕건 제작기술의 맥을 잇고 있다.

주요 작품

바둑탕건, 김공춘, 21x16cm

바둑탕건
바둑무늬의 탕건으로 남자들이 갓을 쓸 때 받쳐쓰는 모자의 일종으로 사모나 갓대신 평상시 집안에서 쓴다.

접탕건, 김공춘, 21x16cm

접탕건
남자들이 갓을 쓸 때 받쳐 쓰는 모자의 일종으로 사모나 갓대신 평상시 집안에서 쓴다.
제작도구와 작업과정

 

탕건은 줄수와 도리수의 촘촘한 정도에 따라 막줄탕건, 상탕건, 중탕건 및 하탕건으로 구분된다. 제작도구에는 탕건골, 알통골, 쳇때기, 마흐레, 털망, 총사발, 탕건바농, 연발, 박죽, 미명실, 뜸, 장낭과 장낭실, 중등띠, 총칼, 먹솔과 먹사지, 정술, 재골, 재골용 장낭, 골무, 차롱 등이 쓰인다.

 

제작도구

탕건골: 탕건의 형태로 짜내거나 정자관의 이마 부분을 짜기 위해 사용하는 나무

 

마흐레: 쳇때기 위에 얹어서 탕건골이 안정적으로 놓여 탕건을 잘 결을 수 있도록 완충작용을 하던 것

 

쳇때기: 탕건골을 올려놓고 탕건을 결어 가는 일종의 작업대이자 작업도구를 넣어 두는 수납장치

 

연발: 탕건골의 표면을 매끈하게 만들어 탕건 작업을 쉽게 도와주는 보조도구

 

미명실, 뜸, 장난과 장낭실, 중등띠, 총칼, 먹솔과 먹사지, 정술, 재골, 재골용 장낭, 골무, 차롱 등이 쓰인다.

정자관 제작모습

정자관은 첫관, 중간관, 막관을 따로 제작한 후 줄머리, 관꼭대기를 연결하여 만든다.

 

정자관의 막관을 제작하는 모습

 

약력
1918
제주도 화북 출생
1975
제3회 육영수여사배 전국공예품 경진대회 입상
1980
제5회 전승공예전 입선
1980
중요무형문화재 제67호 탕건장 기능보유자 인정
1981-1992
제6회 전승공예전(한국민속박물관)~제12회 전승공예전 출품
1982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 행사 감사패
1985 / 2000
중요무형문화재 기록영화 제작
2009
중요무형문화재 제67호 탕건장 명예보유자 인정

한국문화재보호재단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은 문화재보호법 제9조에 근거하여 우리 전통문화를 널리 보전, 선양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공공기관입니다.

 

공식블로그 : http://blog.naver.com/fpcp2010

 

사진 서헌강(문화재전문 사진작가)

탕건장 김혜정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의 무형문화재이야기  중요무형문화재 제67호 탕건장<br>
Master Artisan of Horsehair undercap making skill Holder

1946. 10. 18. ~ | 보유자 인정: 2009년 9월 25일

둘째양반은 뿔관(정자관)을 쓰고 셋째양반은 감투(탕건)를 쓰고 부채를 들고 병신 걸음으로 등장. 새맥시는 노란저고리에 붉은 치마에 전복을 입고 족도리를 썼다. 춤을 추면서 장내를 한 바퀴 돌고 중앙에 오면 말뚝이가 난데없이 등장한다. - 은율탈춤 제4과장 양반춤 중에서

남자의 품격, 탕건

 

탕건은 남자들이 갓을 쓸 때 받쳐 쓰는 모자의 일종으로 머리를 보호하고 상투가 흐트러지지 않게 하기 위해 사용하였는데, 사모(紗帽)나 갓 대신 평상시 집안에서 쓰는 모자로 독립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탕건을 만드는 기술과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을 탕건장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평상시에 관을 대신해 썼는데 속칭 ‘감투’라고도 하며, 벼슬에 오르는 것을 일컫는 ‘감투 쓴다’는 표현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한국의 탕건은 중국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고구려 벽화나 고대의 관모에서 변화된 것인지 밝히기가 어렵지만, 고려시대에는 중국 송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신라의 최치원이나 고려시대 인물인 이색, 정몽주 등을 그린 고려 후기의 초상화에서 쓰고 있는 모자가 탕건모양과 같기 때문이다. 이 모양은 조선전기까지 이어진다. 탕건의 재료로는 말총이 사용되었는데 특히 제주도의 조랑말총은 말총이 가늘고 질기며 부드럽고 매끈하기 때문에 최고의 재료로 꼽혀 탕건은 제주도에서 가장 많이 만들어졌다. 제주도는 본래 육지보다 시국이 안정되고 조용한 곳이어서 관모공예가 성행하였는데 그 이유는 제주도에서 좋은 말총이 생산되어 제주도 부녀자들이 차분히 앉아서 가내공업으로 탕건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말총은 흠이 있으면 도중에 끊어지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흠이 있으면 안된다. 짧은 것보다는 긴 것이 좋다. 제주도 말총은 대부분 노란 것이 많아서 작품이 완성된 후 까만 염색을 한다. 만들기 전에 염색을 하면 신축성이 없고 부드럽지 못해서 쓰기가 불편하다. 한편, 탕건은 홑탕건과 겹탕건, 바둑탕건으로 분류된다. 모두 형태는 같으나 겹으로 또는 2중, 3중으로 엮어 나가는 방법에 따라 모양이 달라진다.

바둑탕건은 사각무늬를 놓은 것인데 이는 탕건이 독립된 모자 구실을 함에 따라 장식화된 것이다. 정자관은 정자[程子, 중국 송나라의 정명도(程明道, 1032~1085)와 정이천(程伊川, 1033~1107) 두 형제를 말하며 이(二)정자라고도 한다]가 창안하여 만들어 썼다고 전해지는 것으로 고려시대 선비들이 많이 사용했으며 모양이 탕건과 비슷하고 만드는 방식도 같았다. 정자관은 가장 높은 관직이 사용하던 3층 정자관부터 2층, 단층까지 3종류로 나뉜다.

조선시대의 관제에는 정자관 외에도 동파관, 충정관 등이 있었는데 각자 자신의 취향대로 개성에 맞는 관을 선택하여 즐겨 썼다. 위의 세봉우리는 터져 있는 형태인데, 대체로 지위가 높을수록 층이 많은 것을 썼다. 탕건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신분적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됐으나, 1894년 단발령 이후 그 제작과 생산이 줄어들면서 쇠퇴하게 되었다.

모녀간 전승되는 제주 여인의 삶, 2대 탕건장 김혜정 선생

 

중요무형문화재 제67호 탕건장 기능보유자인 김혜정 선생은 어머니인 김공춘 선생(탕건장 명예보유자)으로부터 10여 세 전후의 어린 나이부터 탕건 제작 기술을 배웠다. 탕건장 1대 기능보유자인 어머니의 성정과 솜씨를 고스란히 물려받아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탕건을 만들어 왔다.

15살쯤 되었을 때 탕건청이라고 부르는 일청에서 여럿이 일을 했다. 그때부터 탕건 하나를 거뜬하게 짜냈다고 한다. 당시에는 조천읍과 화북동, 삼양동 등지에 밀집되어 있던 탕건청은 오늘날의 공예촌을 방불케 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일을 했다고 한다.

선생의 집안은 증조할머니부터 집안 대대로 탕건을 짜왔다고 한다. 어머니는 7살 때 고모님께 탕건을 배웠고 김혜정 선생은 어머니인 김공춘 선생의 솜씨를 물려 받은 것이다. 1950년대 이후 제주도에서 말총공예가 급격히 사라지기 시작하였는데 당시 탕건 한 개의 값이 쌀 1되가 못되었다고 한다. 1986년에는 15일에 한 개를 만드는 홑탕건과 겹탕건이 한 개에 6만원, 바둑탕건은 한 개에 7만원 정도를 받았다.

“부드러운 것만을 골라서 손질한 말총이 머리카락 같지요? 이게 이렇게 가늘고 부드러워도 엄청 질겨요.”

말총의 성질은 형태가 뒤틀어지지 않아 관모 제작에 무척 적합하다. 게다가 말총은 가볍고 땀을 잘 흡수할 뿐만 아니라 더러움이 잘 타지 않아 위생적이기까지 하다. 말이 제공해 주는 질 좋은 말총을 허투루 보지 않았던 선조들의 지혜를 새삼 깨닫게 한다. 이처럼 말총을 재료로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뽐내는 탕건은 앞은 낮고 뒤는 높으며, 중간에 턱이 진 모양으로 결을 내는 방법에 따라 ‘홑탕건’과 ‘겹탕건’으로 나뉜다. 여기에 더 섬세한 작업으로 아름다운 바둑문양이 들어간 바둑탕건이 있다. 이와 같은 섬세한 기술이 필요한 제작기법이 오늘날 김혜정 선생의 손을 통해서만 전승되고 있는 것이다. 선생은 어머니인 김공춘 선생이 명예보유자로 인정되면서 2009년 중요무형문화재 탕건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탕건일은 다시 보유자 집안의 가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딸이 객지생활을 고집하지 않고 탕건일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뒤를 이어 제주 여성들이 간직했던 솜씨를 이어가는 탕건장 김혜정 선생이 조선시대의 관모 문화와 제주가 낳은 말총공예의 내일을 다시 선생의 딸과 함께 엮어가고 있는 것이다.

주요 작품

 

정자관, 36×27cm정자관은 벼슬이 높고 격식을 갖춘 재상들이 집에서 망건과 탕건 위에 덧쓰던 관으로 위는 터지고 세봉우리로 되어 있다. 말총으로 세 개의 관을 각각 만든 후 연결시켜서 완성한다.

바둑탕건, 20×17cm탕건은 남자들이 갓을 쓸 때 받쳐 쓰는 모자의 일종이며 집에서도 의관을 정제하기 위해 간편하게 착용하기도 하였다.

제작과정

 

홑탕건과 겹탕건은 탕건을 엮어 나가는 방법에 따라 홑으로 1번만 엮어나가면 홑탕건, 2중·3중으로 엮어 나가면 겹탕건이 된다. 또 겹으로 엮어 나가면서 문양과 모양이 달라진다. 홑탕건이란 엮어 나갈 때 홑겹으로 하는 것을 말하며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다.

탕건 제작은 탕건과 비슷하게 만들어진 크고 작은 탕건골에다 대고 매듭으로 엮어 나가는데 탕건을 엮어서 완성될 때까지는 여러 가지 단계를 거치게 된다. 탕건은 세공제작이기 때문에 공구 역시 그렇게 복잡하지 않고 규모도 크지 않다. 탕건은 말총으로 만들기 때문에 말총을 다루는 공구가 발전하였는데 탕건의 모양을 이루는 탕건틀과 같은 공구가 대부분이고 그 외에 체떼기, 바늘과 칼 등이 있을 뿐이다.

1. 말총가닥 빼서 고르기

2. 맺어가기

3. 맺어가기 (2)

4.맺어가기 (3)

약력
  • 1946년                         출생
  • 1981년                         제6회 전승공예대전 입선 (그외 7,8,9,10,11,16회 입선)
  • 198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67호 탕건장 이수자
  • 2008년                         중요무형문화재보유자작품전 출품
  • 2009년                         부천 세계무형문화엑스포 출품
  • 2009년                         중요무형문화재 제67호 탕건장 기능보유자 인정
  • 2010년                         무형문화재전수회관 제주전통학교 강습
이치헌/한국문화재보호재단 (http://www.chf.or.kr/)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은 문화재보호법 제9조에 근거하여 우리 전통문화를 널리 보전, 선양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공공기관입니다.
공식블로그 http://blog.naver.com/fpcp2010
사진
서헌강(문화재전문 사진작가)
발행2013.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