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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호]궁시장 (弓矢匠) | 중요 무형 문화제

문성식 2012. 3. 27. 03:53


종 목 중요무형문화재 47호
명 칭 궁시장 (弓矢匠)
분 류 공예기술
지정일 1971.09.13
소재지 전국



※ 본문설명

궁시장이란 활과 화살을 만드는 기능과 그 기능을 가진 사람을 말하는데, 활을 만드는 사람을 궁장(弓匠), 화살을 만드는 사람을 시장(矢匠)이라 한다.

본래 우리 민족은 오래 전부터 활제작에 있어서 세계 어느 민족보다 탁월한 기교를 가졌다고 전해진다. 중국에서는 한국 민족을 활을 잘 만들고 잘 쏘는 동쪽의 민족이라는 뜻에서 ‘동이’라고 하였다. 고구려 활의 형태는 벽화속에서 볼 수 있는데 현재 사용하는 국궁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 한국의 전통활은 이때부터 변함없이 이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시대에도 활쏘기를 중요시했으며, 조선 전기에는 과거시험의 무과과목에 궁술이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부터 조총이 수입되어 활은 전쟁용 무기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많이 변화하여 현재는 국궁인 각궁(角弓)이 보편화되었다.

활을 만드는 재료로는 대나무, 뽕나무, 물소뿔, 소의 심줄이 있다. 한국의 활은 쇠뿔과 쇠심줄을 사용한 각궁(角弓)이란 점이 특징이며, 화살이 멀리 나가는 강궁(强弓)에 속한다. 활짱의 손잡이 부분과 양끝에는 참나무와 뽕나무를 각각 대지만 탄력을 유지하기 위해 죽심(竹心)을 넣고 그 안팎에다 쇠뿔과 쇠심줄을 민어부레풀로 접착시켰다. 그러나 민어부레풀은 습기가 많고 기온이 높으면 잘 접착되지 않아 여름철에는 활을 만들지 않는다. 제작도구로는 톱, 대패, 나무망치, 줄, 칼, 송곳, 나무집게, 나무빗, 쇠빗 등이 있으며 화살의 종류로는 목전, 철전, 예전, 세전, 유엽전 등이 있다. 싸리나무, 대나무, 철, 심줄, 새의 깃, 도피, 아교 등이 주재료이며 계절에 관계없이 계속 만들 수 있다. 다만 오른손잡이는 우궁깃을 왼손잡이는 좌궁깃을 달아야 한다.

궁시장은 전통적인 공예기술로 중요무형문화재에 지정되었고, 김박영 씨가 궁장(弓匠) 기능보유자로, 박상준, 유영기 씨가 시장(矢匠)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어 그 맥을 잇고 있다.

※ 보충설명

선사시대부터 전투용으로 사용되던 활 및 화살촉을 제작할 수 있는 장인(匠人)을 궁시장이라 한다.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서 마제석촉이 발견되고 역사시대에 들어서면도 삼국 이전의 소국이던 부여(扶餘), 옥저(沃沮), 예(濊),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 등에서 활의 사용이 활발하였음을 『삼국지위지동이전(三國志魏志東夷傳)』 등의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궁시의 연원이 오래된 만큼 그 변천과 종류도 시대에 따라 다양하다. 현재로는 국궁(國弓)으로 불리는 각궁(角弓)과 거기에 따른 화살이 보편적으로 많이 쓰이고 있다. 각궁은 화살과 더불어 서울을 비롯하여 경기도 소사·광주·여주, 전라북도 전주, 전라남도 여수, 경상북도 예천, 경상남도 울산·충무 등 기타 여러 지역에서 제작되고 있으나 그 가운데서도 궁장(弓匠)으로는 김장환, 권영록, 장진섭, 시장(矢匠)으로는 박상준의 기능이 격을 잘 유지했다.

궁(弓)의 재료로는 통대나무를 쪼개어 햇볕에 말리거나 밀실에서 참숯불로 건조시킨 죽편(竹片)과 길이 38cm 너비 3cm의 뽕나무 조각을 물에 삶아서 알맞게 휘게 한 것과 파간(파幹)을 만드는 데 쓰일 참나무쪽과 수우각(水牛角)을 길이 52cm 너비 6cm, 두께 8cm내외로 자른 흑각편(黑角片)과 소의 심줄을 나무망치로 두들겨 살점과 기름이 빠져 실날같이 된 것을 대빗으로 곱게 빗은 힘줄(근) 과 부레풀 및 화피(樺皮)가 있어야 한다. 도구로는 흑각(黑角)을 휘는 데 쓰는 뒤집과 활을 얹을 때 쓰는 조지개와 밧줄과 밧줄로 묶고 죌 때 쓰는 조막손이와 활을 바로 잡는 데 쓰일 궁창(弓窓)과 이밖에 톱, 대패, 나무망치, 줄, 칼, 송곳, 나무집게, 나무빗, 쇠빗, 풀솔, 도가니, 못탕 등을 갖추어야 한다. 이의 재료와 도구로 활의 몸체를 만드는 데는 약 80일이 소요된다. 그리고 건조시키는 데 15일, 선궁(鮮弓)이라고 하여 활의 강약을 조절하고 아름답게 꾸미는 데 또 15일 정도가 있어야 하므로 활 한 개가 만들어지기까지는 약 4개월이 걸린다.

화살은 목전(木箭), 철전(鐵箭), 편전(片箭), 동개살, 장군전(將軍箭), 세전(細箭) 등이 있었으나 현재 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조선시대 무과시취와 습사(習射)에 사용되던 유엽전(柳葉箭)이다. 유엽전의 길이는 85cm 가량이며 무게는 26.25g(7문)이 평균이나 사람과 활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다. 재료는 대나무와 오니를 만드는 데 쓰일 싸리나무 오니를 둘러 싸는데 쓰일 화피, 꿩깃촉, 소심줄, 부레풀이 있어야 한다. 도구로는 톱, 줄칼, 송곳, 졸대, 인두, 저울, 자부, 자비, 통풀, 도가니, 귀알잔, 졸잡이, 화로, 나무집게 등을 갖추어야 한다. 위의 재료와 도구로 화살이 완성되면 마지막 손질로 졸대로 졸을 잡고 해어피(海魚皮)로 문질러 광을 내어야 한다. 그런데 화살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바른손잡이에게는 우궁(右弓)깃을, 왼손으로 활을 쏘는 사람을 위해서는 좌궁(左弓)깃을 달아야 하는 구분이 있다.

1914. 4. 30 - 2001. 8. 24 | 보유자 인정: 1978년 2월 23일

 

 

우리 모두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허공 뚫고/ 온몸으로 가자
가서는 돌아오지 말자/ 박혀서 박힌 아픔과 함께 썩어서 돌아오지 말자.
- 고은, 시집 [새벽](1978) “화살” 중

활을 만드는 사람, 궁인(弓人) - 화살 만드는 사람, 시인(矢人)

궁시(弓矢)에서 궁(弓)은 활을 말하고 시(矢)는 화살을 말하는데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른 기교를 가지고 있다. [경국대전]에도 활 만드는 사람을 궁인(弓人)이라 하였고, 화살 만드는 사람을 시인(矢人)이라고 하여 공조(工曹)의 공장부(工匠府)에 예속시켰다. 궁과 시는 인류의 역사상 가장 오랜 사냥도구이며 동시에 무기였다. 선사시대부터 사용된 활과 화살은 다른 동물에 비해 기동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인간이 먼 거리에서 동물을 사냥할 때 가장 효율적인 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해 개발된 것이다. 이후 총포가 개발되는 근대 이전까지 전쟁의 주요한 무기 중 하나로 사용되어 왔다. 그 과정에서 궁시 제작 기술도 끊임없이 변화하여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였다.


중국에서는 한국 민족을 동이족(東夷族)이라고 불렀는데 그 뜻은 활을 잘 만들고 쏘는 동쪽의 민족이란 뜻이다. 그만큼 중국 민족이 보기에도 우리 민족의 상징을 활과 연관시킬 만큼 궁시는 우리 민족에게 생활의 방편이자 생존의 수단으로 중시되었던 것이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의 활은 각궁(角弓)이라는 점이 특징이고 활과 함께 사용하는 화살 또한 마찬가지로 발전하였다. 화살은 지역에서 생산되는 2-3년생 시누대를 선택하여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만드는 대나무 공예의 진수이다. 화살은 무게와 직경이 일정한 살대를 골라 깎고 다듬는다. 이것을 불에 구워 길이와 굵기 및 색상을 반듯하고 일정하게 만드는 졸잡이 기술과 대나무에 색을 내는 취죽이 중요하다. 여기에 복숭아 껍질[桃皮]로 오늬(활시위를 끼우는 자리)를 감싸 터지거나 습기가 엄습하는 것을 막고, 촉을 꽂고 금속제 토리를 붙이고, 살대의 끝에는 꿩깃을 달아 마무리 짓는다. 이렇게 해야만 원하는 방향으로 화살이 날아가게 만들 수 있다. 이러한 활과 화살 만드는 기술은 해방 이후 국궁의 쇠퇴와 더불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어 1971년 궁시장을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으며, 1978년 박상준 선생을 시장(矢匠) 보유자로 인정하였다.

70여년을 한결같이 죽시 제조에 전념해

박상준 선생은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주교리에서 1914년 4월 태어났다. 선생이 성장한 원당은 예로부터 화살의 명산지 장단에 가까운 고장이다. 박상준 선생의 조부는 조선 말기 무과에 합격했다고 하며 부친 박희원 선생도 지방의 궁수로 소일하다가 화살을 제작하기 시작하면서 나중에는 제시업이 가업이 되었다. 박상준 선생은 18세부터 가업을 이어 70여년을 한결같이 죽시 제조에 전념하였다. 고향인 원당에서부터 시작하여 지금은 인천으로 편입된 경기도 부천군 계양면 병방리에서 오랫동안 공방을 운영했으며 이후에는 인천시 부평구 산곡동에서 만년까지 화살을 만들었다. 젊을 때에는 서울, 경기도, 충청도 등지로 출장을 가서 현지에서 몇 달간씩 머물려 화살을 만들어 공급하였는데, 당시만 해도 가을 농사가 끝나는 시점부터 이듬해 모내기 전까지 활쏘기가 민간에 크게 유행하여 위와 같은 출장 제작이 잦았다 한다. 그때는 일손이 달려 집안 식구들이 모두 참여하여 화살 제조에 참여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박상준 선생의 죽시는 평판이 좋았고 서울, 수원, 평택이 주공급지였다. 1971년 궁시장 종목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1978년 2월 23일 조명제 선생과 함께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였으나 2001년 별세했다. 화살 제작 기능은 아들인 박호준 선생에게 이어졌으며, 2008년 5월에 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 기능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주요작품

화살액자, 박상진, 141.5x70.5cm

화살액자(Framed Arrows)
화살은 지역에서 생산되는 시누대라 불리는 일정한 굵기의 대나무를 선택하여 만드는 대나무 공예의 진수이다. 화살에 사용하는 재료는 금속제 토리, 꿩깃, 화피 등 다양한 재료를 부레풀로 붙인다. 화살을 만드는 방법은 무게와 직경이 일정한 살대를 골라 깎고 다듬고 불에 구워 길이와 굵기 및 색상을 반듯하고 일정하게 만드는 졸잡이 기술과 색을 내는 취죽이 중요하다. 복숭아 껍질로 오늬를 감싸 터지거나 습기가 엄습하는 것을 막고, 살대의 끝에는 꿩깃을 달아 마무리 짓는데, 이렇게 해야 원하는 방향으로 화살이 날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화살의 각 부분 명칭

 

 

박상준 선생이 사용하던 작업도구

대나무를 재료로 삼는 화살은 죽세공의 일종이지만, 금속제 촉과 토리를 끼우거나, 화피나 도피를 바르고 꿩깃을 다는 등 다종다양한 재료를 다룰 도구와 기술을 함께 갖춰야 한다.

 

 

 

 

화살대 : 화살에 사용할 대나무는 아래 위가 곧고 가벼우며 형태가 변형되지 않는 2년생 시누대 중 무게가 6돈 5푼 내지 7돈 정도의 것을 고른다. 시누대는 12월~1월 사이에 서리를 많이 맞으면 대나무의 물이 말라 대의 겉부분이 단단해진다. 산죽이나 울타리죽보다는 바닷가에서 해풍을 쐬고 태양빛을 고루 받고 자란 해변죽이 가장 화살대로 적당하다. 이러한 대나무를 벨 때 ‘낫’이나 ‘칼’로 베고, ‘실톱’으로는 살대를 절단한다. 이렇게 잘라온 생대나무는 ‘부잡이통’에서 졸잡이를 거쳐야 비로소 화살대로 바뀐다.
가위 : 깃을 비슷하게 대충 오리거나 토고리를 만들 함석과 한지 등을 오린다.

망치 : 촉 제작 등에 사용한다.
집게 : 촉의 제작, 수리 등에 사용한다.  
졸대 : 화살의 굽은 곳을 숯불에 쪼여 바로 펴는 도구로 졸 볼 때와 부잡이할 때 사용한다. 소나무로 만들어야 하며 단단한 나무로 하면 대나무에 상처를 주기 때문에 적당치 않다. 졸대에는 밭은 졸대(잔졸대)와 느린 졸대가 있다.


기타 도구
화살대에는 여러 종류의 칼을 다양하게 사용하여 제작한다. ‘창칼’로 살대나 오늬목을 깎고, 송곳처럼 뽀족한 ‘오늬칼’로 오늬구멍을 뚫고, ‘줄칼’로는 대의 마디를 쓸며, ‘상사칼’로는 상사를 파고 깃을 따기도 한다. 화살 끝에 촉을 꽂기 위해 촉틀, 망치, 집게, 촉송곳으로 상사 속의 숨은 마디를 뚫어 촉이 들어가도록 한다. 이 촉이 바지지 않게 해주는 둥근 토리는 ‘쇳대’로 둥글게 말거나 넓히고, 토리를 상사에 맞출 때 ‘나무망치’는 쇠심을 두드린다. 화살이 일정한 방향으로 날아가게 하고자 꿩[장끼]의 날개죽지에 박힌 깃의 줄기를 ‘칼’로 베고 떼어내며 ‘가위’로 오려, ‘인두’로 지진 다음 대나무 위에 어교로 붙인다. 깃 끝은 ‘부젓가락’을 불에 달구어 사용하는데, 이것으로 도피나 벚피를 눌러 밀착시키기도 한다.

약력
1914. 4월
출생
1978. 2월
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 보유자 인정
1978-2001
중요무형문화재보유자작품전 출품
2001. 8월
노환으로 별세

 

한국문화재보호재단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은 문화재보호법 제9조에 근거하여 우리 전통문화를 널리 보전, 선양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공공기관입니다.

 

공식블로그 : http://blog.naver.com/fpcp2010

 

사진 서헌강(문화재전문 사진작가)

1933. 8. 9. ~ 2011.4.11 | 보유자 인정: 1996년 12월 10일 

 

 

바다에 가을 빛 저무니 水國秋光暮
찬바람에 놀란 기러기 높이 난다. 警寒雁陣高
가슴에 근심 가득 잠 못 이루는 밤에 憂心輾轉夜
서릿발 달빛이 활과 칼에 비치네 霜月照弓刀

 

-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시조

弓, 전통을 지키는 최종병기 활

궁시장(弓矢匠)은 활과 화살을 만드는 장인이다. 활을 만드는 장인은 궁장(弓匠), 화살을 만드는 장인은 시장(矢匠)이라 한다. 활은 대나 나무를 반달모양으로 휘어서 두 끝에다 시위를 걸고 화살을 활 위에 걸어 당겼다 놓으면 줄의 탄력을 받아 화살이 튀어나가는 무기로, 선사시대부터 화약병기가 출현한 이후에까지 사용해왔다. 전통무기이면서 사냥에 필요한 도구였던 활은 선사시대부터 중요하게 여겨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중석기시대의 세석기류 중 화살촉이 출토되어 활이 이미 원시사회에서 널리 쓰인 수렵도구였음을 알 수 있다. 또 근대 화약병기가 발명된 이후까지도 화약으로 추진되는 화살이 만들어지면서 근대에도 사용된 무기이기도 하며 현대에 들어서는 심신단련에 좋은 운동으로 널리 보급되기도 하였다. 우리 한민족을 말하는 동이족이란 중화(中華) 동쪽에 사는 오랑캐가 아니라, ‘이(夷)’자의 파자[破字 : 한자의 자획을 풀어 나눔]가 ‘큰 대(大)’와 ‘활 궁(弓)’임이 말해주듯 ‘동쪽의 큰 활잡이’, 곧 대궁인(大弓人)이란 뜻으로 풀이된다. 유물과 문헌을 통해 우리 활의 역사는 대략 3,000년 전후로 추정된다. 그러나 활이 나무나 뿔·뼈 같은 유기물로 만들어졌던 관계로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썩어 없어졌기 때문에 선사시대의 활의 형태를 알 수 있는 유물은 전해지지 않는다. 활은 그 모양에 따라 직궁(直弓)과 만궁(彎弓)으로 나누고 재료의 쓰임에 따라 목궁·각궁·철궁·철태궁(鐵胎弓) 등으로 나누며 재료의 수에 따라 단일궁(單一弓)·복합궁(複合弓), 크기에 따라 장궁(長弓)·단궁(短弓), 세기에 따라 강궁(强弓)·연궁(軟弓), 용도에 따라서 예궁(禮弓)·정량궁(正兩弓) 등과 활의 장식에 따라 붉은 칠을 한 동궁(彤弓)과 검은 칠을 한 노궁(蘆弓) 등으로 분류된다.

 

김홍도의 풍속화 중 활쏘기_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보물527호)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활, 각궁(角弓)

우리나라에서 궁시가 크게 발전한 시기는 삼국시대였다. 고대사회였던 삼국시대에는 정복전쟁이 빈번히 일어났다. 그러므로 주변의 많은 연맹국가를 통일해 나가는 과정에서 수많은 전쟁을 치렀다. 전쟁에서 전략, 전술의 발전과 함께 크게 발달되어 간 것이 무기인데, 궁시 또한 크게 발전되어 갔을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에 비로소 각궁이 등장하며 삼국 중에서 먼저 각궁을 사용한 나라는 고구려이다. 고구려는 활을 잘 다루는 기마 민족으로 고구려의 시조 주몽은 ‘활 잘 쏘는 이’를 가리킨다. 이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고구려의 유물과 고분벽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삼국지위지동이전(三國志魏志東夷傳)」 고구려조에 의하면 고구려에서 사용한 활은 맥궁(貊弓)·단궁(檀弓)·경궁(勁弓)·각궁(角弓)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 중 맥궁이 고구려의 명궁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각궁이다. 백제에서도 근초고왕이 일본사신이 방문하였을 때 각궁전(角弓箭)을 내렸다는 기록을 보아 각궁을 사용하였음이 확인된다. 이와 같이 삼국시대의 각궁은 활재료로 쓰인 뼈와 뿔이 남아 있으므로 그것을 통하여 당시의 활에 대하여 개략적으로 고찰할 수 있다. 중세의 장인들은 활채를 더 견고하고 탄력있게 하기 위하여 뼈나 뿔 같은 재료를 나무 활채에 덧대었는데 이것이 바로 ‘각궁’이었다. 이것은 뽕나무·대나무·참나무·물소 뿔·소 힘줄 등의 재료를 부레풀로 붙여서 제작하는데 제작법과 사용재료에 따라 활의 명칭이 구분된다. 우선 뿔의 붙은 정도에 따라서는 장궁(長弓)과 휘궁(徽弓)으로 구분되는데, 줌통에서 도고자까지 길게 붙이면 장궁(長弓)이며, 오금을 지나 후궁뿔 끝에 그치는 짧은 뿔을 붙이고, 삼삼이에서 도고자까지는 뽕나무를 붙여 만든 활은 휘궁이라 한다. 두 활은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는데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탄력을 지닌 물소 뿔 대신 억센 뽕나무를 대신한 휘궁은 장궁보다 뻣뻣하여 일정부분까지 당겨지게 되면 더 이상 당겨지지 않는데, 이는 시위를 일정거리 만큼 당겨 쏘기가 쉬우므로 적중률이 높다는 장점이 있으나, 파손이 장궁보다 잦고 물소의 뿔이 귀할 때에 장궁에 사용하고 남은 부분이나 하질의 짧은 뿔로 제작하여 장궁에 비해 품질이 낮은 것으로 인식되었으며, 뿔의 보급사정이 과거보다 수월한 현재에는 휘궁을 쏘거나 만드는 이들이 없다.

 

또한 같은 뿔을 사용하여 만든 활도 빛깔로 구분하여 부르는 이름이 달라 물소의 검은 뿔을 붙이면 흑각궁(黑角弓)이라 하고 흰빛을 붙이면 백각궁(白角弓)이라고 하였는데, 백각궁은 흰 빛깔의 물소 뿔이 귀한지라 그 활 역시 귀하게 여겼을 뿐 그 성능은 같았다. 활쏘기는 조선시대까지 무과(武科)의 중요 시험과목이었으며, 우리 민족에게 심신 수양의 수단이기도 했다. 전투에서 살생의 용도를 의미하는 ‘쏜다’는 말 대신, 심심 수련의 뜻이 강조된 ‘낸다’는 말을 더 선호한 우리만의 ‘활의 문화’가 있는 것이다.

각궁의 각 부분 명칭

각궁의 각 부분 명칭


얹은 활과 부린활 : 활을 쏠 수 있도록 시위를 고자에 거는 것을 ‘활을 얹는다’고 하고, 이렇게 해놓은 활을 ‘얹은 활[張弓]’이라고 한다. 반대로 쏘던 활의 시위를 내려서 두는 것을 ‘활을 부린다’고 하고, 그렇게 해놓은 활을 ‘부린활(弛弓)이라고 한다.
절피 : 시위의 외늬를 먹이는 부분에 감은 실, 또는 실을 감아놓은 부분
시위 : 활에 화살을 끼워 당기는 줄
도고자 : 끝이라는 뜻을 가진 고자는 도고자부터 양냥고자까지를 말하는데, 우두머리를 뜻하는 말인‘도’가 붙어 고자가 시작되는 부분을 말한다.
심고 : 시위 양 끝에 심으로 둥글게 만들어 양냥고자에 거는 고리. ‘고자’에 힘이 닿는 곳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고자잎 : 도고지와 양냥고자 사이
양냥고자 : 고자의 맨 끝으로 뾰족하게 튀어나온 부분
정탈목 : 도고지 밑의 굽은 부분
창밑 : 목소의 중간 부분부터 정탈목까지를 말함.
후궁목소 : 후궁은 짧은 뿔을 댄 각궁으로, 우리말로 정착하면서 휘궁으로 굳어졌다. 후궁목소는 휘궁의 뿔이 끝나는 부분부터 가늘어지는 부분을 말한다. 목소는 후궁의뿔에 댄 뽕나무를 가리키나, 지금은 삼삼이부터 도고지까지를 가리킨다.
후궁뿔끝 : 휘궁에서 뿔이 끝나는 부분을 가리킨다.
삼삼이 : 대나무와 뽕나무가 만나는 곳으로 먼오금 아래
먼오금 : 활의 한 가운데인 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뜻으로 한오금과 삼삼이 사이
한오금 : 밭은 오금과 먼오금 사이 가장 많이 휘어지는 곳
밭은 오금 : 대림끝과 한오금 사이
대림끝 : 줌으로 붙인 참나무의 양쪽 끝 부분
아귀 : 줌피의 양쪽 끝부분
출전피 : 줌 바로 위에 화살 닿는 곳에 대는 가죽. 살이 나갈 때 활몸채를 긁고 나가기 때문에 닳아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붙인 가죽이다.
줌(통) : 활을 쏠 때 손으로 잡는 활 가운데 부분
줌피 : 줌을 싼 껍질로 손에 나는 땀을 흡수하도록 한 것
화피단장 : 화피는 활의 겉을 싸는 벚나무 껍질인데, 원래 화(樺)는 자작나무를 뜻하지만, 활쏘기에서는 벚나무를 말한다.

한국 전통활인 각궁과 전통궁술을 세계에 널리 알린 궁장 김박영 선생

김박영 선생은 1929년 8월 9일에(호적상으로는 1933년생이다.)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왕신리에서 아버지 의성 김씨 김홍경 선생과 어머니 박원 여사 사이의 1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예천에서도 널리 알려진 궁장이었으므로 15세 때부터 아버지 밑에서 활을 만드는 법을 배웠으며 아버지가 17세 때 돌아가시자 궁장이던 사촌 형 이치우 선생에게 3년 정도 제궁 기술을 연마하여 어느 정도 기술이 숙련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 10여 년 동안 제궁업을 접어두고 점원, 속옷 공장 등에서 일을 하다가 35세 때 예천의 궁장이던 권오규 선생의 권유로 다시 제궁업에 뛰어 들게 된다. 이때 경기도 지방의 활 제작법을 배우기 위해 부천으로 옮겨 ‘경기궁’의 명인인 김장환 선생의 문하생이 되었다. 1971년 스승인 김장환 선생이 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자 1977년 전수장학생으로 선정되고 이후 1982년 이수자가 되었다. 1984년에 스승인 김장환 선생이 작고하자 스승의 아들인 김기원 선생과 함께 그 뒤를 잇게 되었다. 그러나 김기원 선생 역시 교통사고로 작고하여 김장환 선생의 뒤를 홀로 잇게 되었다. 이후 1988년에 전수교육조교가 되었으며, 1996년 4월 유일하게 생존하던 궁장 장진섭 선생이 작고하자 그 해 12월에 시장(矢匠) 유영기 선생과 함께 궁시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 사람이 만드는 물건이란 게 시간이 지날수록 더 낫게 생겨나지만, 어떤 것은 처음부터 완벽하게 나온 게 있더라고요. 그게 바로 우리 활이오.”

 

각궁은 여름 동안 재료를 준비해 10월부터 이듬해 3월 사이에 만드는데 무려 3,000번 이상 손이 간다. 탄력 좋은 대나무를 적당히 잘라 좌우 양쪽에 물소 뿔을 다듬어 붙인 다음 활 중간에 소 등 부위 힘줄을 두 번 채워 넣는다. 활 하나를 만드는데 소 3마리를 잡는 셈이다.

 

김박영 선생이 1년에 만드는 활은 100여 장(張) 정도다. 스승인 김장환 선생 문하생일 때는 두 사람이 주도해 1년에 500장까지 만들기도 했다. 그만큼 문하생도 줄었지만 이제 각궁에 대한 열기가 예전만 못하다는 증거다. 실제로 최근에는 많은 궁도인구 중 각궁과 양궁을 혼합한 형태의 개량궁을 즐기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고 한다. 힘과 기교가 필요한 각궁보다 훨씬 다루기 쉽고 값도 싼 까닭이다. 이런 연유로 선생의 공방에는 내국인보다 외국인 더 많이 찾았다. 특히 일본인 관광객들이 큰 관심을 보이는데, 1m 남짓한 각궁은 어림잡아 150~300m까지 화살을 날릴 수 있는데 비해 일본의 활은 2m가 넘는 길이면서도 사(射)거리는 고작 수십 미터 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각궁을 한 번 보면 그 멋에 매료돼 취미용 또는 소장용으로 종종 사가곤 하였다. 활발한 작품활동과 후진양성을 위해 노력하던 김박영 선생은 2011년 4월(향년 78세) 노환으로 별세했다.

 

선생의 평생 소원은 한국의 전통활인 각궁과 한국의 전통궁술을 세계에 알리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의 명성과 활동은 국외에 자주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생의 사망소식을 접한 이후 한국의 전통활쏘기에 매료되어 우리 활에 대해 많은 것을 수집하고 연구한 독일인 궁사 칼 자이링거(Karl Zeilinger)씨는 독일에서 발간되는 세계적인 잡지 ‘전통활쏘기(Traditionell Bogenschiessen #62)’에 김박영 궁장님을 애도하는 글을 게재하여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전통 궁 제작기능의 온전한 전승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김박영 선생의 뒤를 아들인 김윤경 선생(궁시장 전수교육조교)이 잇고 있다.

주요작품

각궁(얹은 활) | 51×135cm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활은 각궁(角弓)이다. 각궁은 분류상 복합궁, 만궁에 속하며 물소 뿔, 뽕나무, 소힘줄, 실 등을 민어부레풀로 붙여서 만들었다. 궁(弓)을 활이라 부르는 것은 한국 고어(古語)로 「계림유사(鷄林類事)」에 “弓曰活 射曰活索”이라 함으로 알 수 있다. 제작된 형태는 구부러진 모습으로, 시위를 걸 때에는 활의 휘어진 방향의 반대쪽으로 뒤집어서 걸고 쏘는 것이 특징이다.

 

각궁_ 길이 128cm

각궁_40.5x36cm

 

각궁_42x38cm

각궁_길이128cm

재료 및 제작과정

각궁은 7재(材)로 만든 우수한 복합궁이다. 7재는 물소 뿔, 대나무, 소심줄(牛芯), 뽕나무(弓幹桑), 참나무, 민어 부레풀(魚膠), 화피를 말한다. 이렇게 동·식물성으로 이루어진 7개의 재료가 어우러져 제조되는 것이어서 흔히 각궁은 살아 있는 활이라고 한다. 이 중에서도 물소 뿔, 대나무, 소심줄이 가장 중심적인 재료이고 이것을 견고하게 결합시켜주는 민어 부레풀의 역할이 중요하다.

 

각궁 제작재료

각궁제작에 사용되는 각종도구

 

물소뿔

소심줄, 뽕나무, 대나무, 부레풀, 자작나무껍질, 참나무

 

 

활의 제작시기는 습기가 많고 기온이 높은 계절에는 어교(魚膠 : 부레풀)가 잘 응고 되지 않으므로 접착이 곤란하며 또한 소심을 올리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올린다 해도 건조시키기가 대단히 어렵다. 이러한 관계로 가을에서 봄(10월~다음해 3월) 사이에 제작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활의 손잡이와 양끝 부분에 참나무와 구지뽕나무를 각각 대고, 탄력을 유지하기 위해 죽심(竹心)을 넣은 다음 그 안팎에다 쇠뿔과 쇠심줄을 민어부레풀로 접착시킨다.

 

1) 나무 휘기

2) 물소뿔 다듬기_양각을 2차 가공하여 다듬어내는 과정

3) 뽕나무다듬기

4) 다듬기

 

5) 다듬기

6) 도지개를 붙이는 장면

7) 도지개를 양쪽에 부이고 궁창에 활을 끼운 다음 펴는 장면

8) 완성된 각궁을 잡아 당겨 보는 김박영 보유자

약력
1933년
출생
1959년
궁시장 입문
1965년
김장환 선생 문하 입문
1980~1986년
제5회~ 제11회 전승공예대전 입상
1994년
부천시 홍보 전시관 개인전, 육사박물관 출품
199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 기능보유자 인정
2010년
부천 활 박물관 명예관장
2010년
인사동 보유자 합동 공개행사 시연 및 전시
2011년
별세

 

이치헌/한국문화재보호재단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은 문화재보호법 제9조에 근거하여 우리 전통문화를 널리 보전, 선양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공공기관입니다.

 

공식블로그 : http://blog.naver.com/fpcp2010

 

사진 서헌강

궁시장 유영기

1936. 9. 29. ~ | 보유자 인정: 1996년 12월 10일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

- 영화<최종병기 활> 남이의 대사 중

수천 년을 날아온 전통 화살

오랜 옛날 중국민족은 우리 민족을 동이족(東夷族)이라 불렀다. 동이(東夷)의 의미는 ‘동쪽에 활을 잘 쏘는 민족’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만큼 중국 민족이 보기에도 우리 민족의 상징을 활과 연관시킬 만큼 궁시(弓矢)는 우리에게 생활의 방편이자 생존의 수단으로 중시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궁시가 석기시대부터 생활수단으로 개발되어 점차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무기로 발달한 점은 다른 나라와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모양이나 종류, 그리고 사법(射法)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화살의 경우 신석기 시대 활촉이 남아 있는데 제작기술에 따라 타제석촉과 마제석촉으로 구분된다. 청동기시대에는 이전시대의 생활도구로서 유용성보다는 전통용 무기로서 크게 쓰이게 되었는데 화살대나 화살 깃은 남아있지 않아 실체를 알 수 없고 다만 화살촉이 여러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 시기의 화살촉은 신석기시대 수렵용으로 쓰인 화살촉에 비해 크고 무거워졌으며 활의 강도도 높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원거리 사격이 보다 용이해지는 기술력도 축적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궁시가 크게 발전한 시기는 삼국시대였다. 삼국시대는 고대사회로 정복전쟁이 빈번히 일어났고 이에 따라 크게 발달한 것이 무기였다. 삼국시대에 들어서 비로소 각궁이 등장하며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각궁을 사용한 나라가 고구려였다. 고구려의 유물과 고분벽화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백제에서도 근초고왕이 일본사신이 방문하였을 때 각궁전(角弓箭)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각궁을 사용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화살도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활촉, 화살대, 화살깃 등으로 이루어졌는데 유물이 없어 자세한 사항을 확인할 수는 없다.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각궁은 산뽕나무를 기본으로 하고 소뿔, 심줄, 아교, 실, 철들을 사용하여 제조하였으며, 화살은 재료와 용도, 모양과 특색에 따라 다양한 종류가 나타나고 있다. 재료면에서 보면 죽전(竹箭), 유엽전(柳葉箭), 목전(木箭) 등이 있고, 모양에 따라 세전(細箭), 대우전(大羽箭), 효자전(哮子箭) 등이 있으며, 성능면에서 독전(毒箭), 병전(兵箭), 화전(火箭) 등이 있었다. 유엽전은 버들가지로 만든 화살대에 버들잎 모양의 화살촉을 박은 것으로 태조 이성계에 의해 전투용으로 사용된 기록이 있다. 유엽전을 각궁에 걸어서 쏘면 120보 정도 멀리 나가는데 명중률이 아주 높았다고 한다. 목전은 호시(楛矢)라고도 하는데 외국에 수출까지 하였다고 한다. 조선전기에는 세종조 이후 화약무기가 크게 보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화약무기의 여러 가지 결함을 보완시켜 줄 수 있는 장점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전통병기로서 궁시에 의존도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또한, 조선왕조가 현실적으로는 문치주의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었지만 이념상으로는 문무양반체계였기에 문무겸전을 이상적인 덕목으로 내세워 활쏘기 등을 강조하였으며 왕실에서도 궁술을 중요시 하였다. 활쏘기는 조선시대에 있어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가장 성행했던 신체활동이자 사회적 체육이었던 것이다.

조선왕조는 활쏘기를 의례화하는 한편, 이에 대한 시행절차와 방법을 제도적으로 정비하였는데, 바로 대사례(大射禮)와 향사례(鄕射禮)가 그것이다. 대사례는 조선시대 임금이 성균관에 거둥하여 옛 성인에게 제향하고 활을 쏘던 예(禮)로서 군신, 상하간의 명분의식을 일체화시켜 통치 질서의 확립과 국가의 안녕을 도모하고자 시행되었던 의례였다. 지방의 양반들은 지방의 유향소를 중심으로 향악과 취지가 비슷한 향사례를 향음주례(鄕飮酒禮)와 함께 실행함으로써 사족간의 친목도모와 함께 유교적 덕목인 장유(長幼)의 서(序)를 밝히는 수단으로 시행하였다. 그러나 궁시는 무엇보다 무기로서의 역할이 가장 중요했는데 이에 따라 중앙에 군기감을 설치하고 궁시 제조 장인들을 공장안에 등록시켜 각종 궁시를 제조하게 하였다. 이들은 다른 장인들에 비하여 우대되어 명칭도 궁인(弓人, 활을 만드는 장인), 시인(矢人, 화살을 만드는 장인)으로 불렸다. 화살의 경우 옛날부터 명칭이 전(箭), 시(矢), 촉(镞)으로 혼용되며 사용되었는데 화살은 화살대와 화살촉, 시위에 화살을 걸고 쏠 수 있도록 凹형으로 만든 오늬, 화살이 시위를 떠나서 날아갈 때 일정한 방향을 유지시키기 위한 깃으로 구성되었다. 조선시대에 이런 화살은 목전, 예전, 편전, 대우전, 장군전, 세전, 유엽전 등의 8가지가 있었다.

화살 중 특히 주목되는 것이 편전인데 편전은 화살의 크기가 작아 일명 애기살이라고도 한다. 살대의 길이가 1자 2치로 조선시대 화살 가운데 가장 작은 화살이었는데 관통력이 높고 화살의 길이가 짧아 적이 발사 시 필요한 통아가 없으면 되쏠 수 없다는 이유로 조선의 병기 가운데 가장 중요한 비밀병기였다. 임진왜란 중에는 궁시전략의 일환으로 독화살이 개발되었는데 화살촉에 치명적인 독약을 발라서 발사함으로써 살상효과를 증진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명나라 군에서 독약의 제조법의 공개를 꺼려 임진왜란이 끝난 선조34년(1601)에야 개발하게 되었다. 임진왜란을 거치며 조총의 위력에 무기로서의 중요성이 약화되긴 하였지만 꾸준히 다양화하였다. 화살은 조선후기에 들어 유엽전이 크게 부각되었는데 가벼워 누구나 쉽게 쏠 수 있어 군사를 끌어 모으기가 쉬워졌던 이유였다. 즉 군사확보를 위한 방법의 하나로 유엽전이 활발히 사용되었던 것이다. 유엽전은 철촉으로 만들어진 화살로 화살촉의 모양이 마치 버드나무의 잎과 같다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이후 유엽전은 무과가 폐지된 갑오개혁 이후 전국에 운동을 목적으로 한 활터가 많이 생기면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죽시(竹矢)의 모습으로 남게 되었다.

4대째 가업을 이어받아 장단화살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유영기 선생

유영기 선생은 1936년 장단(현 DMZ 지역)에서 출생하였다. 장단은 조선조 이래 경기도에서 가장 활발하게 화살이 만들어지던 곳으로 선생의 집안은 대대로 서울은 물론 신의주에서도 주문을 받는 유명한 화살 제작 가문이었다. 선친 유복삼 선생은 조부에게서 1914년 전방을 물려받아 운영하였는데 해방 후 분단이 되고 전쟁이 터지자 강화로 피난하였고, 그 후 경기도 파주군 이동면 금촌리에 전방을 새로이 개설하였다. 전쟁이 났을 때도 선친은 패물과 집문서는 놔두고라도 화살 만드는 장비와 재료는 챙기고 피난을 갔을 정도로 집안 대대로 화살 제작에 대한 애착이 대단하였다. 선친은 1961년 예용해 선생에 의해 인간문화재 탐방 기사가 보도될 때만 해도 국내에서 가장 잘 알려진 시장(矢匠)이었다. 그러나 1968년 작고하여 1971년에 지정된 무형문화재 보유자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유영기 선생은 1948년 장단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부터 부친의 가업인 화살방에서 기술을 연마하여 화살제조에 입문하였다. 1949년부터 선친의 뜻에 따라 그 조역을 감당하였지만 본격적으로 전념하게 된 것은 6·25전쟁 이후였다. 선친을 도와 오랫동안 화살 제작에 종사하였는데 부친이 작고한 후 가업을 이어 화살방을 운영하며 장단화살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선생의 화살 공급처는 경기도를 중심으로 하여 서울일대, 멀리는 삼척, 제주까지 이른다. 활량들 대부분이 선생의 집과 거래를 했다. 그러나 점차 전통 화살을 찾는 이들이 줄어들었다. 1977년, 마흔을 갓 넘긴 나이에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 내려오던 전통 화살 제작 기법을 글로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제아무리 뛰어난 전통도 ‘문서화’하지 않으면 변용되거나 사라지게 마련이라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글로 써서 등사판으로 100부의 문서를 만들었다. 그렇게 나온 것이 선생의 첫 책 [한국의 죽전]이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전문 서적이 1990년대에 펴낸 [우리나라의 궁도]이다.

전통 화살에 관한 책을 쓰고 시대별 궁시 기술을 복원하면서도 잊혀짐에 대한 선생의 불안은 해소되지 않았다. 2001년 5월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에 우리나라 최초의 활·화살 전문박물관인 영집궁시박물관을 개관하게 된다. 박물관에는 우리나라 각종 활과 화살 및 쇠뇌, 활쏘기에 필요한 각종 용품, 화살제작 도구와 재료는 물론 중국, 일본, 인도, 영국, 인디언등의 활과 화살 등이 전시되어 있다. 우리나라 것들은 대체로 선생이 제작한 것이고, 나머지 것들은 기증을 받아 전시하고 있다. 선생은 화살 재료로 쓸 대나무를 찾아 전국 곳곳을 누벼왔다. 필요한 것은 대나무만이 아니다. 접착제가 되어 줄 민어 부레와 힘을 모아줄 쇠심줄, 균형을 잡아줄 꿩 깃까지, 화살 하나를 만들기 위해 선생은 쉼 없이 자연의 힘을 빌린다.

보기엔 간단해 보여도, 화살 하나를 만드는 데 130번의 손길이 가야 한다. 적당한 대나무를 구해다가 50여 일간 그늘에서 말린 다음, 살을 벗겨 숯불에 구운 뒤 마디를 다듬고 마디에 따라 선별을 하여 화살촉을 만들고 쇠심줄을 감고 오늬를 넣고 깃털을 붙이는데, 어느 것 하나 쉽지 않다. 아교를 만들기 위해 민어 부레를 끓여야 하고 중간 중간 중량을 맞추기 위해 숱한 저울질을 거쳐야 한다. 각 화살의 굵기나 마디를 일정하게 해야 하는데, 그게 참 어려운 일이다. 몇 년생인지, 어느 지역에서 어떻게 자랐는지에 따라 대나무의 성질이 제 각각이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활쏘기 대회가 자주 열리던 시절엔 활량들이 자주 찾아왔다.

“화살을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 들어오면 반드시 활량을 만납니다. 아무리 좋은 재료로 장기간에 걸쳐 만들어도 사수에게 맞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요. 같은 활, 같은 화살이라도 활쏘는 사람의 체격과 힘, 그 사람의 쏘는 습관에 따라 명중률이 달라지거든요. 쏘는 사람에게 꼭 맞는 화살, 그게 가장 좋은 화살이죠.”

현재 아들 유세현 선생이 대를 이어 전수조교로 궁시장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아들이 가업을 이어받는다고 했을 때 말렸다고 한다. 대를 잇는다는 점에선 대견스러우나 직접 걸어본 이 길이 어렵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생활유지도 어려운 데다 갈수록 양궁화살에 밀려 주문도 잘 안 들어오는 실정이다. 그런데 이제는 손자까지 가업을 잇겠다고 한다. 선생이 지금까지 만든 화살 개수는 10만개가 넘는다고 한다. 그런데도 스스로 100% 만족을 하지 못한다. 선생의 특별한 관심사는 조선시대 화살뿐만 아니라 선사시대부터 이어져온 동이족의 화살 전체를 복원하는 일이다. 그래서 아들과 함께 전국 박물관과 유적지를 찾아 다니고 고서적을 뒤지는 등 잊혀진 궁시 제작기술을 찾고자 애쓰고 있다.

작품

화살액자 / 125×80cm한국의 전통화살 7점을 액자에 넣은 것으로 인마살상용의 뾰족한 촉을 갖춘 장전 2점과 쏘면 소리를 내어 신호 및 전투,수렵 등에 사용되었던 효시4점, 연습용 목전 1점을 넣은 액자이다.

목전, 효시, 장전 액자 / 117×57cm

화살 액자 / 140×80cm

화살 액자 / 131×85cm

화살 액자 / 144×94cm

화살 액자 / 132×94cm

화살의 종류

· 장전 : 뾰족한 촉으로 되어 있는 살상용(殺傷用)화살로 편전에 반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일반적으로 전투 시에 널리 사용했던 모든 화살을 통칭한다. 길이는 84cm정도로 편전에 비해발사 속도가 빠르다
· 효시 : 쏘면 소리가 나는 화살로 조선시대에 신호용으로 사용하거나 의식에 또는 전투나 수렵시에 사용했다. 소리를 내는 통은 단단한 나무를 이용해 속을 파냈다.
· 목전 : 연습용 화살이다.
· 편전 : 조선시대에 비밀병기라 불리는 화살로 왜인들이 있는 곳에선 절대 연습을 하지 못하게 해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지도록 했다. 애기살이라고도 하며, 통아(筒兒 )라는 통속에 넣어 쏘는 작은 화살이다. 사거리가 길고 날아가는 모습이 보이지 않아 적이 피하기 어렵고, 적이 주워도 다시 사용하지 못한다는 장점이 있다. 단 발사 속도가 일반화살보다 느린 것이 단점이다.
· 신전 : 왕명을 전달하던 화살로 살대에 ‘신(信)자가 달린 작은 깃발을 달고 대나무 겉표면에 염색을 해 무늬와 문자를 넣었다. 화살 10개를 틀에 넣어 명령을 전달했는데 중앙에는 신전틀을 들어 올리는 긴 자루를 꿰었던 마름모형의 구멍이 있다.

제작과정

대나무, 철, 소 힘줄, 싸리나무, 어교(魚膠), 꿩털 등 6가지 재료로 화살 1개를 만들기까지는 어렵고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한다. 화살 1개를 만드는데 130번이나 손이 간다. 하루 종일 작업에 매달려도 3개정도 만드는데 그친다고 한다. 매년 11월 말부터 한 달간 전국 각지를 돌며 화살 만들기에 적합한 대나무를 구한 뒤 대나무를 50여 일간 응달에 말린 다음 밤새 살을 벗겨 숯불에 굽고 마디를 다듬어 모듬 별로 선별하는 작업을 거친다. 화살촉을 붙일 아교를 만들기 위해 부레를 끓이는 일도 손이 많이 간다. 완성된 화살도 중량을 맞추기 위해 몇 번씩 저울질을 해야만 한다. 대략적인 화살 제작 과정은 다음과 같다.

1) 화살 제작에 필요한 재료를 준비한다. 화살대는 대나무밭에서 베어낸 2년생의 생나무를 약 한달간 말려 사용한다.
2) 숯불을 피운 대잡이통에 살대를 넣고 갈색으로 구운 뒤 졸대로 화살을 곧게 펴서 교정한다.
3) 위 아래의 끝단을 조금씩 깎아서 부레풀칠을 한다. 이는 소심줄을 감았을 때 살대보다 튀어나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4) 젖은 소심줄로 감은 뒤 말린다. 이는 오늬와 촉이 끼워질 때 감아서 쪼개짐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5) 아랫부분에는 칼로 속을 파내 얇은 대나무 관을 만든 뒤 상사를 끼운다. 이때 상사가 너무 두터우면 공기의 저항으로 멀리 날아가지 못한다.
6) 화살촉을 끼우기 위해 무쇠철사를 꽂는다. 무쇠철사는 촉의 길이만큼 잘라 앞부분은 네모지게 두드리고 달군다.
7) 화살촉을 제작한 뒤 암틀에 끼워 발로 지탱하면서 양손으로 살대를 돌려주어 화살촉이 단단하게 끼워지도록 한다.
8) 화살깃을 다듬은 뒤 부레풀을 칠한 날개에 붙인다. 오늬구멍을 기준으로 3개의 깃을 붙이면 완성된다.

1) 졸잡이

2) 깃 붙이기

약력
  • 1936년                           출생
  • 1977년~1987년               전국 및 경기도 민예품경진대회 10회 입상
  • 1978년~1994년               전승공예대전 특별상 등 16회 입상
  • 1982년                          정무제1장관 감사패
  • 1991년                          문화부장관상(문화가족상) 수상
  • 199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 기능보유자 인정
  • 1999년                          뉴질랜드 박물관 작품 전시, 미국 순회 전시
                                                우리 선조의 발명 무기 시연회 (신기전 및 총통 발사 시연 등)
  • 2000년                          영집궁시박물관 초대관장
  • 2001년                          영집궁시박물관 개관 특별전
이치헌/한국문화재보호재단 (http://www.chf.or.kr/)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은 문화재보호법 제9조에 근거하여 우리 전통문화를 널리 보전, 선양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공공기관입니다.
공식블로그 http://blog.naver.com/fpcp2010
사진
서헌강(문화재전문 사진작가)
발행2012.10.18

궁시장 김종국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의 무형문화재이야기 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br>
Master Artisan of Bow & Arrow Making Holder

1940. 8. 19. ~ | 보유자 인정: 2008년 5월 7일


내가 화살이라면
오직 과녁을 향해
허공을 날고 있는 화살이기를

일찍이 시위를 떠났지만
전율의 순간이 오기 직전
과녁의 키는 더 높이 자라

내가 만약 화살이라면
팽팽한 허공 한가운데를
눈부시게 날고 있음이 전부이기를

금빛 별을 품은 화살촉을 달고
내가 만약 화살이라면
고독의 혈관으로
불꽃을 뚫는 장미이기를
숨쉬는 한 떨기 육신이기를

길을 알고 가는 이 아무도 없는 길
길을 잃은 자만이 찾을 수 있는
그 길을 지금 날고 있기를

-문정희 시인의 ‘내가 화살이라면’ (시집 [다산의 처녀] 중)

수천 년의 세월을 극복하고 날아온 한국의 화살

 

화살은 촉과 살대, 깃, 오늬로 구성되어 있는데 고대의 화살은 그 촉만 출토되고 있다. 화살촉의 재질 종류는 뼈, 돌, 청동, 철 등이다. 골촉은 사슴이나 다른 동물의 뼈나 뿔 또는 이빨을 이용하여 만들었고 석촉은 흑요석, 판석, 벽옥제석, 사암 등으로 만들었으며 그 모양도 다양하다.

청동촉은 피흠이 있는 것이 특징이고 우리나라에서는 가야, 낙랑시대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철촉은 살상효과가 커짐에 따라 크기나 종류가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살대는 곧고 가벼우면서 탄력이 있는 물질로 만들어지는데 이는 대나무나 갈대처럼 곧고 속이 비어있는 재료나 버드나무나 자작나무와 같은 가볍고 탄력있는 나무를 선호하여 제작한다. 또한 나무로 제작되는 화살은 나무의 잔가지로 제작하는 방법과 굵은 나무를 켜서 다듬어 제작하는 방법이 있다. 앞의 방법은 쉽고 대량으로 제작하기가 용이하나 습기 등에 노출되면 다시 굽어지는 단점이 있으며, 뒤의 방법은 제작과정이 길어서 다량으로 생산하는 것이 쉽지 않은 단점이 있다.

고려, 조선시대에 와서는 각종 다양한 화살이 나왔는데 의식용구로만 사용된 기패, 영전, 신전 등이 있고 실전용으로는 편전(片箭,) 장전(長箭), 유엽전(柳葉箭), 신기전(神機箭), 화전(火箭), 총통전(銃筒箭) 등이 있으며, 수렵용으로는 주살, 동시(彤矢), 노시(蘆矢), 습사무과사용으로는 박두(樸頭), 유엽전(柳葉箭), 편전(片箭) 등이 있다. 한국의 화살은 크게 대나무화살인 죽전(竹箭)과 나무화살인 목시(木矢)로 구분되는데 지역에 따라 죽전이나 목시의 선호도가 달랐다.

이것은 지역의 자연조건에 따라 달라지는데 추운지역에서는 대나무가 자생되지 않기 때문에, 한반도의 북쪽에 위치한 고구려 등의 국가는 싸리나무나 버드나무 또는 자작나무를 이용하여 화살을 만들었다. 특히 고구려는 싸리나무로 화살을 만들었는데 이 화살은 호시(楛矢)라 하여 성능이 매우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고려시대까지 사용이 빈번하던 나무화살은 조선시대로 들어오며 점차 제작이 줄게 되는데, 나무화살의 제작은 대나무화살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였고 대나무화살에 비하여 무거워서 먼 사거리에 적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화살의 쓰임도 매우 다양하여 전통에 사용되었던 화살과 사냥에 사용되었던 화살, 그리고 신호와 연락에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병사들의 활쏘기 연습에서부터 선비들의 정신수양의 방법으로 사용되었던 연습용 화살, 화약을 달아 사용하던 로켓형 화살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였다.

반백 년 전통화살의 명맥을 이어온 궁시장 김종국 선생

 

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 기능보유자인 김종국 선생은 1938년 일본 히로시마에서 출생하였다(호적상 출생년도는 1940년이다.) 1945년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부친은 실종되었고 해방이 되자 귀국하였다. 원래 선친의 고향은 함경도였지만 국토 분단으로 인해 선친의 고향으로 귀향하지 못하고 외가가 있는 전라남도 여수에서 성장하며 고등학교까지 학업을 마쳤다.

당시의 형편은 취업이 어려운 상황이라 생계의 방편으로 친구의 소개를 통하여 1960년 5월부터 1962년까지 경남 마산시 추산동의 전방(箭房)에서 일을 하게 되어 이때부터 화살 제작업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이곳에서 조명제 선생의 지도를 받으며 기술을 연마한 후에 1962년에 독립하여 경북 예천군 왕신리로 이사하고 독자적으로 전방을 열었다. 전국활쏘기대회에 적극 참여하여 궁사들의 이름, 특징 등을 기억하였다가 각자의 신체적 특징과 습사 태도에 맞추어 적절히 화살을 만들어주기도 하였다.

1980년대 후반에는 ‘동이궁업(東夷弓業)’이라는 상호로 전방을 내고 화살 제조에 심혈을 기울였다. 한때 일년에 5,000개 이상을 제작하였는데 여름에는 더위로 효율이 떨어졌다고 한다. 평상시에는 한달에 보통 200~300개 정도를 생산하였다. 1년에 한두 달은 깃과 대나무 등 재료 구입을 하였는데 대나무 구입은 주로 강원도 삼척군 원덕면 사곡리 등의 대나무 밭을 사서 대량으로 전죽을 구입하였다고 한다.

당시는 붓대, 낚싯대 등으로 대의 수요가 컸던 관계로 전죽을 제외한 나머지는 팔았다고 한다. 1978년 스승인 조명제 선생이 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됨을 계기로 조명제 선생의 아들 조삼래 선생과 함께 궁시장 전수 장학생으로 선정되었다.

화살 제조에 끊임없이 전통기법을 이론화하여 화살이 보여주는 여러 현상을 과학적 방법으로 설명하려는 그의 열정은 전통 화살 중에 하나인 기패(旗牌)의 문양을 새기는 방법에서 파생된 점반죽법(點斑竹法)이라는 독특한 기술을 복원하기에 이른다. 이는 대나무에 문양을 새기는 전통적인 낙죽법과 달리 염액을 바르고 열처리를 하여 대나무 표면을 상하거나 불로 지지지 않고도 다양하고 아름다운 문양을 나타낼 수 있는 기술로 다른 죽공예에도 폭넓게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다.

선생의 화살 제작 솜씨는 매우 치밀하고 숙련돼 있을 뿐 아니라, 완성된 죽시의 예술성과 조형성 등 모든 면에서 탁월한 기량을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08년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주요 작품

 

마전(磨箭) / 53×106cm 전쟁에 쓰는 화살 중 하나로 [세종실록] 오례의에 보면, 화살의 깃이 좁고 철촉이 작은 것을 마전이라 했다.

기패(旗牌) / 56×105cm 대장들이 전시에 사용하는 일종의 호패로 연세대학교박물관에 있는 유물을 재현하였다. 기패, 심, 어교, 장꿩꼬리, 사골, 색종이, 안료 등을 사용하여 문양을 그려넣었다.

제작과정

 

화살에 사용하는 대나무를 시누대, 시너리대, 일명 해양죽 등으로 부르는데 남부지방 등지 해풍의 영향이 미치는 곳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그 중에 시죽을 굽혀 놓으면 원형으로 복귀하는 상태가 빠른 탄력이 좋은 죽, 마디가 별로 굽지 않고 잘 생긴 죽, 모가지지 않은 죽, 병죽이나 외부 작용에 의하여 흠이 없는 죽, 육안으로 빨리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밑부분보다 윗부분이 가는 죽, 대나무 자체에 진을 많이 함유한 죽, 대나무의 속살이 많이 진 죽을 고른다.

화살은 이러한 선죽하기 과정을 거쳐 초벌자품추리기, 부잡이, 치죽과정, 재벌부잡이, 재 저울질하기, 재벌 자품 추리기, 재단하기, 자르기, 졸잡이, 상사자리 먹금치기, 상사자리·오늬자리 깎기, 푸조름, 심감기, 상사자리·오늬자리 구멍파기, 오늬만들기, 오늬목 끼우기, 상사만들기, 상사끼우기, 오늬 구멍 파기, 오늬구멍 다듬기, 토리 만들기, 오늬다듬기, 오늬사포질하기, 도피싸기, 토리 끼우기, 촉박기, 걸레질하기, 도피 껍질 다듬기, 오늬 부분 마무리, 졸잡이, 깃 붙이기, 마무리 과정을 거쳐 완성된다.

약력
  • 1940년                         출생
  • 1960년                         고 조명제 선생 사사
  • 1979년                         전승공예대전 장려상(1982, 1984, 1985, 1986)
  • 1984년                         제5회 신라미술대전 입선
  • 1987년                         보유자후보 선정
  • 200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 기능보유자 인정
이치헌/한국문화재보호재단 (http://www.chf.or.kr/)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은 문화재보호법 제9조에 근거하여 우리 전통문화를 널리 보전, 선양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공공기관입니다.
공식블로그 http://blog.naver.com/fpcp2010
작품사진
서헌강(문화재전문 사진작가)
발행2013.0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