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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호]갓일(갓일) | 중요 무형 문화제

문성식 2012. 3. 27. 03:01


종 목 중요무형문화재 4호
명 칭 갓일
(갓일)
분 류 공예기술
지정일 1964.12.24
소재지 전국



※ 본문설명

갓은 조선시대 성인 남자들이 외출할 때 반드시 갖추어야 할 예복중의 하나로 원래는 햇볕, 비, 바람을 가리기 위한 실용적인 모자였으나 주로 양반의 사회적인 신분을 반영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갓은 넓은 의미로 방갓형과 패랭이형 모두를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흑립·칠립·평립이라고 부르며 갓일은 갓을 만드는 과정을 말한다.

갓일은 총모자, 양태, 입자로 나뉜다. 총모자는 컵을 뒤집어 놓은 듯한 갓 대우 부분을 말꼬리털 또는 목덜미털을 사용해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양태는 대나무를 머리카락보다 잘게 쪼개서 레코드판처럼 얽어내는 과정을 말하며, 입자는 총모자와 양태를 조립하면서 명주를 입히고 옻칠을 해서 제품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세 가지 과정은 서로 재료가 다르고 솜씨의 격차가 심하기 때문에 생산지를 달리하거나 따로 행해지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 민족의 의생활에서 필수품목의 하나였던 갓은 의복의 변화와 단발령 이후 점차 수요가 줄어들어 현재 통영, 예천, 제주 등지에서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문화재 보전차원에서 전통을 계승하고 보호하고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기능보유자로는 입자장에 정춘모, 박창영, 양태장에 장순자, 총모자장에 김인이 있다.

※ 보충설명

갓은 조선초에 생성되어 가볍고 화사한 관모로서 세계적이라 할 수 있었으나 1930년대부터 그 착용이 쇠퇴되어 현재는 그 전통이 끊어질 우려마저 자아내게 하고 있다.

갓을 제작하는 공정은 크게 3가지 기능으로 구분한다. 갓대우 부분을 말총으로 엮는 총모자장(總帽子匠), 대올을 실낱처럼 떠서 차양부분을 얽어내는 양태장(凉太匠), 총모자와 양태를 조립하면서 명주를 입히고 옻칠해 완제품을 만들어 내는 입자장(笠子匠)이 그것으로, 서로 분업을 거쳐서 비로소 갓이 만들어진다.

최초로 보유자로 인정된 양태장, 입자장과 총모자장이 이미 고인(故人)이 되었고 1980년에 고정생, 오송죽이 추가 지정되었으나 작고하였으며, 현재 보유자는 총모자 기능에 김인, 입자 기능에 정춘모, 박창영 양태 기능에 장순자가 보유자로 인정되어 있다. 이렇듯 갓일의 장인이 급격하게 자취를 감추어가는 까닭은 갓이 우리 관모의 자리에서 물러난 데 있다고 할 것이다.

세계에서도 가장 섬세한 죽세공(竹細工)이요 마미공예(馬尾工藝)인 입자(笠子)가 두식(頭飾)의 자리에서 물러났다고 하여 자연의 추세에만 내맡겨서 인멸케 할 수는 없다. 이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하여 재창조하는 당대의 책임이 절실한 상황이다.

총모자의 재료는 날줄감으로는 말총이 쓰이고 절임줄감으로는 쇠꼬리털이 쓰인다. 도구로는 총모자판인 일골, 일골받침인 주개판, 절이는 데 쓰이는 쇠끌이 있으면 된다. 공정(工程)은 말총과 쇠꼬리털을 길이가 비슷한 것끼리 가려두었다가 일골 위 정면에 창호지를 바르고 아교칠을 하여 말려 날줄과 사잇줄이 흐트러지지 않게 붙인다. 일골을 세워서 윗정상에 말총 8줄을 16가닥이 되게 겹쳐서 한 묶음으로 하여 4묶음을 정자(井字)로 엮어 붙인다. 처음 날줄이 64가닥이 된다.

절임줄로 절이는 방법은 양태 절이는 방법과 같다. 한 절임줄에 4가닥으로 2줄 뜨고 1줄 넘어서 꼬아 나간다. 이 줄은 나선형으로 된다. 정상부의 나선은 면회(面回)가 되고 측면부는 2면회가 된다. 절임줄로 절어가면 날줄 사이가 생기게 된다. 정상에서 날줄 사이사이에 4번 사잇줄을 넣는다. 측면으로 내려갈 때는 사잇줄이 합쳐져서 날줄이 아래와 같이 도합 512줄이 된다. 원날줄수와 사잇줄수의 합계는 다음과 같다. 첫번째는 64가닥에 64가닥을 더하여 128줄이 되고 두번째는 128가닥에 128가닥을 더하여 256줄이 되고 세번째는 256가닥에 128가닥을 더하여 384줄이 되고 네번째는 384가닥에 128가닥을 더하여 512줄이 된다.

다 절인 총모자는 쇠끝의 칼같이 납작한 부분으로 사잇줄을 넣을 때나 절임줄을 이을 때 나온 가닥을 끊어내고 쇠끝의 송곳 굽은 것 같은 부분으로는 절임줄 사이사이의 간격을 고르는 데 쓴다. 총모자를 골에서 뺀 다음에 이를 뒤집어서 먹칠을 하면 완성이 되고 그 다음은 입방(笠房)으로 보내져서 입자장(笠子匠)의 손으로 갓이 모아진다.

숙련된 솜씨로 총모자 하나를 완성하는 데 5일에서 10일이 소요되는데, 노쇠가 심한 오늘날에는 20여 일이 넘게 걸리는 것이 실정이다. 양태(凉太)의 재료는 마디 사이가 40cm 내외의 대나무(분죽(粉竹))로서 대마디를 양태칼로 잘 다듬고 내피와 외피를 가리어 외피부를 사용하는데, 머리카락보다 잘게 쪼갠 대오리(죽사(竹가))를 양태판 위에서 날대와 절대로 엮어 나가는 세공에 속하는 작업이며 양태 한 장을 저는 데는 능숙한 솜씨로도 1∼2주일이 소요된다.

1920. 2. 16 ~ | 보유자 인정: 1985년 2월 1일

 

한국의 갓은 무엇보다 가볍고도 무거운데 그 특징이 있다. 인류가 만든 모자 가운데 갓만큼 가장 가볍고 가장 엄숙하면서도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도 없을 것이다. 갓이 표현하는 의미는 실용성도 심미적인 장식성도 아닌 일종의 점잖음을 보여주는 도덕성이다. 갓 쓰고 망신당한다는 속담이 있듯이 그것은 쓴 사람의 인격이나 정신을 표현하는 언어, 하나의 기호이다. 남자의, 선비의, 양반의 시니피앙(signifiant: 기표)으로써 사람 전체의 몸을 기호로 바꿔놓은 작용을 한다(…) 갓, 그것은 한국인의 이념이 물질 그 자체로 응집되어 있는 ‘머리의 언어’이다.


- 우리문화 박물지(이어령 저, 디자인하우스, 2007) 중

갓, 쓴 사람의 인격과 정신을 표현하는 언어

갓으로 불려지는 흑립(黑笠)은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백의(白衣)와 대비되어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신분을 상징하고 있다. 전통사회의 성인남성의 격은 갓을 갖추어 썼을 때라야 비로소 완성된다. ‘의관을 정제한다’는 말처럼 평소에 성인 남성이 바깥출입을 할 때 의례 도포와 갓을 갖추어 쓰게 마련이었다. 방을 나설 때부터 착용하여 실내에서도 벗지 않았을 뿐더러 돌아와 잠자리에 들기 직전에 비로소 벗는 것이 상례였다. 흰색 도포자락에 짙은 먹빛의 반그늘이 지는 갓이 절제되지만 서로 절묘하게 어우러져 갖춰 쓴 이의 품격을 유감없이 대별할 수 있었다.

성인 남성의 필수품

갓은 고려시대에 서민들이 즐겨 쓰던 패랭이 (平凉子)에서 유래되어 조선시대에는 한층 양식미를 갖춘 공예품으로 발전하였다. 갓을 제작하는 공정은 크게 세 가지 기능으로 구분한다. 우선 갓 대우(대우는 갓의 모자 부분을 일컫는 순수한 국어로서, 모정아[帽頂兒]라고 부르기도 한다)부분을 말총으로 엮는 총모자장(驄帽子匠), 대올을 실낱처럼 떠서 차양부분을 얽어내는 양태장(涼太匠), 총모자와 양태를 조립하면서 명주를 입히고 옻칠해 완제품을 만들어내는 입자장(笠子匠)이 그것이다. 이 세 기능은 서로 재료가 다르고 솜씨의 격차가 심하기 때문에 생산지를 달리하거나, 혹은 한 공방에서 분업적인 협동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총모자장, 양태장, 입자장의 기능을 일괄해 ‘갓일’이라는 명칭으로 묶어 국가에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한 것이다. 물론, 그 용어가 전래의 것은 아니며 제작소 내지 판매점을 갓방(笠房)이라 부를 뿐, 전 공정을 통괄하는 일의 명칭은 따로 없었던 듯하다.

 

지금의 갓은 대체로 조선시대 전기에 정형화되고 그 사용이 점차 일반화되어 사류(士類)의 가장 애용하는 바가 되었다. 동국의관(東國衣冠)은 갓과 도포(道袍)를 말하는데 그 양식미는 세계의 어느 의관보다도 우월하다고 하겠다.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직전까지 우리나라의 성인 남자들은 평상시에 도포에 갓을 갖추어야 비로소 문밖출입을 할 수 있었다. 각지의 명산지에서 제작과 판매를 담당하고 시장에서도 판매하였기에 도매상과 소매상이 전국을 누비던 것이 당시의 풍경이었다. 그러나 값이 워낙에 비싸서 낡았다고 하여 쉽게 새것으로 바꿀 엄두가 나지 않는 물건이기도 했다. 따라서 구멍이 나고 헤져도 부분적으로 수리해 쓰는 것이 일반화된 습관이어서 지방에는 곳곳에 수리공이 성업하기도 했다. 그러나 단발령이 내리고 의습이 서구식으로 바뀌고 난 뒤에는 지방의 노인들 말고는 찾는 이가 급격히 줄면서 갓일도 침체일로에 접어들었다. 갓일은 1964년 12월에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었는데, 문화재보호법이 생기고 가장 먼저 지정한 공예기술 분야로 기록된 것도 이런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김인 선생은 스승인 오송죽 선생의 뒤를 이어 보유자가 되었고, 90세의 고령에 달한 2009년에는 평생을 전업으로 몰입해 왔던 공로를 인정하여 명예보유자의 반열에 올랐다.

갓일의 제작공정

갓일은 갓을 만드는 과정 전체를 말하지만, 갓을 완성하는 데는 총모자, 양태, 입자 분야의 기술이 협업을 통해서만 완성할 수 있는 특성이 있다. 김인 선생은 이 가운데서도 총모자 분야의 기능보유자이며, 말꼬리 털 또는 목덜미털을 써서 컵을 엎어 놓은 듯한 형태의 갓 모자 부분을 담당한다. 양태장은 대나무 오리를 가늘게 쪼개어 모자의 차양부분에 해당하는 양태를 제작하고, 이 두 가지 부품을 하나로 모아 갓을 완성하는 기능이 바로 입자장의 영역이다.

 

총모자: 갓일(총모자장) 기능보유자 김인 선생의 작품

양태: 갓일(양태장) 기능보유자 장순자 선생의 작품

 

완성된 갓(통영 갓): 갓일(입자장) 기능보유자 정춘모 선생의 작품

완성된 갓 (박쥐문양갓): 갓일(입자장) 기능보유자 박창영 선생의 작품

 

제주지역의 보유자, 한라 문화축제나 섬축제 등에 빠짐없이 참여

김인 선생은 제주시 도두동 출생으로 반농반어형 가정에서 1920년 2월 16일에 태어났다. 젊어서는 해녀 일을 주로 하였고, 1970년대 초까지는 가내 수공업으로 총모자를 만들기도 했다. 선생은 제주 1세대 보유자인 오송죽 선생과 함께 기거하면서 다시 총모자 일을 재개하였고, 재료와 연장을 완벽하게 다루게 되었다. 어릴 적부터 솜씨가 좋다는 평을 줄곧 들어온 선생은 머지않아 총모자 제작 분야에서도 일가를 이루었다. 멀리서도 선생의 작품을 찾는 이들이 점차 늘면서 선생의 명성도 자연스럽게 알려지게 되었고 마침내 198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의 총모자장으로 인정되었다. 김인 선생은 평소의 품성이 밝고 따뜻하며 친화력도 좋아서 자랄 때부터 집에는 항상 또래의 친구들이 대여섯 명씩 모여 들었다고 한다. 제주 지역의 보유자로서 한라 문화축제나 섬축제 등에 빠짐없이 참여하여 이 지역 말총공예의 진작에 노력하였다. 90세의 고령에 달한 2009년에 평생을 전업으로 몰입해 왔던 공로를 인정받아 명예보유자의 반열에 올랐다. 현재 선생의 총모자 제작기술은 딸인 강순자(1946년생) 선생이 전수받아 2009년 9월에 중요무형문화재 갓일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어 대를 이어 활동하고 있다.

주요작품

총모자, 김인, 12X15X14cm

총모자
김인 선생의 작품은 모두 과거 전통사회의 갓의 풍모와 가장 근접한 형식미를 갖추었다는 평이다. 단순한 형태를 세련되게 완성하는 일이 오히려 복합한 형태를 만드는 이보다 어렵다고 한다. 단순한 형태는 기능의 숙련도와 작품의 밀도가 일치하지 않으면 결코 높은 평가를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평생을 하루같이 한길만을 걸어온 노장인의 모습은 차라리 한 사람의 구도자의 풍모에 가깝다. 이것이 우리가 존경해 마땅한 참 장인다운 길이다.
김인 선생이 사용하던 작업도구

말총.

일골과 골걸이.

 

말총: 갓의 대우 부분에 사용되는 재료다. 대우를 만들 때 날줄은 길이가 긴 말총을 많이 사용하고 길이에 구애를 받지 않은 절임줄은 쇠꼬리털을 많이 사용한다.

 

일골(총모자골):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전체적인 형태는 아래가 넓고 위는 사다리꼴처럼 줄어드는 변형 원통의 모양이다. 뒤집어 보면 윗면쪽은 막혀 있지만 바닥쪽은 바깥부분의 2cm, 안쪽으로 7.2cm정도 깊이의 둥근 홈이 패어 있다. 이렇게 패인 곳은 주개판 위에 올려 놓고 대우를 엮어가는 작업을 하기 쉽게 하기 위함이다. 일골의 표면에는 어교가 묻어 있는데 말총으로 연결하여 모자의 시작 부분에 해당되는 생이방석을 만든 다음 결어갈 때 불에 녹여서 고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골걸이(주개판): 총모자를 결을 때 주개판 위에 일골을 돌려가면서 짤 수 있도록 만들어져서 판의 꼭대기는 둥글게 굴려져 있다. 주개판 위에 일골을 걸었을 때, 일골 안쪽에 패인 홈이 주개판 위에서 빙 도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양자 사이의 빈 공간에는 헌 헝겊을 넣어 메우는 역할을 한다.

 

이외에 일골 위의 말총을 한 코씩 잡아채서 새뜨기를 할 때 사용하는 총바늘과 먹칠을 하기 위해 사용하는 먹골과 석죽, 먹사발과 먹솔 등이 사용된다.

약력
1920
제주시 도두동 4남2녀 중 장녀로 출생
1980
제5회 전승공예대전 입선(그외 6, 9회 입선)
1985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총모자장) 기능보유자 인정
1993
붇다(붇다 제주 중앙클럽 주관) 대상
2009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 명예보유자 인정

※ 명예보유자
중요무형문화재 명예보유자 제도는 아무나 오를 수 없는 그야말로 명예로운 지위다. 문화재청이 2001년 3월에 제도를 마련하고 2005년부터 시행하기 시작한 명예보유자제도는 연로하고 병마로 더 이상 현장에서 예전처럼 전수활동을 지속하기 어려운 분들을 위해 그 직무로부터 벗어나 남은 생을 보람되게 살아갈 수 있게 배려한 조치이다. 명예보유자 인정제도는 평생을 우리 문화유산을 위해 헌신해 온 보유자들의 명예와 앞으로의 활동을 보장해 주고, 중요무형문화재 전승자들 간의 안정적인 세대교체와 전승현장에 활력을 불어넣는 두 가지 실효성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한국문화재보호재단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은 문화재보호법 제9조에 근거하여 우리 전통문화를 널리 보전, 선양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공공기관입니다.

 

공식블로그 : http://blog.naver.com/fpcp2010

 

사진 서헌강(문화재전문 사진작가)

1943. 9. 10. ~ | 보유자 인정: 2000년 7월 22일

이미 부인을 맞아들인 자는 상투를 틀고 갓을 쓴다. 또 처가 없는 자는 30, 40세에 이르기까지 갓을 쓰지 못하고 머리카락을 뒷머리에 땋아서 등에 늘어뜨린다. 갓을 쓰는 자를 부르는데 모 서방이라고 한다. 갓을 쓰지 않은 자를 아이라고 말하고, 모 도령이라고 부른다. 또 그 이름을 부른다. 가령 연장자이지만 항상 갓을 쓴 소년에게 막 불리고 모든 일에서 권력이 없다.

- 조선잡기 (혼마 규스케 저, 최혜주 역, 김영사 2008년 발행) 중에서

선비의 인격이자 한국적 아름다움의 상징 갓

속칭 갓으로 불려지는 흑립(黑笠)은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백의(白衣)와 대비되어 조선시대 선비들의 신분을 상징하고 있다. 갓은 고려 시대에 서민들이 즐겨 쓰던 패랭이(平凉子)에서 유래되어 조선시대에는 한층 양식미를 갖춘 공예품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흑립은 의관의 정제를 중시했던 조선조 선비들이 평상시에 항상 애용하였고 그들의 취향에 따라 갓의 대우가 높아지기도 낮아지기도 하였으며, 양태도 넓어지고 좁아지는 등 시대의 흐름 속에 양식적인 변천을 거듭하였다.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에 나오는 갓보다는 혜원 신윤복이 그린 갓이 훨씬 풍채가 있어 보인다. 그것은 그들 화가가 가진 필선에 차이도 있겠지만 시대차에 의한 유행의 반영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갓이라는 말은 본시 순수한 한국어이다. 갓을 한자로 입(笠), 흑립(黑笠), 칠립(漆笠) 등으로 표기하는 것이 보통인데 검게 칠하여 사용하기 때문에 흑립이요, 옻칠을 하여 견실하게 만들기 때문에 칠립이다. 그러나 이러한 흑립과 칠립의 형태가 언제부터 굳혀진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근래의 갓은 총대우와 양태에다 성근 명주를 덧씌워 옻칠한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바람이 세찬 해안 주민에 있어서는 총대우에 깁싸개를 하지 않는 음양립을 즐겨 썼다. 갓은 조선시대 말까지 매우 유행하여 성인 남자는 모두 쓰고 다녔으나 한말 개혁 정책으로 단발령이 내려 상투를 베고, 옷에 검은 물감을 뿌려 갓의 사용이 갑자기 저하되고 지금은 사극에서나 볼 수 있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 중엽까지만 해도 전국 어느 곳에서나 만들었는데 그 중에서도 해방 후까지 활발하게 제작이 성행했던 곳은 통영, 예천, 대구, 김천, 김제, 남원 등지이다.

갓 속에 담긴 조상의 숨결을 4대째 이어온 박창영 선생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청복동 816번지에서 태어난 박창영 선생의 집안은 4대째 갓을 만들고 있다. 선생의 고향인 경북 예천 돌티마을은 선생이 어렸을 적만 해도 80가구 가운데 절반 이상이 갓을 만들던 전통적인 갓마을이었다. 증조부 박항길 선생때부터 시작하여 조부 박형석 선생이 대를 이어 받았고 백부 박주해 선생과 중부 박월해 선생, 그리고 부친 박경해 선생이 모두 갓을 만들었다. 모두 갓방을 경영하며 총모자와 양태 및 갓을 만들어 예천갓의 중심을 이루었다. 외할아버지 김영일 선생도 예천에서 대규모 갓방을 경영하여 그곳에서는 부친의 친구인 안수봉 선생을 비롯하여 친구들과 함게 제작하는 등 박씨 일가는 예천 갓을 대표할 만큼 번창하였다.

예천 갓일 가계도

이렇듯 집안 전체가 갓일에 종사하는 환경에서 자란 박창영 선생은 중학교를 졸업한 16세 때에 큰 형님 박호영 선생의 권유로 아버지 밑에서 갓일을 전수받기에 이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갓일을 배우는 도중 아버지가 작고하여 아버지의 친구인 안수봉 선생의 갓공방에 들어가서 일을 배우게 된다. 갓일 시작할 때에는 모자골에다 총모자를 박아 놓고 바닥을 고르는 골배기나 수장일부터 입문을 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좋아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18세가 되던 해에 안수봉 선생의 갓방을 나와서 대구의 규모가 큰 갓방으로 옮겨 다시 수장일부터 배우게 되었다. 당시에는 이미 갓이 귀했기 때문에 갓을 만들면 부르는 것이 값이었다. 수장일 또한 웬만한 대기업에 근무하는 회사원의 월급보다 수입이 좋았다. 1967년 4월에 고향인 예천 청복동 돌태마을로 귀향하여 갓공방을 차렸다. 당시 청복동에는 갓방을 운영하는 집이 여럿이었는데, 새 갓을 만들거나 헌 갓을 수집하여 수리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로 예천은 전국에서 모여드는 갓 상인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러나 산업화와 새마을 운동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차츰 갓의 수요가 격감하였다. 생활에 어려움을 느껴 1978년 서울로 이사한 후 계속 갓일을 하였으나 역시 판로는 없었다. 이에 선생이 생각해 낸 묘안이 바로 방송국에 갓을 납품하는 일이었다. TV 드라마나 영화 속 사극의 인물들이 갓을 쓰고 나오는 것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 영화 ‘스캔들’에서 주인공 배용준이 쓰고 나온 갓과 KBS 드라마 ‘거상 김만덕’과 ‘태양인 이제마’, ‘명성황후’, ‘장희빈’ 등 사극에 등장하는 갓은 모두 선생의 작품들이다.

“무작정 방송국 국장님을 찾아가 ‘내가 만든 갓을 써달라’고 했지요. 품질엔 자신이 있었으니까요. 과거부터 지금까지 TV사극이나 영화에 나오는 갓은 거의 제 손으로 만든 거라고 보면 됩니다.”

선생에게 갓일은 단순한 생계유지 수단만은 아니다. 선비들의 정신세계를 탐구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4대를 이어 130여 년 동안 이어진 가업을 통해 선생이 터득한 삶의 자세다. 그로 인해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갓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일에 큰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철종어진’에 나오는 갓인 전립(氈笠)을 비롯해 사대부들이 주로 썼던 박쥐모양 갓과 국상 때 주로 썼던 백립(白笠), 사신들이 썼던 옥로립(玉鷺笠) 등을 완벽하게 재현했다. 이런 갓 하나를 재현하는 데는 1년여가 걸린다고 한다. 작품을 만드는 일을 온전히 선생 혼자 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유물을 찾아 다니며 예전의 갓을 세심히 관찰하는 일부터 머리카락만큼이나 얇은 대나무인 세죽사(細竹絲)를 하나하나 엮어 모자 부분을 만들고 이어 양태를 엮고 세죽사 가닥마다 명주실을 하나하나 붙이는 작업, 먹칠과 옻칠, 모자와 양태를 모아 곡선을 이루도록 모양을 잡는 일까지. 까다롭고 섬세한 공정을 모두 익히려면 짧게 잡아도 10년은 족히 걸린다고 한다. 작업과정에서 화로에 담긴 숯으로 인두질을 계속해야 하기 때문에 엄청난 인내심도 필요하다.

선생은 1985년 한국문화재보호협회 이사장상을 시작으로 1988년 문화재관리국장상, 1989년 문예진흥원장상을 수상했으며, 1986년 일본 규슈 종합전시장에서의 7일간 갓 제작 시연, 1988년과 1989년에는 미국 LA에서 특별전시회를 열기도 하였다. 2000년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현재 선생의 장남이 박형박씨가 가업을 이어 5대째 전통의 맥을 잇고 있다. 박형박씨는 전통의상학 전공으로 박사과정까지 이수하여 이론적인 체계를 정리함과 동시에 제35회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에 작품을 출품하여 출품작인 ‘흑립’으로 국무총리상을 수상하는 등 기능적인 실력까지를 겸비하였다. 미술을 전공하고 현재 도자기 공방을 운영하는 둘째 아들 역시 틈틈이 갓일을 배우고 있다.


“ 과거 선조들이 만든 갓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납니다. 볼 때마다 그 아름다움에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지요. 이제 갓을 찾는 이들은 없지만,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릴 수 있는 갓일은 제가 평생 놓을 수 없습니다. ”

작품

박쥐문양갓 _ 66×19.5cm명주로 복을 상징하는 박쥐문양을 떠서 양태에 붙였으며 모정(帽頂)에는 선비의 청백리 상징인 옥으로 장식했다.

황창술갓 _ 50×15cm (끈 90cm)조선 중기 인물이었던 단구 황창술이 쓰던 갓을 복원하였다. 죽사로 한 올 한 올 엮어 섬세하게 제작하였다.

백립_50x20cm (끈79cm)주로 국상때 착용하였던 갓으로 삼년상을 치르고 담제(3년상을 치른 후 두 달이 되는 날에 지내는 제사)에 이르는 기간에 사대부가에서 사용하기도 하였다.

옥립_42x20cm

백립_51x18cm

19세기 초 갓_61x19cm

박쥐문양갓_64x20cm

제작과정

먼저 머리카락보다 가는 말총을 작은 쇠갈고리처럼 생긴 바늘로 정교하게 엮은 뒤 먹칠을 해 총모자를 완성한다. 차양 부분인 양태는 대나무를 삶아 쪼개고, 문질러 머리카락굵기로 만들어 결은 뒤 다시 명주실이나 대올을 덧입혀 옻칠을 한다. 완성된 총모자와 양태는 인두질과 아교칠, 먹칠, 옻칠을 반복하면서 조립해 완성한다. 갓을 만드는 데는 가느다란 대나무로 갓의 테를 만드는 ‘양태일, 말총으로 총모자를 만드는 ‘총모자일’, 양태와 총모자를 맞추어 갓을 완성시키는 ’입자일‘ 등 크게 3가지 공정을 거치게 되는데 양태일 24과정, 총모자일 17과정, 입자일 10과정 등 총 51개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한 개의 갓이 완성된다. 그만큼 정성을 들여야 완성되는 노력의 산물인 것이다.

1)대밀기                                 2)골빼기                                3)트집잡기 위해 인두잡기

4)트집잡기                                                        작업중인 박창영 선생

약력
  • 1943년               출생
  • 1973년-1989년    전승공예대전 입선, 장려상, 특별상
  • 1980년               국립민속박물관 백립기증
  • 1998년               일본 규슈 한일종합전시회 초청 작품제작 시연
  • 200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 기능보유자 인정
  • 2000년-현재        중요무형문화재보유자작품전 출품
  • 2004년               미국 뉴욕 맨하탄 한국문화박물관 갓 기증
  • 2004년               세계박물관대회 ‘박물관과 무형문화재’ 갓 제작 시연
  • 2005년-2008년    남북전통공예교류전 참가
  • 2007년               보물 494호 갓 원형 복원
  • 2007년-2010년    부천세계무형문화유산엑스포 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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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서헌강(문화재전문 사진작가)
발행2012.09.27

갓일 장순자

1940. 9. 8. ~ | 보유자 인정: 2000년 7월 22일

水路로 千里 陸路로 千里 / 삼천리를 고중에 드러와서
저긔 안저 양대 트는 저 처자야 / 저 산 일흠 무엇이라드냐
나도 양태트러 부모공양하노라고 / 그 산 일흠 몰낫더니
옛적노인이 일너 전한 말이 / 제주 한라산이라 합듸다.
- 양태가 중, <조선민요연구> 고정옥, 수선사, 1949

갓이 지닌 풍채의 핵심 양태

 

갓을 제작하는 공정은 크게 3가지 기능으로 구분한다. 갓대우 부분을 말총으로 엮는 총모자장, 대올을 실낱처럼 떠서 차양부분을 얽어내는 양태장, 총모자와 양태를 조립하면서 명주를 입히고 옻칠해 완제품을 만들어 내는 입자장이 그것으로, 서로 분업을 거쳐서 비로소 갓이 만들어진다. 이 중 양태란 갓에 둥근 차양을 이루어 태양을 가리는 부분을 말한다.

보통 갓은 총모자를 말총으로 하고 양태는 죽사로 하는 것이 통념이나 옛날에는 양태와 총모자를 모두 죽사로 만들었다. 갓은 본시부터 피죽(皮竹) 쪼개기를 실같이 한 대올을 가지고 결어서 죽태(竹胎)의 기본형을 잡아 놓고 그 위에 깁을 바르면서 구멍이 메워지지 않을 만큼만 옻칠을 입힌 것이다. 모자 부분을 갓대우라고 일컫고 차양부분을 양태라 구별해 부르는데 갓대우와 양태는 제작 재료가 아주 다르게 발달되어 왔다. 본시 댓개비로 만들어 깁을 발랐던 갓대우가 자칫 망가지기를 잘하므로 아예 유연성 있는 말총이나 쇠꼬리털로 대체하게 되었다. 그러나 양태까지 말총으로 대용하기는 곤란하였다. 위풍 있게 폭넓은 양태를 말총으로 겯는다면 그 등판을 두둑하게 휘어잡을 수 없거니와 어느 한쪽이 축 쳐져 버려 단정치 못하게 된다. 그래서 양태는 대올을 극세화하는 기교에 한층 공력을 쏟아 왔다.

갓이 지니고 있는 풍채의 핵심은 양태의 느슨한 곡선에 있다. 그래서 각 시대마다 양태를 넓혔다가 줄이는 유행을 되풀이해 왔다. 단원의 풍속화에 나오는 갓보다는 혜원이 그린 갓이 훨씬 풍채가 있다. 그것은 그들 화가가 가진 필선에 차이가 없는 게 아니지만 시대차에 의한 유행의 반영도 배제될 수 없는 이유이다.

19세기초의 [순조실록]에 의하면 양태의 치레가 도를 지나쳐서 막대하게 낭비되고 있다는 폐단을 지적한 기록도 보인다. 그래서 19세기말 대원군 집권 시에는 대립(大笠)의 양태를 훨씬 좁혀서 소립(小笠)으로 개량하는 한편 양반 계층만이 쓴다는 종래의 통념을 깨뜨려 1896년 단발령과 동시에 백정과 같은 천민까지 갓 쓰는 것을 허락하였다.

한편, 조선시대 양태를 제작하는 장인들은 여자 장인들이 많았으며, 이것은 조선말기 김준근의 풍속화 [냥태 틀고]에서도 확인이 된다.이 그림에 의하면 여자 양태장 2명이 국수가락처럼 가는 대실[竹絲]를 옆에 두고 양태판이와 판걸이 및 바늘 등 간단한 도구만으로 양태를 제작하고 있다. 이와 같은 양태장의 제작 도구는 현재까지도 거의 그대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통영갓 , 갓일(입자장) 기능보유자 정춘모 선생 작품

외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딸들까지로 이어지는 모계 가업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양태장) 기능보유자인 장순자 선생은 외할머니 강군일 여사와 어머니 고정생 여사를 이어 3대째 양태인생을 걷고 있다. 장순자 선생이 기억하는 어머니는 남편의 구박을 받을 때에도 양태판이와 구덕만 들고 다른 집에 피해 가서 양태를 짤 정도로 평생 양태 짜는 일만 했다고 한다. 어머니의 양태 제작기술은 워낙 뛰어나서 주변의 사람들이 “너랑 죽거들랑 손이랑 내놔 죽으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제주시 도련2동 면촌에서 태어난 선생은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대를 이으면서 양태를 짰기 때문에 어깨 너머로 자연스럽게 기능을 익히게 되었고 마을에 있는 공동 작업장인 양태청에 수시로 드나들면서 양태와 자연스런 인연을 맺게 되었다. 어머니의 권유로 장순자 선생은 23살부터 10여 년 간 대장사를 하여 제주의 양태장들에게 대나무를 공급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10여 년 동안 120명의 할머니들에게 대를 공급했다. 그 후 양태를 제작하던 할머니들이 다 돌아가시고 대가 끊겼다. 그러다 선생의 나이 43살에 어머니가 국가 지정 중요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로 인정되면서부터 양태를 제작하는 일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하였다.

김준근, [초립 겻는 모양], 19세기 후반, [기산풍속도첩] 중, <프랑스기메박물관 소장>

어느 날 “대 긁어 안내카마씸?(대를 긁어드릴까요?)”하고 어머니께 여쭸더니 “걸목해봐라(대나무를 대칼로 훑어봐라)”고 한 이후부터 3대에 걸친 양태 인생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늦은 나이에 어머니의 대를 잇는 갓일을 시작한 만큼 그 과정 또한 혹독했다. 양태의 재료인 대오리를 만드는 과정 자체가 어려운데다 손은 수도 없이 대칼에 베였다. 하나의 갓에 10개월 이상의 노력을 쏟아 부어야 했다. 30년이 넘는 세월, 7살 때부터 어머니께 조금씩 갓일을 배웠던 것을 합하면 배가 되는 세월이다.

갓 만드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후회를 한 적도 많다. 그러나 누군가는 해야 하는데 할 사람이 본인밖에 없다는 사실이 원망스러웠던 적도 많다. 하지만 한편으론 본인이 할 수 있어 고맙고 그 역사를 지켰냈다는 자부심 또한 컸다. 1992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2000년 7월에 기능보유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2009년 개관한 갓 전시관은 국가의 지원과 더불어 사비를 털어 지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갓을 보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자 땅을 국가에 헌납하고 작품을 만들어 기부했다. 생계는 과수원에서 감귤 농사로 유지하며 국가에서 나오는 기능보유자에 대한 지원금 등을 모아 전시관에 놓을 갓 등을 사들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 선생의 딸들이 전수과정을 거치며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외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딸들까지 4대에 걸쳐 양태의 기술이 전승되고 있다.

주요작품

 

양태, 46×46cm양태는 대나무의 표피 부분만을 가지고 죽사를 만들어 제작하는 갓의 차양 부분을 가리키는데 본시 양(凉)을 대나무로 제작한다는 뜻에서 비롯되었다.

제작과정

 

양태는 가느다란 대오리를 엮어서 만든다. 제작과정은 대오리 제조공정과 양태 제조공정으로 나뉜다. 대오리는 2~3년 된 대나무로 만드는데, 대나무를 먼저 알맞게 쪼갠 후에 대오리는 안쪽의 연한 부분을 깎아내고 가마솥에 넣어 5시간쯤 쪄서 말려야 한다. 그리고 20시간 정도 물에 담갔다가 양잿물에 나무 재를 깔고 이틀을 가마솥에 삶는다.

걸목한 대나무를 0.1㎝ 가량으로 잘게 쪼개 대실(대오리)을 만든 후, 넓적한 가죽으로 만든 무릎 장을 무릎 위에 놓고, 말린 대오리를 무릎 위에서 칼로 긁어 얇은 종이처럼 만든 다음 섬유같이 가늘게 쪼갠다. 그렇게 대오리 제조공정이 끝나면 양태의 날이 되는 살의 한 끝을 2가닥의 실로 새끼 꼬듯 돌리면서 엮는데, 살의 수는 300∼500가닥이나 된다고 한다. 대마디를 양태칼로 잘 다듬고 머리카락보다 잘게 쪼갠 대오리(죽사, 竹絲)를 양태판 위에서 날대와 절대로 엮어 나가는 세공에 속하는 작업이며 양태 한 장을 만드는 데에는 1년 가까이 소요된다.

마지막으로 살을 양태판 위에 햇살처럼 펼쳐 놓고, 직조의 씨줄에 해당하는 4가닥의 돌림 줄을 가지고 나선형으로 엮어나간다. 이 과정이 끝나면 빗대를 사선으로 꽂아 가로 세로를 안정시키고 묽은 아교로 풀을 먹여 완성한다.



   1) 겉목하기

   2) 대오리 제작

   3) 조를대 넣어 엮기

   4) 빗대꽂기

   5) 어교칠하기

 

1) 겉목하기- 무럽장 위에 삶은 대나무를 얹어 놓고 대칼로 얇게 훝어낸다.
2) 대오리 제작- 다 밀은 대나무를 무릎장 위에 올려 놓고 치댄다.
3) 조를대 넣어 엮기-양태판 위에 쌀날을 펼쳐 놓고 무쇠제역을 올려 놓은 후 절어간다.
4) 빗대꽂기- 태극선 모양의 곡선을 이루며 머럭을 꽂고 고칫대로 정리하는 모습
5) 어교칠하기- 완성된 양태 전체에 골고루 어교칠을 한다.

제작 도구

약력
  • 1940년               출생
  • 1962년               모친 고정생 여사로부터 양태제작 기능 전수받음
  • 1982년               전승공예대전 양태부분 입선
  • 1983년               전승공예대전 양태부분 입선
  • 1984년               전승공예대전 양태부분 입선
  • 1985년               전승공예대전 양태부분 장려상
  • 1985년               제주도지사 감사장 수상
  • 1986년               전승공예대전 양태부분 입선
  • 1992년               제주도지사 공로패 수상
  • 2000년               북제주군 1등 국민, 제주도 신지식인 선정
  • 200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양태장) 기능보유자 인정
  • 2008년               제주자연사박물관 특별기획전, 시연
  • 2009년               제주갓 전시관 공개행사
  • 2010년               특별기획전 ‘촉’ 손끝으로 이어지는 우리 갓
  • 2010년               찾아가는 무형문화재(섬려한 우리 유산 갓-선비체험)
이치헌/한국문화재보호재단 (http://www.chf.or.kr/)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은 문화재보호법 제9조에 근거하여 우리 전통문화를 널리 보전, 선양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공공기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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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헌강(문화재전문 사진작가)
발행2013.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