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오늘의 말씀과 묵상 /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9/13)

문성식 2011. 9. 13. 10:31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9/13)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는 344년 무렵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났다. 신심 깊은 어머니 밑에서 자라나 서른두 살의 나이에 사제가 되었다. 성인은 주로 안티오키아에서 말씀을 선포하였는데 그의 설교는 수많은 사람을 감화시켜 ‘크리소스토모’ 곧 ‘황금의 입’(금구)이라고 불렸다. 398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주교로 뽑혔으나, 사치와 쾌락을 일삼는 왕실을 반대하는 설교를 하여 미움을 받고 두 차례의 유배 생활을 하다가, 407년 세상을 떠났다.
    말씀의 초대
    교회의 지도자와 봉사자는 가정생활에 충실하고 이웃과 관계에서도 품위 있으며 좋은 평판을 듣는 사람이어야 한다. 모범적인 삶을 살며 교회에 봉사할 때 신자들은 그들의 모습을 보고 신뢰하며 더욱 굳건한 신앙을 갖게 된다(제1독서). 예수님 일행이 젊은 외아들을 잃은 슬픈 장례 행렬을 만난다. 주님께서는 그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일으키신다. 주님께서 생명의 주인이심을 드러내신다(복음).
    제1독서
    <감독은 나무랄 데가 없어야 합니다. 봉사자들도 마찬가지로 품위가 있어야 하고, 깨끗한 양심으로 믿음의 신비를 간직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1서 말씀입니다. 3,1-13 사랑하는 그대여, 이 말은 확실합니다. 어떤 사람이 감독 직분을 맡고 싶어 한다면 훌륭한 직무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독은 나무랄 데가 없어야 하고 한 아내의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며, 절제할 줄 알고 신중하고 단정하며 손님을 잘 대접하고 또 가르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술꾼이나 난폭한 사람이 아니라, 관대하고 온순하고 돈 욕심이 없으며 자기 집안을 잘 이끌고 아주 품위 있게 자녀들을 순종시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자기 집안을 이끌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의 교회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 새로 입교한 사람도 안 됩니다. 교만해져서 악마가 받는 심판에 떨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또한 바깥 사람들에게도 좋은 평판을 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방을 받거나 악마의 올가미에 걸리지 않습니다. 봉사자들도 마찬가지로 품위가 있어야 하고,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으며, 술에 빠져서도 안 되고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깨끗한 양심으로 믿음의 신비를 간직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또 그들을 먼저 시험해 보고 나서 흠잡을 데가 없는 경우에만 봉사직을 수행하게 해야 합니다. 여자들도 마찬가지로 품위가 있어야 하고, 남을 험담하지 않으며, 절제할 줄 알고 모든 일에 성실해야 합니다. 봉사자들은 한 아내의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고, 자녀들과 자기 집안을 잘 이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사실 봉사직을 훌륭히 수행하는 이들은 좋은 명성을 얻고,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 더욱 큰 확신을 얻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11-17 그때에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다. 제자들과 많은 군중도 그분과 함께 갔다.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외아들을 잃은 한 여인이 있습니다. 자식의 시신을 메고 가는 상여 뒤를 그 여인과 그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이루어 행렬 지어 따라가고 있습니다. 남편 없이 오로지 외아들에게만 희망을 두고 모든 것을 바치며 산 여인입니다. 그런데 그런 외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같이 슬퍼하며 상여 뒤를 따르는 것으로 보아 그 여인의 슬픔이 얼마나 큰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식이 먼저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하지요. 그래서 부모가 자식을 먼저 보내는 심정을 ‘참척(慘慽)의 고통’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소설가 박완서 씨는 오래 전, 남편을 잃은 지 석 달 만에 외아들마저 잃게 되었지요. 그는 십자가를 내동댕이치고 하느님을 원망하며 스스로 미치지 않는 게 저주스러웠다고 그때의 순간을 회고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견딜 수 없는 극도의 고통 속에서 주님을 더 깊이 만납니다. 자신의 잘남과 능력을 믿고 살다가, 운명을 한 치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만나는 순간, 그 고통의 밑바닥에서 결국은 주님을 부르게 됩니다. 고(故) 박완서 씨도 그 순간에 다른 사람들에게 철저히 무관심하며 이기적으로 살아왔던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그 후에 그는 신앙 산문집, 『한 말씀만 하소서』를 발표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외아들을 잃은 슬픈 ‘죽음의 행렬’이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을 만나면서 외아들은 다시 살아나고 이제 그 행렬은 기쁨으로 가득 찬 ‘생명의 행렬’로 바뀝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마주하는 슬픈 운명은 결국 주님을 만날 때에만 위로받을 수 있고 생명을 얻게 됩니다. 박완서 엘리사벳 님이 아름답게 한 생을 마감할 수 있었던 것은 ‘죽음의 행렬’에서 예수님을 만나 ‘생명의 행렬’에 합류했기 때문입니다.
 
-출처 매일 미사-
저녁노을(모니카)
♬ 생명의 주(Taste and S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