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짜 그리스도인인가?
A. W. 토저
7. 가짜는 감정이 성화되는 것을 등한히 여긴다
감정 없이 의지의 행동도 없다
드레버(James Drever, 1873~1950. 영국의 심리학자)는 그의 <심리학 사전>에서 “감정”을 이렇게 정의 한다. “감정은 마음이 차분한 상태에 있지 않고 강한 느낌에 이끌려서 특정한 행동으로 기울어지는 상태이다”
우리는 감정을 두려워하거나 무시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실 때 주어진 우리의 정상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없다면 온전한 인간의 생활이 불가능할 것이다. 만일 감정이 전혀 없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그런 사람은 기피의 대상이 될 것이다.
다음은 지성과 감정의 올바른 관계, 그리고 감정과 의지의 올바른 관계를 제시한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주니라”(마 14:14). 사람들의 고통에 대한 지적인 인식이 예수님의 동정심을 자극했고, 동정심에 이끌린 예수님은 그들을 고쳐주셨다.
예수님의 심리 작용은 지성에서 감정으로, 다시 감정에서 의지로 진행된 것이다. 언제나 감정은 지식(인식)과 행동 사이에 놓이게 된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대한 “심상(마음 속의 이미지)” 이 머릿 속에 생기지 않는다면, 마음 속에 동정의 감정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동정의 감정이 의지에게 가서 충돌하여 그것을 움직이지 않는다면 긍휼의 행동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인간은 바로 이렇게 만들어져 있다. 심상이 만들어내는 감정이 동정이든 사랑이든 두려움이든 욕망이든 슬픔이든 간에, 감정이 없다면 의지의 행동도 없다.
하나님은 진리가 우리를 도덕적 행위로 나아가도록 움직이게 만드셨다. 정신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마음 속에서 심상으로 변화시켜 받아들이는데, 이것이 바로 관념이다. 관념은 감정을 불러 일으키고, 다시 감정은 의지가 진리에 따라 행동하도록 감동시킨다. 이것이 본래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심리 작용의 과정이다. 죄가 들어와서 우리의 내면을 파괴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살아갈 것이다.
악에 대한 동정심
죄 때문에 우리의 심리적 작용의 세 요소들, 즉 진리와 감정과 행동 중에서 문제가 생기게 된다.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창조된 마음은 종종 거짓에 치우치게 되고, 그런 과정에서 생긴 감정은 의지를 악한 행동으로 몰아 넣는다. 잘못된 것 또는 금지된 것을 깊이 생각하면 이상하게도 우리 마음에는 악에 대한 동정심 같은 것이 생긴다.
이것에 대한 안타까운 예는 목욕하는 밧세바를 다윗이 오래 쳐다 본 것이다. 다윗은 그가 보는 것에 의해 마음이 움직였고, 그에 따라 행동하게 되어 죄를 지음으로 죽는 날까지 죄의 비극적 결과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보고 느끼고 행동했다. 그로부터 수세기 후에 그의 주님도 병자들을 치료하실 때, 보고 느끼고 행동하셨다. 다윗과 예수님의 도덕적 차이는 감정적 차이에 기인한다. 그리고 그 감정적 차이는 감정을 불러 일으킨 대상의 차이에 기인한다. 다윗은 아름다운 여인을 보았고, 예수님은 고통당하는 대중을 보았다. 전자는 죄로, 후자는 긍휼의 행동으로 이어졌다.
“진리-감정-행동” 이라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이기적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거슬려 스스로를 강퍅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빛보다 어두움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상태를 말해준다. 이런 사람들은 빛을 완전히 회피하거나 아니면 빛에 노출될 때 완고하게 저항하여 불순종한다. 이 세상의 육신적 쾌락들을 너무 오랫동안 응시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왠지 그것들에 대해 동정의 감정을 갖게 되고, 결국 그런 감정은 세속적인 행위를 낳게 된다. 또 계속적으로 진리를 접하면서도 그 진리가 불러일으키는 충동에 순종하기를 거부하거나 소홀히 하는 상태를 지속시키면 성령님은 근심하시다가 결국 침묵하시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감정을 모두 봉쇄하고 마치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사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것을 기억하라. 만일 흐르는 강을 막으면 강물은 다른 곳으로 흘러서 논과 밭을 파괴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감정이 정상적이고 자연스럽게 흐르는 것을 억압한다면, 그 감정은 다른 곳으로 뚫고 나와서 삶을 망치고 저주하고 파괴할 것이다.
감정의 성화
그리스도인에게 이렇게 감정은 중요하다. 그러나 감정이 경박해서는 안된다. 일상의 안일함을 기뻐하거나 구차한 평안을 즐기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성도의 기쁨에는 고난의 연단을 기뻐하는 성숙함도 있고, 십자가의 기쁨도 있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특별한 은혜를 주기 위해서 당신을 택하셨다면, 어느 누구보다 더 엄격하고 힘든 훈련과 고난을 당신에게 부과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이 당신을 영화롭게 만드시는 방법은 힘든 훈련과 고난이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당신을 “좀 더 강한 신앙의 용사”로 만들기 시작하셨다면 하나님은, 흔히 대중적으로 인기있는 기독교 선생들이 제시하는 하나님처럼 당신에게 부드럽게 대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가공되지 않은 볼품없는 대리석을 깎아서 아름다운 조각 작품을 만드는 조각가는 잔인하리만큼 무지막지한 연장들을 사용한다.
당신을 하나님의 지고한 은혜의 작품으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은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당신의 마음에서 제거하실 것이다. 당신이 믿는 모든 것들이 당신에게서 떠날 것이다. 당신의 가장 소중한 보물들이 있었던 곳에는 잿더미만 남을 것이다. “성결하게 만드는 가난의 능력”을 가르치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가난이 사람을 거룩하게 만든다면 길거리의 노숙자들은 벌써 성자가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단순히 우리에게서 모든 것들을 빼앗아감으로써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는 것은 아니다. 그분의 깊은 지혜는 우리로 하여금 그것들에 집착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신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들을 허락하시지만, 우리가 그것들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미성숙한 단계에 머물지 못하게 하신다.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성숙한 단계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해를 당하지 않으면서 그것들을 즐길 수 있게 된다.
평안과 기쁨이 없더라도
하나님은 당신을 성숙한 단계로 끌어 올리기 위해서 당신의 어떤 것들을 희생시키신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이제까지 당신의 삶을 지탱해 주고 재미있게 만들었던 즐거움들을 희생시키신다. 성령님이 당신을 세심하게 다루실 때 당신의 삶은 메마르고 딱딱하고 심지어 당신에게 어느 정도 부담스러운 것이 된다. 이렇게 되면 전에 당신이 즐겼던 내적인 재미와 달콤함은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다. 하나님의 미소가 당신의 눈에서 감추어져 있을런지도 모른다.
이런 상태에서 당신은 신앙이 무엇인지 배우게 된다. 당신은 자신에게 열려있는 유일한 길이 힘들고 어려운 길이라는 것과 신앙의 본질이 의지에 있다는 것을 배운다. 그 때 당신은 사도가 말한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기쁨” 을 주는 것이 신앙 자체가 아니라, 천천히 익어가는 신앙의 열매라는 것을 배운다.
당신이 어떤 때는 영적인 기쁨을 느끼고 또 어떤 때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기도 하겠지만, 하나님의 참 자녀로서의 당신의 지위에는 전혀 변화가 없다는 것을 배운다. 아마도 이상한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당신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전혀 부끄러움 없이 살아가는 데도 이상하게 미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평안과 기쁨”을 전혀 느끼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밤의 사역”의 능력
각자에게 이런 “영혼의 밤”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느냐는 서로 다를 것이다. 그러나 기쁨이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이 압력을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를 아신다. 그분은 우리가 밤을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를 아시기 때문에, 때가 되면 압력을 완화시키신다. 아침 별의 반가운 불빛을 통해서, 다음에는 좀 더 풍부한 아침 햇살을 통해서 압력을 완화시키신다.
그때 당신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점점 발견하고, 당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당신은 이 세상의 어떤 학교에서도 배울 수 없는 것을 스스로 깨우치게 될 것인데, 그것은 기운을 북돋아 주는 기쁨 없이도 신앙이 당신을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당신은 그 때, 밤의 사역 - 정결하게 만들고, 세상에 초연하게 만들고, 겸손하게 만들고,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 현재 당신에게 문제가 되는 삶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게 만드는 - 의 능력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기쁨도 할 수 없는 일을 때로는 고통이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렇다! 고통은 이 땅의 사소한 일들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폭로하고, 당신의 마음을 천국의 평안에 대한 갈망으로 채울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외로움
Aiden. W. Tozer
그리스도인이 느끼는 외로움은 이 죗된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서 기인한다.
그 하나님과 함께한 노정(路程)은 거듭나지 않은 이 세상뿐만 아니라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로부터도 그를 자주 분리시키곤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의 본성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심취된 자신의 몰두와 염원 및 갈망함을 이해할 수 있는 동료들과의 교제를 절실히 원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친구들 중에서도 자신의 내적인 경험을 공감하는 이들이 거의 없기에, 그는 혼자 그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적인 이해를 향한 채워지지 못한 구약 선지자들의 갈망은 때때로 항변적인 하소연으로 표출되기도 했으며, 우리의 구주께서도 똑같은 고통을 겪으셨던 것이다.
실제적으로 내적 경험 속에서 성스러운 하나님의 임재속으로 들어간 체험을 한 그는 자신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관심사의 최고 대상이 되고 있는 주제에 대하여 대화를 나눌만한 사람들이 없기에, 주위에서 진행되는 시끄러운 종교적 간담가운데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아니면 다른 그 무엇에 몰두해 있는 듯이 보이곤 한다.
그리고 이런 인상 때문에 그는 재미없고 지나치게 심각한 사람으로 평을 받게 되고, 사람들은 그를 피하게 되며 점점 그와 그가 속한 사회 사이에는 간격이 더 넓게 벌어지게 된다.
이런 중에 그는 옷깃에서나마 몰약(沒藥) 과 침향(沈香) 및 상아 궁정의 계피(桂皮) 냄새를 풍기는 친구들을 구하려고 애쓰지만 결국 거의 발견하지 못하고, 그 옛날 마리아처럼 이 모든 경험을 그의 가슴 속에 담고만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외로움이 그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에게 자신을 내던지게 만드는데, 인간적인 교제를 발견하지 못한 그의 무력함은 그로 하여금 다른 모든 곳에서 찾지 못한 그것을 하나님 안에서 구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
'기독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1 이런 교회가 성장한다. - 신성종 목사 (0) | 2011.08.30 |
---|---|
가짜는 영적 균형감이 없다! (0) | 2011.08.29 |
3 나는 가짜 그리스도인인가? (0) | 2011.08.29 |
2 나는 가짜 그리스도인인가? (0) | 2011.08.29 |
1 나는 가짜 그리스도인인가? - A. W. 토저 (0) | 2011.08.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