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3 나는 가짜 그리스도인인가?

문성식 2011. 8. 29. 23:57

 

나는 가짜 그리스도인인가? 2
A. W. 토저

 

5. 가짜는 신조를 무시한다

 

신조 무용론의 경계
신조를 깎아내리고 체험을 참 기독교의 유일한 척도로 추켜올리는 것이 어떤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완전히 유행이 되어버렸다. 물론 나 자신도 신조 무용론자들에게 공감하는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어떤 이들은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밀어내고 “죽은 신조”만 붙들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이 죽어야 할 이유가 없듯이, 우리의 신조 또한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 실상을 말하자면, 신조란 그리스도의 생각과 말과 행동의 바탕에 깔려 있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는 것” 이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믿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믿는 것이 곧 우리의 신조이다.

지성이 있는 곳에 신조가 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가장 고상한 사역이라고 말들한다. 그러나 전도는 전도자가 그리스도를 향한 자신의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 이상의 것이다. 사랑이 영속적인 의미를 가지려면 지식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효과적인 설교는 지적인 내용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공식적인 신조 없이 예배 드리는 것이 가능하지만 (실제 많은 교인들이 그렇게 한다), 우리가 예배하려는 분에 대한 지식 없이 만족할 만한 예배를 드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바로 이 지식이 우리의 신조인 것이다. 우리가 교리적 지식 없이 하나님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면 안된다. 우리는 “신령(성령)과 진정(진리)으로 예배해야 한다. 진리는 명문화 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을 명문화 한 것이 곧 신조이다.

어떤 의미에서 참 그리스도인은 신학자가 되어야 하고,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 그는 적어도 성경에 계시된 풍성한 진리를 어느 정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다.

 
6. 가짜는 신학을 경시한다

신학 연구의 유익
우리에게 가장 많은 유익을 주는 중요한 연구는 신학 연구이다. 신학이 지극히 중요한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에게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운명에 대한 의문들에 대해 답을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독교의 계시이다. 기독교의 계시의 권위 있는 대답을 외면하고 다른 곳에서 답을 찾다가 아무 답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다. 현대인들이 영감된 성경을 무시하는 것은 참으로 불명예스럽고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들이 하나님, 인간의 운명, 그리고 그들의 영혼에 대하여 알기를 원하는 것이나 알아야 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성경이다.

인간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미래의 문제인데 사람들이 막대한 시간과 돈을 과거의 비밀들을 캐는 데 쏟아 붓는 것은 참으로 아리러니컬한 일이다. 인류학자가 발견할 수 있는 것들보다 나에게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짧은 과거에 범한 죄들을 어떻게 하면 용서받을 수 있는가, 지금 내가 어떻게 하면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는가, 그리고 미래에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복된 임재 안으로 영원히 들어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들이다.


아무리 무해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나를 성경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은 나의 적이다. 내가 하나님과 영원한 것들을 묵상해야 할 시간에 나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게 하는 것은 나의 영혼에 해를 끼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올바로 살고 영원한 하늘나라에 이르게 하는 데 필수적인 것은 신학이다.

사실과 진리의 차이
그러나 신학적 진리가 사변에 그쳐서는 안된다. 오랜 세월 동안 나는 진리를 삶으로 실천할 때에야 비로소 진리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어 왔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삶 전체가 성경과 신학의 진리를 소화하고 흡수할 때까지는 그 진리가 우리에게 아무런 효과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 나의 확신이다. 이것이 구약의 선지자들의 가르침의 중요한 요소이며, 우리 주 예수님의 도덕적 교훈의 핵심이라고 나는 믿는다.

사실이 진리가 되는 순간
언제 신학적 사실이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진리” 가 되는가? 그것은 “순종이 시작될 때”이다. 우리의 의지가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하고 헌신하겠다고 동의할 때, 진리는 조명하고 구원하는 사역을 시작한다. 로버트슨(1863~1934. 미국의 신학자로서 신약 헬라어의 권위자)은 그의 책 <신약 원어 대 해설>에서 “우리는 머리로만 아는 지식과 하나님이 뜻을 행하려는 의지를 구별해야 한다”라고 말했으며, “진리에 복종하는 사람만이 진리를 이해할 수 있다”라고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평균적인 복음주의적 성경학자들은 이 해석이 너무 혁명적이라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고 생각하여 무시한다.

오랜 교회의 역사를 살펴볼 때, 교회의 부흥의 역사가 일어날 때마다 거기에는 항상 진리에 대한 순종이 있었다. 죽은 교회는 진리에 복종하지 않고 단지 진리의 껍질만을 붙든다. 반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교회는 즉시 영적인 능력을 부여받는 복을 받는다. 우리가 진리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 전까지는 진리가 우리를 도울 수 없다. 14세기에 살았던 성 그레고리(13세기 말~1346. 희랍 정교회의 수도사, 신학자)는 “계명을 지키지 않고 단지 독서와 학습을 통해 계명을 이해하려는 사람은 그림자를 실체로 착각하는 사람과 같다. 왜냐하면 진리를 정말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진리에 참여한 사람, 즉 삶을 통해서 진리를 맛본 사람뿐이기 때문이다. 진리에 참여하지 않은 삶, 즉 진리 안으로 들어가 보지 않은 사람이 그것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인간적 지혜로 그것을 왜곡시키게 된다”라고 했다.

영적 조명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신학적 지식뿐만 아니라 영적 진리도 깨닫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조명이 없이는 신학적 진리도 단지 한낱 지식이나 정보에 지나지 않는다. 영적 조명이 없이 신학을 공부하면 소위 “죽은 정통”이 된다. 부흥의 본질은 정통적 신학을 가진 사람들의 영적인 생활을 소생시키는 것이며, 부흥사들의 유일한 목적은 정통적 신조를 가지고 있지만 영적인 삶을 살지 않는 교회들을 각성시키는 것이다. 익히 알고 있는 교리들의 내적인 의미가 갑자기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깨달아진다면, 그 사람에게서 부흥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