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짜 그리스도인인가?
A. W. 토저
3. 가짜는 하나님의 징계를 십자가 지는 것으로 착각한다
십자가와 징계의 차이점
“십자가를 지는 것”과 “징계를 당하는 것”은 비슷해 보이지만 실상 다르다. 징계는 그것을 당하는 사람의 동의 없이 그에게 부과되는 것이다. 반면 십자가는 본인의 동의 없이 부과될 수 없다. 주님도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서 십자가를 지셨다. 그분은 십자가를 피할 수 있는 기회들이 얼마든지 있었지만,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죽기로 굳게 결심하셨다.
그분을 십자가의 길로 몰아넣은 것은 그분의 사랑이었다. “징계”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이고, “십자가를 지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해야 할 의무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에게 사랑의 매를 대실 때, 그들의 허락을 구하지 않으신다. 신자는 징계를 자발적으로 취하지 않는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히 12:6~7).
우리가 원하지 않는데 찾아오는 십자가는 없다. 반면 징계는 원하지 않는데도 찾아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십자가를 지는 것은 의지적인 선택의 결과이다. 그리스도인의 십자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순종하여 따를 때 그에게 닥치는 고난을 의미한다. “순종의 길”에는 십자가가 서 있다.
십자가가 “순종의 길” 에서 발견된다면, 징계는 “불순종의 길”에서 발견된다. 하나님은 온전히 순종하는 자녀를 결코 징계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 매를 맞아 아플 때 우리는 우리가 잠시 옳은 길에서 벗어나 있다고 느껴야 한다. 반면 십자가의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우리가 옳은 길에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십자가와 징계의 구별 방법
우리는 십자가와 징계를 어떻게 구별하는가? 내 생각에 이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고난이 닥칠 때 우리는 그것이 내가 선택한 것인지 아니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외부로부터 닥친 것인지를 구별하면 된다. 주님은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마 5:11)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복된 고난이 우리의 자발적인 선택에 의한 것임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의를 위해 고난을 선택할 때 그 고난이 복되다는 뜻이다. 만일 우리를 향한 사람들의 비난이 “근거가 있는” 비난이라면 우리의 고난은 복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당연히 당할 징계를 당하면서도 그것을 “십자가”라고 믿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징계의 고통에 대해서는 기뻐할 것이 아니라 회개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두가지 고난 중 어느 한쪽에도 속하지 않는 “제 3의 고난”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이것은 징계의 고통처럼 우리를 바로 잡으려는 목적에서 닥치는 고난도 아니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뜻대로 사느라고 당하는 고난도 아니다. 이것은 자연적인 것이며,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가람이라면 누구나 당할 수 밖에 없는 그런 고난이다. 그러나 어떤 위대한 사람들은 이런 제 3의 고난을 선한 것으로 바꾸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기도와 겸손과 인내로써 그들은 역경을 친구로 만들었고, 정신적 고통을 선생으로 삼아서 깊은 영적 진리들을 깨달았다. 우리도 그들처럼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4. 가짜는 행함으로 죄 용서함을 받으려 한다
율법주의자의 착각
인간의 마음은 본래 율법주의에 빠지기 쉽다. 인간의 이성은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은혜를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 이유는 은혜가 이성과 모순되기 때문이 아니라 이성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율법주의자의 본질은 “자기 속죄” 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자신의 죄를 속죄하려는 것이다.
율법주의자는 스스로에게 벌을 부과함으로써, 회한의 감정을 가짐으로써, 자신의 죄 때문에 생긴 피해를 배상함으로써 하나님께 용서받으려고 애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마음은 칭찬을 받을 만한 것이지만,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것은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번 범한 죄를 자기의 노력으로 없앨 수 있다는 착각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미 오래전에 우리는 금식이나 고행으로 우리가 속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성경에서 배웠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과거의 죄에 대하여 계속 후회하면서 자신을 괴롭게 해야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자신의 영혼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고 느끼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우리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이단이다. 과거의 죄에 대하여 계속 후회하면서 자신을 괴롭게 하는 것은 개신교도의 신종의 고행이다.
만성적인 회한을 경계하라
회개에 이르게 하는 “경건한 슬픔”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고후 7:10 참조). 또한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죄를 범한 후 참회개에 이를 정도로 강한 슬픔을 느껴야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런 슬픔의 감정을 계속 느껴서 결국 그것이 만성적인 회한이 되는 것은 옳지 않고 유익하지도 않다. 회한(후회)은 아직 완전히 완성되지 못한 일종의 “좌절된 회개”이다. 일단 영혼이 모든 죄로부터 돌이켜서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하면, 더 이상 회한이 필요 없다.
죄에 대한 회한이 없는 것은 죄를 경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죄는 너무나 무서운 것이고 영혼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어떤 사고나 행위도 죄의 치명적인 결과를 조금도 감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다.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이 죄를 씻어낼 수 있다. 이 무서운 원수에게서 구원받은 영혼은 후회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놀라운 평안과 끝없는 감사의 감정을 느낀다. 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늘 행복감을 박탈당한 상태에서 살아가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완전히 용서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거나, 아니면 하나님이 용서의 조건으로 어떤 감정적 고행을 요구하신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우리의 확신이 늘어갈수록 우리의 불안감은 줄어들고 행복은 늘어갈 것이다.
“후회”는 단지 자애, 즉 “자기 사랑”의 한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자기가 스스로 세운 기준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 깊이 실망한다. 그는 자신의 잘못된 행위가 “좀 더 선한(훌륭한) 자신”을 배신한 행위였다고 느낀다. 그리하여 심지어 하나님이 그를 용서하신다 할지라도 자신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게 된다. 이런 사람은 죄 때문에 생기는 수치심으로 괴로워하며, 자신의 체면이 손상된 것을 쉽게 잊을 수 없다.
그는 계속 자신에게 분노하며 자신에게 형벌을 가하려고 한다. 그가 자신에게 형벌을 부과하는 방법은 빈번히 하나님께 나아가서 분노 중에 자신을 비난하는 것이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 결국 그는 만성적인 회한의 감정에 빠지게 된다. 만성적인 회한은 깊은 회개의 증거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깊은 자애의 증거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완전한 그리스도의 과거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했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사람들 중에 앉혀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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