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1 나는 가짜 그리스도인인가? - A. W. 토저

문성식 2011. 8. 29. 23:54

나는 가짜 그리스도인인가? 
A. W. 토저


1. 가짜는 인스턴트이다

인스턴트 기독교의 보급

인스턴트 기독교는 복음주의적 교회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발견된다.

이 인스턴트 기독교의 이론적 기초는 “그리스도인에게 부과될 수 있는 모든 의무를 “한두 가지 신앙” 의 행위로써 다 할 수 있으며, 그 후에는 우리 영혼의 상태에 대하여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라는 사상이다. 인스턴트 기독교는 과거의 문제들을 깔끔하게 정리해 주고 미래를 보장해 준다. 더 나아가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아주 편안한 양심으로 최소한(?)의 절제력만 발휘하여 자유롭게 육신의 세련된 욕망들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어떤 설교자들은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이미 성도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켜서 성도가 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다. 다른 오류들과 마찬가지로 이런 오류는 진리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다.

한 번의 신앙의 행위로 다 끝났다?
한 가지 신앙의 행위에 의해서 얼마나 많은 것이 성취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런 신앙의 행위 다음에 우리가 해결해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인스턴트 기독교는 한 번의 신앙의 행위로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가르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더 이상의 영적 전진을 갈망하는 욕구를 억압한다.

그것은 기독교의 생명이 정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인 것이며, 성장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새로 태어난 그리스도인이 마치 새로 태어난 아기가 살아있는 유기체인 것처럼 정상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영양분과 운동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깊은 우정이 형성되려면 그 두 존재가 한 번 만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구원의 모든 것을 한두 가지 체험에 담으려는 “인스턴트 기독교”옹호자들은 자연계에 나타나는 “발전의 법칙”을 부당하게 무시한다. 그들은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를 지고 생활 속에서 순종하는 것이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그들은 영적 훈련을 받고 올바른 신앙 습관을 형성하고 세상과 마귀와 육신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는 진리를 무시한다. 최초의 신앙의 행위에 부당하게 집착하게 되면, 더 이상의 영적인 발전을 기대하지 않고 자기 만족에 빠져 정체상태에 머물게 되며, 이런 현상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에 실망을 하게 되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한 번의 신앙 행위로 축복이 자동적으로 주어진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기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런 주장은 깨어서 싸우고 기도해야 할 필요성을 제거해 주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면 내세를 기다리면서 이 세상을 즐길 수 있는 자유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 3:12~14).

2. 가짜는 인격의 변화를 소홀히 한다

세월이 약?
죄는 우리로 하여금 죄의 결과들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친다. 우리는 사물을 본질 그대로 거의 통찰하지 못한다. 초점을 잃고 모든 대상을 바라보는 “윤리적 난시”상태에 빠져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가치판단이 왜곡되어 있다.
우리가 끈질기게 집착하는 한 가지 잘못된 개념은 시간에 대한 개념이다. “지금 우리가 알 수 없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 다 알게 된다”라는 착각 속에 빠져 “세월이 약”이라는 말에 의지한다. 시간에 대한 이런 개념들이 우리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들을 시간과 연관지어 생각하는 습관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


시간에 대한 우리의 오해들 중에서 가장 유해한 것은 인간성을 완전하게 만들어 주는 신비로운 힘이 시간에게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그리스도인이 전혀 그리스도인답지 않게 행동하는 것을 보면 세월이 흐르면 그가 언젠가 거룩한 사람으로 변할 것이라고 믿는다. 바보를 현인으로, 죄인을 성자로 만드는 것은 “시간” 이 아니고 “변화” 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의 마음 속에 변화를 일으키시기 때문에 그들이 변하는 것이다.

문제는 시간이 아니라 변화!
기독교의 박해자 사울이 변하여 하나님의 종 바울이 된 것은 시간이 만들어낸 변화가 아니었다. 그 변화를 이루신 분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그리스도이셨다. 젊었을 때 충동적이고 고집 센 사람이 노년에 모세나 야곱처럼 변화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세월이 그런 변화를 가져왔다고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 변화를 이루신 것이다.
많은 죄인들은 구원의 날을 미루면서, 언제까지나 시간이 자기의 편이기를 막연히 바란다. 그러나 그가 실상 그리스도인이 될 가능성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줄어든다. 다음의 성경절을 보자.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 55:6~7).

이 말씀에서 “변화” 를 나타내는 단어들에 주목하라.

 “찾으라, 부르라, 버리라, 돌아오라”, 이 단어들은 모두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죄인에게서 일어나야 하는 변화들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이것들은 그가 수행해야 할 행동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또한 “긍휼히 여기시리라, 용서하시리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이루시는 변화를 말한다. 구원받기 위해서 죄인은 스스로 변해야 하고, 또한 변화를 받아야 한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거듭나야 한다고 우리 주님은 말씀하셨다(요 3:3~7 참조). 다시 말해서 영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말씀이다. 사도 베드로는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벧후 1:4)라고 말했다.

그러나 구속받은 사람에게 이 최초의 변화만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때부터 죽을 때까지 그의 삶은 영적인 완전함을 향해 항상 전진하는 변화들의 연속이다. 이런 변화들이 일어나도록 성령님은 다양한 방법들을 사용하신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이 아니라, 변화이다.